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그 날, 그 부대에서 -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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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레 작전병이 모두 그렇듯,
나는 다가오는 유격훈련때문에 너무나도 바빴다.
훈련 계획을 비롯한 각종 서류 업무의 초안을 작성하고 검토받는일은 물론이고,
중대 소속이면서 행정병이라는 더블카운터에 의해서 중대장님을 도와 이지환 상병님이랑 같이 행정반에서 구형 전투복에 번호달기 등등……
4박 5일짜리 유격 훈련을 장장 한 달 준비를 하고 있자니 정말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차라리 빨리 유격 해버리고 치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유격 훈련은 내가 일병으로 진급하는 달 바로 전 주.
그래도 제법 기온이 떨어진 9월 하순이었다.
모든 대대 현역들은 단 한 명도 열외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연대장님의 지시에 의해서,
우리 대대도 경계병력은 상근예비역으로 대체하고 전부 부대를 비워야만 했다.
유격 바로 전 주말,
대대에서는 유격 훈련 관련 물자를 미리 옮겨싣기 시작했다.
유격 훈련장 협조가 잘 되지 않아서 결국 부대에서 50km나 떨어진 유격장을 빌려버린 탓에, 우리는 두돈반을 이용해서 주말간에 미리 물자를 옮겨놓기로 했다.
"어휴 일이 이렇게 많은데 훈련은 개뿔……. "
안그러냐? 하고 물어오는 이 말투는 놀랍게도 과장님이다.
물론 나한테는 이제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동원과에서 오신 새로온 과장님은 무려 간부사관 출신이라, 나와 원준이에게 터울이 없어도 너무 터울이 없이 대해 주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한테 과장님이란 존재는 약간 이웃집 사는 야근 자주해서 담배에 찌는 아저씨정도?
"업무용 PC도 싣습니까? "
"당연하지. 5일동안 업무 안하려고? "
과장님은 나한테 눈치를 주면서 얘기했다.
연대장님이 누구든 열외는 없다고 엄포를 놓으셔서 일단 나를 보내기는 하는데…….
가서도 주구장창 PC로 간이상황실에서 업무나 볼 것 같은 무서운 기분이 든다…….
내 군생활에서 유격훈련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사실 가서 뭘 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저 초안을 짜면서 이런 것들을 하는구나 하고 만 것들이 대부분이라 실제로 어떨지는……
반면에 정해성 상병님 언저리의 상병장들은 이번이 두 번째 유격이라 대충 뭘 준비해야 할지 잘 아는 눈치였다.
하루는 일과가 다 끝나고 어렵사리 일찍 생활관에 왔는데,
정해성 상병님이 어깨를 툭툭 쳤다.
"PX 가자. "
"잘……. 못 들었습니다? "
"PX 가자고. "
물론 선임이 후임한테 PX가자고 하는 건 이상한 말이 아니긴 한데…….
정해성 상병님의 손에는 바구니가 있었다.
뭔가 과하게 비장해 보이는 것은 착각이겠지……?
".......뭘 사려고 하시길래 바구니를……. "
"짬찌 티 좀 그만 내고 그냥 따라와. "
그렇게 나는 잠자코 정해성 상병님의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생활관에서 한인혁 일병님은 저런……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전쟁이 나면 이런 상황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거 다 줘. "
"이걸 다 말입니까? "
"어. 그리고 이것도 같이. "
정해성 상병님은 카드를 꺼내들고는 온갖 먹거리를 계산하기 시작하셨다.
내가 낑낑대면서 바구니에 담아온 무거운 음료수들부터 시작해서…….
각종 과자, 초코바, 그리고 방금 피엑스병이 '이거를 다 산다고?' 하고 생각했을 것 같은 맛다시 박스…….
다 사고나니 바구니는 물론이고 가방 하나는 거뜬히 채울 수 있는 엄청난 양이 되었다.
아니 대체 이걸 어떻게 다 먹으시려고……
아니 애초에 어떻게 들고가려고 하시는거지?
"당연히 너가 들고와야지. "
"제가…...말입니까? "
"너 과장님 차타고 가잖아 유격장. "
"....... "
생각해보니 그건 맞는 말이었다.
PC같은 민감한 제품들도 있어서, 나는 부대 미니버스를 타지 않고 과장님 자차에 물건을 실어다가 유격장으로 출발하기로 했던 것이다.
어제 정해성 상병님한테 무심코 훈련계획 말하면서 그런 얘길 했는데 잘도 기억하고 계셨다……
피엑스 테이블에 가득 쌓인 과자랑 음료수 더미를 흘깃흘깃 부대사람들이 보고 지나간다.
나는 그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일단 생활관에서 재빨리 의류대를 가져와서 무작정 집어넣기 시작했다.
"얼마 긁으셨습니까? "
"한 8만원? 얼마 안하던데? "
"8만원이면 제 월급입니다. "
"그것도 맞는 말이지. "
뭔가 이상하게 신나 보이는 정해성 상병님은 PX병에게 카드를 건네주면서 샀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고 있었다.
뭘 샀는지 체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걸 그냥 잠자코 볼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소풍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과장님한테 이걸 설명하자 예상대로,
"야 너도 징하다 진짜. "
"아니 그게……. 제가 산게 아니라…… "
"무슨 못먹어서 죽은 귀신 붙었냐? 이거 다 먹을 수 있기는 해? "
"ㅠㅠ……. "
과장님은 쯧쯧 하고 혀를 차더니 결국 과자랑 음료수로 가득찬 그 의류대를 차 트렁크에 넣는걸 도와주셨다.
"대대장님한테 걸리기만 해봐. 중대로 쫓아낼테니까. "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과장님은 피식하고 웃으셨다.
뭔가 허락해 주실 줄은 알았는데 그래도 뭔가 엄청 부끄럽군…….
주말 간에 물자를 옮기느라 나는 소대원들과 함께 간만에 부대 밖을 나설 수 있었다.
비록 미니버스에 탄 채로 나가는 것 뿐이었지만, 오래간만에 보는 부대 밖 풍경은 너무 좋았다.
나는 창문에 코가 닿을 듯이 얼굴을 대고는 지나가는 풍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군용 건물이 아닌 일반 건물이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대전 시내를 가로지를때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 마저 신기하게 보였다.
서너달만에 보는 도시의 풍경은 굉장히 낯설었다.
그렇게 한참 풍경 삼매경에 빠져있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대원들은 뭔 그리 잠이 많은지 다들 곯아떨어져 있었다.
딱 하나…… 팔짱을 끼고 내 옆에 앉아있는 초록색 견장을 찬 정해성 상병님 빼고.
"뭘 그리 신기하게 보냐? "
"아…… 아닙니다. 그냥 밖이 너무 오래간만이어서…… "
"아직도 신병 안나갔어? "
"예. "
"신기할 만도 하지 ㅋㅋ "
정해성 상병님은 그렇게 피식 웃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눈부신 가을 햇살이, 정해성 상병님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반사되는 햇빛이 그의 갈색 눈동자를 찬찬히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조금 나른해보이는 그의 얼굴은, 그렇지만 그래서 더 귀여워 보였다.
"유격 훈련 힘듭니까? "
나는 할 말이 궁색해져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까짓거 교관놈들이 구르라고 하면 구르면 돼. "
"그……. 안 무섭습니까? 막 장애물 통과하고 그러면…… "
"장애물 통과? ㅋㅋ 그거보다는 체조가 토나올텐데. "
과연……
막상 유격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부족한 내 체력이 많이 걱정이 됐다.
내 부족한 체력으로 훈련에 따라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걸로 정해성 상병님이나 다른 부대원들한테 폐를 끼치면 어떡하지……
조금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볼에 살짝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놀라서 고개를 확 들었는데, 정해성 상병님이 내 볼을 꼬집고 있었던 것이다.
"우왁!!! "
심장이 바깥으로 스스로 탈출하는 것 같았다.
너무 놀랐던 나는 옆 자리에 숙면중이신 한인혁 일병님을 치고 말았다.
그치만…… 너무 딥슬립중이었던 한인혁 일병님은 그걸로는 끄떡도 없다는 듯이 계속 잠에 빠져있다…….
다행이 아닐수가 없었다.
"ㅁ…...뭐하십니까. "
"아니 그냥…… 너무 걱정하길래 표정 풀으라고. "
머쓱해 하면서 정해성 상병님은 그렇게 얼굴을 살짝 붉혔다.
와 진짜 방금 뭐였어……?
내 뇌에 있는 모든 뉴런들이 무슨 일이래? 하고 야단이 났다.
진정해 이것들아…….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
"분대장인데 이 정도 권리는 행사해도 되지 않을까? ㅋㅋㅋㅋ "
다들 자고 있어서 망정이지,
이 꼴을 다른 사람이 봤으면 진짜 이건 부대 특종감이었다.
아무한테도 관심 하나 안 주는 정해성 상병님이, 사람 볼을 꼬집는다고?????
그나마 나야 요즘 들어서 정해성 상병님이랑 같이 다니기 시작해서,
이 사람이 꽤 허당끼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마 그걸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테고…….
머리가 핑핑 돈다.
지금 쯤이면 진짜 얼굴이 새빨개졌을것은 분명했으므로 나는 괜히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그걸 지긋이 쳐다보면서 슬금슬금 웃고 있는 정해성 상병님이 유리창에 반사돼서 보인다.
