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그 날, 그 부대에서 -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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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


일과시간이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지만,
박상욱 병장님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나는 박상욱 병장님이랑 좀 조용히 얘기를 하고 싶었다.
대체 왜 그랬는지 알고 싶기도 했고.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기도 했으니 일단 뭐라도 상황을 맞춰봐야만 했다.
정말 어이가 없지만 그래도 혹시 내가 뭔가 오해라도 하고 있으면 곤란하니까.

결국 박상욱 병장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채 생활관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
맨 처음으로 문으로 들이닥친건 정해성 일병님이었다.

".......?"

정해성 일병님은 나를 쓱 보더니 뭔가 이상한 듯이 쳐다봤다.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지금 이 상황.
그저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디 아프냐?"
"ㅇ…...아닙니다."
"이마 까봐."

내가 어딘가 아파보였는지 정해성 일병님은 내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올려진 정해성 일병님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그래서 그런지 피가 잔뜩 쏠렸던 이마서부터 얼어붙어있던 피가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도 풀렸다.

"열 조금 있는데? 감기아냐?"

그렇게 말하는 정해성 일병님 뒤로 신기하게 쳐다보는 한인혁 일병님이 있었다.
그도 그럴게…… 원래 이 사람 이렇게 자상하지 않잖아.

"ㅇ…...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너가 문제가 아니라 옮는게 문제니까."

귀찮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평상시의 정해성 일병님이랑은 조금 달랐다.
확실히 날 걱정해준 것 같은 말투였다.

"......? 우냐?"

갑자기 정해성 일병님이 그렇게 물어왔다.
코가 시큰거린다 했더니…… 나는 울고 있었다.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울 일은 전혀 없었는데.
그런데 뭔가가 속에서 북받혀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해성 일병님도 당황스러운지 이마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당황스러우실만 하다. 이마에 손만 짚었는데 가만히 있던 애가 갑자기 우니까……
난 이 상황이 너무 부끄러워서 애써 눈물이 안나게 하려고 황급히 소매로 닦았다.
쪽팔려 죽을것 같다…….

"......."

한참동안 진정이 안돼서 나는 결국 조용히 독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조금 진정이 되었다 싶을 무렵 독서실로 정해성 일병님이 따라들어왔다.

"......."

맥없이 독서실 책상에 주저앉아있는 나.
그 옆 책상에 정해성 일병님은 묵묵한 표정을 한 채로 앉아서 기다렸다.
그냥 아무말 하지 않고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지금 나에게는 너무나도 고마웠다.
확실히 위로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마 토닥이거나 말로 위로를 하려고 했으면 지금 감정이 더 수습이 안됐겠지.

"정해성 일병님."

둘 말고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독서실에서 목소리는 벽을 타고 울린다.
정해성 일병님은 쓱 하고 나를 쳐다봤다.
늘 보던 그 익숙한 눈빛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왜."

그는 평상시대로의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어도 됩니까?" 

머리가 정말 복잡했던 나는 앞의 말머리를 잘라먹고 그렇게 질문했다. 
내가 들었어도 너무 뜬금없었을 그 말에,

"……뭐, 하루이틀 보고 살 것도 아닌데. 얘기해 봐." 

정해성 일병님은 그렇게 대꾸했다. 
평상시처럼 툭툭 치는 말투였지만, 
내가 진지하다는 걸 느끼신 모양인지 심하게 핀잔은 주지 않으셨다. 

"그럼 제가 한 말 어디가서 얘기 안한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 뭐길래 자꾸 뜸을들여?…… 말해봐." 

조금 당황한 정해성 일병님을 앞에 두고,
나는 나와 박상욱 병장님 사이에 있었던 모든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말을 하면 할 수록 정해성 일병님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갔다. 
그 표정은 마치 박상욱 병장님과 크게 다툴 때 그 표정과 정확히 닮아있었다. 
이야기를 다 끝마칠 무렵엔, 

"씨.발 개.새끼……"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낮은 목소리로 울리는 욕은 혐오를 가득 담고 있었다.

"어쩐지 근무 바꿔서 선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다."
"........"
"원래 그 새끼 남의 근무 대신 안서거든, 지 근무도 잘 안 바꿨었고."

뭔가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과 동시에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내심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사람이 내 말을 못 믿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었고.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 안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쳤다고 이걸 다른 사람한테 얘기를 하냐. 알겠어."

