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곰처럼 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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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랑의 인사


홀씨들의 투신 -강은교-

5월 어느 날, 낯선 도시
헤매는 길 위에서
너희들을 만났다.
너희들은 가득
허공을 타고 날고 있었다.

길 위의 사람들은
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또는
저마다 들고 있는 얇은 봉투로
머리를 덮으며 걸어갔다.

멈추지 말라, 멈추지 말라

버스가 멈추고 마침
네가 문틈으로 날아 들어와
핏빛 비닐 의자에 쳐박혔다.

켤코 네 집이 되지 못할
딱딱한 도시의 근육 속
한 떠돎이 또 한 떠돎을 낳는 곳

여기저기서 흐느낌들이 일어섰다.

일어선 소리들을 아무도 듣지 못했다.


아침에 혼자 일어날 때의 기분은 언제나 씁쓸하다.
오늘도 지섭은 두 팔을 허둥거리며 몸을 뒤척이다
허전한 마음을 추스리고 나서야 일어날 생각을 했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채우지 못한 아침의 욕망은 완전히 게워내지 못한 뱃속처럼 지저분하다.
한숨을 쉬어본다.
습관처럼 라디오를 켜고 커튼을 연다. 날씨가 좋을 듯 하다.
5월의 햇살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과 어울려 출렁거리는 그 유혹을 당해낼 수 있을까?
"봄날의 곰처럼 널 사랑해"라는 글귀가 떠오른다.
어디서 보았더라... 하루끼의 "노르웨이숲"이었군.
지섭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섭은 두 번째 교차로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조금은 날카로운 여자 DJ 목소리가 신경을 거스른다.
그녀는 슬픈 사연을 읽을 때조차 신이나 있다.
지섭은 피식 웃는다.
그녀의 그런 성격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째튼 부러울 뿐이다.
그녀도 우울할 때가 있기는 한 걸까?
늘 똑같은 코스로 출근을 하지만 지섭에게는 늘 새롭다.
그나마 집에서 회사까지 한시간동안의 여행은 숨막히는 이 도시에서
그를 견디게 하는 유일한 탈출구다.
도로 주변의 은행나무 이파리들은 기분좋게 팔랑거리고
이름도 알수 없는 꽃들이 제각기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주변의 산은 그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 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에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라디오에서 김광석의 "서른즈음에"가 흘러나온다.
그래, 내 나이 서른이구나. 점점 더 멀어져가는 주변 사람들...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빈자리...

갑자기 뒤쪽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노래에 빠져 신호가 바뀌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지섭은 머리를 두어번 흔들고 상념에서 벗어난다.
오늘따라 감상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얼까?
저 놈의 햇살때문이야. 하늘을 한 번 째려본다.

지섭은 한시간 먼저 출근한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녹차 한 잔 마시며
음악을 듣는 그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섭이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틀어놓은 지 얼마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이 기분좋은 시간을 방해받는다는 생각에 얼굴을 찡그리고
들어오는 사람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낯선 사람이다.
지섭은 순간적으로 그 사람을 훑어본다.
얼굴의 절반이상을 차지한 커다란 안경
1970년대에나 있었음직한 물건이군. 하하하
그래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170센티가 될까말까한 키, 짧은 다리, 통통한 몸매, 조금 들어간 눈,
금방이라도 미소가 번질것 같은 입...
지섭은 아기곰같은 인상이라고 생각한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정도...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네. 오늘부터 여기 출근이거든요.
모스크바 지사에서 본사로 발령이 났어요.
정인철이라고 합니다.

아, 정인철 과장님이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안경이 참 잘 어울리네요. 하하하
전 한지섭입니다.
차 한잔 드릴까요?

아, 한지섭씨, 한달 전에 통화한 적 있죠?
목소리듣고 상상했던 모습하고 많이 다르군요.
하하하

그러세요. 어떠리라 생각하셨나요?

음... 키가 크고 덩치가 무척 큰 사람인 줄 알았어요.

작아서 실망하셨나요? 하하하

아니, 난 작은 사람이 좋더군.
아이구, 처음 만난 사람하고 악수도 안했네.
자, 잘 부탁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지섭은 과장님의 손은 참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인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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