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프린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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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찾아오는 조문객도 없는 빈소에서 정훈은 고개를 숙이고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빈소 밖에서는 동네 이웃집 아주머니 두세분이 가끔씩 “아이구, 아이구” 하면서 곡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영원히 떠나가는 이웃을 위해서 그들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예우일 것이었다. 


검은 리본이 곱게 매어져 있는 영정사진속의 그의 엄마는 부드러운 미소로 정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더라도 아빠가 엄마의 곁에 계셨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엄마의 삶의 마지막 이십여개월을 고통속에 혼자 남겨 놓았다는 사실에 아빠의 목소리가 들릴때에는 원망스러움이 문득문득 그의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

  


염습후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던 그의 엄마를 마지막으로 보게 되었을 때,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엄마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인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의 투병으로 예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바짝 말라 있는 얼굴에는 광대뼈만 불거져 있었고 핏기가 사라진 피부는 한평생 살아오면서 겪었던 고생의 흔적만이 거무스름한 주름살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누워있는 엄마를 본 순간 울음을 터뜨린 동생 지연이를 품에 안은 채로 그는 그렇게 그의 엄마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 전날 저녁 늦게까지 연희누나와 현준과 함께 술을 마신 정훈은 휴대폰의 배터리가 다 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그는 자신의 처지를 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첫인상에서 풍기는 것처럼 현준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배어있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연희누나와의 술자리에 그가 불쑥 끼어들었을 때에는 그가 그 전에 정훈에게 도움을 주었다 하더라도 정훈은 경계심과 불편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화가 흘러가면서 여성이 피해야 할 남성의 유형이라던가, 돈 많은 남자를 고르는 법, 원하지 않는 상대를 상처주지 않고 거절하는 방법 등, 부담이 되지 않는 코믹한 이야기들로 우울했던 연희누나의 기분을 바꾸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만에 밝게 웃는 연희누나를 보면서 덩달아 정훈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한 순간 정훈은 현준이 그와의 인연을 이용해서 연희누나에게 접근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집에 돌아온 후에야 그는 휴대폰의 배터리가 다 되어서 꺼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딱히 연락이 올 곳이 없던 그는,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 해 놓고는 쓰러지듯 누워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아침에 눈을 뜬 정훈은 휴대폰을 켜 보고는 그제서야 새벽에 그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수많은 문자와 음성메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견딜 수 없는 충격으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도 못하고, 그는 허둥대면서 택시를 잡아서 근처의 은행 365코너에 들러서 현금을 찾고는 대전집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그는 연희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진정을 하려고 했지만, 택시 유리창 밖의 세상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눈앞은 뿌연 안개속이었고 그는 그 안에서 헤메고 있었다. 


  


그가 살던 동네의 작은 병원의 영안실에서 그는 그를 기다리던 동생들을 만났다. 성훈이는 퉁퉁 부은 얼굴로 정훈의 얼굴을 보자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들어 매달렸고 지연이는 마치 정신이 나간 듯,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엄마는 자신의 운명을 알았던 듯, 며칠 전에 아빠를 불렀다고 했다.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서도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 조각 하나를 지연이에게 건네주고는 간신히 입을 열고 아빠라고 전화하라는 손짓을 했다면서 지연이는 흐느꼈다.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절대 오빠에게는 연락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했다. 지연이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성훈이는 밖으로 나가서 정훈에게 며칠전에 그렇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슬픔과 충격이 너무 크면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니 정훈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빈소에 피워진 향냄새 속에서 그의 동생들이 그를 붙잡고 흐느낄 때에도 그는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저녁 늦은 시간에, 여전히 멍하게 빈소를 지키고 있을 때 영안실 안으로 들어오는 연희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회사의 상조회에서 나온 조의금과 직원들이 개별적으로 얼마씩 모은 봉투를 전달하고는 정훈에게 다가와서 눈길을 한번 주고 향을 피웠다. 


 

“누나 이렇게 먼 길을 어떻게 왔어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정훈이 물었다.


그의 말에 대답 대신 연희누나는 말 없이 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뒷 편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은 현준이 구두를 벗고 있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향을 피우고 무릎을 꿇고는 절을 했다.


집에 잘 들어갔는지 묻는 그의 문자에 연희누나가 정훈의 어머님이 대전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했다고 했다. 


공연한 무리를 하셨다는 정훈의 말에 그래도 덕분에 차도 얻어 타고 편하게 왔다고 말하면서 연희누나가 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들은 그렇게 한쪽에 앉아서 순간순간 그렇게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정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쪼그리고 앉아있는 정훈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돌아가지는 않았던 듯, 방문한 손님에게 음식을 내 오고 다시 상 위를 정리하는 연희누나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새벽이 되어 찾는 사람이 뜸해지고 난 후에야 연희누나와 그는 집으로 출발했다.  