정해성 일병님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깍지를 끼고 있었다.
조금 고민을 하던 정해성 일병님이 말을 꺼냈다.

"일단 나와봐. 여기는 오래 있으면 좀 그래."

정해성 일병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나를 막사 밖으로 데리고 갔다.
막사 뒤편에는 빨래를 말리는 건조대가 있었을 뿐이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나마도 좀처럼 바빠서 나는 빨래만 널고 나갔기 때문에 여기에 뭐가 있는지 잘 몰랐다.

정해성 일병님을 따라서 건조대 안쪽으로 쭉 들어가니,
막사 지하로 이어지는 것 같은 계단이 늘어서있었다.
계단 끝에 어슴푸레한 조명이 있는 것 말고는 어두워서 사람들도 잘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정해성 일병님은 계단참 맨 위에 앉으면서 나도 앉으라고 옆을 툭툭 쳤다.
나는 말 없이 옆에 앉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 저녁이 깔리기 시작하는 밤하늘 아래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좀 더 빠르게 열이 식는 느낌이 들어 빠르게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정해성 일병님은 담배갑을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한 개피 꺼내 불을 붙였다.
프렌치 블랙의 달콤한 향이 쓱 하고 퍼졌다.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 매캐한 담배냄새. 
부대 밖 멀지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두꺼비와 개구리 울음소리. 
하늘은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별빛이 깔린 밤하늘로 모습을 바꿨다. 

그 밤하늘 아래서, 
담배를 피우는 정해성 일병님과, 그걸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나. 

정해성 일병님이 내쪽을 바라보자 나는 슬쩍 딴청을 피웠다. 
그의 꿰뚫어버릴 것 같은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니면 몰래 훔쳐보고 있었던 걸 들키지 않으려고 한 건지. 
어느 쪽이든 나는 조금 머쓱했다. 

살짝 돌린 시선의 가장자리에서, 정해성 일병님의 옆모습을 보았다. 
담배를 하나 물고 있는 그 모습이 무척 인간적이었다. 
덕분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내 마음 한 구석이 살짝 녹는 것이 느껴졌다. 

조용한 가운데 정해성 일병님이 대뜸 물어왔다. 

"피냐?"

정해성 일병님은 당연히 내가 비흡연자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렇게 물어왔다.
나름의 배려인걸까? 
 
"담배는 안핍니다." 

쑥맥같은 내 대답에 정해성 일병님은 피식 하고 웃었다.
뭔가 애 취급 받는 느낌이라 좀 쑥스러웠지만…… 진짜 안 피는걸 핀다고 할 수도 없잖아…... 

그리고 다시 정적. 
하지만 기분나쁜 무거운 정적이 아니라, 조금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기분좋은 정적이었다. 
귀뚜라미와 개구리 소리, 불어오는 밤 바람. 이 모든것이 굉장히 낯설지만 푸근하게 느껴졌다. 

20시가 다되어가면서 초승달은 점점 밝아져 빛 하나 없는 여기서 조명이 되어 주었다. 
정해성 일병님은 담배를 다 태울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왠지 그걸로 좋았다. 

"이제 좀 진정됐냐?" 
"예."

혹시나 했지만 역시 정해성 일병님은 나를 진정시키려 막사 뒤로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나는 정해성 일병님의 배려에 한없이 고마움을 느꼈다. 

"너 오늘 불침번 근무 있지? 그 새끼랑."
"그렇습니다."

상황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보통 오침을 하고 그 날 불침번으로 배정이 됐다.
아무래도 밤낮이 바뀌기도 했고, 그래서 보통 불침번을 서는데는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불침번을 서고 나서 다시 취침하면 사이클 다시 찾기도 쉽기도 했고.
애초에 정해성 일병님이 이렇게 브레이크를 안 걸었다면 아마 난 그때 박상욱 병장님이랑 이 일에 대해서 얘기를 했겠지.

"일단 알겠다. 좀 추스리고, 나중에 보자."

정해성 일병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막사로 먼저 들어가셨다.
그나마 나는 조금 힘이났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것이 이렇게 큰 힘이 될 줄이야…….


박상욱 병장님은 겨우 점호직전에 어슬렁대며 생활관에 들어왔다.
딱 봐도 나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 같았다.
점호 내내 정해성 일병님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폭풍 전야같은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

그리고 점호가 끝나자마자 바로 박상욱 병장님은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서 나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점점 속에서 짜증?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어찌됐든, 중간에 불침번때문에라도 한 번은 마주쳐야 하니까.
나는 그때를 생각하고 잠이 들었다.

