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 정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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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빌라의 현관에 도착했을 때 난 승우에게 배달된 여러 통의 먼지 낀 우편물들을 발견하였다. 난 그 먼지들을 털어내고 우편물을 꺼내서 바라보았다.
보내는 이 최승우. 그리고 받는 이 김정현.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서 한참을 그 우편물을 바라보았다.
그 때 이 곳 빌라에 사는 듯한 아주머니가 내게 말을 걸었다.

\"402호 총각 친구가 보네?\"
\"네. 그런데요.\"
\"그래요? 402호 총각 여기 안 온지 몇 年 되는데. 가끔씩 와서 잠자고 가는 것 같은데 그것도 몇 달에 한 번이고 그러면서 방세는 꼬박꼬박 낸다고 그러더라구요.\"

난 그 아주머니의 말에 다시 우편물을 바라보았다.
보내는 이의 주소를 보아하니 녀석이 군대에서 보낸 것 같았다. 난 그 우편물에 승우를 느껴보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빌라의 옥상으로 향하였다.
옥상에 올라가자 후덥근했던 빌라 안의 공기와는 다르게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난 옥상의 낮은 벽에 내 몸을 기대어 앉아서 녀석이 보낸 우편물의 봉투를 찢었다. 그 손이 마치 알코올 중독자처럼 떨리었다.

-정현이에게...
충성!
잘 지내고 있냐?
나도 힘든 훈련에 정말 매일매일 죽을 것 같지만 견딜 만하다.
요즘 뭐하고 지내냐? 대학은 잘 다니고 있지?
이 곳에서 훈련을 받고 나서 잠자리에 들면 너무나 피곤해서 5분만에 잠이 들게 돼.
근데 난 억지로 10분 동안은 잠 참고 있다.
왜 그러는지 아냐?
이런 말하기 닭살 돋지만 그 10분 동안 니모습 상상할려고.
이제 너랑 떨어진지도 겨우 일주일이 넘었는데 벌써 니가 보고싶어 미칠 것 같아.
그리고 나 교회도 안 다니는데 매일 기도한다. 오늘 밤 꿈속에서 꼭 니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게 해달라고......
미안하다. 그날은......
그 날 솔직히...... 내 맘 알지? 이해해줄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 날 화났더라면 화 풀어라.
화 풀고 가족들 면회 오는 날 잡히면 그 때 한번 좀 와라. 내가 그 때되면 연락할게.
내가 편지를 쓸 줄 몰라서 많이 못쓰겠다. 피곤하기도 하고.
보고싶다.
그리고 내가 이런 말하면 니가 싫어하지만, 사랑한다. 내 가슴이 터질만큼.
잘 지내.         
                                                                199X. X. XX 승우가.
   
-정현이 이 나쁜 놈 보아라.
아직 화 안 풀렸냐?
왜 면회 한 번도 안 오냐?
알잖아. 친구라고는 너 한밖에 없는 거. 근데 면회 한 번도 안 오고.......
그리고 핸드폰은 왜 안돼냐? 답답하다.
속좁은 놈.
이 편지를 쓰면서도 걱정이다.
솔직히 편지 쓰면서도 너에게 보낼 방법이 없잖아. 니네 집으로 보낼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이태원에 우리 집으로 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건데, 니가 조금이라도 날 생각하면 이 편지를 읽게 되겠지. 믿는다.
아, 그리고 집세는 내가 군대에 와서도 꼬박꼬박 내니까, 너 힘들 때 그 집에 와서 쉬다 가. 그러면서 내 생각도 하고.
그리고 임마! 이젠 화 좀 풀고 면회 좀 와라.
보고싶으니까.....
그리고 사랑하니까......
                                                                19XX. X. XX 승우가

-정현아.
시간이 참 빨리 간다.
나 벌써 이등병 됐다. 나도 이젠 완전 군바리 다됐지. 이런 모습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이젠 이 편지를 니가 읽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게 된다. 그냥 니가 그리운 마음에 자꾸 받는 이도 없는 편지를 쓰게 된다.
대체 어디서 뭐하고 사냐? 결혼이라도 한거냐?
나 이젠 니 얼굴 기억도 안난다. 그래서 니 얼굴 생각해 낼려고 별에 별짓 노력하는데, 넌 내 생각 조금이나마 하는 지 모르겠다.
나 이번에 첫 휴가 나간다. 그 때 니 모습 봤으면 해.
피곤하다. 많이.
사랑한다. 이런 말조차 니가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안 서지만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보고싶다. 정현아.
                                                        19XX. X. XX. 널기다리는 승우

