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딕 (Med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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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딕 (Medic)



언젠가 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필 메딕만 그렇게 엽기적으로 죽을까?"

스타크래프트에서 유닛들이 죽을 때 피를 낭자하게 흘리긴 하지만 메딕은 사지가 떨어져 나가 토막이 되어 죽는다.

"여자라서 그런 걸까? 약하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리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애가 똑같은 말을 했다.

"형, 왜 메딕이 그렇게 죽는지 아세요?"

한 달쯤 전이었다. 카페 모임에서 알게 된 동생이 스타 못한다고 따돌림이라며 가르쳐달라고 하던 때가.... 요즘 한참 재미가 붙었다며 대전하자고 하던 그 애.

"......"

"그건 자폭장치가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몸이 조각나면서 죽는 거죠."

"자폭이라면 주위의 적유닛에게 데미지를 줘야 되지만 그런 건 없다."

"풋! 원래부터 메딕은 공격력이 없어요. 그냥 자살 같은 거예요."

"......?"

"메딕은 여자잖아요. 성폭행 당하지 않으려는 거죠."

"...... 그냥 죽일 수도 있는데....."

"형은 그거 몰라요? 시간(屍姦) 할 수도 있다는 거."

"......."

처음 하는 것 치고는 유닛 컨트롤을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아직은 내가 이기고 있었다.

"쳇! 오늘도 실수로 졌지만, 다음엔 각오하세요."

"그래..... 다음부터는 초반러쉬 한다."

"그건 아직 안돼요."

게보린을 하나 먹는다. 밤만 되면 찾아오는 두통. 한 알씩 두 알씩 사던 것을 오늘은 11개나 샀다.

"게보린 2알요."

"자주오시네요. 그러시지 말고 1000원어치 사세요. 그럼 11개 드리거든요."

"1000원치 주세요."

"그런데 진통제 많이 드시면 안 좋아요."

"......."

수면제처럼 게보린도 많이 먹으면 죽을까..... 게보린 먹고 자살했다는 말은 못 들어 봤으니까 죽지는 않나 보다.

"형..... 아직도....."

".......?"

게임방에서 나올 때 술한잔 하자고 조르는 통에 따라간 술집에서 그 애가 꺼낸 말이었다. 처음 한참동안은 스타크래프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주로 그 애가 이야기하고 나는 듣는 입장이었지만, 메딕의 자폭 같은 것은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소주 한 병이 비워지고 다시 한 병을 시키면서 생겨버린 대화의 소강상태에서. 그리고 내가 담배 한가치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 그 순간에. 그 애는 말했다. 아직도.....라고. 아직도?

"형."

"응."

"낮에 철환이 만났어요."

"......."

"이런저런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형이 했던 말이 생각났어요. 그 말 때문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데..... 철환이는 괜한 자책감 느끼며 당황해하고. 왜 그때 그 생각이 났는지. 기가 막혀요. 아무튼 그 상황이 코메디였다니깐요."

"내가 한 말?"

"그거 있잖아요. 집착과 체념."

"그게 웃을 일인가?"

"그럼요. 최소한 저에겐 거짓말인 걸요. 집착으로 시작되어 체념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체념하지 않아도 완성돼요."

"어떻게?"

"까먹거든요."

게보린 하나로는 역부족인가보다. 두통은 여전하다. 위대한 인간의 면역성. 그 생체의 신비. 그러나 다만 생체에 국한된 신비일 뿐이다. 보고, 듣고, 숨쉬고, 움직이고..... 아무 문제없다. 시계를 본다. 새벽3시. 잃어만 가는 수면의 밤. 그리고 두통.
아직도.... 그 다음 말은 뭐였을까? 괜한 자괴감. 괜한 찔림. 그 애가 알 리가 없는데도 그 때 그 순간엔 나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아직도 그러냐고. 아직도 그 지경이냐고. 아직도 비굴하게 거머쥐고 있냐고. 이젠 넌덜머리가 난다고. 그런 말을 하려 했던 것 같았다.
스타크래프트를 가르쳐줄 때 자주 술을 마셨다. 그 애는 천성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했고, 철환이와 사귀다가 헤어졌다는 이야기도 그러면서 들었다.