내 근무는 2번초였고, 한시간 조금 넘게 살짝 잠들었다 일어났다.
정말 이례적일 정도로 박상욱 병장님은 이미 근무투입 준비를 다 하고 침상에 앉아있었다.

"......."

쓱 하고 생활관을 둘러보니, 정해성 일병님은 자리에 없었다.
근무 투입 보고를 하고 인수인계 받기로는 자기계발 연등 신청을 따로 하셨다고 한다.

"가볼게. 수고하고."
"어 그래."

박상욱 병장과 동기인 1소대 분대장이 인수인계를 끝내고는 생활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중앙 현관에는 나와 박상욱 병장님 말고는 없게 되었다.

"......"

박상욱 병장님은 조금 머쓱거리다가 벽에 기댄채로 현관 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침 하늘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습한 공기를 타고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고 있다.

"저……. 박상욱 병장님."
"왜."

말을 안 할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무겁게 입을 뗐다.
예상했다는 듯이 즉답하는 박상욱 병장님의 목소리는 평소랑 다르게 무겁게 들렸다.

"저 혹시 왜 그러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뭐를."

내가 그렇게 물었지만, 이 망할놈은 내가 끝까지 설명하기 전까진 잡아 뗄 생각인 것 같았다.

"오늘 오침때……."

나는 그 말을 하자마자 그때의 박상욱 병장님 얼굴이 생각나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말을 하다말자 박상욱 병장님이 나를 다그쳤다.

"말을 하다말어 왜."

그 말을 듣자 순간 머리에 피가 다 쏠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임으로서의 존경, 분대장으로서의 위엄이 한꺼번에 다 와르르 무너지고,
결국 이 정도 밖에 안되는 변태새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걸 꼭 제가 말을 해야 합니까?"

내 입에서는 이등병이 하기엔 너무 거친 말이 튀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판단으로 내뱉기에는 너무 경솔한 말이었다.

"뭐라했냐 지금?"
"......."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긴 하지만, 너무 말을 세게 한 것도 사실이라서…….
나도 모르게 입술을 뜯었다.

"하…… 나 진짜……."

하고 박상욱 병장님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따라와."

순식간에 돌변한 그는 나를 가장 가까운 근무자 취침실로 불렀다.
근취실은 중앙복도 바로 옆에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거의 조명도 비치지 않는 복도에서 열린 근취실 안은 진짜 암흑이었다.
문이 끼이익 하고 닫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에서 조금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

헉 하는 숨소리를 먼저 귀가 인지하고,
그다음 뇌가 고통을 느꼈다.
사실 그 정반대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터무니없이 아픈게 내 옆구리에서 느껴졌다.

진짜 나는 그냥 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내 옆구리를 친건 아마도 발이었겠지.

"이등병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정신을 못차리네."

차가운 목소리로 박상욱 병장님은 그렇게 나한테 말을 내뱉었다.

"너 호모새끼인거 다 알아. 너도 다 즐겼잖아 새끼야."

또 한 번 퍽 하고 소리가 났다.
이번엔 배 한가운데였다. 진짜 너무 아파서 눈물이 주륵 하고 흘렀다.
그것보다도 이 사람 내가 게이인 걸 어떻게 안거지?
그냥 넘겨 짚은건가 싶기엔 너무 확정적인 말투였다.

고막이 먹먹하게 울렸다.
텅 빈 근무자취침실 안에서의 고함소리는 날카롭게 반향되어 귀에 꽂혔다.

비 소리가 커튼 바깥에서 희미하게 났다.
매캐한 먼지가 켜켜이 쌓인 바닥이 너무 차갑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근무자취침실이 조금씩 동공이 적응되면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어나."

나는 그 한마디에, 별 수 없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차인 옆구리가 정말 아팠지만 머뭇대봤자 한 대 더 맞는 것 말고는 다른게 없을 테니까.
서있으면 적어도 막을 수 라도 있겠지.

그런 비틀대는 나를 박상욱 병장님은 침상에 앉혔다.
뭐지…… 갑자기……
나는 쓰러지다시피 침상에 주저앉았다.

"너도 좋았잖아. 나 며칠 뒤면 휴간데 그냥 넘어가자."

