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그 날, 그 부대에서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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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조금씩 흘러서, 슬슬 가을이 끝나가는 초겨울 무렵이 되었다.
덕분에 아침기온은 점점 내려가서 쌀쌀함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다행인것은 거의 4일에 한 번 꼴로 아침점호를 거를 수 있었다는 정도.
상황 근무자가 거의 없어서 진수도 역시 작전과로 오자마자 상황 근무병으로 투입되었다.
문제라면 진수의 성격은 정말 사무업무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아……”
새벽 세 시, 나는 연대 간부에게 잔뜩 털려서 기분이 안 좋은 본부중대장님 눈치를 보면서 상황 수습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진수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 쩔쩔 매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별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잤냐?”
“죄송합니다……”
“미쳤어?”
내가 날카롭게 다그치자, 진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가 새벽 세 시에 생활관에서 자다가 불려나갈만큼 상황이 꽤 안좋았다.
우리 대대에서는 상황 전파용 단말인 ATCIS-R이라는 노트북으로 연대와 통신을 하고 있었는데,
상황전파 훈련을 하기 위해서 그 단말로 새벽에 불시에 연대나 사단에서 대대에 상황전파 훈련을 하루에 한 번 꼴로 했다.
그러면 상황병은 그 상황을 받아서 근무 초소에 상황을 전화로 얘기하고, 그러면 근무초소에서 연대나 사단 지통실로 상황을 그대로 다시 재보고 하는 식으로 상황 전파 훈련이 끝나고는 했다.
문제는 그 훈련을 나는 근무 이래로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는데,
진짜 대범하게도 이 자식은 졸다가 그걸 놓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어제 복초까지 서면서 알려줬는데……
그것도 하필이면 본부중대장님 근무에 이 사단을 벌렸으니 아마 또 당분간은 상황근무에도 투입을 못 시킬것이 뻔했다.
아니면 내가 복초로 근무를 서던지……
“애좀 잘 가르쳐봐.”
이 상황이 맘에 안드는 또 한 사람, 강혁 상병님이 평소의 장난끼는 싹 사라진 짜증나는 표정으로 책상을 탁탁 치면서 말했다.
사실 강혁 상병님이 나한테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상황 전파 임무는 상황병이 하는 업무가 맞기는 하니까……
“죄송합니다.”
“니가 뭘 죄송해.”
내가 재차 죄송하다고 했지만, 강혁 상병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씀하셨다.
차라리 오늘 정해성 상병님이 근무였더라면…… 조금은 나았을텐데……
여러모로 진수가 정말 운이 없기도 없다.
결국 수습을 다 하고 내가 상황실을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새벽 네 시가 넘어서였다.
가뜩이나 그 날 야근하느라 거의 11시에나 생활관에 들어갔던 나는 4시간 남짓밖에 자질못했다.
“표정이 안좋다?”
그 날, 일과가 끝나고 나서 좌측현관 벤치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던 내 옆에,
슬며시 한 사람이 다가와서 앉으면서 그렇게 넌지시 물었다.
정해성 상병님이었다.
“오늘 너무 힘들었습니다……”
“너네 작전과 신병? 걔 때문이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투덜대는 이유를 단박에 알아맞춘 정해성 상병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하면서 얘기했다.
“같이 근무 선 사람이 강혁 상병님이잖아. 모를 수가 없지. 그렇게 떠들고 다니는데.”
나는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 느낌이 들어서 머리를 감쌌다.
저절로 이마에 손이 짚어진다. 작전과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면…… 근무는 더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너 새벽에 불려갔대며.”
“예…… 대충 수습하니까 네 시 조금 넘었습니다.”
“많이 힘들었겠다.”
그런 내 어깨에, 정해성 상병님의 손이 탁 하고 얹혔다.
짜증나고 우울한 이 순간에, 그나마 위로가 되는 단 하나의 손이었다.
내 답답한 성격에 아마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이런 얘기도 할 수 없었겠지.
그냥 속으로 끙끙 앓다가 곪았을 것이다.
그때, 막사 좌측현관 유리문이 살짝 열리고는 그 틈으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막 오침을 끝내고 나온 진수였다.
“……”
“……”
그런 진수를 나와 정해성 상병님은 쓱 쳐다봤다.
진수는 그런 우리 둘을 보고 엄청나게 놀라더니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는 담배를 꺼냈다.
그러고보니 얘 담배폈었지……
저녁 공기는 꽤 추웠다.
11월 말이어서 그런지 이제 기온은 거의 한 자릿 수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조금 있으면 곧 영하가 되고, 첫 눈도 볼 수 있겠지.
그런 차가운 공기 속에서 어색한 정적이 지속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진수는 말 없이 담배를 폈다.
우리 둘의 눈치를 살피느라, 벤치에 앉지도 못한 채 말이다.
“김보현 일병님……”
한참 뒤에야 진수는 그렇게 어렵게 말 머리를 꺼냈다.
나는 대답 대신에, 진수를 쓱 하고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
“진짜 죄송합니다……”
“후우……”
재차 죄송하다고 하는 진수가 퍽이나 안쓰럽긴 했지만,
동시에 나는 첫 근무때부터 졸아버린 진수를 이대로 넘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수십가지 생각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웠다.
“너 진짜 다음번에 졸면 죽여버린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화를 삭히지 못하고 결국 입밖으로 내 버렸다.
진수는 그런 내 말투에 크게 놀란 것 같았고, 고개를 더 푹 떨궜다.
동시에 내 옆에 앉은 정해성 상병님도 어깨를 조금 꽉 쥐었다.
순간 속으로 나도 아차 싶었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가봐.”
“예.”
담배를 다 핀 것 같은 진수는, 그대로 담배를 끄고 막사로 들어갔다.
휑하게 남은 정해성 상병님과 나.
“너 묘하게 말투가 나 닮아간다?”
정해성 상병님은 살짝 걱정어린 말투로 그렇게 나한테 말했다.
나도 놀라긴 했다.
사실 화가 그렇게 끝까지 치민 적이 내 인생에서 별로 없어서 그랬을까……?
“죄송합니다……”
“뭐래 ㅋㅋ 죄송할 건 아니야. 걱정이라 그런거지.”
“그냥 걱정시켜드려서 죄송해서…… 그렇습니다.”
“나도 내 말투 좋아서 쓰는거 아니야. 너무 그런 것 까지 닮지는 마 ㅋㅋ”
“알겠습니다.”
정해성 상병님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머쓱하게 웃었다.
조금은 바보같기도 한 정해성 상병님의 무방비 웃음을 보니, 나도 모르게 속에서 웃음이 났다.
