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너머의 세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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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와 6월 말에 헤어진 후, 마치 상처받은 나의 심장을 조롱하는 듯, 거북이 걸음과 같이 느릿하게 흘러가던 시간도 어쩌다 돌아보니 10월 말에 접어들고 있었다.

 

 

간신히 한 회사에 취업하게 되어 입사한지 겨우 8개월이 접어들고 있었다.

작은 무역회사였지만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실무적인 면에서 많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딴에는 이참에 열심히 회사일에만 몰두하자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생각이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따금씩 늦은 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면 그의 모습이 슬며시 눈앞에 나타나서 아픈 상처를 헤집어댔다. 어둠속에서 보이지 않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미 나의 존재는 기억속에서 조차도 존재하지 않을 그의 모습이 나를 여전히 괴롭혔다.

 

처음에는 마지막에 그가 나에게 준 상처의 말만이 고스란히 남아 분함을 이기지 못해 저주를 퍼부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되자 그가 나에게 베풀었던 다른 일들도 나의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한 겨울에 갈비집에서 알바 시간이 끝난 후, 그를 만나기로 한 종각역으로 출발할 때였다.

손님들이 여전히 식사를 하고 있는 그 앞에서 큰 목소리로 ‘일하는 것이 너무 느려터졌다’는 사장의 잔소리를 들은 후, 가게 밖으로 나와 낡은 패딩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터덜거리면서 지하철역으로 걷고 있었다. 주머니속에 찔러넣은 왼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속이 비어있는 낡은 지갑의 모서리가 마치 나의 너덜거리는 삶을 비추는 듯 했다.

 

‘얼마나 하길레’ 라는 귀에 울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나는 지하철 역을 지나쳐 그냥 걷기로 했다.

아무래도 지하철을 탄다고 해도 갈아 타는 것 까지 감안하면 걷는 것도 그리 멀어보이지 않아 보였다.




도로위의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2월 말의 찬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와 나의 낡은 패딩을 뚫고 나의 살을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한기가 돌면서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몸은 점점 더 움츠려들고 나의 발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더욱 더 빨라졌다.

그래도 처음에는 한편으론 막막하게 느껴졌던 거리가 점점 줄어들어  어느 덧 종각역의 4번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가슴에서도 드디어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건물의 코너를 돌아 으레 그렇듯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한 내 또래의 타인들이 다정한 대화와 따뜻한 웃음소리로 가득 채우고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한쪽 구석에서 문가를 지켜보고 있던 그가 나를 보자 얼굴 한 가득 웃음을 머금고 손을 들어보였다. 슬며시 사람들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쳐 그의 건너편 좌석에 앉았다.

나를 보던 그의 표정이 천천히 변하더니 나를 향해 몸을 앞으로 굽히고는, 두 손을 내게로 뻗어 손바닥을 펴고 나의 볼을 감싸 쥐었다.

“어떻게 된거야?” 두 눈이 똥그래져서 놀란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알바하는데서 여기까지 걸어왔어. 괜찮아 형.” 주변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나의 볼에서 그의 손을 떼지 않았다.

“볼이 꽁꽁 얼었는데 뭐.” 그가 그런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나의 눈을 들여다 보는 그를 마주 보면서 그의 손바닥 안에서 점점 따뜻해지는 나의 볼이 느껴졌다.

 

그래, 나의 차가운 삶 속에서도 이렇게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삶이... 산다는 것이 완전히 무의미 하지 않다는 것을....그의 그런 미소가, 손길이, 현실의 삶 속에서 넘어지고 걷어 차이는 나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었다.

 

“그까짓 돈 몇푼 아낀다고 너 또 여기까지 걸어왔다고?” 그의 얼굴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한 겨울인데 네 패딩이.....” 내가 입고 있던 상의에 눈을 한번 돌린 후, 그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원래 내가 추위를 안타니까. 이거면 충분해.” 자존심 따위는 버린 지 오랜 나의 삶에서도 그의 그런 반응은 나에게 불편함과 비참함을 슬며시 느끼게 했다.

