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세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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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한테 평생 세컨드할게.
그러니까 다른 사람 만나도 돼. 나 괜찮아."
그날 나는 조수석 창가에 머리를 기대어 앉아있었고
그가 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히 건넨 말이었다.
울컥이며 번뜩이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다
그렁해진 그의 눈가만큼
점점 내 온 몸도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마음으로 내게 그런 말을 했을지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내 욕심은 버겁고
무거운 현실 앞에
차마 나를 놓을 수는 없었던 그가
치열한 고민 끝에 내놓은 결론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늘 기다려야만 했다.
밤과 주말, 공휴일은 물론이고 휴가까지
내게 주어지는 선택권이란 평일 점심시간 외에는
단 하루도 없었다.
그가 시간을 내어 일방적으로 찾아오는 것 말고는
약속을 잡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았다.
여름 휴가때 해외로 떠난 그로부터
열흘이 넘도록 연락이 없었을때엔
가슴속부터 화근내가 치솟았다.
"넌 못해. 못버틸 거다. 난 시작 안했으면 좋겠어."
가까운 지인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도 없었던
딱 하루의 우연으로 시작된 관계.
우리 사이를 일찍부터 눈치 챈 그가
내게 했던 경고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개월을 버텨내다
한창 뜨겁던 스물아홉의 인내심은
결국 한계를 드러냈고
술과 함께 그의 앞에서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얼마뒤에 그가 꺼내놓은 대안이
바로 평생 세컨드였다.
그런데 내 입장에선 세컨드라함은
앞으로 누구를 만나더라도
한없이 속여가며 그를 곁에 두라는 소리이지 않나?
그렇게라도 그 관계를 유지한다한들
과연 내 정신과 마음이 온전했을까?
그가 꺼내놓은 제안은 내게는 일종의 신호였다.
우리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놓아주기까지 정말 많이 힘들었지만,
이쁜 두 아이와 아내를 두고
뒤늦게 본인의 정체성을 깨달은 그 사람이
오늘따라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추억에 젖은 감상때문이라기보단
그 이유가 조금은 쌩뚱맞을 수 있는데...
스물아홉. 그래, 그때는 참 힘들었겠다 싶다.
들끓는 열정을 참으라니 그게 어디 쉬웠을까?
와이프와 통화하는 현장을
적접 목격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기분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차안이라 피할 길 없이
귀에 때려박히는 목소리를 버텨내기란 참...
그런데 지금의 난?
내가 당장 누군가의 두 번째를 자처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때때로 나를 불러내
몸과 마음을 시간내어 보내주기만 해도 좋을 것만 같다.
한사람에게 온마음, 온시간을 집중해 쏟는 나를 너무 잘 알다보니
덜 신경쓰고 정줄 놓고 살더라도
알아서 틈틈이 비는 시간 따박따박 날 찾아만 준다면
어쩐지 편할 것도 같다.
상대는 사는게 치이고 바빠서
되려 한 눈 파는 일이 적을 것 같고
그 틈에 어떻게든 나를 끼워넣어준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여길 것만 같다.
아련함을 포장한 감동 파괴가 되버린 듯 하지만
평생 세컨드.
그때는 정말, 참 서글픈 말이었는데
스물아홉의 정열이 사라진 지금
이제는 그 입장이 나라면 괜찮을지도?
그런데 이런 대가리 꽃밭같은 생각도 결국 다 떠나
서로가 취향이 맞아야 이루어질 소리인데다
뒤따르는 공허함까진
당장은 살짝 모른척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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