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숲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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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해서 나른하게 들어오는 5월 초의 햇볕을 이마에 느끼면서 나는 방안에 누워있었다.

 

 

 

 

토요일 오후부터 재채기가 한두번씩 나와서 혹시나 하고 생각했지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드디어 감기가 온 것 같았다. 몸살 기운도 있는지 팔뚝과 손마디가 욱신거리는 듯 했고 두통도 느껴졌다.

 

약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하필 또 일요일이라서 언덕너머에 있는, 이 동네에서 유일한 약국은 문을 닫았을 듯 싶었다. 큰길까지 10분 넘게 걸어 내려가야 할 것이 뻔해지자 몸을 일으킨다는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한증 증상으로 여름이 오기전, 여전히 선선한 날씨인 봄부터 이마와 겨드랑이 그리고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이제 겨우 5월초, 출근하기 위해서 아침 7시 반에 서울로 가는 전철 승강장에서 줄을 서 있다보면, 그 아침에 반팔 와이셔츠만 입고 양복 상의는 팔뚝에 걸고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주변에는 아직까지 바람막이 겉옷이나 쟈켓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으니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한여름의 차림새로 이마의 윗부분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끼는 나는 또 다른 면에서도 아웃사이더였다.

 

그래도 퇴근할 시간에는 기온이 많이 내려갔는지 서늘한 기분이 들어 양복 상의를 입곤 했는데, 지난 금요일에는 아예 상의를 회사에 놓고 퇴근해 버렸다. 아침마다 입지도 않고 있으면서 상의를 꼬박꼬박 들고 다니는 것도 귀찮았고, 그렇다보니 낮에 일이 있어서 정작 입어야 할 때에는 구겨진 것이 꽤 눈에 띄어서 보기가 거북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열두시가 다 되어서 휴대폰이 울린 다음에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 목소리가 왜 그래?” 콧물이 계속 흘러 코맹맹이가 된 채로 전화를 받는 내 목소리를 듣자 종현이 물었다.

 

감기.” 만사가 귀찮다는 투로 말을 툭 내뱉고는 손을 뻗어서 티슈하나를 뽑아 다시 코를 하고 풀었다.

 

, , 다 춥다고 하는데 반팔 입고 돌아다니는 꼴 보았을 때 벌써 알아봤어.” 그가 한심하다는 투로 혀를 찼다.

 

약은 사먹고?”

 

. 지금 사려가려고....”

 

, 근처에 있다면 내가 사들고 갈텐데. 멀리 있으니 그런 것도 좀 불편하네." 그의 미안함이 뭍어나는 말투가 느껴졌다.

 

"겨우 감기인데 무슨....거기, 일은 잘 되고?"

 

"그럭저럭... 이번에 큰 오더가 들어와서 주문 날짜 맞추어 물량 만들어 내느라 지금 정신 없다."

 

"이번 주말도 못오더니 그럼 다음 주말에도 일해야겠네?" 섭섭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무덤덤한 투로 물었다.

 

"절대 안돼지. 지난 주말에도 니 얼굴 못봤는데 다음 주말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올라갈거야. 벌써 2주째 니 얼굴 못보고 있으니 미치겠다야." 그가 말을 마치고 멋적은 듯 크게 웃었다.

 

"그래, 바쁠텐데 어서 편하게 일 봐. 난 이제 슬슬 준비하고 약사러 나가봐야겠다."

 

"알았어. 얼른 약 사먹고 몸 따뜻하게 하고 편하게 푹 쉬어. 알았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헝클어진 머리 위에 모자를 눌러쓰고 집 밖으로 걸어 나왔다.

 

5월의 햇살속에서 땀을 흘리던 내가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서 내가 아프긴 아픈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 길가에 있는 약국에서 종합감기약을 사 들고 다시 언덕배기를 걸어올라 오는 사이에 주머니속의 휴대폰이 울렸다.

 

뜻밖에 전화를 한 사람은 소현이였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았지만 어쩐일인지 예전의 명랑함은 사라진 듯 했다.

 

, 소현씨도 잘 지냈죠?”

 

, 뭐 그냥....” 그녀의 말투 또한 어색하게 그껴졌다

 

제가, 감기 때문에....” 말을 멈추고 나는 손바닥으로 입주위를 막으면서 재채기를 했다.

 

, ....”

 

그런데 무슨 일로....” 왼손으로 휴대폰을 귀에 바짝 댄 채로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휴지를 찾으면서 물었다.

