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exual Identity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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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형 인간이 아니라 다른 보여드릴 건 없고, 예전에 페북에 썼던, 저라는 사람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글을 가져왔습니다.


 혹시 이 긴 글을 읽으시는 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든 그렇지 않든 제가 만나는 모든 분들께드리고 싶은 말은,


Gracias! Buen Camin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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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이야기 이자, 그러나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 나를 이루는 가장 큰 가치이면서 내 생각과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야기이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도 수없이 고민해 왔고, 써야겠다 마음먹고서도 선뜻 풀어낼 용기를 내기 어려웠던 이야기이다. 누군가에겐 불편한 이야기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자, 힘겨운 삶을 버텨내는 어느 소수자의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담임선생님이 여자분이셨는데, 부모님께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매주 금요일 종례 시간이면 반 아이들에게 주말에 교회에 갈 사람을 모았었는데, 나도 그중에 하나였다. 다른 선생님과 달리 아는 것도 많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하시는 분이라, 그때 부터 막연한 동경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신이라는 존재가 아직 막연한 개념이었던 당시에는 많은 이들이 삶의 진리요, 인생의 동반자라고 여기는 그 존재가 어떤 존재일까 막연한 궁금증이 일었다. 몇 차례 교회를 나가고,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다. 교회에서였는지, 나처럼 선생님을 따라 교회를 나가던 친구들한테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면 안 돼', '그건 큰 잘못이고, 큰 벌을 받을 거야', '동성애는 죄악이야' 그 얘기를 들은 후 조금 우울해졌다. 어린 마음에 겁도 났고, 괜히 교회에 가면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조금씩 교회를 멀리했고, 어느새 교회를 나가는 게 두려워졌다. 몇몇 아이들이 왜 나오지 않냐고 물었었는데,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부터 였던 것 같다. 나는 빨리 독립이 하고 싶었다. 언젠가 누군가-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내 비밀을 알아버렸을 때, 나를 멀리할 것 같았고, 나를 미워할 것 같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교 아이들과는 친하게 지냈지만, 내 마음속 비밀은 꺼내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와 아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고 생각했고, 차라리 빨리 어른이 되어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의 1학년,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환경과 생각을 가진 동기들, 비록 1, 2년 차이지만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게는 다 큰 '어른'으로 보이던 선배들. 그들과 밤새도록 술잔을 채우고, 웃고 마시며 떠들었던 그때가 참 즐거웠다. 학업, 과 활동, 새로 만난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잘 적응하고 있었고, 과 학생회장 선배에게 집행부 활동 권유를 받았다. 5월쯤이었나, 어느 고학번 선배가 학교로 오셔서 술자리가 있었고, 2차, 3차를 거치며 계속해서 웃고 떠드는 자리가 계속됐다.


 왜였을까, 그토록 즐거운 술자리에도 더 이상 흥이 나지 않았다. 괜히 감정이 고조되어 이내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재밌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아무리 웃고 떠들어도, 나는 외톨이가 되는 듯 했고, 술기운을 빌어 다 털어놓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도무지 그럴 자신이 없어, 술에 취한 척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기숙사로 향했다.


 5월의 캠퍼스는 밤공기가 약간 차게 느껴졌다.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데, 멈추면 눈물이 삐져나올 것 같아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기숙사 앞에 도착했을 때, 평소 나와 친하게 지내던 같은 과 여자 동기 둘이서 앉아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눴는데, 항상 웃고만 다니던 녀석이 울상을 짓고 있으니 무슨 일인가 걱정이 되었는지 무슨 이야기인지 말해보라 한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 그때의 내가 미친 것 같았다. 말해도 이해 못 할 거라고,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속마음은 털어놓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그래, 그냥 못 받아들이면 자퇴하고 군대나 가야겠다'하는 생각으로, 대학 들어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했다. 다행히 그 두 친구는 상당히 덤덤히 이야기를 받아들였고, 시간을 두고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에게 하나둘 얘기를 했을 때도 다들 그러려니 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대학의 축제 때였나, 서울에서 뒤풀이를 했고, 거기에는 한 편입생 형이 있었다. 덩치도 크고 무서운 인상이었지만, 편입생이어서 과 학생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던 형이고, 나도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평소 술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술 마시던 도중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나중에 친한 친구가 말하길 나를 가리켜 게이 아니냐고 물어봤단다. 그 얘기를 듣고는 그냥 멍했다. 더 이상 그 형이 웃으며 인사를 해도, 떨떠름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사람이 더 믿기 힘들어졌다.


 그때 부터 나는 아무리 친해도 사람들 사이에서 벽을 두기 시작했고, 가끔 친했던 형들이 '너는 왜 이렇게 네 얘기를 안 하냐, 신비주의냐' 하는 농담에도 그냥 웃어넘길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모진 성격이 아니라 나를 형처럼 따르는 후배들에게 한두 명 얘기하긴 했지만, 그때 마다 나는 도박사가 되었다. 그 사람을 얻거나, 아니면 내가 가진 전부를 다 잃거나.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가장 위험한 도박(gamble)들 이었다.


 대학에서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그 와중에 스쳐 간 인연들도 많았는데, 나는 사람을 '정리'하는 법을 터득했다. 한 번쯤 운을 떼보고, 이 사람과는 거리를 더 두어야겠다던지, 이 사람은 믿고싶다던지. 잔정이 많은 나로서는 수북이 쌓이는 연락처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시간을 두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정리되면 연락처를 지워나갔다.


