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소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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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오전일이 끝나고 그제서야 따뜻한 믹스 커피 한잔을 손에 들 수 있게 되었다.

한 겨울이었지만 등뒤에 있는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따끈따끈한 햇볕이 뒷통수와 목덜미에 느껴졌다.

   

고개를 들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들여다 보고 있는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거래처로부터 부탁받은 자료에 넣을 레터링을 만드느라 골몰하고 있는 듯한  그를 그렇게 바라 보다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래서, 만나 보니까 어때?”

“네?” 나의 뜬금 없는 물음에  똥그래진 눈으로 녀석이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현이 말야.”

“......”

나의 말에 아무 대답 없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녀석은 슬며시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개인적으로 만나 보니 더 마음에 든다고 그 녀석이 어젯밤에 전화 했던데.....”

 

처음에 현재의 사업구상을 하고 있긴 했지만 이전의 실패로부터 나는 좌절의 나락에 떨어져 있었다.
마치 분화구와 같은 깊은 바닥에 떨어진 후, 높이를 잴 수도 없는 깊은 벽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결코 나는 그 패배감에서 회복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졌었다.
자신감도 없었도 깨느릇하고 몽롱한 정신에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터무니 없이 부족한 자본이었다.

술 좌석에서 술김에 털어 놓은 나의 고민을 듣고 녀석은 실패후 시도도 해보려 하지 않는 나를 마치 형처럼 나무랐다. 
나의 사업에 자신이 투자를 하겠다고 했다.

그런 녀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술김에 건네는 허세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런 녀석을 보고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 다음날 녀석은 내가 거주하고 있던 원룸의 앞에 와서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 술김의 농담이 아니었냐고 묻는 나의 말에 화를 냈다.
“형과 내 사이가 겨우 그 정도 였어요?”  라면서 녀석은 상처받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녀석의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서 일감도 얻어다 주고 퇴근길에 들러서 술한잔을 기울이면서 나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용기를 불러 넣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해주었다.

남에 뒤지지 않게 충분히 배웠고, 그 만큼 능력도 있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물론, 외모도 남에게 밀리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 나의 사무실에 놀러왔다가 새로 나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된 지환이를 보고는 첫눈에 반했던 것인지, 넌지시 나에게 지환에 관해서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눈치가 없다고 해도 그런 녀석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르는 척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환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해서 넌지시 물었을 때, 녀석은 뜨뜻미지근한 태도와 술에 물탄 듯 한 말로 나의 판단을 어렵게 만들었다.

싫은 데, 그래도 사장이라는 내가 묻는 것이니 제대로 내색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좋은데 처음부터 좋다고 하면 잡히고 들어가는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니면, 요즈음 젊은 애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진 탓에, 나의 머릿속에 뇌 회로가 번역을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같이 영화도 보기로 했다면서?”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씁쓸한 향이 목구멍 속으로 번져갔다.

“그래서 그 친구한테, ‘그날 일이 좀 바빠서 지환이 출근해야 하는데’ 라고 농담 한번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날더러 악덕 사장이라면서 당연히 쉬어야 한다고 협박 반 사정 반 하던데, 그 녀석이....”

“.......”

“같이 영화 보러 가기로 할 정도면 서로 괜찮다는 신호 아니야?”

“.......”

녀석은 아무 표정의 변화 없이 멍하니 모니터에 머물던 시선을 책상위로 떨어뜨렸다.

“왜? 별로였어?”

“........”

“그 녀석 능력있고 가방끈도 길고, 생긴 것도 꽤 괜찮고....뭐 어디 나무랄 데 없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지훈이 슬며시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커피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러신 분 같으셨어요. 그런데......”

“그런데?”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녀석이 말을 멈추고 한번  겸연쩍은 웃음을 슬며시 지어보였다.

“왜 그 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어요.”

“..........”

“그 분하고 억지로 비교를 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일부러 생각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갑자기 다른 사람이 생각나더라구요.”

“........”

“딴이,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거나 하는 그런 것도 전혀 아니었는데.....”

“.........”