 

.... 사실은...” 그녀가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저 윤호씨와 별거중예요. 못 들으셨죠?” 잠시 주저하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뜻밖의 말에 놀라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한 달 정도 됐어요. 그리고.....” 그녀가 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여전히 놀라 길 한가운데서 발을 멈추고  꼼짝도 못하고 휴대폰을 귀에 대고 그대로 서있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그렇게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천천히 주변에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간신히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제가 윤호씨 소지품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

 

이건 돌려줘야 할 것 같은데... 직접 윤호씨 얼굴을 다시 볼 자신이 없어서요 . 민환씨가 좀 건네 주시면 안될까 해서 전화드렸어요.”

 

"... ....." 여전히 멍한채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간신히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오후 세시에 예전에 뵈었던 종로 플로방스 카페에서 뵈었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으신가요?”

".....“ 목이 막혀 말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 괜찮습니다."

 

"그럼 그때 뵙도록 할게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긴 휴대폰를 귀에 대고 잠시동안 넋나간 사람처럼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수많은 잡다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기 시작했다.

 

윤호가 지난 해 12월에 결혼을 한 이후로 그나 소현에 관한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결혼한지 몇 개월이 되었다고 벌써 별거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에게 돌려줄 소지품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 힘들게 그들과 나를 따로 떼어내고 나만의 세상을 간신히 만들기 시작했을 뿐인 나에게 그녀의 전화는 견디기 힘든 부담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그들과 어떤 일로도 엮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그녀의 전화는 나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왜 또, 내가 그와 그녀의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인가.....

 

 

 

늦지 않게 커피숍에 도착했는데도 그녀는 이미 나와 있었다.

 

별거 후 한달 지났다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녀는 어떤 힘든 일을 겪었다는 티가 전혀 나지 않는, 여전히 세련된 모습이었다.

 

맞은편 자리에 앉는 나를 보고 고개를 까딱하던 그녀가 탁자위에 놓여있던 두툼한 노란색 봉투를 집어들어 내 앞 쪽에 놓았다.

 

멍하게 그녀와 봉투를 번갈아 보는 나를 보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윤호씨 일기장인거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이의 일기장이라고 말해야하는 게 아닐까? 무슨 이유로 별거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여전히 남편이기에 그이라는 호칭이 맞지 않을까?

 

아니, 일기라기 보다는 그냥 사적인 일을 적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걸 왜 저에게.......”

 

그렇게 말을 꺼내면서도 순간 어떤 일 때문에 그와 그녀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었는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러자 그녀의 눈과 직접 마주치는 것조차 불편해졌다.

 

그녀와의 결혼전에, 그저 친구사이로만 알고 있던 그와 나의 관계가 그 이상이라는 것을, 그와 나 사이의 모든 것이 그녀의 머리속에 발가벗겨져 있는것이 틀림없었다. 앞에 놓인 커피잔에 손을 뻗으려 하다가 내 손가락이 떨리는것이 느껴졌다. 황급히 나는 손을 거두고 슬며시 주먹을 쥐고는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그녀가 나를 부른 것이었다.

 

그제서야 왜 지금 그녀가 이것을 나더러 윤호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녀가 배신감에 치를 떠는 모습과, 나와 그를 철저하게 괴롭히기 위한 그녀의 보복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착하려고 노력했지만, 뜨거워진 내 얼굴이 느껴졌다. 아랫입술 근처에서 파리하게 경련이 일었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읽어왔던 소설에서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행동했는지, 혹은 드라마에서 어떤일이 벌어졌는지 머리 속에서 섬광처럼 이미지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뺨을 맞거나, 물잔 세례를 맞는 주인공의 얼굴이 내 뇌리에 클로즈업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차분하게 앉아서 내 앞에 놓여진 봉투에 시선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에 더 이상 숨쉬기조차 어려워져서 무심결에 가슴에 손을 얹는 순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3월 말에 윤호씨와 설악산에 놀러갔다가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었어요.”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충격을 받았다는,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치신데는...’ 이라고 말이라도 건네야 했지만, 내 입은 멍하게 얼어붙어서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저는 보시는 것처럼 괜찮은데, 윤호씨가 많이 다쳤어요. 맞은편에서 오던 차와 충돌한건데 운전석에 앉은 사람들만 좀 많이 다쳤거든요.” 그녀가 말을 멈추고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왼쪽 다리를 많이 다쳐서 14주가 나왔어요. 그래서 아직 병원에 있구요.”

 

"......."

 

집에서 윤호씨 서재를 정리하다가 잠겨진 서랍 안에서 그걸 발견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차분했다.