진짜 화가 너무 났는데 그것 때문에 간신히 진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원래 신병때는 다 저러고 사는거야. 너도 알잖아.”
“그래도 첫 근무때는 원래 안 저러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ㅋㅋ”
정해성 상병님은 그렇게 내 말에 동의하면서, 하늘을 쓱 올려다보셨다.
이미 밤이 완연한 하늘은 조용히 별만이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 모레 근무때도 본부중대장님 아냐? 그때 근무 잘 서면 되지.”
그런 정해성 상병님의 말에, 나는 넌지시 근무표를 떠올렸다.
정말 겹치기 어려운 나와 정해성 상병님의 근무에는 본부중대장님이 같이 편성되어 있었다.
오히려 이게 차라리 더 나을수도 있다.
그때 근무 빡세게 하면 본부중대장님도 신경을 조금 덜 쓰겠지.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ㅋㅋ”
“ㅋㅋ 드디어 표정 풀었네.”
“정해성 상병님이 와줘서 다행입니다 ㅋㅋ”
“이럴 때 말 들어주고 하는게 애인 아냐? ㅋㅋ”
갑자기 풀어진 분위기에 정해성 상병님이 갑자기 불쑥 그런 얘기를 했다.
난 너무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돌아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듣습니다 ㅋㅋ”
“뭐래. 아무도 없거든 김곰탱씨?”
“으으……”
최근 들어서 정해성 상병님은 나를 ‘곰탱’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김곰탱은 기본이고 바보곰탱이 등 바리에이션이 계속 늘어나는 건 기분탓이겠지……
“정해성 상병님.”
“왜 ㅋㅋ”
“저 춥습니다 ㅋㅋ”
“안아달라고?”
“헐……”
사실 그냥 추우니까 들어가자는 말이었지만,
대뜸 그렇게 정해성 상병님은 나를 와락 껴안아 버렸다.
그렇게 길진 않았지만, 정해성 상병님은 정말 행복해보였다.
아마 내 표정도 비슷하겠지……?
“오늘은 막사 현관이니까 여기까지.”
엣흠, 하고 부끄러운 기색을 숨기면서 정해성 상병님은 자리에서 탁 일어섰다.
“바보같이 뭘 멍때려. 들어가자 ㅋㅋ”
“예 ㅋㅋ”
막사 안으로 들어가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이 지루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군생활을 버틸 수 있었을까?
밑에 후임 하나 들어온 것 만으로도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걸 다 꿋꿋히 참고 버텨내는 정해성 상병님이 무척 대단해 보였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게 동경이라는 걸까?
그리고 다음 날,
여느때와 다름 없는 정말 바쁘고 평온하고 아무 일 없는 일과시간에 나는 인사과 업무일지를 보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대민지원??”
너무 생소한 단어에 나는 그만 혼잣말로 내뱉고 말았다.
내 양 옆에 앉아있는 원준이와 진수도 그런 내 혼잣말에 흥미를 가지고는 쓱 쳐다봤다.
“대민지원이 왜.”
그리고 뒤에서 늘 여전히 모락모락 담배연기를 올리고 계시는 과장님이 내 혼잣말에 반응하셨다.
이런 촌동네에 대민지원 할 데가 어디에 있다고 우리 부대가 대민지원을 해……?
“저희 대민지원 나갑니까?”
“어 뭐…… 뭐시기냐 여기 지역 축제 교통정리인가? 하잖냐.”
“축제 말입니까?”
“아 보현이 너 올해가 처음이지?”
그러고는 과장님은 나를 손짓해서 부르더니, 모니터에 쓱 하고 공문 하나를 띄웠다.
군청에서 온 협조공문이었는데, 매년 하는 지역축제에 인력(……)을 요청하는 공문이었다.
“추워 디지것는데 축제는 무슨 얼어죽을 축제인지 모르것다.”
그런 말을 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시는 과장님.
그런 나와 과장님의 대화를 진수와 원준이는 귀를 쫑긋하고 세우고 듣고있었다.
“무슨 축제래?”
“인삼인가 그건가봐. 지역 특산품.”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서 공문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말했다.
그 말인 즉슨…… 이 답답해 죽을 것 같은 사무실을 벗어날 명분이 생길…… 것 같기도 하고.
“안될 걸.”
그런 내 표정을 넌지시 보더니, 원준이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ㅇ……아니 뭐가.”
“너 못나간다고.”
“나 아무말도 안했어.”
“표정은 그게 아닌데? ㅋㅋ”
원준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다시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옆에서 조금 애처롭게 쳐다보는 진수.
나는 괜시리 그냥 그런 진수에게 핀잔을 주고 싶어졌다.
“뭘 보냐.”
“ㅇ……아닙니다.”
그제서야 당황해서는 엑셀에 시선을 고정하는 진수.
이렇게 산만해서야 원……
실제로도 진수는 책상에 오래 앉혀 놓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 이등병인데도 눈에 보이는데, 나중에 상병쯤되면 아마 사무실에 있으려고 하지도 않겠지……
그런 진수의 성격을 감당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었다.
과장님은 진수는 전혀 신경도 안쓰고 나한테만 잔뜩 업무를 안겨줄 뿐이고,
난 거기서 진수가 할 수 있는 몫을 조금 떼서 시켜보는 정도로만 만족해야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눈이 동그랗게 떠질 일을 경험했다.
“갔다 와.”
“진짭니까?”
과장님은, 나보고 대민지원을 갔다오라고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심경이야……?
“할 것도 없잖냐. 진수랑 갔다와.”
“……”
“왜 ㅋㅋ”
과장님은 피식 웃으면서 멍때리는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다.
조금 할 게 적은 시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순순하게 보내 줄 과장님이 아닌데.
“갑갑하대매. 바람이나 좀 쐬고 와라.”
“ㄱ…… 감사합니다.”
어제 나랑 원준이가 했던 말을 아직도 신경쓰고 계셨는지,
과장님은 흔쾌히 나를 보내는 것에 허락하셨다.
하기사…… 요즘 막사 밖을 안나가도 너무 안나갔다.
그런 나를, 원준이는 음울한 눈으로 올려다 보면서 배웅해줬다.
“잘 갔다 와……”
“그래……ㅋㅋㅋㅋㅋ”
나는 뒤도 안돌아보고 사무실 밖을 나섰다.
진짜 너무너무 오래간만에 바깥공기를 마신다는 기분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진수와 나는 진짜 쏜살같이 빠르게 대민지원을 나가는 차량에 몸을 실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진짜……
나는 회색빛 미니버스에 올라타면서 빠르게 탑승한 인원들을 살폈다.