“커피보다 우선 먼저 나가자.” 그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잠자코 그냥 따라와 봐.” 그가 그를 올려다보는 나를 빤히 내려다 보면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 왜 그래 형. 나 정말 괜찮아.” 주변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나는 그를 향해 슬며시 손사래를 쳤다.

“내가 널 몰라?” 그가 화난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다시 사정하는 듯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냥. 여기 근처에 중저가 브랜드 패딩을 파는 데를 알아. 그리고 이월 상품이라 얼마 하지도 않아.” 그가 손가락을 까딱까딱 해 보이면서 나에게 일어서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난 꼼짝 않고 그대로 앉아서 그런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너. 이러면 나, 너 생각땜에 걱정되서 밤에 잠도 못자. 이 녀석아. 형 위해서 한번만 져 줘. 응?” 그의 얼굴 가득 안쓰럽다는 표현이 가득하게 번져있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망설였다. 내가 그를 연인으로 사귄다는 이유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에게 덕을 보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고집 부리지 말고 얼른. 제발. 응?” 그가 마침내 사정하는 투의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그의 말에 마침내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테이블을 돌아 슬그머니 다가와서 슬며시 나를 껴안았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미안해.” 나의 말을 끊으면서 그가 나의 귓속에 속삭였다.

“내가 너무 멋대로고 서툴러서 네 감정 다 못 헤아려주는 거 용서해 줘.”  말을 마치고는  슬며시  그는 나의 어깨를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그의 다정했던 그런 모습이, 나를 감동시켰던 그의 말투와 행동이 생각이 날 때면 이미 끝나버린 그가 나의 머릿속에 그림자처럼 남아있는 그를 지우기 위해 나는 그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이미 끝난 사이였고 거기까지가 그와 나의 인연이었다. 이제 모든 것은 그와 나의 삶의 범위 밖으로 밀려간 것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를 이해하고 싶었고 나는 순전히 그런 그를 오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던지 그의 마지막은 그의 변심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 때문에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삶은 항상 나에게 잔인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죽으라는 법은 없는 듯 해 보였다.

 

그럭저럭 친했던 친구의 가까운 친척분의 도움으로 길었던 고시원의 쪽방의 삶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숨쉬기에도 갑갑했던 그 곳에 있기 싫어서 가능한 늦게 들어가서 몸을 눕히고 잠만 자고는 다시 눈이 뜨기 무섭게 나와 버리고 싶었지만 그 곳의 밖은 모든 것이 돈으로 연결되는 고단한 세상이었다.

그런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운좋게도 드디어 나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작은 다세대 주택을 소유하고 있던 그 분은 넉넉한 마음씨로 나의 사정을 들어주셨다.

3호선 원흥역에서 넉넉잡아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그 다세대 주택의 방 하나를 그 아저씨는 무보증에 월 10만원이라는 가격으로 나에게 넘겨주셨다.

믿기지 않는 그의 호의에 ‘아무래도 꽤 오랫동안 비어있던 방이라서 그저 깨끗하게만 살아달라’ 는 그의 말에 나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현했다.

 

 

그렇게 나는 일년 반 동안 그와 함께 보냈던 종로를 포함한 서울의 여러 번화가를 잊고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 내 마음속의 그 모든 상처가 거의 아물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씩 생활이 나아진 듯 느껴지자 마음속 한 구석에 꿈틀거리면서 다시 누군가와의 만남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제 겨우 숨통이 트여 살아갈 만 하다는 것이라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만족하면서 살아가자고 내 자신을 타일렀지만 나의 공허한 마음 한쪽에서는 누군가의 미소와 손길과 관심이라는 빛을 보지 못하고 누르스름하게 쳐져 있는 집안의 식물의 이파리와 같은 나의 삶에 생기를 불어 넣어줄 사람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회사일이 끝나가던 어느 금요일 오후에, 인터넷 게시판에서 모임을 주선하고 있는 몇몇 글을 읽어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을 찾아 사람들의 무리에서 끈적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배회하다가 취기로 가득 채워진 몸을 이끌고 공허한 마음을 쥐고는 현관문의 비밀 번호를 누르고 있는 나의 모습이 느껴졌다.