예상치 못했던 그의 말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다른 사람하고 벌써 ‘썸’이라던가 그런 것 타고 있는거야?”

“아니예요.”

그가 황망해 하면서 붉어진 얼굴로 손을 내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니구요. 그냥 얼마전에 아는 친구들 몇하고 종로에서 술을 마시다가 우연하게 단순히 같이 자리를 하게 된 사람이 있었거든요.”

녀석이 말을 멈추고 슬며시 모니터를 흘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니고, 관심을 가질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도 안 했었고, 그래서, 그 다음에 잊고 있었는데, 사장님 소개로 만난 그 형하고 같이 마주 않아 있는데, 어이없게 그 사람이 갑자기 떠오르는 거예요. 정말 매너 없는 일이지만요.”

 

녀석이 말하는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슬그머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저.. 사장님...”

녀석이 어렵게 다시 입을 열고 나를  바라보았다.

“죄송한데, 저 토요일에 출근해서 일하면 안 될까요?”

“.........”

“사장님도 잘 아시고 하시는 분인데, 제가 직접적으로 거절하기가.....”

“그럼....”

“네?”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사람에 대해서 얘기 좀 해봐. 그럼 들어보고 내가 결정하지.”

 

 

 

 

 

내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눈코 뜰새 없었던 처음 한달이 지나고, 이제 그럭저럭 익숙하게 된 후,  어느 토요일 밤에 녀석은 예전에 알고 지냈던 친구들 세 명과 종로에서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넷이서 소주 한 병을 막 해치웠을 때, 그들과 안면이 있던 나이가 몇 살을 더 먹은 형이 그들이 앉아 있던 작은 소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미 자리가 꽉 차 있던 그 홀에서 그들을 발견한 그 형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와 비어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장님!”

자리에 앉자 그는 손을 들고 큰 목소리로 사장을 불렀다.

“여기 의자 하나 더 갖다 주세요.” 소주잔 하나 더 부탁할 것으로 예상했던 지환이와 그의 친구들의 의아한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그런 그들을 한번 흘끗 돌아보고 그 형이 자신의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야! 어서 들어와. 다른데 가도 지금 시간엔 자리 없어.”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한 남자가 쭈뼛거리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이 건네주는 플라스틱 간이의자를 두 친구 녀석 사이에 우격다짐으로 밀어넣고 그 형은 그 남자를 끌어당겨 앉혔다.

한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슬며시 가리고는 그는 불편한 몸짓으로 지환의 일행에게 목례를 해 보였다.

어색한 표정으로 그렇게 그의 손에 의해서 가려져있던 그의 왼쪽 볼이, 그 형이 건네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게 되면서 드러났다.

어두운 소주방의 불빛 아래에서 그의 왼쪽 뺨의 불그스름한 흉터가 눈에 띄었다.

입술 끝에서 시작한 그 흉터는 그의 목 아래로 번져 내려가고 있었다.

 

“얘가 이렇게 보여도,” 그의 옆에 앉아있던 그 형이 입을 열었다.

“사람은 진국이야.”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그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 보았다.

“잠깐만 여기에 있어. 다른 곳에 갈 만한 곳이 있나 좀 둘러보고 올게.”

그리고 그 형은 지환의 일행을 돌아보았다.

“금방 다시 올거니까 그동안 얘도 좀 끼워 줘.”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형은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홀 밖으로 걸어나가버렸다.

“귀찮은 혹 우리에게 떼어놓고 갔다. 저 형.”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지환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그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자리를 옮긴 2차에도 그는 마치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듯한 꼬마의 모습처럼 지환의 일행의 뒤를 따라왔다.

 

“댁은 어디예요?”

친구중에 한 녀석이 그에게 물었다.

“진천이에요.” 그를 향한 질문이 마치 고맙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띄면서 그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진천요?” 마치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친구 녀석이 지환을 돌아보았다.

“충청북도요.” 그가 다시 우물거리듯 대답했다.

여전히 그의 왼손은 반쯤 펴진 채로 그의 입가의 주위를 맴돌았다.