진짜 저건 악취미다……
분명 이런 분대장 밑에서 나는 심장쇠약으로 죽을것이다……
"아무튼 너무 걱정 하지마라. 나도 같이 뛰잖아. "
그렇게 말하고는 내 머리에 손을 내밀어 쓰윽 쓰다듬어 주시는 정해성 상병님.
아니 대체 이 사람 오늘 왜 이러는거야…...ㅠㅠㅠㅠㅠㅠ
"연대 기동중대 사람들이 조교라던데. 너가 더 잘 알거 아냐. 죽기야 하겠어? "
그리고는 어깨를 톡톡 치고는 손을 내리는 정해성 상병님.
진짜 이 사람 오늘 심장 여러번 멎게 한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정해성 상병님이 쓸고 지나간 머리는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그건 압니다…… "
"그럼 됐네. 나도 있는데 뭔 걱정이야. "
덤덤한 말투로 정해성 상병님은 지긋이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 사람을 보면 항상 든든해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속으로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아야만 했다.
애써 참으려고 나는 창에서 시선을 뗴지 않았다.
지나가는 풍경속에서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몇 년 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공기를 맡으면서 기분을 만끽했다.
청명하고 따스한 초가을 하늘이었다.
- 15.
유격날이 되었고, 대대 사람들은 전부 유격장으로 향했다.
유격 전에는 입소행군 15km가 예약되어 있었는데, 딱히 행군할 곳이 없어서 대대 근처를 빙빙 돌다가 행군 다 끝나고 기진맥진한 사람들을 미니버스가 태워다 날랐다.
덕분에 아침부터 기운이 다 빠지긴 했지만 오늘은 이렇다 할 훈련은 이제 없으니까.
오후에 텐트를 치고 짐정리만 하면 끝이었다.
점심밥이 오기는 왔는데 식판이 없어서,
소위 말하는 짬밥…… 봉지에 모든 걸 넣고 섞어 먹는 정말 말로만 들었던 군대밥을 먹게 되었다.
나는 문화충격을 받아서 한인혁 일병님이랑 수군수군댔다.
"원래 훈련때 밥 다 이렇게 먹습니까? "
"전에 RCT 할때는 식판이 있긴 했어서 식판 비닐로 덮어서 그 위에 밥 받고 그랬는데……. 오늘 밥차 온다지 않았어? "
"확실히 예정은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
"예정이란 건 깨지라고 있는거지…… "
다행히 식판은 나중에 오긴 왔지만 이미 밥때를 다 놓쳐서 왔다.
별 수 없이 나는 포카락을 들고 봉지밥을 먹으려고 했다.
쓰윽.
밥을 먹으려고 앉은 나한테 내밀어지는 두 빨간색 봉지.
내민 사람은 당연히 정해성 상병님이다.
"와 이걸 언제 사놓으셨습니까? "
당연히 이 일을 알 리가 없는 한인혁 일병님이 정해성 상병님한테 경탄을 한다.
하지만 정해성 상병님은 그걸 건네주고는 그냥 저 멀리 앉아서 따로 밥을 먹을 뿐이었다.
"........ "
왠지는 모르지만 정해성 상병님은 항상 저렇게 부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원래 그런 성격인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걸 하필이면 또 나한테는 감추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른 사람과 같이 있거나 눈에 띌 것 같으면 얄짤없이 예전 그대로였다.
아무튼 나는 받아든 맛다시를 봉지에 조금 넣고 비볐다.
보기엔 그냥 고추장같았는데,
"? "
입에 넣자마자 나는 맛다시한테 사과를 해야 했다.
고추장이랑 감히 비교를 하다니…….
대신에 단점으로는 이걸 넣자마자 정말 강렬하게도 맛다시 맛 밖에 안난다……
"와 이거 진짜 맛있습니다. "
"맛있는지는 모르겠고…….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만들어 주기는 하는 거 같네 ㅋㅋ "
엄청나게 놀란 나한테 한인혁 일병님은 밥을 입에 넣으면서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애매한 맛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시는 걸까.
"근데 좀 이상하단 말이지…… "
"어떤 게 말입니까? "
"정해성 상병님. "
나는 밥을 먹다가 정해성 상병님이 홀로 앉아있던 나무 아래를 봤다.
정해성 상병님은 밥을 먹다 말고 뭔가 곰곰히 생각하는 듯 멍하니 허공을 쳐다 볼 뿐이었다.
확실히 뭔가 좀 생각하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냥 평소대로지 않습니까? "
"맛다시 줄 때 개 깜짝 놀랐어. 정해성 상병님이 누구한테 뭐 주는거 처음 봤거든. "
감동이네, 하고 한인혁 일병님은 감탄하면서 밥을 계속 먹기 시작했다.
나도 밥을 천천히 먹으면서 정해성 상병님을 지긋이 살펴봤다.
뭘 생각하시는지 정말 미동도 하지않고 그냥 멀거니 하늘만 쳐다볼 뿐인 정해성 상병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그렇다고 직접 물어보기는 너무 실례인 것 같고,
걱정거리가 있으면 말을 해주면 같이 생각해 줄 수 있을텐데.
그러다가 갑자기 누가 머리를 통 하고 쳤다.
"뭘 그렇게 보냐. "
한인혁 일병님이 내가 정해성 상병님을 보고 있던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ㅇ…….아닙니다! "
"근데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뚫어지겠네. "
"제가…… 말입니까? "
나는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대체 왜 이럴까. 요즘 나는 정해성 상병님한테서 도통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멍해진 기분을 조금 떨쳐내고자 나는 고개를 털었다.
"호오…… "
한인혁 일병님은 갑자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잠깐 당신 이거 무슨 의미야. 잠깐!!!!
"됐어. 밥 마저 먹어라. 나는 화장실 다녀올게. "
이상한 말만 남기고는 한인혁 일병님은 내가 말릴새도 없이 쓱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덕분에 나만 혼자 덩그러니 텐트동 근처에 남겨졌을 뿐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조금 있자 갑자기 저 멀리서 정해성 상병님이 자리에서 탁탁 털고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슬슬 집합시간인가? 하고 시계를 봤지만 아직 집합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해성 상병님은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던 것 처럼 턱 하고 옆에 자리에 앉았다.
"맛다시 준거는? 먹었어? "
정해성 상병님은 군화 끈을 고쳐매면서 그렇게 나한테 물었다.
"예 먹었습니다. "
"그렇군…… 오늘 야근도 하냐? "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
나는 간이 상황실에 통신병들이 설치한 업무PC를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어차피 오늘 내로 인트라넷 회선 끌어오는 건 무리라고 그랬고……
아마도 그럼 오늘은 업무를 할 래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 저녁에 나 좀 보자. "
음? 무슨 일이지?
분대장 업무인가? 아니면 나 뭐 잘못했나……?
"또 또 쪼는거 봐라. 별거 아니니까, 크게 신경쓰지 마라. "
대체 겁을 안 먹을 수 있는건지 모르겠다.
견장까지 차고 그런 말 하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 같잖아.
나는 내가 이때까지 했던 여러가지 행동들을 주마등처럼 돌이켜보면서 정해성 상병님께 무례하게 대하지는 않았나 하고 생각해버리게 됐다…….
"혹시 하실 말이 뭔지……. 힌트라도 주실 수 없으십니까? "
"저녁까지 기다려 임마…...ㅋㅋ 내가 괜히 저녁이라 한 줄 알어? "
내가 보채자 선임 두 말 시키게 하네, 하면서 툴툴대시는 정해성 상병님.
아니 대체……. 할 말 있다고 저녁까지 간 쫄리게 만드는 건 대체…….
오후 늦게까지 텐트를 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텐트는 D형 텐트로, 병사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텐트용 천 4개를 조합하면 만들 수 있는 텐트였다.
훈련소에서 3개로 만드는 A형 텐트는 쳐봤지만, 4개로 만드는 D형 텐트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기초가 되는 천막 기둥을 4개 박아올리는 것 부터 상당히 난감했다.
걸핏하면 픽픽 쓰러지는 데다가, 땅은 또 엄청나게 딱딱해서 기둥이 박혀 들어가지가 않았다.
"와…… 씨……. "
한인혁 일병님이 개인삽으로 땅을 조금 파내 보려고 했지만, 요즘 들어 갑자기 낮아진 기온때문인지,
땅은 쉽사리 파들어가지지 않았다.
"이리 줘봐. "
옆에서 지켜보던 정해성 상병님이 삽을 들더니 진짜 엄청난 힘으로 땅을 깡 소리가 날 만큼 내리쳤다.
뭔가 쩍 하는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하필이면 기둥을 박을 곳에 커다란 돌이 있었다.
덕분에 내려친 삽도 날이 조금 찌그러져서 삽으로서의 운명을 다했다……
삽 주인인 한인혁 일병님의 안타까운 시선이 삽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나중에 삽 새로 받아다 줄게. "
"??? 알겠습니다. "
정해성 상병님은 뭔가 평소답지 않게 욕도 화도 내지 않으셨다.
보통 이렇게 답답한 짓 하면 바로 잔소리가 날아들텐데.
그런 정해성 상병님은 고분고분하게 삽도 받아다 주겠다고 했다……
한인혁 일병님이 놀라실 만도 하다.