별 다른 이유는 아니고, 정해성 상병님이 탔나 체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20명 남짓한 인원들 사이에 정해성 상병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어제 인사과에서 받았던 명단에서는 분명히 들어가 있었는데……
그런데 막사 밖에서 방탄과 소총을 든 정해성 상병님과 부사수가 보였다.
뭐야 근무 투입이신가……?
나는 출발 대기중인 미니버스 창문을 열고, 정해성 상병님을 목을 빼고 쳐다봤다.
그제서야 정해성 상병님은 나를 발견하고 미니버스 창문 가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셨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궁금함을 띄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대민지원 나가?”
“과장님이 가라고 하셔가지고 나왔습니다 ㅋㅋ”
“사무실 밖에서 보는 거 되게 오래간만이네.”
정해성 상병님의 말투는 조금은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그런지 딱딱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느슨해져 있었다.
그것 만으로도 주변 사람들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지만, 이미 사람들은 나랑 정해성 상병님이 친하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기에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딱 한 사람, 옆에 있는 진수만 의아하게 쳐다 볼 뿐이었다.
그러고보면 진수는 정해성 상병님을 보는 것 자체가 굉장히 드물겠지.
“맛있는 거 사와.”
“ㅋㅋ 뭐 사옵니까?”
“아무거나.”
그리고는 정해성 상병님은 불쑥 고개를 내밀어서 나만 들리게 작게 소근소근 말했다.
“가서도 내 생각 많이 하라는 뜻이야. 김곰탱이.”
그렇게 말하고는 간다, 한 마디를 하고 정해성 상병님은 방탄을 고쳐쓰고는 부사수와 함께 위병소쪽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피식 웃고말았다.
진짜 정해성 상병님은 귀엽기도 귀엽지만, 내 기분을 너무 잘 맞춰주는 것 같다.
사실 오늘 대민지원 나가고 싶었던 것도 정해성 상병님이 명단에 있어서 그랬던건데……
뭐 그래도 오늘 밤에 같이 당직이니까……
오늘 밤과 내일 오침 내내 쭉 같이 있을거니까 조금은 참을 수 있었다.
미니버스는 이윽고 출발했고,
내 옆자리의 진수는 많이 피곤했는지 금방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진수 이 녀석도 적성에 안 맞는 일 하느라 되게 피곤했을텐데……
정해성 상병님 말 대로 내가 이 녀석을 너무 다그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생활관도 달라서 따로 얘기할 시간도 많지 않았기에, 이번에 대민지원 나가면서 틈이 있으면 조금 풀어주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 27.
버스는 추수가 끝난 논밭 사이를 달려서 구청 근처의 한 체험관 근처에 도착했다.
우르르 내린 대대원들 사이에서 나와 진수는 주차장 동쪽에서의 교통정리를 맡게 되었다.
그냥 단순히 들어오는 차에게 주차할 곳을 안내해주는 일이었다.
이미 초겨울에 진입한 늦가을 날씨는 무척 쌀쌀했다.
우리는 번갈아가면서 주차장 진입로에서 한 명씩 교대로 쉬었고,
그러다보니 금방 시간이 흘러서 쉬는 시간이 되었다.
문제는 내가 너무 체력이 달린다는 것에 있었다.
사무실에서 맨날 작업만 하다보니 진짜 체력이 눈에 띌 정도로 약해져 있던 나는,
고작 교통정리를 할 뿐인데도 반 시간쯤 지나면 지쳐있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진수는 매번 만류했다.
“들어가 쉬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아냐 됐어. 됐다니까.”
“ㅋㅋ 제가 하면 됩니다. 진짜 괜찮습니다.”
진수는 그렇게 넉살좋게 나를 살살 밀어서 의자에 앉혀놓고는 봉을 휘적휘적 저으면서 들어오는 차량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사회에 있을때도 한 번씩 그런 알바를 했다고 한다.
“별 거 아니긴 한데 생각보다 힘들긴 합니다 이거.”
진수는 군청에서 막 주고간 음료수 캔을 따면서 얘기했다.
나는 고작 두어시간도 못하고 털썩 주저앉아서 체력이 고갈되어있었다.
다행히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땀은 많이 안났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ㅋㅋ 너가 도와줘서 살았다.”
“다행입니다 ㅋㅋ”
그렇게 진수는 빙긋 웃으면서 나한테 포카리스웨트 한 캔을 건넸다.
나는 생각없이 그것을 받아들어서 한 캔 들이켰다.
달콤한 이온음료의 자몽향이 코 끝에 쓱 훑듯 지나가고, 청량감이 목에 퍼졌다.
“쓰러지시면 안됩니다 ㅋㅋ”
“야 이런걸로 사람이 쓰러지냐?”
“사람마다 케바케 아니겠습니까? ㅋㅋ”
“안쓰러져 ㅋㅋ”
진수가 작전과에 온지 약 한 달 반.
생각해보면 진수가 있어서 꼭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등병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수는 분위기만 조금 풀어주면 금방 기운을 차리고는 분위기를 띄우곤 했다.
덕분에 나랑 원준이 사이도 꽤 많이 좋아진 것도 있고.
그런 분위기를 과장님도 썩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김보현 일병님이랑 단 둘이 있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러네……”
사실 엊그제 있었던 어색한 일도 잊을겸,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그런것에 기죽지 않는다는 것 마냥, 진수는 한껏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런 들뜬 진수를 보면 차라리 그냥 중대로 보직을 받았으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저 김보현 일병님께 하고 싶었던 말이 있습니다.”
캔 음료를 마저 마시면서, 진수는 쓱 말을 꺼냈다.
나는 다음에 올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한채, 그렇게 진수에게 뭐냐고 물었다.
진수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김보현 일병님 저 진짜 기억 안나십니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무언가 어둡고 커다란 기운이 쓰윽 하고 고개를 쳐 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순간에 가까운 그 시간을 한없이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진수의 입에서는 믿을 수 없는 얘기가 천천히 나왔다.
“세한이 형이랑 아시는 사이지 않으십니까?”
세한이……
아 그런애도 있었지.
아니 잠깐 그 애 이름이 왜 진수 입에서 나오지?
“김세한?”
“예.”
“나랑 대학 동기인 세한이?”
“예. 대학 들었을때 확신 했었습니다.”
김세한이랑 얘가 아는 사이라고……?
아니 잠깐 도대체 이게 어떻게 이어지는거야.
“올해 초에 세한이 형 생일파티 했을때 그때 오셨지 않으십니까?”
“아……”
거의 탄식에 가까운 소리가 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평소 이쪽 사람 지인을 늘리는 것에 무척 부정적인 나한테 어떻게든 사람 소개를 시켜주겠다고,
세한이가 자기 생일파티에 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세한이 말고는 아무도 몰랐던 데다가, 나는 그때 당시 깨진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도 별로 다른 사람을 유심히 보지 않았었다.