 대학의 1학년 때, 장교 후보생에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을 했다. 그때부터 합격자 소집, 입단 전에는 예비 후보생 교육, 입단 후, 임관 직후, 나는 군 장교로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때 마다 후보생 또는 장교의 자격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다.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자, 금치산자, 한국 국적이 아닌 자 등 다른 요건은 다 이해가 되었는데, 유독 나를 슬프게 만든 것은 '동성애자는 장교의 결격 사유이다.'라는 항목이었다.


 처음 그 얘기를 보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선택한 결정이지만, 마음 한켠에는 들키면 안 된다는 불안감과 내가 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그러나, 여느 군 교육기관이 그렇듯, 학문과 장교로서의 덕목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그곳에서, 나는 그런 걱정은 잊고 멋있는 소대장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X 년 3월 초 추위가 가시지 않은 계룡대 연병장에서 임관 선서를 하고, 장성에서 병과 교육을 받고. 지금 생각하면 참 즐거웠다. 나 역시 이 나라를 지키는 어엿한 장교의 한 사람임을, 국가의 안녕과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군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교육기관에서 배치될 자대에 일주일가량 야전을 체험할 때, 내가 맡게 될 소대원들을 처음 보았고, 어깨에 책임감을 다지면서, 열심히 해야지 다짐했다. 군 생활 중에 가장 기뻤던 순간 중에 하나는 교육을 마치고, 사단에 가서 전입 신고를 하고, 자대에 들어섰는데, 내 소대원 중에 한 녀석이 내 이름을 부르며 이제 오신 거냐며 웃으며 인사를 건냈던 때다.


 첫 자대 배치받은 부대는 훈련이 많고 힘들기로 악명높은 곳 이었는데, 처음에는 혼나고 깨지면서도 참 재밌었다. 일과 후나 주말에는 내 소대원들 얼굴 보러 막사에 갔었고, 애들한테 정이 가서 어느새 중대원들을 다 챙겨 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겨 밤늦게까지 생기부를 보고, 면담을 했었다. 하루는 어김없이 생기부를 뒤적이는데 한 막내 하사가 날 보고는 '소대장님 멋있습니다' 했는데,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뭔가를 잘 해내고 있구나' 생각했다.


 중대에서 첫 전술 훈련을 나가 처음으로 실제 지휘를 했던 나날이, 내게는 너무 힘들었다. 자괴감도 많이 들었고, 부족함이 많이 느껴져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다. 그때 군대에서 처음으로 담배를 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선임이나 여러 부사관들이 많이 놀라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소대장 상이 있었고, 나 스스로가 장교단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졌었는데, 그 모습이 어떻게 비춰 졌을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마음에 남는 것은 내 군 생활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떤 병사들에게 얼차려를 줬는데, 사실 말로써 해도 됐을 것을 왜 그땐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내게는 너무도 미안한 기억이다.


 자대 전입 초기의 모습은 어디 가고 단 두 달 만에 몸도 마음도, 자존감 역시 바닥을 쳤다. 그쯤 이었나, 내가 근무를 서는 날이었고, 내 소대원 한 명이 불침번이었다. 당직을 서는 날이면 어떻게든 깨어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므로, 잠시 잠도 깰 겸 그 아이와 담배를 폈었다. 만약에 그때라도 털어놓았으면, 달라졌을까.


 대한민국을 이루는 중요한 가치를 헌법이라 믿는 나로서는, 육군 규정상에 내가 장교의 결격사유에 해당된다는 사실이 퍽 가슴 아팠다. 그날부터 전역을 하는 날까지 나는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 집단에서 살아남으려고,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애를 썼다. 숱하게 방황했고, 몇 번이나 '전역'의 의사를 내비치어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했었다.


 학군단이나 군 생활을 하면서 사진을 참 많이 찍었었는데, 그때는 즐거웠던 그 순간이, 그 시간을 함께한 이들이 훗날 내 정체를 알게 되어 나를 꺼리고 싫어할까봐. 다시는 내게 그때처럼 웃으면서 얘기하지 않을까 봐서, 나는 그때의 순간들을 작은 액정에나마 붙들고 싶었다.


 그렇게, 만나는 순간부터 이별을 생각했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대학의 새내기 시절부터 줄곧 가져온, 그 긴 시간 동안 참고 인내하며 가슴 깊이 삭혔던 이야기. 나는 사람과 대화하고, 웃고 떠드는 것이 즐겁다. 작은 기억이라도 오래 간직하는 편이라 사람을 잘 못 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가끔은 혼자 속앓이할 지라도, 나는 그런 내가 좋다.


 장교 후보생 시절 방학 기간 훈련을 받으면서 종교 활동을 갔었다. 불교는 생소하고, 기독교는 불편하고, 대게 나는 천주교를 택했다. 무언가 신비한 분위기에 매료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명동 성당에 자주 갔었다. '고해성사'라는 것이 신자들에게만 허락된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신부님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내가 태어난 것이,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잘못인가 하는 것을.


 나의 이러한 고백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불쾌하게 들릴지는 모르겠다. 누군가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한 배신의 감정이 차오른다면 그 믿음을 져버린 나로서는 더없이 미안하다. 더 이상 나 스스로를 숨기고 사는 삶이 내게는 너무 버거워서 그런 것이라 이해해주십사 부탁한다. 나는 그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냥 나의 넋두리를, 나 같은 사람도 당신 곁에 있었다는 것만 알아주길. 20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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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로인 것을


https://youtu.be/M0-SQ51H_ok?si=Lk262R4NRoyhnAv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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