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나타난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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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우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동성애는 과연 근래 서양에서 유입된
퇴폐사조일까?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동성애자는 존재했고 다만 그들이 드러났는지
숨어있었는지의 여부가 다를 뿐이었다.
가장 오랜 전통은 신라의 화랑도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화랑의 선발 기준은 귀족 자제 중 미소년이었다.
요즘같이 남성우월적인 사회에서 여자도 아닌 장차 국가 지도층이 될 남자들을 외모로
선발한다면 얼마나 충격적일까? 그들이 풍류를 즐기고 무예를 닦고 서로 어울렸다는 기록만 가지고는 그들이 동성애 흔적을 찾긴 힘들다. 다만 진흥왕때 유명한 화랑 사다함은 친구 무관랑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죽었다 하고 <모 죽지랑가><찬 기파랑가>등의 향가엔 단순히 남자들의 우정이라 보기엔 지나친 내용과 절절히 애끓는 내용을 엿볼 수 있다.
신라 혜공왕은 본래 공주로 태어날 몸이었지만 부왕 경덕왕이 신에게 빌어 운명을 바꾸어 태어난 후 어려서부터 여자옷을 입고 여자들의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나약하고 정치에 무관심하여 후에 쿠데타로 왕위를 빼앗긴다.
고려 목종은 여자 후궁대신 유충정, 유행간이라는 남자 후궁 두명을 두었다.
그러나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은 폐위되어 이들은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게이였던 왕들은 이렇게 전부 유약한 왕들뿐이었을까? 공민왕은 고려 말의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노국공주(그녀가 출산을 못했던게 혹시 플라토닉 러브는 아니었을까?)를 잃고 그는 새로 후궁을 4명이나 간택하지만 그녀들 대신 자제위라는 미소년 귀족 자제를 선발하여 그들과 더불어 즐겼다고 한다. 공민왕은 궁녀들과 자제위들의 혼음을 지켜보다가 여장을 한 자신을 자제위에게 뒤에서 범하도록 명하였다니 복장도착에 관음증세까지 보였다.
그러나 <고려사>는 고려를 적대시하던 조선 초에 쓰여진만큼 그 신빙성이 의심을 받는다.
그들은 어떻게하면 고려를 좀 더 문란하고 타락한 사회로 적을까 고민하였을것이다.
조선은 유교를 표방하며 남존여비와 적서차별로 엄격한 신분질서를 요구하고 보수적인 이념으로 백성들의 정신까지 지배하였다. 지금의 내숭, 체면, 위선, 권위, 허세 등의 우리 국민성이 이때부터 연유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性과 관련된 모든 언급은 천하고 금기시되었다. 오직 정절과 금욕만이 미덕인 사회였다.
그러나 조선 초엔 아직 이전의 자유로움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세종때 처형된 남녀 양성인 사방지, 레즈비언으로 폐위된 세자빈 봉씨, 성종때 고위층을 유혹하여 물의를 빚은 종실 며느리 출신의 기생 어우동...
그러나 서민들의 소박한 문화엔 자유로움이 숨쉬고 있었고 조선시대 문화예술의 전수자요 공로자인 남사당패들의 동성애는 유명했다. 여자가 없는 그들은 암동모, 숫동모라 하여 어린 미소년(삐리)과 어른 남자가 부부가 되어 공동 이동생활을 했고 남자들을 상대로 매매춘도 하였다.
사대부 게이들은 그렇게라도 자신들의 억압된 욕구를 풀 수 밖에 없었다.
농촌 마을 청년회에선 바구리라 하여 신입회원이 들어오면 신고식(성희롱)하는 풍습도 있었다고 하니 당시 승방, 감옥, 군인 등 민간에선 어느 정도 동성애가 묵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허나 이성이 없는 상황에서의 대리욕구 충족은 동성애와는 구별될 필요는 있다.
왕이나 세자를 위하여 평생 처녀로 늙어 죽어야 하는 궁녀들은 대식(對食)이라 하여
늙은 궁녀가 어린 궁녀를 상대로 욕구를 푸는 풍속도 전해진다. 세종은 대식을 금하여 적발된 궁녀에겐 태형 10도를 치라고 명하였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연암이 중국의 귀족댁을 방문했을때 미소년과의 동침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다는 대목이 나오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인 남자에게 원조교제를 하던 소년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이상에서 보듯이 서슬이 시퍼런 조선시대에도 민간에선 동성애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는 유교적인 전통에 일제의 잔재, 미군정과 군사정권의 영향등으로 더욱 폐쇄적이고 기형적으로 보수적인 의식이 형성되어 왔다.
이제 이를 극복하고 자유로운 인간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계급, 인종, 민족, 종교. 성별, 성적 취향, 장애 여부를 신경쓸 필요가 없는 세상이 왔으면 정말 좋겠다.