그 날 먼저 술 먹고 뻗어버려서 세한이가 한 소리 했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있는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 파티에 참석했었다는 건 그…… 그러니까 얘도……
“와 진짜 부산 떠나서 대전땅에서 이렇게 뵙다니 너무 반갑습니다 ㅋㅋ”
“……”
무척 쾌활한 진수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나는 갑자기 수만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얘가 내 정체성을 알고 있고…… 본인도 게이고……
거기에 눈치없는 세한이가 중간에 끼어 있고……
내 걱정은 순식간에 정해성 상병님까지 닿아서 터질 것 같은 지경이 되었다.
“너도 이쪽이구나….…”
“예 ㅋㅋ 진짜 군대 선임으로 이렇게 마주칠 줄 몰랐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아하하, 하고 웃고는 있지만 나는 걱정이 됐다.
어떻게 얘 입을 막아야 할까?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
진수는 까만 눈동자를 이쪽으로 향해오면서 봇물 터지듯이 질문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때 생일파티때 저 맞은편에 있었는데 기억 안나십니까?”
“아 그랬어?”
“그랬어 라니 ㅋㅋㅋ 진짜 너무하십니다 제가 술까지 따라드렸는데.”
“모르겠다…… ㅋㅋ 그때 너무 빨리 취해서 집에 엄청빨리 갔거든.”
“그때 되게 술 빨리 드시긴 했습니다.”
그렇게 재잘대는 진수의 상황설명에서, 나는 그제서야 어렴풋이 그때 맞은편에 앉았던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리스타일이 지금이랑 완전히 딴판이어서 매치하기가 어렵긴 했지만…… 그렇다고 또 영 똑같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ㅋㅋㅋㅋ 지금도 계속 혼자십니까?”
“ㅇ……응?”
진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나한테 비수를 날렸다.
분명 아무생각 없이 반가워서 던진 안부차 묻는 소리겠지만, 나한테는 갑자기 그게 너무 크게 들렸다.
“그때 아마…… 깨진지 얼마 안 되셨다고……”
“뭐 그랬지.”
“지금도 계속 그대롭니까?”
나는 눈동자에 갈고리를 잔뜩 띄우고 물어오는 진수한테 조금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아…… 뭐 있어. 그런 사람 ㅋㅋ”
내가 그렇게 머쓱해하면서 대답하자, 진수는 그제서야 와! 하고 박수를 쳤다.
“진작 그럴 줄 알았습니다 ㅋㅋ 김보현 일병님 진짜 귀염상이어서 진작 솔로탈출 할 줄 알았습니다.”
“뭐래 ㅋㅋ 수작부리지 말고. 너는?”
“저는 없습니다 ㅋㅋ 아무래도 곧 입대기도 했고 그래서 저도 그냥 포기했습니다.”
꼬리가 달렸다면 한껏 휘저을 기세인 진수를 앞에 두고, 나는 내심 후회했다.
내가 진짜 어쩌다가 세한이 생일파티에 가서 이런 사단을 만들었지……
그런 타들어가는 내 속도 모르고, 진수는 계속 나를 코너로 몰아붙였다.
“사진 있으십니까? 저 아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됐어 없어 임마 ㅋㅋ”
“와 애인인데 사진이 없습니까?”
그런 진수한테 나는 황급히 얼버무리기 바빴다.
“폰에 있어 ㅋㅋ 그리고 그 사람도 별로 안좋아해. 보여주는거.”
“은둔입니까? 아니면 제가 알면 안 되는 사람?”
말이 점점 빨라지는 진수를 보고 나는 점점 더 들키면 안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진짜로…… 만약 알게된다면 진짜로 큰 일이 날 것이다.
“됐어 그냥 넘어가 ㅋㅋ”
“알겠습니다 ㅋㅋㅋ 근데 그……”
진수가 숨을 삼키고, 무슨 말이 이어질 지 모르는 나도 같이 숨을 삼켰다.
“정해성 상병님이랑은 아무 관계 아니신 겁니까?”
나는 속으로 눈을 질끈 감으면서, 논스톱으로 부정했다.
“미쳤냐? ㅋㅋ 그냥 정해성 상병님하고는 친한 사이야.”
“진짭니까? 김보현 일병님하고 대화하시는 거 보면 진짜 장난아닌데 ㅋㅋ 애인분이 알면 질투할 것 같습니다.”
“니가 내 애인이냐? ㅋㅋ 쓸데없는 걱정하지마 ㅋㅋ”
그제서야 진수는 한숨을 쉬면서 얘기를 이어갔다.
“진짜 다행입니다. 안그래도 부대에 그런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무슨 말?”
“그냥 부대에 사람들이 장난식으로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쟤네 둘 커플아니냐고 ㅋㅋ”
하하, 하고 나는 미쳤냐고 대꾸했지만 내 속은 그게 아니었다.
한 둘은 그런 사람이 있기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소문을 직접 들어버리니 조금 당황스럽네……
“아무튼 아니라고 하시니 혹시 사람들이 그런 말 하면 아니라고 단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이등병이 ㅋㅋㅋ 뭔 수로 선임들 말에 끼어들려고 그래 ㅋㅋ 관둬라.”
“그래도 믿어주는 사람이 처부 후임이면 괜찮지 않습니까?”
“어휴…… 그래 고맙다 ㅋㅋ”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애써 달라붙는 진수의 시선을 외면하고 캔을 버리고 다시 교통정리를 하러 나갔다.
참 알 수 없는 인연이다. 정말 술 자리 한 번 같이했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을 부대에서 만나고, 심지어 나를 알아보기까지 하다니.
하지만 더더욱 행동을 조심해야 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봤던 사이지만 그렇게 입이 가벼운 성격도 아닌 것 같았고.
나는 진수를 조금 믿어보기로 했다.
애초에 진수녀석도 소문이 나는 건 피하고 싶을테니까 피차 일반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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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ㅋㅋㅋ 시티 리뉴얼됐네요!
소설방에 드디어 동영상과 사운드클라우드 직접링크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감개무량....
게다가 임시저장도 가능하네요!!!!!! 이제 업로드하다가 필터링 걸려서 글 다날려먹고 하는 일이 줄겠습니다 만세!!!!
요즘 좀 뜸했쥬....?
죄송합니다...... 병원신세를 조금 지고있어서 ㅠㅠ
시티 접속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ㅠㅠ
글 작업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죄송할따름이에요 ㅠㅠ
곧 다음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서, 슬슬 가을이 끝나가는 초겨울 무렵이 되었다.