박상욱 병장님은 사과 하나 없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
이미 내 눈에 이 사람은 인간이하의 생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
"알겠지?"

내 대답을 종용하는 그의 말에, 나는 순순히 따를 수 없었다.

"싫습니다."
"뭐라고?"
"....... 싫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 말을 끝내자마자 박상욱 병장님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퍽.
이번엔 가슴팍이었다.
콜록- 하고 기관지가 저절로 기침을 내뱉어야 했다.
진짜 위험했다. 방금 거의 명치 부근이었어.

"같이 영창이나 갈래 그럼?"

그렇게 넌지시 물어오는 쓰레기의 질문에,
나는 속으로 내가 왜 가야하냐고 생각했다.

"영창은 니가 가겠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문이 달칵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듬직한 체격이 바깥 조명에 비춰지면서 실루엣처럼 드러났다.

그 사람은 시간차도 없이 곧바로 들이닥치더니 박상욱 병장님의 멱살을 잡았다.

"ㅁ…..뭐야 이 새끼는…… 미쳤나……"

박상욱 병장님은 완강하게 뿌리치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의 악력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미친 새끼는 너지. 존나 할게 없어서 말년에 이런 짓거리나 쳐하지?"

늘 듣던 낮은 목소리는 정해성 일병님의 목소리였다.
연등을 하고 있었을 정해성 일병님이 여길…… 왜…….

정해성 일병님은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놨다.
그제서야 박상욱 병장님은 켁켁거리면서 막힌 숨을 들이쉬었다.

"김보현. 나가있어."

차가움이 잔뜩 묻은 낮은 목소리.
나는 정신이 들 새도 없이 근취실 바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욱씬거리는 옆구리를 잡고 나는 간신히 중앙현관으로 나가서 서 있었다.
유일하게 조명이 있는 복도 한가운데에서 나는 그저 멍하니 근취실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해성 일병님이 오지 않았다면 상황은 더 나빴겠지.
아니, 이미 나빠질 대로 나쁜 상황에 더 나쁜 상황이란게 있을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근취실 문이 다시 열렸다.
먼저 나온 건 정해성 일병님이었다.

"작전과 쪽으로 가서, 인사과장님 주무시나 한 번 봐봐."

작전과는 통유리로 상황실이랑 이어져있었기 때문에,
종종 불침번들이 당직사령이 자는지 안자는지 확인하러 들어가는 곳이긴 했다.
작전과 사무실로 넘겨다본 오늘 당직사령인 인사과장님은 말년답게 거의 풀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주무십니다."

내가 확인하고 나오자, 정해성 일병님은 후번 근무자를 데리고 나왔다.
아직 교대시간이 아닐텐데……?

"교대하고, 활동복 입고 근취실로 와."

그 말을 하고는 정해성 일병님은 그대로 근취실로 다시 들어가셨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그의 말을 따라서 활동복 차림으로 근취실로 들어갔다.

".......?"

들어가자마자, 어두운 방 안에 박상욱 병장님이 서있었다.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있는 정해성 일병님.

"미안하……"
"새끼야 존댓말 하라고 했지."
"......."

박상욱 병장님은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다,

"......죄송합니다."

눈 앞에 일어난 일이 좀 놀랍긴 했다.
전투복 차림의 박상욱 병장님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나한테 죄송하다고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한거야……?

나는 아까 얻어맞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정해성 일병님은 제지했다.

"그냥 얘기 좀 했다. 저 새끼 스스로가 한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그래도 이건 좀……
아무리 그래도 분대장인데 선을 조금 넘어버린 건 아닐지 생각했다.
하기사 저 사람이 나한테 한 짓도 선 넘은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아직 중대장님한테 보고는 안드렸는데……"

정해성 일병님은 그 말을 하고는 쓱 나를 쳐다봤다,

"보현이 너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말해주는게 더 빠를거 같아서 물어볼려고."

아 그래서…… 나를 데려온거구나.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애써 답을 내렸다.

"그냥…… 사과 받았으면 됐습니다."
"어차피 중대장님한테 너가 얘기하러 간대도 상관없어. 그래도 깔끔하게 하고싶으니까 거짓말은 안했으면 좋겠다."

정해성 일병님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조금 머뭇거리다 박상욱 병장님은 고개를 축 늘어뜨린채로 그대로 나가셨다.
덩그러니 남은 정해성 일병님과 나.