 


마침내 발인을 하고 그의 어머니의 관이 화장터의 공포스러운 입 속에 삼켜진 후,  어머니의 시신이 사라져갈 때,  정훈은 마침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이 그의 세상의 시작이고 끝인 듯 싶었다. 목구멍을 통해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와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제어할 방법은 없었다. 

이제 더 이상은 이 세상에는 그에게 엄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엄마와 같이 지내려고 크게 마음을 먹고 월차휴가를 낸 3일 동안 그는 그렇게 그의 엄마와 작별을 했다.


  


마지막 날, 봉안당에서 삼우제를 지냈다.


집에 돌아와서, 여전히 엄마의 병환으로 인한 냄새가 배어있는 방안에서 쪼그려 앉아있는 그의 어깨를 아빠가 슬며시 다독거렸다.


너무나 지친 그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말할 힘조차 없었다. 그저 멀거니 그를 내려다 보고 있는 그의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정훈아” 그의 아빠가 그를 한번 부르고 나서 그 앞에 조용히 앉았다.


“정말 미안하다.” 


멍한 눈빛으로 정훈은 그의 눈앞에 앉아있는 흐릿한 아빠의 형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밖에서 지연이와 성훈이가 무슨 일인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돌기둥 마냥 굳은채로 앉아있다가 마침내 아빠가 입을 열었다.


“아빠가 지연이하고 성훈이는 부산으로 데리고 가려고 그런다.” 잠시 말을 멈추고 여전히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정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부산에 아빠 친구가 있어서 거기서 자리를 잡았어. 고모도 근처에 사니까 도움도 좀 되고... 그래서 여기 정리하고 내려가려는데...” 아빠가 말을 맺지 못하고 정훈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지연이하고 성훈이가 그러겠대?” 간신히 눈의 초점을 아빠에게 맞추고 정훈이 입을 열었다.


“그래..” 아빠가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에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도 같이 내려가면 아빠한테 큰 힘이......”


“나는 안가요.” 정훈이 아빠의 말을 끊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조용히 정훈을 바라보던 아빠가 일어나서 벽에 걸린 겉옷의 안주머니속에서 노란 봉투 하나를 꺼내서 정훈에게 내밀었다.


“엄마가 너한테 전해주라는 거야.”


정훈은 말없이 손을 뻗어서 그 봉투를 받아들고는 조용히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을 손가락을 집어넣어 꺼냈다.


그가 예전에 엄마에게 건네준 통장과 현금카드, 그리고 쪽지가 하나 들어있었다.


서울로 떠나기 전 그가 대전의 집 근처 은행에서 만든 통장과 현금카드였다. 


직장을 구해서 엄마 병원비와 생활비 부쳐주겠다고 정훈이 엄마에게 약속하면서 엄마의 손에 쥐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몇 겹으로 접혀진 쪽지를 펴 보았다.


삐뚤거리기는 했지만 엄마의 필체인 것을 그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내 큰아들,


어디 내놔도 제일 잘난 우리 큰아들.


통장에서 돈 빼서 쓰지 않았다고 화내거나 섭섭해 하지마.


우리아들이 엄마 위해서 힘들게 벌어서 보내 준 돈.


통장만 보고 있어도 엄마는 이 세상에서 제일 배부르고 행복해.


우리아들 대학졸업 못 시켜 주고 고생만 시키다가 먼저가서 엄마가 정말 미안해.


우리아들 아빠 연락 안 된다고 원망하지 말고 이해해줘.


아빠가 엄마하고 정훈이 지연이 성훈이 많이 사랑해.


우리 아들 엄마가 하늘만큼 사랑해.“ 


 


그가 매달 보낸 월급이 한푼도 인출이 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찍혀있는 통장을 손에 쥐고 또다시 눈물이 터져 나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꺽꺽 거리면서 한참을 흐느끼다가 마침내 두 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와 그를 붙잡고 따라 울기 시작할 때에야 그는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더 일찍 집에 들렀어야 했다.


엄마가 그렇게 떠나기 전에 손을 잡아주고 난 괜찮다고, 난 잘 지낸다고, 난 항상 행복하다고 말해 주었어야 했다. 병으로 그렇게 피부가 시커멓게 바짝 말라가고 복통으로 배를 움켜쥐면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틸 때에 최소한 그는 엄마가 그 때문에 하고 있을 죄책감을 덜어드렸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모두 지난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그를 보지 못한 채 가버렸다. 

 


밤이 늦은 시간까지 엄마가 누워있던 방안에서 그렇게 넷이서 침묵을 지키면서 앉아있었다.


“그래도 처음엔 6개월을 못 넘길거라고 했는데 엄마 오래 사셨어.”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던 지연이가 코를 훌쩍이면서 정훈의 손을 슬며시 잡으면서 중얼거렸다.