거의 텐트 치는 것을 혼자 도맡아서 하는 정해성 상병님을 지켜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한인혁 일병님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 어디 좀 아프신건가? "
"잘 모르겠습니다. "
"아니면 누가 밥에 약이라도 탔나……? 진정제 같은거. "
"그런 짓 하려면 목숨 내놓고 해야 할 겁니다 아마…… "
"그렇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단 말이야……. "
조곤조곤하게 얘기하다가,
우리는 마냥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정해성 상병님이 가져다 달라는 물건들을 최대한 빠르게 가져다 주는 식으로 도왔다.
텐트는 한 명이서 쳤지만, 이상하게도 텐트 자체는 우리 텐트가 부대에서 가장 빠르게 쳐졌다.
"와 저거 정해성 상병님이 쳤냐? "
"예 그렇습니다. "
"이걸 어떻게 벌써 다 쳐…… 미쳤네……. "
옆 텐트인 2소대 사람들이 한 마디씩 거들고 갔다.
정해성 상병님은 그런 말에는 아랑 곳 않고,
"다들 수고했다. 안에서 좀 쉬어. "
그렇게 말하고는 혼자서 훌쩍 떠나버렸다.
나는 한인혁 일병님과 함께 짐을 텐트 안에 적절히 정리해 놓기 시작했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D형 텐트라고 해봤자 얼마나 넓을까 싶었는데, 두세명이서 쓰기에는 적절한 크기의 텐트였다.
이 정도면 자는데는 크게 무리 없을 것이고, 짐도 좀 놔둬도 괜찮을 것이다.
훈련소에서 한 번 숙영했을때 지었던 A형 텐트랑은 정말 차원이 다른 넓이였다.
문제는 저녁식사 전 쯤에 일어났다.
숙영지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샤워시설이 따로 있는 훈련장이기도 했어서,
우리는 그 샤워장을 빌려서 간단히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정해성 상병님은 어딜 가셨는지 계속 보이지 않아서, 나와 한인혁 일병님만 따로 샤워를 하러 텐트동에서 샤워장으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아……. 존.나 아프네……. "
텐트동에서 샤워장까지 가는 계단참이 무척 경사가 높았는데,
한인혁 일병님이 가다가 발을 헛디뎌 버린 것이다.
아마 아침에 행군을 한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런 것도 있으시겠지…….
"괜찮으십니까? "
"으으……. 일단 너 먼저 씻으러 가. 나 상황실에서 약 좀 받아올게. "
"제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
"괜찮대도…… 아야야……. 아 좀 아프네 ㅠㅠ "
"저한테 기대면 됩니다. 많이 다치신 것 같습니다. "
"하필이면 훈련 전에…… "
한인혁 일병님의 다리는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지만,
상황실에서 응급조치를 취했는데도 붓기가 점점 심해지는 모양이었다.
"조심 좀 하지 그랬냐. "
"경사가 급한 지 잘 안 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
정해성 상병님이 조금 있다 나타나셨고,
뒤 이어서 작전과장님도 같이 나타나셨다.
"보현이 선임이구나. 다리는 좀 괜찮아? "
환자 앞이었지만 아랑곳 않고 담배를 물고서는 작전과장님이 그렇게 물어왔다.
상황실이 금방 담배연기로 뿌얘졌다.
한인혁 일병님은 고통을 억지로 참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
"골절은 아니겠지만 좀 심하게 삔 것 같은데? "
부은 다리를 쓱 보더니 과장님은 말을 이어가셨다.
"훈련은 못 뛰겠고…… 보현아 차량 어떻게 되지? "
"아마 응급 후송차량 한 대 있을 겁니다. "
나는 수송대 선임들한테 쪼여가며 짰던 훈련계획을 떠올리며 얘기했다.
"그거 태워서 대통 후송 보내고, 그 뒤로는 부대서 상근 애들이랑 교대로 전화대기 하면 되겠다. "
그 말을 듣자 한인혁 일병님은 조금 안도한 표정이었다.
사실 그 누구보다도 유격을 빼고 싶어 했던 건 한인혁 일병님이었지만, 이게 이런 식으로 실현이 될 줄이야…….
아, 참고로 대통 이라고 하는 건 대전 소재의 국군통합병원을 말하는 것이다.
유격장에서는 물론이고 부대에서 가장 가까운 국군병원이라 다들 많이 신세지고는 했다.
"그럼 운전병 부릅니까? "
"본부중대장한테 얘기하고 알아서 처리 하라 해. 난 바쁘니까 먼저 간다잉. "
그렇게 말하고 떠나버린 과장님.
후에 들어온 본부중대장님이 "과장님이 그렇게 하라면 하는거지 뭐. " 하고는 그냥 그렇게 처리해버려서 한인혁 일병님은 순식간에 부대로 복귀하게 되었다…….
목발을 짚고 터덜터덜 차에 오르는 한인혁 일병님은 기운이 축 쳐져있었다.
"부대서 보자. 훈련 잘 받고 와. "
"알겠습니다. 한인혁 일병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
고개를 끄덕이고,
한인혁 일병님은 차량에 타서 어둑해진 훈련장 바깥으로 사라졌다.
- 16.
해가 완전히 지고, 깜깜한 밤이 되었다.
야산 한 가운데에 위치한 훈련장은, 상황실로 쓰는 건물 한 채 말고는 그저 텐트들에서 새어 나오는 손전등 빛 줄기들 뿐이었다.
그런 텐트들 사이에서,
"....... "
"....... "
나랑 정해성 상병님은 단 둘이 텐트에 있게 되었다.
정해성 상병님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편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놀러오는 사람도 없었다.
들른 사람은 딱 한 명, 원준이였다.
"보현이 있냐? "
문 닫힌 텐트 밖으로 깐돌깐돌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장난끼 가득한 목소리는 정말 언제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반년 가까이 지냈는데도 이 정도면야……
"어. "
"들어간다? "
"왜. "
"걍 놀러왔는데. "
바람에 날려갈듯한 가벼운 목소리를 텐트 구석에서 얌전히 누워서 듣고 있는 정해성 상병님.
대꾸도 안하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야……
"여기 정해성 상병님도 계셔. "
"아? 아 맞다 그러네……. "
그럼 이거 주고 갈게 하더니 텐트 옆으로 쓰윽 컵라면 두 개를 내미는 원준이.
오 뭘 또 이런 걸.
"정해성 상병님도 맛있게 드십쇼. "
원준이는 뭔가 정해성 상병님이랑 얘기도 잘 나눠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어색하게 그렇게 얘기했다.
정해성 상병님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의류대에서 맛다시랑 참치를 꺼내더니,
"가져가. "
그렇게 쓱 원준이에게 그걸 내미셨다.
순식간에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원준이……
"와!!!! 어디서 사셨습니까? PX에도 없어가지고 못 가져 왔는데. "
그 범인이 이 사람이다 원준아. 겉에 속으면 안돼. 이거 매점매석이라고.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ㅎㅎ 보현이 너도 푹 쉬어! "
그렇게 말하고 진짜 기쁜듯이 폴짝폴짝 뛰면서 가는 원준이는 진짜 평소 그대로의 이미지였다……
뭐가 맨날 저렇게 신날까……. 하기사 오늘은 업무 안해도 되니까 그게 기쁜 걸 지도 모른다.
"쟤는 원래 저렇게 정신없어? "
텐트 천장에 매달린 조명 아래로 피곤한 표정을 짓는 정해성 상병님이 말을 꺼냈다.
반쯤 옆으로 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뭔가 잘 알 수 없었다.
"원래 저런 성격입니다. "
"ㅋㅋ 그래도 재미는 있겠다. "
"눈치가 좀 많이 없는 애라서……. 그닥 재밌지는 않습니다. "
"그래도 라면 챙겨다 주는 동기는 귀하지. 지환이 봐라. 얼마나 정나미 없는지. "
이지환 상병님을 얘기하시는 정해성 상병님.
실제로 이지환 상병님은 정해성 상병님 만큼이나 부대에서 칼같은 사람으로 유명했다.
동그란 안경을 끼고는 모든 중대 사람들의 부탁을 "안 돼. " 로 일축시키는 사람…….
"슬슬 가자. "
갑자기 정해성 상병님이 자리를 털고 나갈 준비를 하셨다.
활동화를 신는 걸 보니 아주 밖으로 가실 모양인데…….
"어디 갑니까? "
"따라와 그냥. "
늘 그렇듯 듬직한 덩치로 앞장서시는 정해성 상병님.
희미하게 남아있는 달빛만이 조명이 되어 가는 길을 어슴푸레하게 비추고 있었다.
조금 걸었을까,
우리는 텐트가 모여있는 언덕의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언덕 아래로는 상황실 건물과 그 주변으로 유격장의 전경이 보였다.
"앉아. "
정해성 상병님은 먼저 근처 가장자리에 앉으시면서 얘기했다.
언덕은 꽤 급경사였지만, 그렇다고 못 앉을 정도로 불안정하진 않았다.
생각해보니 오늘 저녁에 뭔가 할 말이 있으시다고 했던 정해성 상병님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말 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조금은 어색한 침묵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이 총총하게 박힌 별 하늘 아래에 살짝 깔렸다.
귀뚜라미 소리가 침묵을 조용히 지켜주고 있었다.
한참 있다가, 그는 정적을 깼다.
"조금 확실하게 해 두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래. "
말투가, 정해성 상병님의 말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온화한 말투였다.
하지만 동시에 진지하기도 해서, 나는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약속 하나 하자. 너도, 나도 거짓말은 안 하기로. "
살짝 떨리는, 하지만 낮은 목소리는 여전히 정해성 상병님의 것이었다.
