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돌이썰(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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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4일 일요일 오전 11:02
#썰/다른썰
+ 축구공 그 남자
처음봤던 건 17년 겨울 즈음이었던 것 같다. 편의점 알바를 시작한지 석달쯤 지났었나, 이제 일도 손에 익었고, 자주 오는 손님들도 눈에 익어서 단골 손님들하고는 간단한 인삿말 정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주중에는 잉여롭게 살다가 주말에 이 일만 하던 터라 배터리가 찬 채였고,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일하는 게 재미있던 시기였던지라. 특히 잘생긴 훈남 손님들 오면 괜히 한마디씩 말 붙이곤 했다.
기억하기로는 내 타임에 처음 본 손님이었다. 첫인상은 검정 롱패딩 안에 축구 유니폼을 입고 축구공을 들고 있었던 것 같다. 막 한 게임 뛰고 온 듯 약간 붉게 상기된 얼굴. “운동 좋아하시나 봐요.” 편돌이가 갑자기 말 붙일 줄 몰랐던듯, 살짝 당황하면서 “어… 네” 하고 이내 입을 다문다.
반응을 보니 괜히 말 꺼낸건가 싶다. 빼박 게이 인증한건가 싶고. 그래도 왜, 웃으면 귀여울 것 같았는데. 운동좋아하는 덩치큰 대형견 같은 느낌?
+ 여자친구한테 숙취해소음료 사주는 남자
그 훈내미 손님이 또 왔다. 원래도 나처럼 얼굴이 붉은편인 건가 생각하던 차에 빠른 걸음으로 냉장고에서 숙취해소 음료를 꺼내온다. “술 많이 드셨어요?” 하고 물으니 멋쩍은 듯 웃으면서 “아뇨, 여자친구가 술 너무 많이 마셔서…” 하며 한숨 쉬는 남자.
그러고 보니 카운터에 올려져 있는건 ‘모닝케어 레이디’ 그럼 그렇지… 이런 남자가 애인하나 없다면 이상한 거지… 괜한 기대는 초장에 접는게 낫지. ‘여자친구’한테 ‘여성용’ 숙취해소음료 사주잖아…
계산을 마치고 안녕히가세요, 인사하는데 그래도 인사는 받아준다. 그래, 훈남이랑 말이라도 섞고 지내는 걸로 만족하자.
+ 진열대 뒤에서 웃는 남자 & 인사하려고 기다리던 남자
그 뒤로도 몇번 마주치고 나서는 인사도 반갑게 받아준다. 괜히 나도 들떠서 그 남자 손님만 오면 싱글벙글이다. 조금이라도 촉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 손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으리라.
인사말을 주고 받으면서 배시시 웃는데, 웃는게 진짜 귀엽다. 남친하고 싶은 그런 남자랄까.
하루는 또 혼자와서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는데, 다른 손님들도 매장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빈 카운터에 서있으면서 눈으로는 그 남자를 사심가득한 눈으로 멀찌감치 보고 있었다.
옆모습이 살짝 보일 만한 위치, 혼자서 씨익 웃고 있다. 통화하는 건 아니었고, 폰이라도 보고 있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뭐야, 왜 혼자 웃는건데. 괜히 설레잖아.
그때 샀던게 컵라면이랑 이것저것 사갔던 것 같다. 그 손님 계산을 하는 도중에 뒤에 다른 손님이 계산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손님은 계산을 마치고 바로 나가지 않고 한발짝 물러서서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음? 왜 안나가지? 하는 생각을 하며 기다리던 손님 계산까지 마쳤다. 그리고 카운터로 다가와 내게 인사를 건내는 이 남자. 정확히 기억은 나질 않는데, 잘 지냈냐 같은 간단한 안부 인사였고, 서로 학번이랑 과까지 물어보게 됐다.
-생년월일을 묻더니 ‘내가 형이네’ 하는 남자-
보통 일반 남자가 편’돌’이랑 일부러 인사나누려고 볼일도 마쳤는데 조금 기다리기도 하던가…? 조금 이상하단 생각이 들긴했다. 그럼 어때, 덕분에 한마디라도 더 할 수 있는걸. 그리고 그때 부터 괜히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 모자를 자주쓰는 남자
처음엔 자주 보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처음엔 왜 안 오나 아쉽기만 하다가, 시간이 지나며 무슨 일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때쯤 왔었다. 보통은 새벽 4~5시 즈음 손님이 없을 때 간단한 끼니를 때울 만한 삼각김밥, 컵라면 같은 것들을 사가곤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낡은 야구 모자를 쓰고 왔는데, 색도 많이 바래고, 꼭 같은 모자 하나만 쓰는 것이 무언가 사연이라도 있는가 지레 짐작하곤 했다.