 

 

그리고, 10월 마지막 주말, 할로윈 분장을 한 사람들이 거리를 누비던 토요일 밤, 늦은 시간에 새로울 것이 없는 또 다른 술 모임을 찾았다.

 

일렬로 길게 붙여진 테이블에 12명이 둘러앉아 각자의 얼굴에 기대감과 실망, 피곤함과 열정, 그리고 웃음을 담고 온갖 다른 색조의 목소리로 신나게 떠들어 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남자의 시선이 가끔씩 순간순간 나의 얼굴에서 멈추고 머문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의 표정이 적당히 어색해져 버렸다. 그리고 슬그머니 의식적으로 눈여겨 본 그는 적당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싫지 않은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가끔씩 그와 순간순간 눈이 마주칠때면 무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그를 발견했다.

 

취기가 온몸에 퍼지던 어느 시간, 그날의 방장의 말에 따라 게임이 시작되었다.

점차 몽롱해진 나는, 그저 그런 분위기에 휩싸여 헤벌레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가 나누어주는 쪽지를 받아놓고 앞에 앉은 남자가 나에게 들어보이는 소주잔에 나의 잔을 부딪치고는 한입에 털어 넣었다.

 

소주잔을 ‘탁’ 하고 테이블 위에 기분좋게 내려놓는 순간, 방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6번과 10번” 그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표정이 번졌다.

“20초 동안 프렌치 키스하기!” 그의 말에 모두 자신의 번호를 확인하고는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내 손안에 있는 쪽지를 펴 보았다.

‘10’ 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슬며시 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

방장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쑥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왔다.

“초는 내가 잴 테니까, 진짜 애인하고 하는 것처럼 아주 찐한 키스를 하는 겁니다. 아니면 무효! 더한걸로 벌칙을 줄 거예요.”

‘까짓, 그게 뭐 대수라고...’ 속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생각했다.

내 눈 앞에서 내 상대가 다시 한번 멋쩍은 웃음을 한번 지어보이고는 다시 묘한 미소를 띄면서 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

“자! 자! 더 찐하게...1초...2초..3초...” 방장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그리고 나의 입을 벌리면서 그의 혀가 나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퀴퀴한 소주 냄새가 서로의 입안에 번졌다. 그리고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의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곁눈질로 보게 된 나의 시야에 내 앞의 남자가 홀의 반대편 쪽으로 고개를 떨구고 나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15초...16초...”

그가 벌떡 일어나서 가게의 문 쪽을 향해서 걸어가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내 입술에 닿아있던 남자의 입술이 떨어진 후, 다시 한번 쑥스러운 표정을 보이면서 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끈적한 웃음소리와 왁자지껄한 대화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 밖으로 나왔다.

 

가게 밖, 문 옆의 빈 술병을 담아 놓는 상자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는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 본 후, 슬며시 기지개를 켰다.

 

무릎에 무엇인가 닿는 느낌에 내려다 보니, 그가 담배와 라이터를 집은 손을 나에게 내밀고 있었다.

“아...저 담배 안피워요.”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사양을 했다.

“그럼 왜 나왔어요?”

“.......”

그는 다시 묻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밤공기 좋네요. 딱 알맞게 쌀쌀하고...”

“좋았어요?” 그가 나의 말을 끊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요?” 하지만 이미 그의 질문이 어떤 의미인 줄은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모르는 척 해야 할 듯 했다.

“............”

“좋아서 하나요? 누군지도 모르는 랜덤한 상대와 그냥 흔한 게임만 한건데.... 아무 의미 없는 거잖아요.” 심드렁 하게 내가 말했다.

“전화번호 줄래요?” 그가 나를 다시 올려다 보면서 물었다.

그의 말에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내려다 보았다. 평범한 얼굴에 모나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그의 얼굴에 번져있는 우울하고 외로운 느낌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이 또한 큰 의미가 없을 듯 했다.

그가 나의 인연이 아니라면 말이다.

“공일공...” 나의 전화번호를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해 두는 대신에 슬며시 자신의 휴대폰을 나에게 내밀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건네 받으면서 순간 그의 손가락의 느낌이 전해졌다.

 

그리고 천천히 나는 그의 휴대폰에 나의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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