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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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좀체 우는 법을 잊었던 휴대폰이 간만에 알림을 띄웠다. “매치가 성사되었습니다.” 상대는 만 34살, 여기서 1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백인이었다. (이렇게 성사되는 이들이 대개 그렇듯) 언제 좋아요를 누른 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지만 꽤 내 취향인 사람이었다. 뺨을 뒤덮은 짧은 금빛 수염이 남자다워 보였고, 눈동자는 마치 동남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맑고 푸른 바다의 색이었다. 그는 영국에서 왔고, 한국에 온 지는 11년정도 지났다고 했다. 그렇게 오래 되었다길래 내심 기대하며 묻자, 한국말은 아주 약간 듣거나 읽을 수 있지만 말은 전혀 못한다고 하더라. 그 나라 말을 일절 못하면서도 몇 년씩이나 있다니. 새삼 영어권 사람들은 외국 나가 살기도 쉽겠다, 싶었다. 때문에 학부 졸업 이후 열어본 적도 없는 사전 어플을 켜 팔자에도 없는 영어로 간간히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 만날래?”
그가 있는 곳은 경기도 어딘가의 신도시라고 했고, 내비를 찍어 보니 가는 데만 30분정도 걸렸다. 12km. 30분. 잠깐 고민했으나, 내가 살다살다 언제 외국인을 다 만나보겠냐 싶어 알겠다고 했다.
애초에 그는 자기네 집에서 뭐라고 먹으면서 놀자고 했지만, 이런 만남이 으레 그렇듯 우리는 만나자마자 섹스를 했다. 외국인과의 관계는 처음이라 좀 긴장했지만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 다 사정을 하고 나서는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가길래, 먼저 씻겠다는 뜻인 줄 알고 잠깐 누워있으니 도로 나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같이 씻자는 말이었구나.
“몇 살이야?”
“한국 나이로 30살이요."
“와, 훨씬 어릴 줄 알았는데.”
나는 언젠가 미드에서 본, 검지와 중지를 토끼귀 모양으로 까딱거리는 제스처를 하며 ‘You know, Asians.’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크게 웃으며 내게 입을 맞췄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어색해졌다. 나는 낯을 꽤 가리는 타입이고, 더더군다나 (Literally) 말도 안 통하는 상대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막막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마틴, 이라고 했다. 왠지 나도 가르쳐줘야 할 것만 같아 한국 이름과 영어 이름 중 어떤 것을 말할까 고민하다가, Terry라고 했다. 영어 이름이었지만, 어쩐지 한국식으로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직접 고른 이름이냐고 물었다. 왜 이렇게 이름에 집착하지.
“아뇨, 초등학교 때…”
“혹시 원어민 영어 선생님이 지어 준 거야?”
“헉. 어떻게 알았어요?”
그가 질렸다는 표정을 하며, 한국인들에게 물어보면 다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 말했다. 그렇냐, 나는 좀 웃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정적. 마틴이 음악을 틀었다. 아는 곡이라도 나오면 아는 체를 해야겠다 싶었으나 그렇지도 않았다. 자꾸만 가슴이 답답하고 어딘가 불편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요, 제가 지난 달에 헤어져서요.”
그가 놀란 얼굴을 하곤 나를 봤다. 나는 이쪽 사람을 만날 때마다 전 애인들의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상대방의 이전 사람에 대해 묻는 버릇이 있었는데, 수년 전 만났던 누군가가 ‘나한테 관심이 없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고 했던 이후로 이게 대화의 물꼬를 트기에 부적절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의 나는 우울했고, 어색했고, 불편했다. 누구라도 붙잡고 무슨 이야기라도 하고싶었다. 되도 않는 영어를 드문거리면서라도.
“그랬어? 힘들었겠다.”
“이제는 막 엄청 힘든 건 아닌데, 오늘 같은 날이 그래요. 쉬는 날인데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그러다가 당신한테 연락이 온 거에요.”
그는 어쩐지 안쓰러운 얼굴을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뒷통수에 느껴지는 그의 손바닥이 따듯했다.
“당신은 어때요? 한국 사람, 만나본 적 있어요?”
3년정도 만났다고 했다. 공식적으론. ‘Huh?’ 하며 고개를 갸우뚱 하자, 헤어지기 4~5달 전부터 상대쪽에서 점차 식어가는 게 보였다고 했다. 당신은 어땠는데요? 되물으려다 말았다. 대신 그가 했던 것처럼, 짧고 부드러운 금빛 머리칼이 복슬복슬한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말을 할 때마다 3초에 한번씩 더듬거리긴 했지만, 의외로 소통이 많이 어렵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와 좋아하는 영화 취향이나 드라마 이야기를 할 때는, 친구를 통해 알게 됐다는 말이 순간 영어로 생각나지 않아서 ‘You know, 소개?’ 하고 묻자 그가 ‘So gay?’라길래 둘 다 와르르 웃기도 했다. 나는 특히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에 약한 터라, 잠깐 마틴과 함께하는 평행세계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언어는 우리가 가진 가장 낮은 장벽이겠지.
말없이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눈부신 푸른빛에 어쩐지 빨려들어갈 것만 같아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한국에 어쩌다가 와서 지내게 됐을까. 이 먼 대륙 끝에서 끝까지, 한국에 와 10년이나 지냈다는 그가 겪었을 외로움의 크기가 가늠되지 않았다. 나라면 진즉 사무쳐 죽었을텐데. 우리는 시덥잖은 이야기를 이어가면서도 중간중간 입을 맞추거나 허그를 하기도 했다. 나보다 15cm는 더 큰 그에게 안겨있노라면 어떤 안정감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겠다고 하고, 마지막 포옹을 할 때는 더 그랬다. 오늘 나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오늘 즐거웠어.”
“나두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푸른 눈이 어딘가 슬퍼 보였다.
“또 보자.”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나는 알 수 없는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꽤 자주 스스로도 뭔지 모를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그럴 때마다 감정에 정의를 내리면 좀 괜찮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일까 고민하다 이내 운전대를 잡았다. 마틴이 이름에 집착하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전남친과 헤어지고 난 후 가장 힘들었던 건 거창한 게 아니었다. 어쩌다가 일찍 퇴근하는 날, 회사 점심 메뉴에 치킨이 나온 날, 다음주에 비가 온다는데 세차를 할 지 말 지 고민하는 날. 이런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할 데가 없다는 게 힘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쩌면 나는 반드시 그 사람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누구라도 상관없던 거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고 나니 외로워졌다. 외로운 상태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딱잘라 말할 수 없는데도 그랬다. 그런 스스로가 너무 모순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슬프기도 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낯선 동네를 지나쳐 창밖으로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을 보면서, 비로소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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