처음만난 후로 시간은 지나서 추운 계절이 다 지나가고 있었고, 덕분에 해가 조금씩 어제보다 조금 더 일찍 뜨기 시작했는데, 동틀무렵이면 가게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곤 했다. 그 때문에 그 시간대가 되면 내 신경은 온통 가게 밖으로 향해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그 모자와, 그 사람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면서 괜히 기분 좋아지곤 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만큼 약속이 많은 인기남이란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안 좋은 일이 있던 건지 그저 피곤해서 그랬던 건지 무표정하거나 어두울 때가 많았고, 친구사이 였다면 위로라도 해줬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움만 커지는 나날이었다.
+ 사촌동생을 인사시키는 남자
늘 오는시간대였다.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주위는 밝아지고, 잠든 도시가 조금씩 깨는 시간. 그리고 야간 편돌이인 내가 잠에서 깨려고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는 시각. 늘 혼자만오던 평소와는 달리 다른 남자랑 같이 왔는데, 꽤나 취해 보였다.
취한 친구는 진열대쪽으로 보내고, 자기는 카운터 앞에 선다. “술 많이 드셨나봐요” 하는 물음에 “네, 조금…” 하면서 멋쩍은 듯 웃는 이 남자.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가리려는 듯 애쓰는데, 그 손목에는 큼직하게 도장이 하나 찍혀있다.
“클럽갔다왔어요?” 민망한듯 웃음으로 답하는 그 남자. “강남?” “이태원이요…” 20살 이후로는 클럽 가본적이 없는 나다. 잘은 몰라도 요즘 핫한 곳은 강남쪽이라고 해서 찔러본건데, 이태원이라는 대답이 나온다. 이태원에도 일반 클럽이 있나?
만취한 친구는 비틀거리며 진열대에 부딪혔고, 남자는 그에게로 가서 부축하면서 살 것들을 고른다. 그러다가 취한 친구가 레토르트 카레를 떨어뜨렸다. 남자는 황급히 그걸 주워서는 카운터에 올려놓는다. 살짝 밟혀서 박스가 구겨져있다.
취한 친구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하는 남자. 그랬더니 그 취객이 카운터 쪽으로 와서는 꾸벅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하고. 음? 뭐지?ㅎㅎ 계산을 하면서 “사촌동생이에요.” 하는 남자. 둘이서 꾸벅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선다.
신기한 해프닝이긴 하다. 왜 클럽갔다온 걸 쑥쓰러운듯이 얘기를 한 걸까, 왜 굳이 사촌동생이라고 소개하면서 인사를 시킨 걸까, 둘이서 귓속말로 무슨 말을 주고 받은 걸까. 내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진짜로 오해할만한 상황인 건지.
+ 같이 한잔하자는 남자
그리고 또 다른 어느날. 어김없이 새벽녁에 들어온 남자. 이번에는 혼자다. 간단히 먹을 과자 같은 것들 사고는 자리를 잡는 남자. “오늘은 좀 이따가 갈게요” 굳이 그런말 안해도 상관없는데, 그렇게 말하니 왠지 귀엽다.
술 마시다 온 것 같았고, 괜히 말이라도 한마디 더 붙여볼 요량으로 진열대에서 갈아만든 배 두캔을 꺼내들었다. “이거 드세요” 하면서 하나 내밀고는
서비스 라며 얼버무렸다. 서비스긴 하지. 맘에 드는 손님한테만 주는 편돌이의 사심 가득 담긴.
음료수를 계산하고서 카운터 자리에 앉는데 수줍게 말 꺼내는 남자. “안 바쁘시면 같이 한잔 할래요?” 방금 내민 음료수캔을 손에 쥐고 이 말을 하는데, 나는 이미 광대승천한 느낌. 거울은 안 봤지만 아마 얼굴 빨개졌을 거다.
