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소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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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몰아 상가의 주차장입구로 들어섰다.
성공적으로 거래가 완료된 거래처에 들러 딴에는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결과가 예상보다 너무 잘 나왔다고 함박웃음을 짓는 사장을 보면서 마음 한편에 뿌듯함으로 벅차올랐다.
곧 다시 추가 오더를 넣겠다는 거래처 사장의 말을 듣고는, 기쁜 마음으로 차에 올라 퇴근 후 조촐하게 나마 회식이라도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차를 마치고 발을 옮기던 나의 눈에 익숙한 차량과 차번호가 들어왔다.
상가 입구로 통하는 통로쪽에 주차되어 있던 차의 운전석에 앉아 장현이 머리를 뒤로 젖히고 마치 잠이 든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슬며시 창문을 두드리자 눈을 뜨고는 그가 창문을 내렸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이 되어있었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여기서 뭐해?”
나의 말에 그가 꺼칠해진 안색으로 피곤한 듯 눈을 찡그리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퇴근시간까지 좀 앉아 있다가 들어가려고 했지요.”
“피곤해 보이는데, 올라가서 한쪽 구석에 간이침대라도 펴놓고 잠깐 이라도 눈 좀 붙일래?”
그가 내 말에 겸연쩍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퇴근 시간도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지환이 데리고 좀 일찍 가던가.”
“그것 보다....”
여전히 피곤한 내색을 보이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근처 조용한 데 가서 차라도 한잔 할까요?”
“이 일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나 하고 많이 고민했어요.”
커피를 들고 한 모금 맛을 보고는 장현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뜬금없는 그의 말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말을 꺼내기 쉽지 않은 듯, 잠시 망설이더니 그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 화재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긴 있었어요.”
“.........”
“근데, 그 죽은 사람이......” 말을 멈추고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띄었다.
“ ‘이준하’ 예요.”
“뭐?”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놀라서 그에게 물었다.
“그 사람 살아있다면서.....”
“그 이준하가 아니구요.”
“............”
“동명이인이더라구요.”
“...........”
“그때 겨우 스물 셋이었더라구요. 사진으로 보니 곱상하고 여리여리하게 생겼던데.....”
말을 멈추고 그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아직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여튼, 그 녀석이 화재가 있던 그날 그 우리가 알고 있는 이준하란 놈이 살던 집에서 죽은 거예요.”
그의 말에 황당해진 나는 잠시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알아낸거야?”
정신을 차리고는 커피잔을 들고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듯한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한두 다리 거치고 아는 인맥 다 동원해서 그때 그 사건이 어떤 일이었는지 슬쩍 한번 알아봤어요.”
그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경찰에는 준하 주변에서 같이 다니던 몇 놈이, 그 죽은 녀석이 우안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증언을 했더라구요.”
“........”
“녀석들이 말을 어떻게 맞추고 또 경찰에서 어떻게 꿰 맞추었는지 그 어린 이준하란 놈이 우안이와 싸우고 홧김에 방화를 한 것으로 경찰은 결론을 내렸더라구요.”
“.......”
“뭐 수사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충 꿰어맞추기로 한 게 역력한데..... 증인도 있겠다, 경찰도 귀찮은 일 빨리 끝내고 싶었을 테고....”
“그래도.....”
나의 말에 그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집주인하고 죽은 사람이 동명이인이라는게 선뜻 이해되지 않는데..... 그리고 집주인도 없는 집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는.....”
“그냥 우연이라고 결정 내렸나 보더라구요. 뭐 이쪽에서는 처음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본명을 알려주길 꺼리고, 닉이나 다른 가명으로 지내는 것이 흔하니까요. 그러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우연히 이름이 같더라. 또 이준하란 이름도 좀 흔한 것 아니냐.... 뭐 그런식으로.... 그리고 준하 그 자식 부모님도 그 날 녀석이 본가에 와 있었다고 증언도 했고....”
“........”
“그 죽은 녀석도 참...”
말을 꺼내놓고 장현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하고 웃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바람나서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갔고, 엄마 혼자서 키웠던 것 같아요. 나이 터울이 있는 동생이 하나 있었고.... ”
“........”