덕분에 아침기온은 점점 내려가서 쌀쌀함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다행인것은 거의 4일에 한 번 꼴로 아침점호를 거를 수 있었다는 정도.
상황 근무자가 거의 없어서 진수도 역시 작전과로 오자마자 상황 근무병으로 투입되었다.
문제라면 진수의 성격은 정말 사무업무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아……”
새벽 세 시, 나는 연대 간부에게 잔뜩 털려서 기분이 안 좋은 본부중대장님 눈치를 보면서 상황 수습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진수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 쩔쩔 매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별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잤냐?”
“죄송합니다……”
“미쳤어?”
내가 날카롭게 다그치자, 진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가 새벽 세 시에 생활관에서 자다가 불려나갈만큼 상황이 꽤 안좋았다.
우리 대대에서는 상황 전파용 단말인 ATCIS-R이라는 노트북으로 연대와 통신을 하고 있었는데,
상황전파 훈련을 하기 위해서 그 단말로 새벽에 불시에 연대나 사단에서 대대에 상황전파 훈련을 하루에 한 번 꼴로 했다.
그러면 상황병은 그 상황을 받아서 근무 초소에 상황을 전화로 얘기하고, 그러면 근무초소에서 연대나 사단 지통실로 상황을 그대로 다시 재보고 하는 식으로 상황 전파 훈련이 끝나고는 했다.
문제는 그 훈련을 나는 근무 이래로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는데,
진짜 대범하게도 이 자식은 졸다가 그걸 놓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어제 복초까지 서면서 알려줬는데……
그것도 하필이면 본부중대장님 근무에 이 사단을 벌렸으니 아마 또 당분간은 상황근무에도 투입을 못 시킬것이 뻔했다.
아니면 내가 복초로 근무를 서던지……
“애좀 잘 가르쳐봐.”
이 상황이 맘에 안드는 또 한 사람, 강혁 상병님이 평소의 장난끼는 싹 사라진 짜증나는 표정으로 책상을 탁탁 치면서 말했다.
사실 강혁 상병님이 나한테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상황 전파 임무는 상황병이 하는 업무가 맞기는 하니까……
“죄송합니다.”
“니가 뭘 죄송해.”
내가 재차 죄송하다고 했지만, 강혁 상병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씀하셨다.
차라리 오늘 정해성 상병님이 근무였더라면…… 조금은 나았을텐데……
여러모로 진수가 정말 운이 없기도 없다.
결국 수습을 다 하고 내가 상황실을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새벽 네 시가 넘어서였다.
가뜩이나 그 날 야근하느라 거의 11시에나 생활관에 들어갔던 나는 4시간 남짓밖에 자질못했다.
“표정이 안좋다?”
그 날, 일과가 끝나고 나서 좌측현관 벤치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던 내 옆에,
슬며시 한 사람이 다가와서 앉으면서 그렇게 넌지시 물었다.
정해성 상병님이었다.
“오늘 너무 힘들었습니다……”
“너네 작전과 신병? 걔 때문이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투덜대는 이유를 단박에 알아맞춘 정해성 상병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하면서 얘기했다.
“같이 근무 선 사람이 강혁 상병님이잖아. 모를 수가 없지. 그렇게 떠들고 다니는데.”
나는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 느낌이 들어서 머리를 감쌌다.
저절로 이마에 손이 짚어진다. 작전과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면…… 근무는 더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너 새벽에 불려갔대며.”
“예…… 대충 수습하니까 네 시 조금 넘었습니다.”
“많이 힘들었겠다.”
그런 내 어깨에, 정해성 상병님의 손이 탁 하고 얹혔다.
짜증나고 우울한 이 순간에, 그나마 위로가 되는 단 하나의 손이었다.
내 답답한 성격에 아마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이런 얘기도 할 수 없었겠지.
그냥 속으로 끙끙 앓다가 곪았을 것이다.
그때, 막사 좌측현관 유리문이 살짝 열리고는 그 틈으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막 오침을 끝내고 나온 진수였다.
“……”
“……”
그런 진수를 나와 정해성 상병님은 쓱 쳐다봤다.
진수는 그런 우리 둘을 보고 엄청나게 놀라더니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는 담배를 꺼냈다.
그러고보니 얘 담배폈었지……
저녁 공기는 꽤 추웠다.
11월 말이어서 그런지 이제 기온은 거의 한 자릿 수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조금 있으면 곧 영하가 되고, 첫 눈도 볼 수 있겠지.
그런 차가운 공기 속에서 어색한 정적이 지속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진수는 말 없이 담배를 폈다.
우리 둘의 눈치를 살피느라, 벤치에 앉지도 못한 채 말이다.
“김보현 일병님……”
한참 뒤에야 진수는 그렇게 어렵게 말 머리를 꺼냈다.
나는 대답 대신에, 진수를 쓱 하고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
“진짜 죄송합니다……”
“후우……”
재차 죄송하다고 하는 진수가 퍽이나 안쓰럽긴 했지만,
동시에 나는 첫 근무때부터 졸아버린 진수를 이대로 넘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수십가지 생각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웠다.
“너 진짜 다음번에 졸면 죽여버린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화를 삭히지 못하고 결국 입밖으로 내 버렸다.
진수는 그런 내 말투에 크게 놀란 것 같았고, 고개를 더 푹 떨궜다.
동시에 내 옆에 앉은 정해성 상병님도 어깨를 조금 꽉 쥐었다.
순간 속으로 나도 아차 싶었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가봐.”
“예.”
담배를 다 핀 것 같은 진수는, 그대로 담배를 끄고 막사로 들어갔다.
휑하게 남은 정해성 상병님과 나.
“너 묘하게 말투가 나 닮아간다?”
정해성 상병님은 살짝 걱정어린 말투로 그렇게 나한테 말했다.
나도 놀라긴 했다.
사실 화가 그렇게 끝까지 치민 적이 내 인생에서 별로 없어서 그랬을까……?
“죄송합니다……”
“뭐래 ㅋㅋ 죄송할 건 아니야. 걱정이라 그런거지.”
“그냥 걱정시켜드려서 죄송해서…… 그렇습니다.”
“나도 내 말투 좋아서 쓰는거 아니야. 너무 그런 것 까지 닮지는 마 ㅋㅋ”
“알겠습니다.”
정해성 상병님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머쓱하게 웃었다.
조금은 바보같기도 한 정해성 상병님의 무방비 웃음을 보니, 나도 모르게 속에서 웃음이 났다.
진짜 화가 너무 났는데 그것 때문에 간신히 진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원래 신병때는 다 저러고 사는거야. 너도 알잖아.”
“그래도 첫 근무때는 원래 안 저러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ㅋㅋ”
정해성 상병님은 그렇게 내 말에 동의하면서, 하늘을 쓱 올려다보셨다.