그 떨림은 뭔가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서, 나도 조금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시려고 하는 걸까?
하지만 애초에 나는 그에게 숨길 것도 없었고, 숨길 작정도 없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
무슨 말을 하실 진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 무겁게 대답했다.
"너……. 남자 좋아하냐? "
그리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도대체 왜 지금 그런 말이 여기서 나오는거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네? 아니오?
망설이고 있는 것 자체로도 이미 YES에 가까운 대답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아니오라고 즉답 할 수도 없었다.
이걸 물어오는 정해성 상병님이 싫은 것도 아니었지만,
동시에 유쾌한 질문도 아니었다.
짧은 찰나에 오만 생각이 지나가고, 이 사람이 이 질문을 했을 이유를 드디어 하나 생각해 냈다.
박상욱 병장.
분명히 그 일이 있었을 떄, 나를 아웃팅을 했던 것이 틀림없다.
진짜 끝까지 나한테 엿을 남기고 가는구나…….
귀뚜라미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하지만…… 나는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에게 거짓말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뭣보다 내가 게이라고 해서 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싶었다.
그래서 조용히 대답을 했다.
"예. "
말이 벽돌처럼 무겁게 내 입에서 나오자마자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기화되듯이 내 앞에서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정해성 상병님의 고개는…… 그 답지 않게 푹 숙여져서 나한테 잘 보이지 않았다.
"박상욱 병장한테서 들으셨습니까? "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정해성 상병님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역시 그 인간일 줄 알았어.
뭘 믿고 넘겨짚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훌륭하게 적중했다.
씨.발새끼…….
"부대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
"안 해. 할 이유도 없고. 애초에 내가 이 일 아니었으면 할 얘기도 아니었고. "
내가 너무 차갑게 말을 해서 그런지,
정해성 상병님은 도리어 당황하고 있었다.
그도 긴장을 해서 그런지 무릎 위로 손을 모아쥐고 있었다.
"그럼……. 할 얘기가 뭡니까. "
내가 생각해도 내 입에서는 이런 상황만 되면 너무 차갑게 말을 내뱉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말 한 마디 잘 못 했다간, 내가 부대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겉잡을 수 없게 틀어져 버릴 테니까.
"음…….. "
정해성 상병님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나는 대충 짐작을 해 버렸다.
그래서 그를 난처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제가 정해성 상병님 좋아할까봐 그러십니까? "
"....... "
내가 덤덤하게 물은 질문에,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의 고개는 여전히 숙여진 채로, 도통 표정을 알 수 없게 했다.
짧은 찰나에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정해성 상병님한테 남자로서 설렜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나에게 주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관심,
어려울 때 마다 나타나서 척척 상황을 해결해 주는 선임으로서의 능력,
그리고 툴툴대지만 할 건 다 하는 그의 성격.
어쩌면 일반 사회에서 사적으로 만났었다면, 좋아한다고 한 마디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그를 잃을 순 없었다.
차라리 그것보다 못한 관계가 되더라도, 거짓말을 해서라도 관계를 잡아야 했다.
참을 수 없는 침묵이 계속 돼서, 나는 입을 열고 말았다.
"정해성 상병님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경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
나는 왠지 모르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눈물이 또 나려고 하고 있었다. 대체 나는 뭐가 억울해서 우는 것일까.
"오해, 냐? "
정해성 상병님은 갑자기 나한테 그렇게 돌직구로 되물었다.
쓰윽 고개를 드는 정해성 상병님의 얼굴은, 어둠속에서도 알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거짓말은 안 한다고 했었던거, 까먹었을까봐 딱 한 번만 물어볼게. "
정해성 상병님은 숨을 살짝 삼키고, 터무니 없는 질문을 했다.
"너가 호감이 있다고 내가 생각했던 거, 오해야? "
……..
정말 집요하게 내 아픈 곳을 명치로 찌르듯이 질문해오는 정해성 상병님.
이미 그에게는 내가 하는 말이 어떤게 맞고 틀린지 다 아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예 라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어색한 사이가 될 뿐입니다…….
정해성 상병님의 눈은 그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느때와는 달랐다. 그의 시선은 내 눈 안까지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내가 졌다.
진짜 이건 어떡 할 도리가 없다.
다 알고서 물어오는 것인데, 내가 여기서 아니오라고 해봤자 결국은 똑같아…….
"죄송합니다……. "
"....... "
"거짓말 해서 죄송합니다……. 저……. 정해성 상병님 좋아합니다……. "
눈에서 눈물이 났다.
푹 숙여진 얼굴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
말을 이어나가는데 거슬리게 자꾸 콧물이 나와서 훌쩍거리게 됐다.
너무 부끄럽고…… 죄송하고……
그의 호의를 왜 그냥 호의로만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그런 내 자신한테 너무 화가 났다.
그런 내 어깨에, 익숙한 손이 톡톡 하고 노크를 했다.
정해성 상병님은 내 옆에서 말없이 어깨를 토닥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뭘 우냐 그런 걸로. 좋아할 수도 있지. "
토닥거림은 더 기폭제가 돼서,
눈물이……. 더 멈추지 않게 되었다.
대체 이렇게 울어본 게 얼마 만인지…….
마음이 너무 저리고 아프다. 심장이 억죄어오는 느낌이 너무 싫었다.
"죄송합니다……. "
끄윽 거리면서 나는 간신히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 할 뿐이었다.
진짜 부끄러워 죽고싶다…….
그런 나한테 갑자기 정해성 상병님은 이상한 걸 물어왔다.
"그……. 남자랑 연애는 안해봐서 그런데……. "
다행스럽게도 정해성 상병님은 내가 그런 말을 했는데도 아무렇지 않으셨다.
오히려…… 좀 더 자연스러운 느낌?
궁금증이 드디어 해결됐다는 표정으로 정해성 상병님은 피식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꺼냈다.
"걍…… 너는 좀 어떤가 해서. "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내 귀는 의심을 너무 많이 받는다.
그도 그럴게 너무 믿을 수 없는 얘기만 계속 들어서 그런 것일터다.
"저 말씀이십니까……? "
너무 놀라서 울던 것도 멈춰버린 것 같다.
뭘까 이 기분……. 자이로드롭도 이런 느낌은 아닐것이다.
냉탕 온탕에 담금질 되는 기분……
"그래. 너가 어지간히 신경이 쓰여야 말이지. "
머쓱거리면서 뒷통수를 긁는 정해성 상병님.
아니 뭐야 이게.
나 지금 얼떨결에 고백하고 그게 성공한 그런 상황인가?
"어지간히 소심해가지곤…… 어휴…… "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마구 헝클어뜨리는 정해성 상병님.
그런 그를 나는 진짜 멍해져서 지긋이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저……. "
"몰라. 그 뭐……. 사귀든지 말든지. "
싫음 말고. 하고 정해성 상병님은 진짜 믿을 수 없이 그런 말을 해 왔다.
아니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셔도……. 나는…….
싫을 수가 없잖아…….
나는 아까 울었던게 너무 머쓱하고 부끄러워서,
그냥 정해성 상병님을 꼭 안는걸로 대답을 대체했다.
조금 쌀쌀했던 바깥공기에 대조되는 정해성 상병님의 온기가 품 안으로 들어왔다.
"으이구……. 바보네. "
그런 나를 정해성 상병님은 꼭 안아 주셨다.
진짜 너무 꿈만 같았다.
내일이 되면 거품이 돼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과,
꿈이면 어떡하지 하는 이상한 불안함이 공존하는…….
하지만 이게 꿈일리가 없었다.
"고민 많이했다. 너도 많이 했을테지만……. "
고개 옆으로, 정해성 상병님이 그런 말을 했다.
"그래도 지금 말 안 해두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ㅋㅋ "
"아닙니다…… 저 인기 없습니다. "
"이래 놓고 막 줄서있는거 아니야? 순번표 뽑아서? "
"ㅋㅋㅋㅋㅋ 진짜 아닙니다. 저 아싸라서…… "
"바보네 ㅋㅋ "
그리고는 정해성 상병님은 내 이마에 쪽 하고 키스를 했다.
예전의 볼꼬집이랑 똑같이 아무 예고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지간히도 놀라네……. "
"그……. 이런 거 할 때는 조금 말씀이라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싫은데? 놀라는 모습 커엽거든. "
"....... "
이 사람, 뭔가 이런 상황이 되면 엄청 짖궂어 지는구나.
나는 결심을 하고, 조금 정해성 상병님이랑 떨어졌다.
갈색 눈동자는 갑자기 물음표를 띄우고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눈동자에 겹쳐지듯이, 나는 천천히 정해성 상병님과 입을 겹쳤다.
시간이 멈춰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꿈이라면 정말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게 현실이라면……. 이대로 평생을 갔으면 좋겠다.
너무나도 궁금한 게 많았지만,
나는 지금은 참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가 같이 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을 것이고,
그때 차근차근 물어보면 되니까.
입이 천천히 멀어져간다.
처음보는, 정해성 상병님의 부끄러워 하는 표정.
나를 진짜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구나.
그런 안도감이 들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럼 오늘부터 1일로 치는거야? "
정해성 상병님은 머쓱하게 그렇게 물어왔다.
그거 너무 상투적인 멘트잖아…….
본인도 너무 머쓱한지 조금 고개를 돌리면서 얘기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ㅋㅋㅋ "
"그래애 ㅋㅋㅋ "
머쓱하게 웃는 우리 사이를 보름달이 비추고 있었다.
