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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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모양이다. 눈이 풀리고, 혀가 꼬인다.
둑이 무너진 듯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선배에게 욕이 섞인 술주정을 하고 있다.
개새끼. 왜? 그냥, 넌 개새끼야.
묵묵히 내 술주정을 받아주며 선배는 소주잔을 비운다.


*

1.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나의 눈은 항상 선배를 쫓고 있었다.
단단하면서도 선한 인상의 선배는 항상 새내기들에게 친절했다.

가장 쉽게 밥을 사달라고 조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선배는 항상 ‘달라 빚을 내서라도’ 새내기들 밥과 술은 사줘야한다고 말했다.

며칠 학교에 보이지 않는 후배에게 전화해 안부를 물을 줄 아는 선배였고,
단대건물 앞 잔디 위에서 예비역 선배들과 어울려 족구를 잘 했던 후배였고,
학년대표를 맡아 모꼬지와 종강파티를 준비하는 활달한 동기였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선배를 따랐다.

항상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던 선배와는 의외로 쉽게 친해질 기회가 생겼다.


2.
“야! 임성재!”
먼발치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 돌아보지 않아도 나는 그것이 선배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반가운 마음을 애써 누르며 선배가 부르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선배는 나무탁자 위에 테니스 라켓 몇 개와 공을 올려놓고
테니스 동아리의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성재야, 너 테니스 관심 있냐?”

테니스 동아리라, 사실 내겐 조금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평생 테니스라고는 쳐본 적이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덜컥 가입서에 이름을 적었다.
‘초보자도 환영’이라는 말이 홍보종이에 적혀있었고,
내 지갑 속에는 비록 교재 살 돈이라고 받아왔을지언정
라켓을 즉시 구입할 정도의 돈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선배를 더 자주 보고 싶어서였다.


3.
“이 놈, ‘테니스’에 ‘테'자도 모르는 놈이었잖아?”

반대쪽 코트에 서서 선배는 몇 개의 공을 서브했지만
내가 받아친 공은 뜻대로 날아가 주지 않았다.
네트에 걸리거나, 담장을 넘어 가거나, 오히려 뒤로 튕겨져 나갔다.

선배는 웃었고, 괜찮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 있냐?

나는 속으로만 울었다.
선배에게 정확히 날아가지 못하는 테니스공이
마치 선배를 좋아하는 내 마음 같았기 때문이다.
‘사랑해요. 선배.’
하지만 그 고백은 네트에 걸리거나, 담장을 넘어가거나, 오히려 뒤로 튕겨져 나가
선배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4.
선배가 직접 내 자세를 잡아주었다.
내 뒤에 서서 한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내 오른손목을 잡았다.
나를 감싼 선배의 양 손이 천천히 움직여 내 손에 쥐어진 라켓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라켓이 밀려갈수록 점점 밀착되는 선배의 몸.
바로 귀 뒤에서 속삭이는 선배의 말소리.
귓불을 간질이는 숨소리.

아찔해서 그만 눈을 찔끔 감아버린다.

자냐? 선배는 가볍게 내 머리에 꿀밤을 때리고는 웃는다.

.......................................

아프다. 너무 아프다.


5.
매일같이 나는 테니스 연습에 열중했다.
좀 더 정확히 선배를 향해 공을 쳐 낼 수 있는 용기와 준비가 내겐 필요했다.

아침 일찍 학교 대운동장을 몇 바퀴 뛰고는
테니스 코드로 나와 벽을 상대로 라켓을 휘둘렀다.
공강시간에도, 수업이 끝난 후에도 나는 테니스 연습을 했다.
몇 시간이고 라켓을 휘두르다 보면 온 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땀이 눈에 들어간 모양이다. 눈이 따끔거린다.
테니스 연습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땀이 눈에 들어갔기 때문인 것이다.


6.
모든 동아리 선배들이 대견해 한다.
일취월장, 청출어람이라며...
무슨 테니스 귀신이라도 붙은 거 아니냐고.
나는 알고 있었다. 이미 선배와도 게임을 해서 이길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는 걸.

하지만 자꾸만 나는 피하게 된다.


7.
“야! 임성재! 너 요즘 자꾸 왜 날 피하냐?”
테니스 코트에 들어오는 선배를 보고
서둘러 연습하던 코트를 정리하고 나가려던 내 손목을 선배가 낚아챈다.

“제가 뭘요.” 기어가는 목소리다.

“불만이 있음 말로 해. 임마. 사내자식이 소심하게 꽁해가지고.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한거야? 말 해보라니까? 내가 다 들어 줄게.”

천천히 고개를 들며 나는 말했다.

“선배, 게임 한 번 하실래요?”


8.
너무도 쉽게 나는 선배를 이겼다.
선배는 자신이 졌으니 술을 사겠다고 한다.
이제 돌이킬 수가 없다.


*


눈을 떠 보니 아침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다.
어젯밤이 기억나지 않는다.
선배에게 무슨 말인가 한 것 같은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술집에서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흐르던 것만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런,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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