“그 엄마란 사람도 아들이 게이였다는 것이 놀라고 또 그런 얘기가 여기저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겠죠. 게다가 녀석들이 돈봉투좀 쥐어줬을 거구요. 이유야 그럴듯하게 내세워서...그래서 그렇게 조용히 종료 되나 했는데....“
“.......”
“갑자기, 고등학교때부터 그 놈 애인이었다는 한 여자가 나타난 거예요. 그 죽은 녀석이 절대 게이 아니라고.....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엄청 바람둥이였다고.... 여자들한테 선심쓰고 낭비가 심해서 그 어린놈이 여기저기 사채도 끌어다 썼다고 하더라구요. 게다가 호모포비아였다고도...”
“그건 어떻게.....”
녀석의 말에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 자식 직업이 파프리카 티비에서 비제이였었나봐요. 지금은 올렸던 영상은 모두 삭제되었던데, 방송에서 포비아 발언을 여러번 했었다네요. 그랬던 녀석이 절대 게이일 리가 없다고, 다시 수사해야 한다고 신문사나 방송사에 연락하겠다고 난리치고, 그 여친이 그 놈 엄마까지 다시 데리고 와서 경찰에 문제 제기를 하면서 사건이 길어졌었나봐요.”
“.........”
“그 쪽에서 우안이란 녀석 만나게 해달라고 했는데, 개인정보라면서 그렇게 하지 않았나보더라구요.”
“.......”
“그래도 그 여자가 보통이 아니라서 지난해까지도 그 화재에 관련되거나 아는 사람을 찾겠다고 종로며 이태원이며 여기저기 들*시고 다녔다네요.”
“........”
“그 죽은 남친 엄마를 통해서 돈 좀 받았다는 것을 들었겠죠. 보통내기가 아니니 그렇게 돈 냄새 한번 맡고 나서 사건에 걸린 녀석들을 보니 돈 좀 있는 집 애들 같고... 어떻게 좀 하면 목돈 좀 손에 넣지 않을까 하는 속셈이었겠지만요.”
말을 멈추고 녀석이 씁쓸하게 한번 웃어 보였다.
“녀석들이 또 호락호락하지 않죠. 그 여자에게 줄 돈으로 변호사를 사는게 뻔한 일이잖아요.”
말을 멈추고 장현이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조용하게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나는 아무 말 못하고 그런 그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자식들이 무슨 짓을 했길레......”
“..........”
“이제 또 다른 새로운 증거나 증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며칠 안에 완전히 종료가 되나봐요.”
“........”
“생각같아서는 경찰서에 찾아가서 그냥 냅따 신고를 해버리고 싶지만....”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꽉 쥐고는 그가 이를 악물었다.
“당장 일이 커지면 지환이 녀석이 또 어떻게 될 지......”
녀석이 말끝을 흐리며 다시 고개를 슬며시 떨구고 자신의 커피잔에 멍하니 시선을 두었다.
그렇게 잠시 움직이지 않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힘들게 들고 나를 보면서 자신의 가방이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만 가지요. 형님. 집에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어요.”
아직 퇴근 시간 전이었지만, 나는 머뭇거리는 지환의 등을 떠밀었다.
어짜피 일찍 끝내고 회식이나 하려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저 피곤해 보이는 장현이를 대신해서 운전을 하라고 넌지시 일렀지만, 키를 달라는 지환의 말을 무시하고 장현은 운전석에 들어가 앉아 버렸다.
엉거주춤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지환은 조수석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시동이 걸린 차의 조수석의 문을 열고 지환이 오른 후 막 출발을 하려는 때였다.
주차장의 입구에 차량 한 대가 슬며시 다가와서 멈췄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밖으로 나와 내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옮겨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장현이도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고는 그를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늘씬한 몸매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 리드미컬하게 날리고, 서글서글한 눈빛을 한 이목구비가 뚜렷한 매끈하게 생긴 잘 생긴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 밖으로 자신을 내다보고 있던 장현에게 눈길을 주었다.
천천히 차의 문을 열고 장현이 몸을 일으키고 나와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수석문을 열고 나온 지환이도 그의 모습에 놀란듯한 듯 했다.
“오랜만이예요. 지환씨.”
그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밝아 보이지 않았다.
구부정한 모습으로 지환도 그에게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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