순 정 (21)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기도가 끝났어도 녀석은 계속 날 감싸고 있었다.
녀석의 차분한 숨소리를 들었을 때, 갑자기 녀석에게 보여주고픈 것이 떠올랐다.
그곳에 녀석과 함께 간다면 나는 정말로 내가 가진 세상을 녀석에게 보여주는 건데......
난 날 껴안은 녀석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승우야. 내가 가자는 데 갈 수 있겠냐?\"
\"여관? 그 정도야.\"
\"새-끼. 장난하지 말고.\"
\"알았어. 어딘데?\"
\"그냥 같이 가고 싶은 곳이 갑자기 생겼어.\"
\"알았어.\"

난 녀석의 손을 잡고 큰길로 나왔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택시가 지나갔다. 난 그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어 세웠다. 그러자 택시가 우리 앞에 멈추었다.
난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있는 승우를 먼저 택시 뒷좌석에 앉혀놓고 나도 따라탔다.

\"아저씨, 지금 인천 갈 수 있죠?\"
\"인천이요? 갈 수 있어요.\"

녀석은 놀란 표정으로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가 그런 녀석에게 뭐가 어떠냐는 표정을 짓자 녀석은 기가 차다는 표정이다.
난 녀석의 손을 운전기사 아저씨 몰래 꼭 잡으며 속으로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녀석의 표정도 안심이 된 모습이다.

어느덧 택시는 인천시내에 들어갔다.
녀석은 내 옆에서 고개를 나에게 기댄 체, 잠이 들어 있었다. 난 그런 녀석의 머리내음과 또 아직도 환하게 내 어린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네온불빛들이 날 취하게 했다.
그러자 기사아저씨가 고개를 내 쪽으로 힐끔 돌리더니 날 취기에서 깨웠다.

\"인천 어디가요?\"
\"연안부두요.\"
\"어디 배타고 가시게요?\"
\"네.\"
\"어디 가는데요?\"
\"제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이요.\"

아저씨는 그러냐며 내게 말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연안부두 앞에다 택시를 세웠다.
난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요금을 지불한 후, 녀석을 깨웠다.
그러자 워낙 한 번 잠에 들면 잘 깨지 않은 녀석이 잠결에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나를 따라서 택시에서 내렸다.
그렇게 택시에서 내린 뒤에도 나에게 기대어 걸으면서 금방 잠이 들었다.

난 녀석을 이끌고 연안부두 앞으로 걸어갔지만 부두는 닫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닫힌 문 앞에 내게 기대어 잠자고 잇는 녀석을 바닥에 그냥 앉혀 놓았다. 그리고 나도 녀석의 옆에 주저앉아 녀석의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게 하고선, 나도 녀석의 머리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아물거리는 내 어렸을 때 추억을 승우와 함께 할 내일을 꿈꾸며......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난 아직 부족한 잠에서 깨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6시다.
부두도 문을 열었다.
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승우를 깨웠다. 그리고 승우에게 부두 화장실에 가서 세수 좀 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녀석은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았는지 아무 말 없이 어린아이처럼 내가 시키는데로 했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얼른 근처 지하상가로 향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아직 열지 않은 수많은 가계들 가운데 유독 한 가계만이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매년마다 이 시간에 오시길래, 올해에도 오실까 했는데 오셨네.\"
\"네,\"
\"오늘은 뭐 드려요?\"
\"간편하게 입을 수 있는 반바지랑 티셔츠 두 세 벌이랑 이렇게 두 벌씩 주세요. 아, 그리고 청바지도요.\"
\"오늘은 친구랑 같이 가요? 두 벌씩 달라는 거 보니까.\"
\"네.\"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는 30대 초반의 이 여자는 먼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내게 건네주더니 내가 말 한데로 옷들을 찾아서 쇼핑백에 싸기 시작했다.
변화를 싫어하는 나에겐 몇 年 째, 별 변화가 없는 이 곳이 언제나 좋았다.
난 주인 여자가 준 쇼핑백을 받아 들고선 카드를 꺼내서 여자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카드를 얼른 긁더니 내게 다시 돌려주었다.

\"내년 이 맘 때, 또 오실 거죠?\"
\"글쎄요, 모르겠네요.\"
\"물어 볼 때마다 모르겠데.\"
\"그래요? 안녕히 계세요.\"

난 얼른 지하상가를 빠져 나와 부두로 향하였다.
부두 대합실 안에는 세수를 말끔히 끝낸 승우가 앉아 있었다.
난 녀석에게 손을 흔들며 녀석의 옆에 앉았다.

\"어디 가는데 여기까지 온 거냐?\"
\"그냥, 너하고 가고 싶은 곳이라니까.\"
\"그래, 가보면 알겠지. 지구 밖으로 나가는 건 아니지?\"
\"응. 근데 너 배는 타 본적 있냐?\"
\"모르겠다. 기억은 안 나는데.......\" 
\"한 10시간쯤 타야 하는데.\"
\"10시간...... 너 나 죽일려고......\"

난 놀라서 호들갑을 떨려는 승우를 뒤로하고 매표소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이 매표소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손주의 손을 잡은 할머니, 녹색 새마을 운동 모자를 눌러 쓴 아저씨, 모자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낚시꾼, 그리고 어디를 놀러 가는지 들뜬 모습으로 재잘거리는 대학생들까지......
부두 안은 꽤 혼잡했다.
드디어 내 순서가 왔다. 난 지갑에서 만 원 짜리 몇 장을 매표소 안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대청도 두 장 주세요.\"

