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뇽의 반달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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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 1998년까지 프랑스 유학 생활 동안의 저의 이야기들을 일기 형식으로 엮어서 매일 한 편 씩 연재하고 있습니다.
* 라뇽의 반달 1...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1993. 5. 1. 토요일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마당에 서 있었지.
나는 아주 어렸고, 봄 날 이른 아침이면 흰눈 내리는 겨울처럼 왜 꽃이 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 떨어진 꽃들은 젖은 땅 위에서 나무의 모양새를 정확히 그려내며 시들어 갔지만, 꽃의 기억은... 여린 가지 위에서조차도 푸른 열매로 오래오래 살아 남아 있었지...
토요일 늦은 아침에 서울을 떠났는데 이 곳에 도착해 보니 아직도 토요일 오후 네 시였어. 비행시간은 정확히 열 세시간 반이었는데...... 가끔은 내가 잃어버리기도 하고 또 가끔씩은 그냥 사라져 버리기도 하는 그런 시간들 앞에서 이제는 내가 많이 무디어졌어. 타인과는 아무 것도 공유할 수 없었던 기억들만으로 혼자 살아 있던 동안에 나는 세상과는 무관한 삶의 방식에 길들여지고 있었던거야.
안개비가 서리처럼 하얗게 가로등 위로 내리고 있어 지금 이 곳엔. 빠리 시내로 들어가는 전철역 앞, 드골 공항 근처의 작은 호텔방이야. 단 한 마디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만 우박처럼 마구 쏟아져 나오는데 나는 우산 하나도 없이 그 앞에 속수무책으로 내 놓아져 버린 그런 기분이야. 갑자기 무섭고 두려워지기도 하지만 절대로 내가 아는 외로움 만큼은 아니야. 늘, 뒤돌아 뛰어가서 되찾고만 싶었었던 내 유년의 기억들을 끌어안고 나는 오늘 이 곳으로 왔어. 아이의 작은 배꼽을 닮은 하얀 꽃들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던 내 어린 봄 날, 그 이른 아침의 하얗던 아이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그 시절 만큼 먼 이 곳으로 도망치듯 와 버렸어. 미안해, 모딜리아니를 닮은 그림이 내 마음 속에 있어서가 아니었어. 나는 이미 스물 여섯이고 그런 내 마음 속에 꼭꼭 숨어있던 나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어서 그랬어. 푸른 빛이 바래어 가는 나의 영혼도 더 늦기 전에 다른 이들 것처럼 자유롭게 살게 하고 싶어서 그랬어. 미안해, 내 자신 마저도 부정하려고만 했었던 나에게 나는 지금 너무나도 많이 부끄럽고 미안해, 진심이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의 그림들 속에 포장되어져 있었던 나를 이제는 꺼내야겠어. <나>대로, <나>인 채로, <내>방식대로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살고 싶어. 날이 밝는 대로 다시 떠나야 할 먼 길 보다 내 사람들에게로 가는 길이 더 멀게만 느껴지는 건 내 스스로가 그들로부터 그만큼 멀어져 왔기 때문이지. (내일 계속)
* 라뇽의 반달 1...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1993. 5. 1. 토요일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마당에 서 있었지.
나는 아주 어렸고, 봄 날 이른 아침이면 흰눈 내리는 겨울처럼 왜 꽃이 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 떨어진 꽃들은 젖은 땅 위에서 나무의 모양새를 정확히 그려내며 시들어 갔지만, 꽃의 기억은... 여린 가지 위에서조차도 푸른 열매로 오래오래 살아 남아 있었지...
토요일 늦은 아침에 서울을 떠났는데 이 곳에 도착해 보니 아직도 토요일 오후 네 시였어. 비행시간은 정확히 열 세시간 반이었는데...... 가끔은 내가 잃어버리기도 하고 또 가끔씩은 그냥 사라져 버리기도 하는 그런 시간들 앞에서 이제는 내가 많이 무디어졌어. 타인과는 아무 것도 공유할 수 없었던 기억들만으로 혼자 살아 있던 동안에 나는 세상과는 무관한 삶의 방식에 길들여지고 있었던거야.
안개비가 서리처럼 하얗게 가로등 위로 내리고 있어 지금 이 곳엔. 빠리 시내로 들어가는 전철역 앞, 드골 공항 근처의 작은 호텔방이야. 단 한 마디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만 우박처럼 마구 쏟아져 나오는데 나는 우산 하나도 없이 그 앞에 속수무책으로 내 놓아져 버린 그런 기분이야. 갑자기 무섭고 두려워지기도 하지만 절대로 내가 아는 외로움 만큼은 아니야. 늘, 뒤돌아 뛰어가서 되찾고만 싶었었던 내 유년의 기억들을 끌어안고 나는 오늘 이 곳으로 왔어. 아이의 작은 배꼽을 닮은 하얀 꽃들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던 내 어린 봄 날, 그 이른 아침의 하얗던 아이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그 시절 만큼 먼 이 곳으로 도망치듯 와 버렸어. 미안해, 모딜리아니를 닮은 그림이 내 마음 속에 있어서가 아니었어. 나는 이미 스물 여섯이고 그런 내 마음 속에 꼭꼭 숨어있던 나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어서 그랬어. 푸른 빛이 바래어 가는 나의 영혼도 더 늦기 전에 다른 이들 것처럼 자유롭게 살게 하고 싶어서 그랬어. 미안해, 내 자신 마저도 부정하려고만 했었던 나에게 나는 지금 너무나도 많이 부끄럽고 미안해, 진심이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의 그림들 속에 포장되어져 있었던 나를 이제는 꺼내야겠어. <나>대로, <나>인 채로, <내>방식대로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살고 싶어. 날이 밝는 대로 다시 떠나야 할 먼 길 보다 내 사람들에게로 가는 길이 더 멀게만 느껴지는 건 내 스스로가 그들로부터 그만큼 멀어져 왔기 때문이지.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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