이미 밤이 완연한 하늘은 조용히 별만이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 모레 근무때도 본부중대장님 아냐? 그때 근무 잘 서면 되지.”
그런 정해성 상병님의 말에, 나는 넌지시 근무표를 떠올렸다.
정말 겹치기 어려운 나와 정해성 상병님의 근무에는 본부중대장님이 같이 편성되어 있었다.
오히려 이게 차라리 더 나을수도 있다.
그때 근무 빡세게 하면 본부중대장님도 신경을 조금 덜 쓰겠지.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ㅋㅋ”
“ㅋㅋ 드디어 표정 풀었네.”
“정해성 상병님이 와줘서 다행입니다 ㅋㅋ”
“이럴 때 말 들어주고 하는게 애인 아냐? ㅋㅋ”
갑자기 풀어진 분위기에 정해성 상병님이 갑자기 불쑥 그런 얘기를 했다.
난 너무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돌아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듣습니다 ㅋㅋ”
“뭐래. 아무도 없거든 김곰탱씨?”
“으으……”
최근 들어서 정해성 상병님은 나를 ‘곰탱’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김곰탱은 기본이고 바보곰탱이 등 바리에이션이 계속 늘어나는 건 기분탓이겠지……
“정해성 상병님.”
“왜 ㅋㅋ”
“저 춥습니다 ㅋㅋ”
“안아달라고?”
“헐……”
사실 그냥 추우니까 들어가자는 말이었지만,
대뜸 그렇게 정해성 상병님은 나를 와락 껴안아 버렸다.
그렇게 길진 않았지만, 정해성 상병님은 정말 행복해보였다.
아마 내 표정도 비슷하겠지……?
“오늘은 막사 현관이니까 여기까지.”
엣흠, 하고 부끄러운 기색을 숨기면서 정해성 상병님은 자리에서 탁 일어섰다.
“바보같이 뭘 멍때려. 들어가자 ㅋㅋ”
“예 ㅋㅋ”
막사 안으로 들어가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이 지루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군생활을 버틸 수 있었을까?
밑에 후임 하나 들어온 것 만으로도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걸 다 꿋꿋히 참고 버텨내는 정해성 상병님이 무척 대단해 보였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게 동경이라는 걸까?
그리고 다음 날,
여느때와 다름 없는 정말 바쁘고 평온하고 아무 일 없는 일과시간에 나는 인사과 업무일지를 보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대민지원??”
너무 생소한 단어에 나는 그만 혼잣말로 내뱉고 말았다.
내 양 옆에 앉아있는 원준이와 진수도 그런 내 혼잣말에 흥미를 가지고는 쓱 쳐다봤다.
“대민지원이 왜.”
그리고 뒤에서 늘 여전히 모락모락 담배연기를 올리고 계시는 과장님이 내 혼잣말에 반응하셨다.
이런 촌동네에 대민지원 할 데가 어디에 있다고 우리 부대가 대민지원을 해……?
“저희 대민지원 나갑니까?”
“어 뭐…… 뭐시기냐 여기 지역 축제 교통정리인가? 하잖냐.”
“축제 말입니까?”
“아 보현이 너 올해가 처음이지?”
그러고는 과장님은 나를 손짓해서 부르더니, 모니터에 쓱 하고 공문 하나를 띄웠다.
군청에서 온 협조공문이었는데, 매년 하는 지역축제에 인력(……)을 요청하는 공문이었다.
“추워 디지것는데 축제는 무슨 얼어죽을 축제인지 모르것다.”
그런 말을 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시는 과장님.
그런 나와 과장님의 대화를 진수와 원준이는 귀를 쫑긋하고 세우고 듣고있었다.
“무슨 축제래?”
“인삼인가 그건가봐. 지역 특산품.”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서 공문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말했다.
그 말인 즉슨…… 이 답답해 죽을 것 같은 사무실을 벗어날 명분이 생길…… 것 같기도 하고.
“안될 걸.”
그런 내 표정을 넌지시 보더니, 원준이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ㅇ……아니 뭐가.”
“너 못나간다고.”
“나 아무말도 안했어.”
“표정은 그게 아닌데? ㅋㅋ”
원준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다시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옆에서 조금 애처롭게 쳐다보는 진수.
나는 괜시리 그냥 그런 진수에게 핀잔을 주고 싶어졌다.
“뭘 보냐.”
“ㅇ……아닙니다.”
그제서야 당황해서는 엑셀에 시선을 고정하는 진수.
이렇게 산만해서야 원……
실제로도 진수는 책상에 오래 앉혀 놓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 이등병인데도 눈에 보이는데, 나중에 상병쯤되면 아마 사무실에 있으려고 하지도 않겠지……
그런 진수의 성격을 감당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었다.
과장님은 진수는 전혀 신경도 안쓰고 나한테만 잔뜩 업무를 안겨줄 뿐이고,
난 거기서 진수가 할 수 있는 몫을 조금 떼서 시켜보는 정도로만 만족해야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눈이 동그랗게 떠질 일을 경험했다.
“갔다 와.”
“진짭니까?”
과장님은, 나보고 대민지원을 갔다오라고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심경이야……?
“할 것도 없잖냐. 진수랑 갔다와.”
“……”
“왜 ㅋㅋ”
과장님은 피식 웃으면서 멍때리는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다.
조금 할 게 적은 시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순순하게 보내 줄 과장님이 아닌데.
“갑갑하대매. 바람이나 좀 쐬고 와라.”
“ㄱ…… 감사합니다.”
어제 나랑 원준이가 했던 말을 아직도 신경쓰고 계셨는지,
과장님은 흔쾌히 나를 보내는 것에 허락하셨다.
하기사…… 요즘 막사 밖을 안나가도 너무 안나갔다.
그런 나를, 원준이는 음울한 눈으로 올려다 보면서 배웅해줬다.
“잘 갔다 와……”
“그래……ㅋㅋㅋㅋㅋ”
나는 뒤도 안돌아보고 사무실 밖을 나섰다.
진짜 너무너무 오래간만에 바깥공기를 마신다는 기분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진수와 나는 진짜 쏜살같이 빠르게 대민지원을 나가는 차량에 몸을 실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진짜……
나는 회색빛 미니버스에 올라타면서 빠르게 탑승한 인원들을 살폈다.
별 다른 이유는 아니고, 정해성 상병님이 탔나 체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20명 남짓한 인원들 사이에 정해성 상병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어제 인사과에서 받았던 명단에서는 분명히 들어가 있었는데……
그런데 막사 밖에서 방탄과 소총을 든 정해성 상병님과 부사수가 보였다.