막 해가 뜨기 시작한 6시 40분쯤에 난 녀석의 손을 이끌고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나갔다.
우리 앞에는 2층 짜리 큰 여객선이 보였다.
우리는 마치 영화 타이타닉이 막 시작될 때, 디카프리오와 그의 친구가 기대에 부푼 모습으로 배에 오르는 것처럼 얼른 배 간판에 올라탔다.
그리고 배가 부두를 떠나면서 기적을 울리자 우리는 아무도 없는 선착장을 향해서 마구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2층 객실로 올라갔다.
그 곳에는 좌석 대신 방바닥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는 카키색 담요가 놓여져 있었고, 다른 한 쪽 구석에서는 벌써부터 그 담요를 펼쳐놓고 화투판이 열렸다.
우리는 한 쪽에 자리를 마련하고 자리를 폈다.
승우가 아까부터 내가 갖고 있던 쇼핑백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거 뭐냐?\"
\"응, 가서 입을 옷들...... 반바지랑 티셔츠 몇 벌이랑 잘 때 입을려고 청바지도 샀어.\"
\"돈이 어딨다고?\"
\"카드로 긁었지.\"
\"막 나가는구나, 아주.\"

난 녀석에게 말 대신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내 머리를 감싸더니 쥐어박기 시작했다.
난 물론 숨막혀 죽겠다고 발버둥을 쳤고......

하지만 내 머리를 쥐어박던 녀석은 곧 배 멀미로 앓아 누웠다.
죽겠다며 엄살을 피우는 녀석이 예전 같으면 이때다 싶어서 더 괴롭혔을 텐데, 지금은 녀석이 왠지 안쓰러워 보이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난 녀석을 일으켜 배 간판으로 갔다.
바다 바람을 맞자 녀석은 좀 괜찮아진 모습이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푸르름 위에 하이얗게 일어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정현아, 너 지금 우리 가는 곳 갑자기 왜 가자는 거냐?\"

승우는 계속 끝이 보이질 않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긴 진작에 나는 녀석에게 이 배를 타게 된 이유를 말했어야 했다.
난 녀석처럼 끝이 없는 바다를 바라보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대청도라는 곳이야. 내 고향.\"
\"니 고향?\"
\"응. 내가 지금 양부모님한테 입양되기 전에 태어나서 살던 곳.\"
\"근데 그 곳에 날 데려가냐?\"
\"그냥, 너에게 내 모든 것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랬냐? 난 니가 아주 어렸을 때는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줄 알았었는데.\"
\"아니. 생생히 기억하는 걸.\"
\"나한테 얘기해줄 수 있냐?\"
\"응. 우리 친엄마는 아무런 꿈도 없이 탈출 할 곳도 없는 섬에서 쭉 자라온 처녀였어.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나에겐 외할머니지. 하여튼 외할머니하고 단 둘이 섬에서만 사는 것을 답답해했데. 그러다 섬에 들어온 해군을 만났고, 그 해군은 내 친아버지가 되었어. 하지만 엄마가 자신의 뱃속에 내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아버지는 제대를 해서 소식이 끊긴 상태였어.\"

\".......\"
\"엄마는 자신의 뱃속에 들어있는 내가 두려워 날 지우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동네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날 낳으셨어. 난 정말로 축복 받지 못한 탄생을 한 거지.\"
\"그랬구나.\"
\"그렇게 난 외할머니랑 엄마 밑에서 어리광 한번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자랐어. 그러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된 거야. 아버지가 없는 난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그래서 엄마는 나를 위해 아버지를 찾으러 육지로 나갔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무슨 이유였는지 돌아오는 배에서 뛰어내리셨어.\"

\"정현아.\"
\"섬에 배가 들어오고, 난 엄마가 돌아온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뻐서 부두에서 외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엄마를 기다렸는데...... 엄마는 입술이 파래진 체, 내 앞에서 당신의 머리위로 하얀 천을 덮으셨어. 그리고 다신 깨지 않으셨어.\"
\"......\"
\"그리고 몇 달 후 외할머니마저 그 충격으로 돌아가시고 갈 곳 없는 난 동네사람들에 의해서 인천에 있는 보육원으로 보내졌고, 그렇게 입양된 거야.\"

승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아까처럼 먼바다만 바라볼 뿐이다.
내가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때, 녀석이 뒤로 다가와 나를 안았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너를 알면 알수록 왜 자꾸 슬퍼지지? 자꾸 니가 안타까워져.\"
\"이마 왜 그래? 사람들이 보자나.\"
\"미안해. 그냥 미안해. 넌 그렇게 아픈 기억들이 많은데 난 그냥 행복하게만 지내왔어. 미안해. 그런것도 모르고 너도 나처럼 모든 것이 행복한 줄 알고 있었던 거 정말 미안해.\"
\"임마. 그러니까 다신 내 곁에서 멀어지지 마. 알았냐?\"
\"그래. 알았어.\"

어느 새 갈매기가 우리의 머리 위에서 날고 있었다.
그리고 끝이 없을 줄 알았던 바다의 지평선에는 작은 섬마을이 보였다.
그 곳에서 아마 우리는 지금까지의 추억보다 더 많은 추억을 만들 것이다.         


관련자료

댓글 1

<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essay?sca=&amp;sfl=wr_name,1&amp;stx=피카츄" data-toggle="dropdown" title="피카츄 이름으로 검색" class="sv_guest"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피카츄</a> <ul class="sv dropdown-menu" role="menu"> 님의 댓글

  • <spa…
  • 작성일
바다가 그립네요^^*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