어짜피 손님도 없겠다, 또 왠 재수냐 싶어서 얼른 그 남자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통성명 제대로 한 것도 그때가 처음인 듯 싶었다. 인적사항도 주고 받았다. 11학번이고, 91년생. 경영대고 부모님한테 5천 정도 받아서 소소하게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고 했다. 술 마시는 걸 좋아한다며 다음에 술 한잔 하자고 하더라.
그렇게 내 얘기, 그 남자 얘기 하다가 주위가 밝아졌고, 손님이 하나둘 오면서 나는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다시 올게요 하면서 나갔던 남자가 다시 돌아와 맥주를 고르고 있다. 혹시 맥주 한잔 하실래요? 하면서 내게 권하길래, 근무중에는 못마신다고 했다.
사양하는 내게 그래도 고르라기에 두 캔을 골랐다. 간단한 안주거리를 더 고르고는 계산을 마치고 내몫의 맥주 두캔을 내민다. 나는 내 번호를 쓴 쪽지를 건내줬고, 남자는 약간은 당황한듯 쪽지를 받았다.
남자가 나가고 곧이어 “방금 올라간 술쟁이 김형균입니다~” 하며 전화번호를 찍어 보낸 카톡이 왔고, 술한잔 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 같이 한잔했던 남자
몇번 카톡을 주고 받다가 약속을 잡았다. 약속장소는 일하는 편의점 앞. 먼저 도착해서 담배 한대 피면서 기다렸다. 보통의 남자들이 그렇듯 조금은 늦지 않을까 싶었는데, 왠걸 제 시간에 맞춰 나오는 남자.
자주 입는 짙은 녹색의 티셔츠에 예의 야구 모자를 쓰고 나왔다. 우리는 집 근처에 고기집을 갔다. 내가 굽겠다고 했는데도 남자는 괜찮다며 혼자서 고기를 구웠다.
남자의 선배 중에 바(bar)를 하는 형이 있어서 한번은 놀러 갔는데, 가격대가 쎄서 그 뒤로는 못 갔다는 얘기, 고등학교때 고향에서 버스타고 서울까지 와서는 칵테일 공부를 했다는 얘기, 나중에는 작은 바를 하나 운영하고 싶다는 얘기.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시점에서 그때 했던 얘기를 떠올려 보니 저정도 밖에 기억이 안난다. 이 남자는 술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사실 궁금했던게 많았는데, 듣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꺼내진 못했다.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적당히 취기가 올랐고, 배도 차서 가게를 나왔다. 헤어지면서 재밌었다고, 다음에 또 한 잔 하자고 그랬다. 내 얘기는 별로 안 했던 것 같은데, 난 계속 듣기만 했던것 같은데.
그런 애매한 술자리가 끝났고, 며칠 뒤 나는 그에게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했었다. 그떄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 나왔던 때다. 자기도 마블영화 좋아한다고 , 혼쾌히 알겠다고 했었고, 예매까지 했었는데, 보기로 한 전날 확인차 가능하냐고 물어봤을 때 급한 사정이 있어서 집에 내려간다 했다.
그리고 두 달쯤 뒤에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졌고, 잘 지내냐고 카톡을 보냈다. 다음날이 되서야 그렇다는 대답. 왜 대답이 석연찮냐며 무슨 일 있냐고 내가 보낸 카톡이 마지막이었다.
어쩌면 그쯤 되니까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지도. 무슨일이 생겼던 건지, 그 뒤로는 전혀 얼굴을 보지 못했고, 얼마 뒤에 나는 알바를 그만 뒀다. 마지막으로 잘지내라는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꽤 오랜시간이 지나고서야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해서 쓴 글이라 두서없고, 조금 다른 말이 오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기분좋았던 기억들이라 이렇게라도 남기고 싶어서 글을 쓴다.
고마웠어요. 덕분에 긴 야간 근무가 덜 지루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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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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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밋게 잘봤고
머리속으로 필름이 스치며 돌아가는 느낌과 뭔지모를 애뜻하고 아련한 느낌입니다.
그사람이 일반미엇기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껴서 손절했단 판단을 하기엔
이태원 클럽 사촌동생이라고 굳이 변명성 인사를 시킨 부분이 명쾌히 설명이
안되네요.
암튼 아쉽고 씁쓸한 뒷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