으레 작전병이 모두 그렇듯,
나는 다가오는 유격훈련때문에 너무나도 바빴다.
훈련 계획을 비롯한 각종 서류 업무의 초안을 작성하고 검토받는일은 물론이고,
중대 소속이면서 행정병이라는 더블카운터에 의해서 중대장님을 도와 이지환 상병님이랑 같이 행정반에서 구형 전투복에 번호달기 등등……
4박 5일짜리 유격 훈련을 장장 한 달 준비를 하고 있자니 정말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차라리 빨리 유격 해버리고 치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유격 훈련은 내가 일병으로 진급하는 달 바로 전 주.
그래도 제법 기온이 떨어진 9월 하순이었다.
모든 대대 현역들은 단 한 명도 열외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연대장님의 지시에 의해서,
우리 대대도 경계병력은 상근예비역으로 대체하고 전부 부대를 비워야만 했다.
유격 바로 전 주말,
대대에서는 유격 훈련 관련 물자를 미리 옮겨싣기 시작했다.
유격 훈련장 협조가 잘 되지 않아서 결국 부대에서 50km나 떨어진 유격장을 빌려버린 탓에, 우리는 두돈반을 이용해서 주말간에 미리 물자를 옮겨놓기로 했다.
"어휴 일이 이렇게 많은데 훈련은 개뿔……. "
안그러냐? 하고 물어오는 이 말투는 놀랍게도 과장님이다.
물론 나한테는 이제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동원과에서 오신 새로온 과장님은 무려 간부사관 출신이라, 나와 원준이에게 터울이 없어도 너무 터울이 없이 대해 주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한테 과장님이란 존재는 약간 이웃집 사는 야근 자주해서 담배에 찌는 아저씨정도?
"업무용 PC도 싣습니까? "
"당연하지. 5일동안 업무 안하려고? "
과장님은 나한테 눈치를 주면서 얘기했다.
연대장님이 누구든 열외는 없다고 엄포를 놓으셔서 일단 나를 보내기는 하는데…….
가서도 주구장창 PC로 간이상황실에서 업무나 볼 것 같은 무서운 기분이 든다…….
내 군생활에서 유격훈련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사실 가서 뭘 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저 초안을 짜면서 이런 것들을 하는구나 하고 만 것들이 대부분이라 실제로 어떨지는……
반면에 정해성 상병님 언저리의 상병장들은 이번이 두 번째 유격이라 대충 뭘 준비해야 할지 잘 아는 눈치였다.
하루는 일과가 다 끝나고 어렵사리 일찍 생활관에 왔는데,
정해성 상병님이 어깨를 툭툭 쳤다.
"PX 가자. "
"잘……. 못 들었습니다? "
"PX 가자고. "
물론 선임이 후임한테 PX가자고 하는 건 이상한 말이 아니긴 한데…….
정해성 상병님의 손에는 바구니가 있었다.
뭔가 과하게 비장해 보이는 것은 착각이겠지……?
".......뭘 사려고 하시길래 바구니를……. "
"짬찌 티 좀 그만 내고 그냥 따라와. "
그렇게 나는 잠자코 정해성 상병님의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생활관에서 한인혁 일병님은 저런……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전쟁이 나면 이런 상황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거 다 줘. "
"이걸 다 말입니까? "
"어. 그리고 이것도 같이. "
정해성 상병님은 카드를 꺼내들고는 온갖 먹거리를 계산하기 시작하셨다.
내가 낑낑대면서 바구니에 담아온 무거운 음료수들부터 시작해서…….
각종 과자, 초코바, 그리고 방금 피엑스병이 '이거를 다 산다고?' 하고 생각했을 것 같은 맛다시 박스…….
다 사고나니 바구니는 물론이고 가방 하나는 거뜬히 채울 수 있는 엄청난 양이 되었다.
아니 대체 이걸 어떻게 다 먹으시려고……
아니 애초에 어떻게 들고가려고 하시는거지?
"당연히 너가 들고와야지. "
"제가…...말입니까? "
"너 과장님 차타고 가잖아 유격장. "
"....... "
생각해보니 그건 맞는 말이었다.
PC같은 민감한 제품들도 있어서, 나는 부대 미니버스를 타지 않고 과장님 자차에 물건을 실어다가 유격장으로 출발하기로 했던 것이다.
어제 정해성 상병님한테 무심코 훈련계획 말하면서 그런 얘길 했는데 잘도 기억하고 계셨다……
피엑스 테이블에 가득 쌓인 과자랑 음료수 더미를 흘깃흘깃 부대사람들이 보고 지나간다.
나는 그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일단 생활관에서 재빨리 의류대를 가져와서 무작정 집어넣기 시작했다.
"얼마 긁으셨습니까? "
"한 8만원? 얼마 안하던데? "
"8만원이면 제 월급입니다. "
"그것도 맞는 말이지. "
뭔가 이상하게 신나 보이는 정해성 상병님은 PX병에게 카드를 건네주면서 샀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고 있었다.
뭘 샀는지 체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걸 그냥 잠자코 볼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소풍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과장님한테 이걸 설명하자 예상대로,
"야 너도 징하다 진짜. "
"아니 그게……. 제가 산게 아니라…… "
"무슨 못먹어서 죽은 귀신 붙었냐? 이거 다 먹을 수 있기는 해? "
"ㅠㅠ……. "
과장님은 쯧쯧 하고 혀를 차더니 결국 과자랑 음료수로 가득찬 그 의류대를 차 트렁크에 넣는걸 도와주셨다.
"대대장님한테 걸리기만 해봐. 중대로 쫓아낼테니까. "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과장님은 피식하고 웃으셨다.
뭔가 허락해 주실 줄은 알았는데 그래도 뭔가 엄청 부끄럽군…….
주말 간에 물자를 옮기느라 나는 소대원들과 함께 간만에 부대 밖을 나설 수 있었다.
비록 미니버스에 탄 채로 나가는 것 뿐이었지만, 오래간만에 보는 부대 밖 풍경은 너무 좋았다.
나는 창문에 코가 닿을 듯이 얼굴을 대고는 지나가는 풍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군용 건물이 아닌 일반 건물이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대전 시내를 가로지를때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 마저 신기하게 보였다.
서너달만에 보는 도시의 풍경은 굉장히 낯설었다.
그렇게 한참 풍경 삼매경에 빠져있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대원들은 뭔 그리 잠이 많은지 다들 곯아떨어져 있었다.
딱 하나…… 팔짱을 끼고 내 옆에 앉아있는 초록색 견장을 찬 정해성 상병님 빼고.
"뭘 그리 신기하게 보냐? "
"아…… 아닙니다. 그냥 밖이 너무 오래간만이어서…… "
"아직도 신병 안나갔어? "
"예. "
"신기할 만도 하지 ㅋㅋ "
정해성 상병님은 그렇게 피식 웃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눈부신 가을 햇살이, 정해성 상병님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반사되는 햇빛이 그의 갈색 눈동자를 찬찬히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조금 나른해보이는 그의 얼굴은, 그렇지만 그래서 더 귀여워 보였다.
"유격 훈련 힘듭니까? "
나는 할 말이 궁색해져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까짓거 교관놈들이 구르라고 하면 구르면 돼. "
"그……. 안 무섭습니까? 막 장애물 통과하고 그러면…… "
"장애물 통과? ㅋㅋ 그거보다는 체조가 토나올텐데. "
과연……
막상 유격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부족한 내 체력이 많이 걱정이 됐다.
내 부족한 체력으로 훈련에 따라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걸로 정해성 상병님이나 다른 부대원들한테 폐를 끼치면 어떡하지……
조금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볼에 살짝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놀라서 고개를 확 들었는데, 정해성 상병님이 내 볼을 꼬집고 있었던 것이다.
"우왁!!! "
심장이 바깥으로 스스로 탈출하는 것 같았다.
너무 놀랐던 나는 옆 자리에 숙면중이신 한인혁 일병님을 치고 말았다.
그치만…… 너무 딥슬립중이었던 한인혁 일병님은 그걸로는 끄떡도 없다는 듯이 계속 잠에 빠져있다…….
다행이 아닐수가 없었다.
"ㅁ…...뭐하십니까. "
"아니 그냥…… 너무 걱정하길래 표정 풀으라고. "
머쓱해 하면서 정해성 상병님은 그렇게 얼굴을 살짝 붉혔다.
와 진짜 방금 뭐였어……?
내 뇌에 있는 모든 뉴런들이 무슨 일이래? 하고 야단이 났다.
진정해 이것들아…….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
"분대장인데 이 정도 권리는 행사해도 되지 않을까? ㅋㅋㅋㅋ "
다들 자고 있어서 망정이지,
이 꼴을 다른 사람이 봤으면 진짜 이건 부대 특종감이었다.
아무한테도 관심 하나 안 주는 정해성 상병님이, 사람 볼을 꼬집는다고?????
그나마 나야 요즘 들어서 정해성 상병님이랑 같이 다니기 시작해서,
이 사람이 꽤 허당끼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마 그걸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테고…….
머리가 핑핑 돈다.
지금 쯤이면 진짜 얼굴이 새빨개졌을것은 분명했으므로 나는 괜히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그걸 지긋이 쳐다보면서 슬금슬금 웃고 있는 정해성 상병님이 유리창에 반사돼서 보인다.