뭐야 근무 투입이신가……?
나는 출발 대기중인 미니버스 창문을 열고, 정해성 상병님을 목을 빼고 쳐다봤다.
그제서야 정해성 상병님은 나를 발견하고 미니버스 창문 가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셨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궁금함을 띄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대민지원 나가?”
“과장님이 가라고 하셔가지고 나왔습니다 ㅋㅋ”
“사무실 밖에서 보는 거 되게 오래간만이네.”
정해성 상병님의 말투는 조금은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그런지 딱딱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느슨해져 있었다.
그것 만으로도 주변 사람들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지만, 이미 사람들은 나랑 정해성 상병님이 친하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기에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딱 한 사람, 옆에 있는 진수만 의아하게 쳐다 볼 뿐이었다.
그러고보면 진수는 정해성 상병님을 보는 것 자체가 굉장히 드물겠지.
“맛있는 거 사와.”
“ㅋㅋ 뭐 사옵니까?”
“아무거나.”
그리고는 정해성 상병님은 불쑥 고개를 내밀어서 나만 들리게 작게 소근소근 말했다.
“가서도 내 생각 많이 하라는 뜻이야. 김곰탱이.”
그렇게 말하고는 간다, 한 마디를 하고 정해성 상병님은 방탄을 고쳐쓰고는 부사수와 함께 위병소쪽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피식 웃고말았다.
진짜 정해성 상병님은 귀엽기도 귀엽지만, 내 기분을 너무 잘 맞춰주는 것 같다.
사실 오늘 대민지원 나가고 싶었던 것도 정해성 상병님이 명단에 있어서 그랬던건데……
뭐 그래도 오늘 밤에 같이 당직이니까……
오늘 밤과 내일 오침 내내 쭉 같이 있을거니까 조금은 참을 수 있었다.
미니버스는 이윽고 출발했고,
내 옆자리의 진수는 많이 피곤했는지 금방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진수 이 녀석도 적성에 안 맞는 일 하느라 되게 피곤했을텐데……
정해성 상병님 말 대로 내가 이 녀석을 너무 다그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생활관도 달라서 따로 얘기할 시간도 많지 않았기에, 이번에 대민지원 나가면서 틈이 있으면 조금 풀어주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 27.
버스는 추수가 끝난 논밭 사이를 달려서 구청 근처의 한 체험관 근처에 도착했다.
우르르 내린 대대원들 사이에서 나와 진수는 주차장 동쪽에서의 교통정리를 맡게 되었다.
그냥 단순히 들어오는 차에게 주차할 곳을 안내해주는 일이었다.
이미 초겨울에 진입한 늦가을 날씨는 무척 쌀쌀했다.
우리는 번갈아가면서 주차장 진입로에서 한 명씩 교대로 쉬었고,
그러다보니 금방 시간이 흘러서 쉬는 시간이 되었다.
문제는 내가 너무 체력이 달린다는 것에 있었다.
사무실에서 맨날 작업만 하다보니 진짜 체력이 눈에 띌 정도로 약해져 있던 나는,
고작 교통정리를 할 뿐인데도 반 시간쯤 지나면 지쳐있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진수는 매번 만류했다.
“들어가 쉬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아냐 됐어. 됐다니까.”
“ㅋㅋ 제가 하면 됩니다. 진짜 괜찮습니다.”
진수는 그렇게 넉살좋게 나를 살살 밀어서 의자에 앉혀놓고는 봉을 휘적휘적 저으면서 들어오는 차량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사회에 있을때도 한 번씩 그런 알바를 했다고 한다.
“별 거 아니긴 한데 생각보다 힘들긴 합니다 이거.”
진수는 군청에서 막 주고간 음료수 캔을 따면서 얘기했다.
나는 고작 두어시간도 못하고 털썩 주저앉아서 체력이 고갈되어있었다.
다행히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땀은 많이 안났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ㅋㅋ 너가 도와줘서 살았다.”
“다행입니다 ㅋㅋ”
그렇게 진수는 빙긋 웃으면서 나한테 포카리스웨트 한 캔을 건넸다.
나는 생각없이 그것을 받아들어서 한 캔 들이켰다.
달콤한 이온음료의 자몽향이 코 끝에 쓱 훑듯 지나가고, 청량감이 목에 퍼졌다.
“쓰러지시면 안됩니다 ㅋㅋ”
“야 이런걸로 사람이 쓰러지냐?”
“사람마다 케바케 아니겠습니까? ㅋㅋ”
“안쓰러져 ㅋㅋ”
진수가 작전과에 온지 약 한 달 반.
생각해보면 진수가 있어서 꼭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등병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수는 분위기만 조금 풀어주면 금방 기운을 차리고는 분위기를 띄우곤 했다.
덕분에 나랑 원준이 사이도 꽤 많이 좋아진 것도 있고.
그런 분위기를 과장님도 썩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김보현 일병님이랑 단 둘이 있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러네……”
사실 엊그제 있었던 어색한 일도 잊을겸,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그런것에 기죽지 않는다는 것 마냥, 진수는 한껏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런 들뜬 진수를 보면 차라리 그냥 중대로 보직을 받았으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저 김보현 일병님께 하고 싶었던 말이 있습니다.”
캔 음료를 마저 마시면서, 진수는 쓱 말을 꺼냈다.
나는 다음에 올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한채, 그렇게 진수에게 뭐냐고 물었다.
진수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김보현 일병님 저 진짜 기억 안나십니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무언가 어둡고 커다란 기운이 쓰윽 하고 고개를 쳐 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순간에 가까운 그 시간을 한없이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진수의 입에서는 믿을 수 없는 얘기가 천천히 나왔다.
“세한이 형이랑 아시는 사이지 않으십니까?”
세한이……
아 그런애도 있었지.
아니 잠깐 그 애 이름이 왜 진수 입에서 나오지?
“김세한?”
“예.”
“나랑 대학 동기인 세한이?”
“예. 대학 들었을때 확신 했었습니다.”
김세한이랑 얘가 아는 사이라고……?
아니 잠깐 도대체 이게 어떻게 이어지는거야.
“올해 초에 세한이 형 생일파티 했을때 그때 오셨지 않으십니까?”
“아……”
거의 탄식에 가까운 소리가 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평소 이쪽 사람 지인을 늘리는 것에 무척 부정적인 나한테 어떻게든 사람 소개를 시켜주겠다고,
세한이가 자기 생일파티에 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세한이 말고는 아무도 몰랐던 데다가, 나는 그때 당시 깨진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도 별로 다른 사람을 유심히 보지 않았었다.