"카페 모임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았어요. 둘이 성격도 잘 맞았고. 같이 있으면 즐겁고 좋고.... 그러다 보니 없을 땐 허전하고, 보고 싶고.... 아. 이게 사랑이구나 싶었죠. 그래서 제가 먼저 말했어요. 좋아한다고요. 그리고 사귀었죠. 힘들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전에도 충분히 사귀는 것처럼 지냈으니까. 이젠 방해받을 것도 없이 잘 지낼 수 있다고만 생각했었죠. 그런데 그건 저의 착각이었어요. 철환이는 달랐던 거죠. 친구로 지내는 것과 사귀는 것은 행동부터 달라져야 하는 거였어요. 전 몰랐고, 철환이는 알았죠. 그 애만 변해갔거든요. 그렇게 삐걱대다보니 어느 날 그러네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 건 아니래요. 그냥 외롭기 때문에 누군갈 옆에 두고 싶어 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자기는 누군갈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다고. 그래서 헤어지자고..... 참 바보 같죠? 지금까지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요. 그 뒤로 철환이는 절 피하는 건지 모임에도 나오지 않고, 다시는 그 전처럼 될 수가 없었죠. 제가 좋아한다고 말을 꺼낸 그 순간부터 모든 게 잘못되어버렸어요. 다시는 그런 말 안할꺼야. 그런데 형. 저 아직도 철환이 보고 싶어요. 너무 보고 싶어요..... 정말 바보라니깐....."

그 애가 연거푸 술을 마실 때 나는 담배를 피우고만 있었다.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해줘야 했지만,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런 말 있지.... 사랑은 집착으로 시작되어 체념으로 완성된다고....."

"형도 그랬나요? 체념으로 완성시켰나요?"

"......"

"체념이란 말은 단지 잊는다는 말이지 않나요? 그것뿐인가요?"

"대충은."

"잔인하네요. 사랑이란 건."

서서히 창밖이 어스름하게 환해져왔다. 조금씩 두통은 가라앉고 눈꺼풀도 무거워진다. 어차피 난 거짓말쟁이니까. 집착도 체념도 내 말은 아니었으니까. 아무 것도.....처음부터......

"그만 끝내자."

"......"

"더는 싫어. 내가 먼저 체념할게. 그리고 각자 다시 시작해."

"......"

"......그래.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 아무 것도 모를 꺼야, 넌. 내가 뭐 때문에 힘들어하고, 뭐 때문에 울었는지 넌 모를 꺼야. 너에겐 아무 상관없겠지만, 난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아이의 아버지야....... 처음엔 그랬지. 무조건 집착해 나가는 걸 사랑이라고 여겼어. 우린 둘다 그랬어. 사랑이라고..... 체념이란 것이 있다는 건 몰랐으니까. 그것도 사랑에 포함된다는 건 몰랐으니까. 이젠 체념하자. 집착으로 시작되고 체념으로 완성되어야만 한다면 우리 그렇게 하자."

".....싫어."

"그럴 줄 알았어. 넌 모를 거라고 했지..... 연락하지 마. 만나지도 않을 거야. 다시 말하지만 끝내자."

"싫어."

"그만해.... 먼저 나갈게."

"싫어. 싫다구!"

찻잔을 집어던지고 고함을 지르고..... 우둑하니 서있는 그 사람을 안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었다. 절대.... 하지만 금새 밀쳐지고 그 사람은 떠났다.

불면의 밤이 끝나고 아침이 되자 그제야 잠이 쏟아졌다. 자야지,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지. 다시 하루가 시작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잠시 잠들었다가 수업시간에 맞추어 학교로 갔다. 몇 개의 강의를 듣고 그 애와 만날 약속에 미리 간 커피숍에서 밀려드는 졸음에 잠시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해가 저물어 간다고 일찌감치 두통이 찾아오고 있었다.

"형, 또 머리 아파요?"

언제 들어왔는지, 바로 옆에서 그 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머리가 무거워 몸을 일으키기 힘들었다. 그냥 잠든척하며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자요?"

대답하지 않았다.그 애도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의 침묵, 그리고 나지막이 들리는 목소리.

"형....메딕은요, 자신을 치료하지 못해요. 최소한 둘이 있어야 서로를 치료해줄 수 있어요."

무슨 소리야? 설마..... 그 '아직도'라는 말이?

"한 달 동안.....에너지 모았어요. 이젠 제 차례예요. 각오하세요."

그 애를 바라볼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가만히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 따뜻해져오는 등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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