진짜 저건 악취미다……
분명 이런 분대장 밑에서 나는 심장쇠약으로 죽을것이다……
"아무튼 너무 걱정 하지마라. 나도 같이 뛰잖아. "
그렇게 말하고는 내 머리에 손을 내밀어 쓰윽 쓰다듬어 주시는 정해성 상병님.
아니 대체 이 사람 오늘 왜 이러는거야…...ㅠㅠㅠㅠㅠㅠ
"연대 기동중대 사람들이 조교라던데. 너가 더 잘 알거 아냐. 죽기야 하겠어? "
그리고는 어깨를 톡톡 치고는 손을 내리는 정해성 상병님.
진짜 이 사람 오늘 심장 여러번 멎게 한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정해성 상병님이 쓸고 지나간 머리는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그건 압니다…… "
"그럼 됐네. 나도 있는데 뭔 걱정이야. "
덤덤한 말투로 정해성 상병님은 지긋이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 사람을 보면 항상 든든해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속으로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아야만 했다.
애써 참으려고 나는 창에서 시선을 뗴지 않았다.
지나가는 풍경속에서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몇 년 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공기를 맡으면서 기분을 만끽했다.
청명하고 따스한 초가을 하늘이었다.
- 15.
유격날이 되었고, 대대 사람들은 전부 유격장으로 향했다.
유격 전에는 입소행군 15km가 예약되어 있었는데, 딱히 행군할 곳이 없어서 대대 근처를 빙빙 돌다가 행군 다 끝나고 기진맥진한 사람들을 미니버스가 태워다 날랐다.
덕분에 아침부터 기운이 다 빠지긴 했지만 오늘은 이렇다 할 훈련은 이제 없으니까.
오후에 텐트를 치고 짐정리만 하면 끝이었다.
점심밥이 오기는 왔는데 식판이 없어서,
소위 말하는 짬밥…… 봉지에 모든 걸 넣고 섞어 먹는 정말 말로만 들었던 군대밥을 먹게 되었다.
나는 문화충격을 받아서 한인혁 일병님이랑 수군수군댔다.
"원래 훈련때 밥 다 이렇게 먹습니까? "
"전에 RCT 할때는 식판이 있긴 했어서 식판 비닐로 덮어서 그 위에 밥 받고 그랬는데……. 오늘 밥차 온다지 않았어? "
"확실히 예정은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
"예정이란 건 깨지라고 있는거지…… "
다행히 식판은 나중에 오긴 왔지만 이미 밥때를 다 놓쳐서 왔다.
별 수 없이 나는 포카락을 들고 봉지밥을 먹으려고 했다.
쓰윽.
밥을 먹으려고 앉은 나한테 내밀어지는 두 빨간색 봉지.
내민 사람은 당연히 정해성 상병님이다.
"와 이걸 언제 사놓으셨습니까? "
당연히 이 일을 알 리가 없는 한인혁 일병님이 정해성 상병님한테 경탄을 한다.
하지만 정해성 상병님은 그걸 건네주고는 그냥 저 멀리 앉아서 따로 밥을 먹을 뿐이었다.
"........ "
왠지는 모르지만 정해성 상병님은 항상 저렇게 부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원래 그런 성격인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걸 하필이면 또 나한테는 감추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른 사람과 같이 있거나 눈에 띌 것 같으면 얄짤없이 예전 그대로였다.
아무튼 나는 받아든 맛다시를 봉지에 조금 넣고 비볐다.
보기엔 그냥 고추장같았는데,
"? "
입에 넣자마자 나는 맛다시한테 사과를 해야 했다.
고추장이랑 감히 비교를 하다니…….
대신에 단점으로는 이걸 넣자마자 정말 강렬하게도 맛다시 맛 밖에 안난다……
"와 이거 진짜 맛있습니다. "
"맛있는지는 모르겠고…….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만들어 주기는 하는 거 같네 ㅋㅋ "
엄청나게 놀란 나한테 한인혁 일병님은 밥을 입에 넣으면서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애매한 맛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시는 걸까.
"근데 좀 이상하단 말이지…… "
"어떤 게 말입니까? "
"정해성 상병님. "
나는 밥을 먹다가 정해성 상병님이 홀로 앉아있던 나무 아래를 봤다.
정해성 상병님은 밥을 먹다 말고 뭔가 곰곰히 생각하는 듯 멍하니 허공을 쳐다 볼 뿐이었다.
확실히 뭔가 좀 생각하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냥 평소대로지 않습니까? "
"맛다시 줄 때 개 깜짝 놀랐어. 정해성 상병님이 누구한테 뭐 주는거 처음 봤거든. "
감동이네, 하고 한인혁 일병님은 감탄하면서 밥을 계속 먹기 시작했다.
나도 밥을 천천히 먹으면서 정해성 상병님을 지긋이 살펴봤다.
뭘 생각하시는지 정말 미동도 하지않고 그냥 멀거니 하늘만 쳐다볼 뿐인 정해성 상병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그렇다고 직접 물어보기는 너무 실례인 것 같고,
걱정거리가 있으면 말을 해주면 같이 생각해 줄 수 있을텐데.
그러다가 갑자기 누가 머리를 통 하고 쳤다.
"뭘 그렇게 보냐. "
한인혁 일병님이 내가 정해성 상병님을 보고 있던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ㅇ…….아닙니다! "
"근데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뚫어지겠네. "
"제가…… 말입니까? "
나는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대체 왜 이럴까. 요즘 나는 정해성 상병님한테서 도통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멍해진 기분을 조금 떨쳐내고자 나는 고개를 털었다.
"호오…… "
한인혁 일병님은 갑자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잠깐 당신 이거 무슨 의미야. 잠깐!!!!
"됐어. 밥 마저 먹어라. 나는 화장실 다녀올게. "
이상한 말만 남기고는 한인혁 일병님은 내가 말릴새도 없이 쓱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덕분에 나만 혼자 덩그러니 텐트동 근처에 남겨졌을 뿐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조금 있자 갑자기 저 멀리서 정해성 상병님이 자리에서 탁탁 털고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슬슬 집합시간인가? 하고 시계를 봤지만 아직 집합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해성 상병님은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던 것 처럼 턱 하고 옆에 자리에 앉았다.
"맛다시 준거는? 먹었어? "
정해성 상병님은 군화 끈을 고쳐매면서 그렇게 나한테 물었다.
"예 먹었습니다. "
"그렇군…… 오늘 야근도 하냐? "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
나는 간이 상황실에 통신병들이 설치한 업무PC를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어차피 오늘 내로 인트라넷 회선 끌어오는 건 무리라고 그랬고……
아마도 그럼 오늘은 업무를 할 래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 저녁에 나 좀 보자. "
음? 무슨 일이지?
분대장 업무인가? 아니면 나 뭐 잘못했나……?
"또 또 쪼는거 봐라. 별거 아니니까, 크게 신경쓰지 마라. "
대체 겁을 안 먹을 수 있는건지 모르겠다.
견장까지 차고 그런 말 하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 같잖아.
나는 내가 이때까지 했던 여러가지 행동들을 주마등처럼 돌이켜보면서 정해성 상병님께 무례하게 대하지는 않았나 하고 생각해버리게 됐다…….
"혹시 하실 말이 뭔지……. 힌트라도 주실 수 없으십니까? "
"저녁까지 기다려 임마…...ㅋㅋ 내가 괜히 저녁이라 한 줄 알어? "
내가 보채자 선임 두 말 시키게 하네, 하면서 툴툴대시는 정해성 상병님.
아니 대체……. 할 말 있다고 저녁까지 간 쫄리게 만드는 건 대체…….
오후 늦게까지 텐트를 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텐트는 D형 텐트로, 병사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텐트용 천 4개를 조합하면 만들 수 있는 텐트였다.
훈련소에서 3개로 만드는 A형 텐트는 쳐봤지만, 4개로 만드는 D형 텐트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기초가 되는 천막 기둥을 4개 박아올리는 것 부터 상당히 난감했다.
걸핏하면 픽픽 쓰러지는 데다가, 땅은 또 엄청나게 딱딱해서 기둥이 박혀 들어가지가 않았다.
"와…… 씨……. "
한인혁 일병님이 개인삽으로 땅을 조금 파내 보려고 했지만, 요즘 들어 갑자기 낮아진 기온때문인지,
땅은 쉽사리 파들어가지지 않았다.
"이리 줘봐. "
옆에서 지켜보던 정해성 상병님이 삽을 들더니 진짜 엄청난 힘으로 땅을 깡 소리가 날 만큼 내리쳤다.
뭔가 쩍 하는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하필이면 기둥을 박을 곳에 커다란 돌이 있었다.
덕분에 내려친 삽도 날이 조금 찌그러져서 삽으로서의 운명을 다했다……
삽 주인인 한인혁 일병님의 안타까운 시선이 삽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나중에 삽 새로 받아다 줄게. "
"??? 알겠습니다. "
정해성 상병님은 뭔가 평소답지 않게 욕도 화도 내지 않으셨다.
보통 이렇게 답답한 짓 하면 바로 잔소리가 날아들텐데.
그런 정해성 상병님은 고분고분하게 삽도 받아다 주겠다고 했다……
한인혁 일병님이 놀라실 만도 하다.