 

보통때에는 누구도 서재에 발을 들여 놓는것을 싫어해서 들어가 본적이 거의 없었는데, 윤호씨가 병원에 입원한 동안 집안을 정리했어요.”

 

“.........”


사실 내가 모르고 있는 그에 관련한 무언가를 찾으려고 그랬던 것인데. 그런데 그 일기장이...” 그녀가 말을 멈추고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수 없는 두려운 상황이었다. 계속되던 감기증상도 놀라서 달아났는지 몸이 아픈것인지 아닌지도, 아니 내가 몸이 있기나 한 것인지까지 의심이 들 정도로 나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책상의 맨 아랫서랍이 잠겨져 있더라구요. ‘혹시 이 안에 내가 모르는 그의 어떤 것이...’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근처 열쇠전문 수리점에 연락해서 열어보았어요.”

 

“......" 도둑이 제발이 저린 듯, 나는 고개를 숙여 내 앞에 놓인 물잔을 보았다.

 

'접시물에도 코박고 죽는다' 는데. 그 잔에 남아있는 물이면 나하나 정도 처리하는 것에는 충분할 듯 싶었다.

 

 

 

민환씨는 그이와 친하시니까 이미 대충 다 알고 계셨겠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차가웠다.

 

사실, 결혼한지 한달이 지난 후부터 그가 좀 이상했어요. 친구들이나 여기저기에서 들어본 신혼과는 너무 차이가 있었어요. 내가 어쩌다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으면 순간 움찔 놀래기도 하고, 내가 누워서 그의 어깨에 손가락만 대도 슬며서 돌아눕기도 하고..."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석고상 처럼 굳어져 있는 나에게 한번 눈길을 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말 제가 한다고 해서 제가 어떤 못된 여자라던가, 남들이 말하는 밝히는 여자라던가 그런건 아니예요. 민환씨도 이해하실거라고 믿어서 이런 정말로 사적인 치부 드러내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민환씨는 윤호씨와 친하니까요."

 

"...."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대답이 내 입밖으로 새어나왔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말을 멈추고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너무 예민한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게 계속 되더라구요. 귀가도 늦고 자주 술에 취해서 들어오고, 다정한 말이나 행동도 거의 없고... 그냥 무뚝뚝한 성격이라는 것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어요. 대화를 해도 그저 웃기만 하고, 자기는 원래 애정표현이 낯설다는 말을 했지만 어딘가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서 어쩌다가 아는 친구한테 슬쩍 얘기를 해보다가 그 친구가 진짜 이상하다고 한번 알아보자고....”

 

그녀가 말을 멈추고 다시한번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커피잔을 내려다 보았다.

 

그가 게이바에 간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너무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더라구요. 설마설마 했는데.....그런 그를 보면서 감당이 안되더군요. 배신감같은것은 둘째 치고 너무나 놀라고 믿어지질 않아서.......”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 테이블 위로 툭하고 떨어졌다.

 

내가 뭔가 잘못한게 있어서 그런가 하고 생각도 많이 했어요.” 가방에서 손수건과 손거울을 꺼내서 그녀가 눈물에 젖은 마스카라를 지워냈다.

 

설악산 여행도 뭔가 변화를 주고 싶어서 갔던 거예요. 그가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다던지, 아니면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데 말을 못하는게 있어서 그러는 것인지.... 내가 잠자리에서 남들이 하는 것을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녀의 얼굴이 붉게 변하면서 다시 그녀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설악산에 있으면서도 똑같아 보이는 그를 보면서 돌아오는 길에 슬며시 말을 꺼냈어요. 혹시 나한테 무슨 불만 같은 것 있냐고요. 그러다가 그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지다가 마침내는 그가 바에 간것을 알고 있다고 말해버렸어요. 제가 너무 흥분이 된 상태여서 ...... 그리고 그가 너무 흥분해서 운전을.....” 그녀가 왼손 팔꿈치를 탁자위에 대고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한참을 그렇게 꼼짝 않던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제 대신 그 봉투 좀 윤호씨에게 전달좀 해주세요. 부탁드려요.” 그녀가 봉투에 시선을 한번 주고는 다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겠다는 듯 보이는 그녀의 눈을 피해서 슬그머니 봉투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연락 드릴게요. 민환씨.” 


그녀는 어정쩡하게 일어서는 나를 돌아보고는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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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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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것 같다.
한 사내의 연애 후일담을 담은 소설에서 헤매고 있다.
공감력을 확대하는 작가님의 필력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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