"......뭐라고 얘기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별 말 안했다. 제대로 들어가면 이건 영창으로 안끝난다는 말만 했고,
 사과 할거면 확실하게 하는 게 본인한테도 더 좋을거라는 얘기도 했다."

확실히 듣고보니 그 말이 맞기는 했다.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계속 저 사람에게 시달렸겠지.

"어차피 곧 갈 사람이라서 내가 분대장 찰거니까. 자리도 내일 당장 바꾸기로 했다. 그게 너한테 나을 것 같아서."

정해성 일병님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뭐…… 그래도 나한테 먼저 말해줘서 고맙고."

그렇게 한마디를 하고 정해성 일병님은 앞장서서 나가셨다.
그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일이 이렇게나마 마무리 된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웃팅이 될 만한 불씨가 여기서 멈춰줬다는 게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 10.


정말 말도 안되는 큰 폭풍이 지나간 다음 날.
정해성 일병님의 수습은 정말 말도 안되게 빨랐다.

"충성!"
"드디어 해성이가 분대장을 차네. 잘 부탁하고."
"알겠습니다."

중대장님의 말에 덤덤하게 대답하는 정해성 일병님.
다음 달 상병을 다는 정해성 일병님의 분대장 임명식이 그날 저녁에 바로 열렸다.
박상욱 병장님은 억지로 정해성 일병님의 어깨에 견장을 달아주고는 중대장님의 농담에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 뒤로 박상욱 병장님은 생활관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나도, 정해성 일병님도 신경이 쓰였던 거겠지.

그 날 저녁에 바로 자리도 바뀌었는데 이건 100% 정해성 일병님이 나를 위해서 신경을 써준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박상욱 병장과 뚝 떨어진 자리에서 정해성 일병님 바로 옆에서 자게되는 모양이 되었다.
그야말로 철저한 차단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그럴 일도 없었던게, 그 뒤로 박상욱 병장은 나한테 일절 말도 걸지 않았다.
어찌됐든 2주 정도 뒤면 전역할 그에게 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너 어제 분명히 뭐 있었지?"
"뭐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너 불침번 설때?" 

부대의 이모저모에는 민감하기 짝이없는 인사과에 연이 닿아있는 한인혁 일병님이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소대마다 돌아가는 식당청소를 하러가면서 한인혁 일병님은 계속 이야기를 걸어오셨다.

"딱히 뭐 없었습니다."
"거짓말 치지 마. 너 일찍 철수하는 거 다 봤어." 
"그때 몸이 좀 안좋아서 일찍 철수했습니다." 
"근무를 일찍 철수한다고? 보고도 없이? 이상한데?" 
"그때 정해성 일병님이 어떻게 처리해주신 것 같습니다." 

계속 물고 늘어지는 한인혁 이병님의 말에 나는 어떻게든 거짓말인 티를 내지 않으려고 열심히 둘러댔다. 
정해성 일병님이 어떻게 처리를 한 건진 모르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한인혁 일병님은 그게 더 이상한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해성 일병님이 그랬단 말야?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한인혁 일병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그게 의외인가? 나는 뒷통수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후번 근무자랑 교대하게 해 주신 것 같습니다." 
"하기사 인사과장님 근무였으니까……. 근데 보통 그런 경우는 근무를 빼 줄텐데." 

흐음, 하고 생각하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걸.레를 빠는데 집중하는 한인혁 이병님. 
나도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은 일이어서 손걸.레에 시선을 옮겼다. 

한참동안 걸.레를 빨다가 갑자기 한인혁 이병님이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정해성 일병님이 너 되게 좋아하는 것 같다." 

뜬금없는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면서 이야기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성 일병님이 그렇게 세심한 사람이 아닌데. 나 같았으면 아마 왜 진작에 보고 안했냐고 펄펄 뛰셨겠지."

하긴 그거야 좀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내가 속사정을 이야기 한 걸 이야기 해 줄 수도 없고. 

"그러고 보면 너 잔소리 안듣는것도 그렇고…… 너 많이 신경쓰시는 것 같긴 했어. 
  가끔 보면 너 없을때 좀 자주 찾으시는 거 같기도 했고." 

아무쪼록 잘 해주니까 부럽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빤 걸.레를 차곡차곡 쌓는 한인혁 이병님. 
그런데 왠지 귓가에 아무렇지 않게 말한 한인혁 이병님의 이야기가 자꾸 걸린다. 
정해성 일병님이 날 자꾸 찾는다고? 내가 없을때? 