거의 텐트 치는 것을 혼자 도맡아서 하는 정해성 상병님을 지켜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한인혁 일병님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 어디 좀 아프신건가? "
"잘 모르겠습니다. "
"아니면 누가 밥에 약이라도 탔나……? 진정제 같은거. "
"그런 짓 하려면 목숨 내놓고 해야 할 겁니다 아마…… "
"그렇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단 말이야……. "
조곤조곤하게 얘기하다가,
우리는 마냥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정해성 상병님이 가져다 달라는 물건들을 최대한 빠르게 가져다 주는 식으로 도왔다.
텐트는 한 명이서 쳤지만, 이상하게도 텐트 자체는 우리 텐트가 부대에서 가장 빠르게 쳐졌다.
"와 저거 정해성 상병님이 쳤냐? "
"예 그렇습니다. "
"이걸 어떻게 벌써 다 쳐…… 미쳤네……. "
옆 텐트인 2소대 사람들이 한 마디씩 거들고 갔다.
정해성 상병님은 그런 말에는 아랑 곳 않고,
"다들 수고했다. 안에서 좀 쉬어. "
그렇게 말하고는 혼자서 훌쩍 떠나버렸다.
나는 한인혁 일병님과 함께 짐을 텐트 안에 적절히 정리해 놓기 시작했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D형 텐트라고 해봤자 얼마나 넓을까 싶었는데, 두세명이서 쓰기에는 적절한 크기의 텐트였다.
이 정도면 자는데는 크게 무리 없을 것이고, 짐도 좀 놔둬도 괜찮을 것이다.
훈련소에서 한 번 숙영했을때 지었던 A형 텐트랑은 정말 차원이 다른 넓이였다.
문제는 저녁식사 전 쯤에 일어났다.
숙영지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샤워시설이 따로 있는 훈련장이기도 했어서,
우리는 그 샤워장을 빌려서 간단히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정해성 상병님은 어딜 가셨는지 계속 보이지 않아서, 나와 한인혁 일병님만 따로 샤워를 하러 텐트동에서 샤워장으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아……. 존.나 아프네……. "
텐트동에서 샤워장까지 가는 계단참이 무척 경사가 높았는데,
한인혁 일병님이 가다가 발을 헛디뎌 버린 것이다.
아마 아침에 행군을 한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런 것도 있으시겠지…….
"괜찮으십니까? "
"으으……. 일단 너 먼저 씻으러 가. 나 상황실에서 약 좀 받아올게. "
"제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
"괜찮대도…… 아야야……. 아 좀 아프네 ㅠㅠ "
"저한테 기대면 됩니다. 많이 다치신 것 같습니다. "
"하필이면 훈련 전에…… "
한인혁 일병님의 다리는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지만,
상황실에서 응급조치를 취했는데도 붓기가 점점 심해지는 모양이었다.
"조심 좀 하지 그랬냐. "
"경사가 급한 지 잘 안 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
정해성 상병님이 조금 있다 나타나셨고,
뒤 이어서 작전과장님도 같이 나타나셨다.
"보현이 선임이구나. 다리는 좀 괜찮아? "
환자 앞이었지만 아랑곳 않고 담배를 물고서는 작전과장님이 그렇게 물어왔다.
상황실이 금방 담배연기로 뿌얘졌다.
한인혁 일병님은 고통을 억지로 참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
"골절은 아니겠지만 좀 심하게 삔 것 같은데? "
부은 다리를 쓱 보더니 과장님은 말을 이어가셨다.
"훈련은 못 뛰겠고…… 보현아 차량 어떻게 되지? "
"아마 응급 후송차량 한 대 있을 겁니다. "
나는 수송대 선임들한테 쪼여가며 짰던 훈련계획을 떠올리며 얘기했다.
"그거 태워서 대통 후송 보내고, 그 뒤로는 부대서 상근 애들이랑 교대로 전화대기 하면 되겠다. "
그 말을 듣자 한인혁 일병님은 조금 안도한 표정이었다.
사실 그 누구보다도 유격을 빼고 싶어 했던 건 한인혁 일병님이었지만, 이게 이런 식으로 실현이 될 줄이야…….
아, 참고로 대통 이라고 하는 건 대전 소재의 국군통합병원을 말하는 것이다.
유격장에서는 물론이고 부대에서 가장 가까운 국군병원이라 다들 많이 신세지고는 했다.
"그럼 운전병 부릅니까? "
"본부중대장한테 얘기하고 알아서 처리 하라 해. 난 바쁘니까 먼저 간다잉. "
그렇게 말하고 떠나버린 과장님.
후에 들어온 본부중대장님이 "과장님이 그렇게 하라면 하는거지 뭐. " 하고는 그냥 그렇게 처리해버려서 한인혁 일병님은 순식간에 부대로 복귀하게 되었다…….
목발을 짚고 터덜터덜 차에 오르는 한인혁 일병님은 기운이 축 쳐져있었다.
"부대서 보자. 훈련 잘 받고 와. "
"알겠습니다. 한인혁 일병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
고개를 끄덕이고,
한인혁 일병님은 차량에 타서 어둑해진 훈련장 바깥으로 사라졌다.
- 16.
해가 완전히 지고, 깜깜한 밤이 되었다.
야산 한 가운데에 위치한 훈련장은, 상황실로 쓰는 건물 한 채 말고는 그저 텐트들에서 새어 나오는 손전등 빛 줄기들 뿐이었다.
그런 텐트들 사이에서,
"....... "
"....... "
나랑 정해성 상병님은 단 둘이 텐트에 있게 되었다.
정해성 상병님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편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놀러오는 사람도 없었다.
들른 사람은 딱 한 명, 원준이였다.
"보현이 있냐? "
문 닫힌 텐트 밖으로 깐돌깐돌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장난끼 가득한 목소리는 정말 언제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반년 가까이 지냈는데도 이 정도면야……
"어. "
"들어간다? "
"왜. "
"걍 놀러왔는데. "
바람에 날려갈듯한 가벼운 목소리를 텐트 구석에서 얌전히 누워서 듣고 있는 정해성 상병님.
대꾸도 안하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야……
"여기 정해성 상병님도 계셔. "
"아? 아 맞다 그러네……. "
그럼 이거 주고 갈게 하더니 텐트 옆으로 쓰윽 컵라면 두 개를 내미는 원준이.
오 뭘 또 이런 걸.
"정해성 상병님도 맛있게 드십쇼. "
원준이는 뭔가 정해성 상병님이랑 얘기도 잘 나눠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어색하게 그렇게 얘기했다.
정해성 상병님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의류대에서 맛다시랑 참치를 꺼내더니,
"가져가. "
그렇게 쓱 원준이에게 그걸 내미셨다.
순식간에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원준이……
"와!!!! 어디서 사셨습니까? PX에도 없어가지고 못 가져 왔는데. "
그 범인이 이 사람이다 원준아. 겉에 속으면 안돼. 이거 매점매석이라고.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ㅎㅎ 보현이 너도 푹 쉬어! "
그렇게 말하고 진짜 기쁜듯이 폴짝폴짝 뛰면서 가는 원준이는 진짜 평소 그대로의 이미지였다……
뭐가 맨날 저렇게 신날까……. 하기사 오늘은 업무 안해도 되니까 그게 기쁜 걸 지도 모른다.
"쟤는 원래 저렇게 정신없어? "
텐트 천장에 매달린 조명 아래로 피곤한 표정을 짓는 정해성 상병님이 말을 꺼냈다.
반쯤 옆으로 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뭔가 잘 알 수 없었다.
"원래 저런 성격입니다. "
"ㅋㅋ 그래도 재미는 있겠다. "
"눈치가 좀 많이 없는 애라서……. 그닥 재밌지는 않습니다. "
"그래도 라면 챙겨다 주는 동기는 귀하지. 지환이 봐라. 얼마나 정나미 없는지. "
이지환 상병님을 얘기하시는 정해성 상병님.
실제로 이지환 상병님은 정해성 상병님 만큼이나 부대에서 칼같은 사람으로 유명했다.
동그란 안경을 끼고는 모든 중대 사람들의 부탁을 "안 돼. " 로 일축시키는 사람…….
"슬슬 가자. "
갑자기 정해성 상병님이 자리를 털고 나갈 준비를 하셨다.
활동화를 신는 걸 보니 아주 밖으로 가실 모양인데…….
"어디 갑니까? "
"따라와 그냥. "
늘 그렇듯 듬직한 덩치로 앞장서시는 정해성 상병님.
희미하게 남아있는 달빛만이 조명이 되어 가는 길을 어슴푸레하게 비추고 있었다.
조금 걸었을까,
우리는 텐트가 모여있는 언덕의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언덕 아래로는 상황실 건물과 그 주변으로 유격장의 전경이 보였다.
"앉아. "
정해성 상병님은 먼저 근처 가장자리에 앉으시면서 얘기했다.
언덕은 꽤 급경사였지만, 그렇다고 못 앉을 정도로 불안정하진 않았다.
생각해보니 오늘 저녁에 뭔가 할 말이 있으시다고 했던 정해성 상병님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말 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조금은 어색한 침묵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이 총총하게 박힌 별 하늘 아래에 살짝 깔렸다.
귀뚜라미 소리가 침묵을 조용히 지켜주고 있었다.
한참 있다가, 그는 정적을 깼다.
"조금 확실하게 해 두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래. "
말투가, 정해성 상병님의 말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온화한 말투였다.
하지만 동시에 진지하기도 해서, 나는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약속 하나 하자. 너도, 나도 거짓말은 안 하기로. "
살짝 떨리는, 하지만 낮은 목소리는 여전히 정해성 상병님의 것이었다.