그 날 먼저 술 먹고 뻗어버려서 세한이가 한 소리 했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있는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 파티에 참석했었다는 건 그…… 그러니까 얘도……
“와 진짜 부산 떠나서 대전땅에서 이렇게 뵙다니 너무 반갑습니다 ㅋㅋ”
“……”
무척 쾌활한 진수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나는 갑자기 수만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얘가 내 정체성을 알고 있고…… 본인도 게이고……
거기에 눈치없는 세한이가 중간에 끼어 있고……
내 걱정은 순식간에 정해성 상병님까지 닿아서 터질 것 같은 지경이 되었다.
“너도 이쪽이구나….…”
“예 ㅋㅋ 진짜 군대 선임으로 이렇게 마주칠 줄 몰랐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아하하, 하고 웃고는 있지만 나는 걱정이 됐다.
어떻게 얘 입을 막아야 할까?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
진수는 까만 눈동자를 이쪽으로 향해오면서 봇물 터지듯이 질문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때 생일파티때 저 맞은편에 있었는데 기억 안나십니까?”
“아 그랬어?”
“그랬어 라니 ㅋㅋㅋ 진짜 너무하십니다 제가 술까지 따라드렸는데.”
“모르겠다…… ㅋㅋ 그때 너무 빨리 취해서 집에 엄청빨리 갔거든.”
“그때 되게 술 빨리 드시긴 했습니다.”
그렇게 재잘대는 진수의 상황설명에서, 나는 그제서야 어렴풋이 그때 맞은편에 앉았던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리스타일이 지금이랑 완전히 딴판이어서 매치하기가 어렵긴 했지만…… 그렇다고 또 영 똑같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ㅋㅋㅋㅋ 지금도 계속 혼자십니까?”
“ㅇ……응?”
진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나한테 비수를 날렸다.
분명 아무생각 없이 반가워서 던진 안부차 묻는 소리겠지만, 나한테는 갑자기 그게 너무 크게 들렸다.
“그때 아마…… 깨진지 얼마 안 되셨다고……”
“뭐 그랬지.”
“지금도 계속 그대롭니까?”
나는 눈동자에 갈고리를 잔뜩 띄우고 물어오는 진수한테 조금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아…… 뭐 있어. 그런 사람 ㅋㅋ”
내가 그렇게 머쓱해하면서 대답하자, 진수는 그제서야 와! 하고 박수를 쳤다.
“진작 그럴 줄 알았습니다 ㅋㅋ 김보현 일병님 진짜 귀염상이어서 진작 솔로탈출 할 줄 알았습니다.”
“뭐래 ㅋㅋ 수작부리지 말고. 너는?”
“저는 없습니다 ㅋㅋ 아무래도 곧 입대기도 했고 그래서 저도 그냥 포기했습니다.”
꼬리가 달렸다면 한껏 휘저을 기세인 진수를 앞에 두고, 나는 내심 후회했다.
내가 진짜 어쩌다가 세한이 생일파티에 가서 이런 사단을 만들었지……
그런 타들어가는 내 속도 모르고, 진수는 계속 나를 코너로 몰아붙였다.
“사진 있으십니까? 저 아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됐어 없어 임마 ㅋㅋ”
“와 애인인데 사진이 없습니까?”
그런 진수한테 나는 황급히 얼버무리기 바빴다.
“폰에 있어 ㅋㅋ 그리고 그 사람도 별로 안좋아해. 보여주는거.”
“은둔입니까? 아니면 제가 알면 안 되는 사람?”
말이 점점 빨라지는 진수를 보고 나는 점점 더 들키면 안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진짜로…… 만약 알게된다면 진짜로 큰 일이 날 것이다.
“됐어 그냥 넘어가 ㅋㅋ”
“알겠습니다 ㅋㅋㅋ 근데 그……”
진수가 숨을 삼키고, 무슨 말이 이어질 지 모르는 나도 같이 숨을 삼켰다.
“정해성 상병님이랑은 아무 관계 아니신 겁니까?”
나는 속으로 눈을 질끈 감으면서, 논스톱으로 부정했다.
“미쳤냐? ㅋㅋ 그냥 정해성 상병님하고는 친한 사이야.”
“진짭니까? 김보현 일병님하고 대화하시는 거 보면 진짜 장난아닌데 ㅋㅋ 애인분이 알면 질투할 것 같습니다.”
“니가 내 애인이냐? ㅋㅋ 쓸데없는 걱정하지마 ㅋㅋ”
그제서야 진수는 한숨을 쉬면서 얘기를 이어갔다.
“진짜 다행입니다. 안그래도 부대에 그런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무슨 말?”
“그냥 부대에 사람들이 장난식으로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쟤네 둘 커플아니냐고 ㅋㅋ”
하하, 하고 나는 미쳤냐고 대꾸했지만 내 속은 그게 아니었다.
한 둘은 그런 사람이 있기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소문을 직접 들어버리니 조금 당황스럽네……
“아무튼 아니라고 하시니 혹시 사람들이 그런 말 하면 아니라고 단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이등병이 ㅋㅋㅋ 뭔 수로 선임들 말에 끼어들려고 그래 ㅋㅋ 관둬라.”
“그래도 믿어주는 사람이 처부 후임이면 괜찮지 않습니까?”
“어휴…… 그래 고맙다 ㅋㅋ”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애써 달라붙는 진수의 시선을 외면하고 캔을 버리고 다시 교통정리를 하러 나갔다.
참 알 수 없는 인연이다. 정말 술 자리 한 번 같이했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을 부대에서 만나고, 심지어 나를 알아보기까지 하다니.
하지만 더더욱 행동을 조심해야 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봤던 사이지만 그렇게 입이 가벼운 성격도 아닌 것 같았고.
나는 진수를 조금 믿어보기로 했다.
애초에 진수녀석도 소문이 나는 건 피하고 싶을테니까 피차 일반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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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ㅋㅋㅋ 시티 리뉴얼됐네요!
소설방에 드디어 동영상과 사운드클라우드 직접링크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감개무량....
게다가 임시저장도 가능하네요!!!!!! 이제 업로드하다가 필터링 걸려서 글 다날려먹고 하는 일이 줄겠습니다 만세!!!!
요즘 좀 뜸했쥬....?
죄송합니다...... 병원신세를 조금 지고있어서 ㅠㅠ
시티 접속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ㅠㅠ
글 작업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죄송할따름이에요 ㅠㅠ
곧 다음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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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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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병 진수의 등장으로 어떻게 전개가 될지 예측불허네요 ㅎㅎ 갠적으로 지원군이었으면 훼방꾼은 안됩니다~ 아 글고 작가님 정해성 상병과 보현이 닮은 사람 없나요? 둘의 이미지가 너무 궁금하네요ㅜ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