-정현이에게
휴가 때 널 찾아보았지만 니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어.
휴가가 끝나가는 날, 옥수역에 가 보았어. 혹시 니가 있지 않을까 해서. 아니 지나가다가도 나를 보고는 지하철에서 내리지는 않을까 하고......
근데 역시나 널 만날 수 없었어.
넌 어디에서 무엇하고 있냐?
내가 땡볕 아래에서 훈련받고 있을 때 넌 무엇하고 있을까? 내 그 곳을 만지려고 하는 고참들의 손길을 오로지 너를 생각하며 뿌리치다가 고참에게 끌려가서 한참을 맞고 있을 때, 넌 무엇하고 있을까?
무심한 자식. 널 미워하고 싶다.
정말로 널 미워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건 긴 시간 니가 내 곁에 없어도 난 너를 함께 있을 때보다 더욱더 사랑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쁜 놈. 지옥으로 떨어져라. 그럼 나도 같이 뛰어내릴 테니까.
                                                                19XX. X. XX. 승우가
         
나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코끝이 찡해지면서 목이 메워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울음소리를 참지 못하였다.
\"바보같은 놈아. 니가 옥수역에서 날 찾을 때, 나도 군대에 있었어. 나도 니 면회 가고 싶었는데 그래서 못 갔던 거야. 나두 너 훈련받을 때, 훈련받았다고.\"
난 승우의 편지를 손에 쥔 체, 흐느끼며 말했다.
오후의 선선한 바람이 눈물과 콧물과 소리내어 우느냐고 흘리는 침으로 범벅이 된 나의 얼굴을 닦아내었다.
그리고는 난 녀석의 편지를 내 볼에 부비었다. 그 종이 한 장에서 녀석의 따듯함을 느낄 수 잇었다.

난 눈물을 닦아내고선 벌떡 일어나. 마구 뛰기 시작하였다.
\"수원대 다닌데.\"
난 수원으로 향하는 전철을 타기 위해서 그 근처 전철역으로 마구 뛰었다.
뛰면서 그 동안 승우와 나의 모습들이 노란색 색광렌즈를 낀 영화의 필름처럼 나를 스쳐지나갔다.
처음 시비 붙었었던 모습, 손을 잡으며 잠자리에 들었던 모습, 제주도 겨울밤에 왈츠를 추었던 모습, 아무도 없는 바다에서 춤을 추었던 모습.
그리고, 훈련소에 말없이 나의 따듯한 위로도 받지 못한 체 들어가는 녀석의 모습.
너무나 미안했다. 녀석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난 그 미안한 마음에 더 빨리 더 멀리 뛰었다.

난 전철을 타고서도 내 마음을 진정시키지 않았다.
나의 몸은 전철 안에서 손잡이에 기대어 서 있지만 나는 뛰고 있었다.
녀석을 위해서 난 뛰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수원. 수원역입니다.\"
한참을 뛰다보니 어느새 수원까지 왔다.
이젠 어떻게 승우를 만나야 하나. 이런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쳤다.
수원도 작은 곳이 아닌데, 난 이 큰 도시에서 승우를 어떻게 찾겠다고 무작정 이렇게 수원에까지 왔을까? 전철에서 내리면 난 무엇부터 해야하나?
전철이 새마을호가 수원역에 지나가기 위해서 잠시 멈춰서 있는 동안 난 이런 생각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막상 전철이 수원역에 도착하고 출입문이 열리자 마자 난 또 뛰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의 어깨를 부딪히며,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난 역의 계단을 뛰어 올랐다. 그리고 개찰구 앞에서 줄을 서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발을 계속 동동 굴렀다.
난 드디어 수원역 청사에서 빠져 나왔다.
하지만 수원역 앞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난 다시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 너머로 보이는 높은 건물들, 많은 차들로 가득 찬 도로 정신이 없었다.
\"수원대에 있다던데.\"
수원대...... 난 다시 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뛰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의 모습처럼 난 무엇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뛰었다.

한참을 이곳저곳 뛰어다니다가 버스 정류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정류장을 향해서 방향을 바꾸려는 순간 너무나 낯익은 모습에 세상은 온통 색을 잃은 흑백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그 흑백의 화면속에 오직 여름태양의 빛을 받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난 그 사람을 보고서는 마구 뛰던 나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 사람도 나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옆으로 메고 있었던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흑백화면 속의 세상은 참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데 유독 빛을 받은 우리만이 멈춰진 시간 속에서 서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왔구나.'
'응. 늦어서 미안해.'
'보고싶었어.'
'나도 보고싶었어. 너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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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으로 글다운 글 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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