그 떨림은 뭔가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서, 나도 조금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시려고 하는 걸까?
하지만 애초에 나는 그에게 숨길 것도 없었고, 숨길 작정도 없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
무슨 말을 하실 진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 무겁게 대답했다.
"너……. 남자 좋아하냐? "
그리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도대체 왜 지금 그런 말이 여기서 나오는거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네? 아니오?
망설이고 있는 것 자체로도 이미 YES에 가까운 대답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아니오라고 즉답 할 수도 없었다.
이걸 물어오는 정해성 상병님이 싫은 것도 아니었지만,
동시에 유쾌한 질문도 아니었다.
짧은 찰나에 오만 생각이 지나가고, 이 사람이 이 질문을 했을 이유를 드디어 하나 생각해 냈다.
박상욱 병장.
분명히 그 일이 있었을 떄, 나를 아웃팅을 했던 것이 틀림없다.
진짜 끝까지 나한테 엿을 남기고 가는구나…….
귀뚜라미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하지만…… 나는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에게 거짓말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뭣보다 내가 게이라고 해서 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싶었다.
그래서 조용히 대답을 했다.
"예. "
말이 벽돌처럼 무겁게 내 입에서 나오자마자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기화되듯이 내 앞에서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정해성 상병님의 고개는…… 그 답지 않게 푹 숙여져서 나한테 잘 보이지 않았다.
"박상욱 병장한테서 들으셨습니까? "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정해성 상병님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역시 그 인간일 줄 알았어.
뭘 믿고 넘겨짚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훌륭하게 적중했다.
씨.발새끼…….
"부대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
"안 해. 할 이유도 없고. 애초에 내가 이 일 아니었으면 할 얘기도 아니었고. "
내가 너무 차갑게 말을 해서 그런지,
정해성 상병님은 도리어 당황하고 있었다.
그도 긴장을 해서 그런지 무릎 위로 손을 모아쥐고 있었다.
"그럼……. 할 얘기가 뭡니까. "
내가 생각해도 내 입에서는 이런 상황만 되면 너무 차갑게 말을 내뱉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말 한 마디 잘 못 했다간, 내가 부대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겉잡을 수 없게 틀어져 버릴 테니까.
"음…….. "
정해성 상병님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나는 대충 짐작을 해 버렸다.
그래서 그를 난처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제가 정해성 상병님 좋아할까봐 그러십니까? "
"....... "
내가 덤덤하게 물은 질문에,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의 고개는 여전히 숙여진 채로, 도통 표정을 알 수 없게 했다.
짧은 찰나에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정해성 상병님한테 남자로서 설렜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나에게 주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관심,
어려울 때 마다 나타나서 척척 상황을 해결해 주는 선임으로서의 능력,
그리고 툴툴대지만 할 건 다 하는 그의 성격.
어쩌면 일반 사회에서 사적으로 만났었다면, 좋아한다고 한 마디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그를 잃을 순 없었다.
차라리 그것보다 못한 관계가 되더라도, 거짓말을 해서라도 관계를 잡아야 했다.
참을 수 없는 침묵이 계속 돼서, 나는 입을 열고 말았다.
"정해성 상병님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경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
나는 왠지 모르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눈물이 또 나려고 하고 있었다. 대체 나는 뭐가 억울해서 우는 것일까.
"오해, 냐? "
정해성 상병님은 갑자기 나한테 그렇게 돌직구로 되물었다.
쓰윽 고개를 드는 정해성 상병님의 얼굴은, 어둠속에서도 알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거짓말은 안 한다고 했었던거, 까먹었을까봐 딱 한 번만 물어볼게. "
정해성 상병님은 숨을 살짝 삼키고, 터무니 없는 질문을 했다.
"너가 호감이 있다고 내가 생각했던 거, 오해야? "
……..
정말 집요하게 내 아픈 곳을 명치로 찌르듯이 질문해오는 정해성 상병님.
이미 그에게는 내가 하는 말이 어떤게 맞고 틀린지 다 아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예 라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어색한 사이가 될 뿐입니다…….
정해성 상병님의 눈은 그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느때와는 달랐다. 그의 시선은 내 눈 안까지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내가 졌다.
진짜 이건 어떡 할 도리가 없다.
다 알고서 물어오는 것인데, 내가 여기서 아니오라고 해봤자 결국은 똑같아…….
"죄송합니다……. "
"....... "
"거짓말 해서 죄송합니다……. 저……. 정해성 상병님 좋아합니다……. "
눈에서 눈물이 났다.
푹 숙여진 얼굴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
말을 이어나가는데 거슬리게 자꾸 콧물이 나와서 훌쩍거리게 됐다.
너무 부끄럽고…… 죄송하고……
그의 호의를 왜 그냥 호의로만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그런 내 자신한테 너무 화가 났다.
그런 내 어깨에, 익숙한 손이 톡톡 하고 노크를 했다.
정해성 상병님은 내 옆에서 말없이 어깨를 토닥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뭘 우냐 그런 걸로. 좋아할 수도 있지. "
토닥거림은 더 기폭제가 돼서,
눈물이……. 더 멈추지 않게 되었다.
대체 이렇게 울어본 게 얼마 만인지…….
마음이 너무 저리고 아프다. 심장이 억죄어오는 느낌이 너무 싫었다.
"죄송합니다……. "
끄윽 거리면서 나는 간신히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 할 뿐이었다.
진짜 부끄러워 죽고싶다…….
그런 나한테 갑자기 정해성 상병님은 이상한 걸 물어왔다.
"그……. 남자랑 연애는 안해봐서 그런데……. "
다행스럽게도 정해성 상병님은 내가 그런 말을 했는데도 아무렇지 않으셨다.
오히려…… 좀 더 자연스러운 느낌?
궁금증이 드디어 해결됐다는 표정으로 정해성 상병님은 피식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꺼냈다.
"걍…… 너는 좀 어떤가 해서. "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내 귀는 의심을 너무 많이 받는다.
그도 그럴게 너무 믿을 수 없는 얘기만 계속 들어서 그런 것일터다.
"저 말씀이십니까……? "
너무 놀라서 울던 것도 멈춰버린 것 같다.
뭘까 이 기분……. 자이로드롭도 이런 느낌은 아닐것이다.
냉탕 온탕에 담금질 되는 기분……
"그래. 너가 어지간히 신경이 쓰여야 말이지. "
머쓱거리면서 뒷통수를 긁는 정해성 상병님.
아니 뭐야 이게.
나 지금 얼떨결에 고백하고 그게 성공한 그런 상황인가?
"어지간히 소심해가지곤…… 어휴…… "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마구 헝클어뜨리는 정해성 상병님.
그런 그를 나는 진짜 멍해져서 지긋이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저……. "
"몰라. 그 뭐……. 사귀든지 말든지. "
싫음 말고. 하고 정해성 상병님은 진짜 믿을 수 없이 그런 말을 해 왔다.
아니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셔도……. 나는…….
싫을 수가 없잖아…….
나는 아까 울었던게 너무 머쓱하고 부끄러워서,
그냥 정해성 상병님을 꼭 안는걸로 대답을 대체했다.
조금 쌀쌀했던 바깥공기에 대조되는 정해성 상병님의 온기가 품 안으로 들어왔다.
"으이구……. 바보네. "
그런 나를 정해성 상병님은 꼭 안아 주셨다.
진짜 너무 꿈만 같았다.
내일이 되면 거품이 돼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과,
꿈이면 어떡하지 하는 이상한 불안함이 공존하는…….
하지만 이게 꿈일리가 없었다.
"고민 많이했다. 너도 많이 했을테지만……. "
고개 옆으로, 정해성 상병님이 그런 말을 했다.
"그래도 지금 말 안 해두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ㅋㅋ "
"아닙니다…… 저 인기 없습니다. "
"이래 놓고 막 줄서있는거 아니야? 순번표 뽑아서? "
"ㅋㅋㅋㅋㅋ 진짜 아닙니다. 저 아싸라서…… "
"바보네 ㅋㅋ "
그리고는 정해성 상병님은 내 이마에 쪽 하고 키스를 했다.
예전의 볼꼬집이랑 똑같이 아무 예고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지간히도 놀라네……. "
"그……. 이런 거 할 때는 조금 말씀이라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싫은데? 놀라는 모습 커엽거든. "
"....... "
이 사람, 뭔가 이런 상황이 되면 엄청 짖궂어 지는구나.
나는 결심을 하고, 조금 정해성 상병님이랑 떨어졌다.
갈색 눈동자는 갑자기 물음표를 띄우고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눈동자에 겹쳐지듯이, 나는 천천히 정해성 상병님과 입을 겹쳤다.
시간이 멈춰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꿈이라면 정말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게 현실이라면……. 이대로 평생을 갔으면 좋겠다.
너무나도 궁금한 게 많았지만,
나는 지금은 참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가 같이 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을 것이고,
그때 차근차근 물어보면 되니까.
입이 천천히 멀어져간다.
처음보는, 정해성 상병님의 부끄러워 하는 표정.
나를 진짜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구나.
그런 안도감이 들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럼 오늘부터 1일로 치는거야? "
정해성 상병님은 머쓱하게 그렇게 물어왔다.
그거 너무 상투적인 멘트잖아…….
본인도 너무 머쓱한지 조금 고개를 돌리면서 얘기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ㅋㅋㅋ "
"그래애 ㅋㅋㅋ "
머쓱하게 웃는 우리 사이를 보름달이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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