퇴폐사조일까?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동성애자는 존재했고 다만 그들이 드러났는지
숨어있었는지의 여부가 다를 뿐이었다.
가장 오랜 전통은 신라의 화랑도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화랑의 선발 기준은 귀족 자제 중 미소년이었다.
요즘같이 남성우월적인 사회에서 여자도 아닌 장차 국가 지도층이 될 남자들을 외모로
선발한다면 얼마나 충격적일까? 그들이 풍류를 즐기고 무예를 닦고 서로 어울렸다는 기록만 가지고는 그들이 동성애 흔적을 찾긴 힘들다. 다만 진흥왕때 유명한 화랑 사다함은 친구 무관랑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죽었다 하고 <모 죽지랑가><찬 기파랑가>등의 향가엔 단순히 남자들의 우정이라 보기엔 지나친 내용과 절절히 애끓는 내용을 엿볼 수 있다.
신라 혜공왕은 본래 공주로 태어날 몸이었지만 부왕 경덕왕이 신에게 빌어 운명을 바꾸어 태어난 후 어려서부터 여자옷을 입고 여자들의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나약하고 정치에 무관심하여 후에 쿠데타로 왕위를 빼앗긴다.
고려 목종은 여자 후궁대신 유충정, 유행간이라는 남자 후궁 두명을 두었다.
그러나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은 폐위되어 이들은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게이였던 왕들은 이렇게 전부 유약한 왕들뿐이었을까? 공민왕은 고려 말의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노국공주(그녀가 출산을 못했던게 혹시 플라토닉 러브는 아니었을까?)를 잃고 그는 새로 후궁을 4명이나 간택하지만 그녀들 대신 자제위라는 미소년 귀족 자제를 선발하여 그들과 더불어 즐겼다고 한다. 공민왕은 궁녀들과 자제위들의 혼음을 지켜보다가 여장을 한 자신을 자제위에게 뒤에서 범하도록 명하였다니 복장도착에 관음증세까지 보였다.
그러나 <고려사>는 고려를 적대시하던 조선 초에 쓰여진만큼 그 신빙성이 의심을 받는다.
그들은 어떻게하면 고려를 좀 더 문란하고 타락한 사회로 적을까 고민하였을것이다.
조선은 유교를 표방하며 남존여비와 적서차별로 엄격한 신분질서를 요구하고 보수적인 이념으로 백성들의 정신까지 지배하였다. 지금의 내숭, 체면, 위선, 권위, 허세 등의 우리 국민성이 이때부터 연유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性과 관련된 모든 언급은 천하고 금기시되었다. 오직 정절과 금욕만이 미덕인 사회였다.
그러나 조선 초엔 아직 이전의 자유로움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세종때 처형된 남녀 양성인 사방지, 레즈비언으로 폐위된 세자빈 봉씨, 성종때 고위층을 유혹하여 물의를 빚은 종실 며느리 출신의 기생 어우동...
그러나 서민들의 소박한 문화엔 자유로움이 숨쉬고 있었고 조선시대 문화예술의 전수자요 공로자인 남사당패들의 동성애는 유명했다. 여자가 없는 그들은 암동모, 숫동모라 하여 어린 미소년(삐리)과 어른 남자가 부부가 되어 공동 이동생활을 했고 남자들을 상대로 매매춘도 하였다.
사대부 게이들은 그렇게라도 자신들의 억압된 욕구를 풀 수 밖에 없었다.
농촌 마을 청년회에선 바구리라 하여 신입회원이 들어오면 신고식(성희롱)하는 풍습도 있었다고 하니 당시 승방, 감옥, 군인 등 민간에선 어느 정도 동성애가 묵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허나 이성이 없는 상황에서의 대리욕구 충족은 동성애와는 구별될 필요는 있다.
왕이나 세자를 위하여 평생 처녀로 늙어 죽어야 하는 궁녀들은 대식(對食)이라 하여
늙은 궁녀가 어린 궁녀를 상대로 욕구를 푸는 풍속도 전해진다. 세종은 대식을 금하여 적발된 궁녀에겐 태형 10도를 치라고 명하였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연암이 중국의 귀족댁을 방문했을때 미소년과의 동침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다는 대목이 나오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인 남자에게 원조교제를 하던 소년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이상에서 보듯이 서슬이 시퍼런 조선시대에도 민간에선 동성애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는 유교적인 전통에 일제의 잔재, 미군정과 군사정권의 영향등으로 더욱 폐쇄적이고 기형적으로 보수적인 의식이 형성되어 왔다.
이제 이를 극복하고 자유로운 인간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계급, 인종, 민족, 종교. 성별, 성적 취향, 장애 여부를 신경쓸 필요가 없는 세상이 왔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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