그 말은 일리가 있는 듯 했다.
분대장을 달고 난 정해성 일병님은 어딘가 자꾸 나한테 나사를 빠진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일과시간에 잠깐 생활관에 두고 온 비품이 있어서
잠깐 급하게 생활관을 들렀을 때의 일이었다.
생활관 사람들은 여느때처럼 예비군 교장 정비 작업에 끌려가서 안보일테고,
나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예상하고 생활관으로 들어갔다.

"?"
".......?"

급해서 박차고 들어간 문 안에는 어째선지
런닝 차림으로 땀을 식히고 있는 정해성 일병님이 계셨다.

"아…...너냐?"

그렇게 물어오는 정해성 일병님의 표정은 평소랑 다르게 조금 얼이 빠져있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걸까?
확실히 8월 중순이면 그럴 만 했지만 실내에서 일하는 나는 도통 더위를 느낄 새가 없었다.

마침 공교롭게 나는 PX에서 사온 원준이랑 같이 마시려던 캔커피가 있었다.
다행이다……. 내가 이 사람한테 뭐라도 해 줄수 있는게 있어서.
나는 캔커피를 내밀면서 얘기를 꺼냈다.

"요전에는 진짜 감사했습니다."

정해성 일병님은 내가 내민 캔커피를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민 손이 머쓱해진 나는,

"......커피 안좋아하십니까?"

걱정스럽게 물어봤다.
정해성 일병님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놀라면서 캔커피를 받아들었다.

"아니야. 잘 마실게."

그렇게 캔커피를 받아들고선 원샷을 해버리고는 정해성 일병님은 침상에 올라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려고 하셨다.
그는 겨우겨우 넘어지지 않고 있다가 나랑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
"......"

날이 덥기는 했지만 이 사람…… 어딘가 아픈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얼이 빠져있었다.
정해성 일병님은 크게 당황한 눈빛이었다가, 0.1초만에 쓱 하고 표정을 지웠다.
아니 정확히는 고개를 돌렸다는 표현이 나은 것 같다.

조금 의아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곧 다가오는 유격훈련 초안을 짜느라 머리가 아팠기 때문에,
그냥 곰곰히 생각하다가 결국 궁금했던 걸 입으로 꺼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정해성 일병님."
"왜."
"어디 아프십니까?"

오묘한 정적이 3초.

"아냐 임마…… 일이나 하러가."

그렇게 당황한 말투로 재빨리 전투복을 입고는 정해성 일병님은 나가버렸다.
뭐지 저 사람…… 왜 이렇게 갑자기 귀여운거야 ㅋㅋ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본 귀여움에 기분이 좋아져서 생활관을 나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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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이 소설에 대한 TMI를 적고 갑니다.

1. 이 소설은 2014년 7월에 연재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총 30부였고, 당시 미완결 연재작이었습니다.

2.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재분은 등장인물의 설정이 조금 바뀌고, 대사와 플롯만 거의 유지한 채로 묘사가 새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연재분에서 매끄럽지 않은 진행 부분 등을 대거 수정하면서 플롯 자체가 틀어지거나 짤렸던 설정을 복원하거나 하는 정도의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좀 어려울 듯 합니다.

3. 초반부의 설정묘사가 너무 세세하고 재미없다는 지적을 과하게...... 받아서......ㅠ....... 덜어내고 덜어낸 결과 여기까지가 초반부 진행입니다.
박상욱 병장이 등장하는 데 까지가 일단 1부 진행이라 보시면 됩니다.

4. 3에 이어서...... 재미없는 초반부를 이겨내시면 아마 그 다음에 오는 내용을 좀 더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으레 장편연재물이 그렇듯...... 자극적인 초반부를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ㅠㅠ 여기까지 참고 읽으신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5. 과거 연재분을 지금 읽을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제가 백업본을 가지고 있고 아마 그게 다일 겁니다. 이런 소설이 딴 데로 퍼날라진적이 있다면 또 다른 문제겠지만요.......

6. 앞으로도 할 얘기는 많습니다. 쭉 지켜봐주시고 댓글이나 추천 해주시면 저는 그게 원동력이 될 것 같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7. 설정 자체를 설정본으로 게시하는 것은 독자가 몰입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주의라서 잘 게시하지 않는 주의지만, 대대 조직도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중입니다.
다음 화에 게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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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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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네요  정해성 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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