자신의 흉터를 남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제는 무의식적으로 손이 그렇게 올라가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시간이 늦었는데, 지금 차편은 있어요?” 그의 말에 놀란 친구 녀석 하나가 그에게 물었다.

“아...” 그가 고개를 돌려 그 친구를 바라보았다.

“동생이 서울에 살아요. 오늘 밤은 그 동생네 집에서 신세를......” 어색한 표정으로 그가 말을 얼버무렸다.

그의 말에 친구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이 살기는 좋지요? 공기도 좋고, 조용하고....” 그런 그의 모습이 측은해 보인다는 생각에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던 지환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예....” 그가 지환을 바라보면서 그제서야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웃는 표정에 그의 입술이 비대칭이 되었다. 왼쪽 입 끝이 일그러졌다.

“서울보다는 좋은 것 같애요.”

그의 웃음에는 고통이 숨어 있었다. 지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 그가 그의 일행과 같이 있는 동안에는 기분좋게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가도록 해주고 싶었다.

 

지환이 소주병을 들고 빈 그의 잔을 채웠다.

“근데, 아까 그 형하고 오늘 만나기로 하셨던거예요?” 친구 녀석이 그에게 물었다. 얼굴에는 귀찮아 하는 표정으로 가득했다.

“그 형 이름이 뭐였지? 히즈끼 형인가?”

그의 말에 다른 녀석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종로에는 자주 나오세요?” 딴이 할 말이 없던 지환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그에게 물었다.

“삼년만에 와 보는 거예요.”

그의 왼손이 테이블의 위와 그의 왼쪽 볼 사이에서 쉬지 못하고 방황하듯 움직였다. 한순간 그의 볼에 그늘을 만들고 있던 그의 손은 다음 순간 그의 흉터를 내보이면서 어색한 듯 테이블위로 내려왔다. 하지만 곧 다시 그의 볼 근처로 돌아가 버렸다. 그의 볼 위에서 그의 손가락이 어색하게 떨렸다.

“자주 놀러 오시지 그러세요. 진천이래봤자. 한시간 반이면 종로 오실수 있을텐데.”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그 정도면 괜찮아요.” 그가 다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 안 죽고 살아있다고 그냥 도장 찍으러 오는 거거든요.”

말을 마치고 그가 다시 한번 힘들게 실쭉 웃었다.

일그러지는 입술의 위로 그의 눈빛은 아련한 그리움이 젖어 있는 듯 느껴졌다.

“멋지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러 오시는 거겠죠.”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지환이 넌지시 말했다.

 

“하시는 일은 뭐예요?” 옆에 앉아있던 녀석이 다시 물었다.

“예, 뭐 그냥 이것저것.....”

정확하게 자신의 직업을 말하지 못하는 그의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저는....”

그런 불편한 상황을 모면해 주고 싶었던 듯 지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의 예상 밖의 말에 녀석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목소리가 좋으신 것 같아서..... 뭐, 그런 것 있잖아요.... 교통방송에서 음악 틀어주고 정보알려 주고 하는 디제이.....”

지환의 말에 그는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크게 웃어보였다.

 

 

 

 

 

“오늘 고마웠어요.”

소줏방 앞의 거리에서 그가 지환의 일행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색한 목례를 하고 몸을 돌리는 친구들과 달리 부드러운 표정으로 지환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희도 너무 즐거웠습니다.”

지환의 말에 그가 슬며시 손을 내밀어 지환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불청객이 되어버렸는데도 잘 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환의 손 안에 그의 굵고 딱딱한 손마디가 느껴졌다.

순간 비닐하우스에서 혹은 과수원에서 흙과 나뭇가지를 쥐고 있는, 쇠스랑을 들고 밭의 흙을 털어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연상이 되었다.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와서 외롭지 않아서 좋았어요.”

그가 다시 한번 눈 주위에 웃음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큰 도로에 있는 버스 정거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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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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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아 잘했어.
근데 사장님. 직원에게 은근히 소개팅 종용하는 것도 일종의 갑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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