 

  


뿌옇게 동이 트고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그렇게 벽에 등을 대고 밤을 새워버린 정훈은 일요일 아침에 다시 시흥시로 올라가기 위해 집안에 남아 있던 그의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입대 전, 넉넉하게 살 때에 입던 옷들은 모두 성훈이 옷가방에 넣어 놓고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었던 전공서적들은 박스에 담아서 월요일에 근처 고물상에 갖다 팔라고 성훈이에게 일렀다. 그가 짐을 정리하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돌린 지연이와는 달리, 성훈은 “나는 형 따라 가서 같이 살면 안 돼?” 하면서 힘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아빠하고 누나 돌봐줘야지.” 하고는 정훈은 그런 성훈의 어깨를 한번 어루만졌다.


  


통장안에 800 만원 남짓한 돈이 찍혀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그가 다니던 대학의 전경이 떠올랐다. 그러나 당장 그 돈이 더 필요한 사람은 아빠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을 나오기 전 그는 아빠가 화장실에 간 틈에 통장과 현금카드를 사랑한다는 간단한 말과 비밀번호를 적은 쪽지와 함께 아빠의 허름한 가방속에 넣었다. 옆에 있던 동생들에게는 나중에 아빠한테 알려주도록 당부를 해 놓았다.



일요일 오후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속에서 정훈은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를 따라서 부산에 가지 않은 이유를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독립할 나이에 아빠를 따라서 갈 이유가 모호한 것처럼, 가족이 모두 이사를 하는데 따라가지 않을 이유도 또한 없었다. 혹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아쉬움에 여전히 그가 어디를 가든지 자신이 넘어야 할 현실의 벽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전히 현실 속에서는 자신이 공장에서 일하는 공돌이지만 자신의 소속은 또한 그가 끝내지 못한 대학이라는 알량하고 헛된 자존심으로 그가 속해있다고 믿는 대학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서 자신도 모르게 일그러진 얼굴에서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며칠 동안을 잠도 제대로 못잔 터였고 이제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밀려오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순간엔가 창문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었다.


 


 


 


(현준)


“무슨 좋은 일 있었니?”


현준이 밤 늦게 들어올 때까지 거실에서 티비를 보던 엄마가 구두를 벗고 들어오는 그를 어깨너머로 돌아보면서 말했다.


“좋은일은요. 아니예요.” 


  


그가 방으로 들어가서 양복 윗저고리를 벗고 넥타이를 풀고 있을 때 그의 엄마가 문을 빼끔히 열고는 들어왔다.


“선애가 화 났다더니 이제 풀린거야? 둘이 데이트하다가 들온거니?” 이제 와이셔츠 단추를 풀고 있는 그의 등 뒤에서 그의 엄마가 호기심에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런거 아니예요.” 그가 고개를 돌려 어깨너머로 엄마를 한번 돌아보고는 셔츠를 벗었다.


“아니긴 현관에 들어 오면서부터 싱글벙글 하더구만. 로또 당첨된건 아닐테구 너 그렇게 웃는 낯 본적이 하도 오랜만이라서 물어 보는 거야.” 말을 마치고 나서 현준이 이제 바지의 벨트를 풀면서 돌아보자 그의 엄마는 뒤를 돌아 방을 나가서 문을 닫았다.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벗어서 벽걸이에 걸어 놓은 다음 그는 벽에 걸려있는 거울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의 엄마가 그렇게 물으실 만도 한듯했다.


그의 모습은 여느 때와는 달라보였다.


눈꼬리에 주름이 지고 입가에 미소가 번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자신도 자신의 변화에 놀라고 있었다.


 


오늘 정훈과의 첫 술자리에서 현준은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친해 놓으면 좋을 사람, 재미있고 좋은 사람이라는 각인을 시켜주기 위해서 평상시의 자신이 아닌 그의 다른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는 말도 많이 했고 많이 웃었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유머의 총 지식을 동원해서 정훈과 연희의 반응을 살피면서 그들을 재미있게 해 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다행히도, 그들은 그의 그런 노력에, 그가 하는 말에 웃어도 주고 고개도 끄덕이면서 맞장구도 쳐 주었다.

  


공손하고 깍듯한 말투의 정훈을 보면서 그가 군대를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제대 후 일년동안 회사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가 졸업한 서울의 옆 동네에 있는 대학을 다니던 중이었다는 사실도 대화중에 알게 되었다.


그 학교의 캠퍼스에 어느 구내식당이 더 싸고 맛있었고 어느 교수의 무슨 수업은 어떻다더라는 그 학교를 졸업한 고등학교 동창에게 들은 말을 꺼냈을 때였다.  순간 현준은 정훈의 눈빛이 달라지고 볼이 발그레 하게 상기되면서 그의 얘기를 듣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한 공대교수는 쪽지시험을 보고는 성적미달 학생들을 모두 운동장으로 내보내서 비가 오는 날씨 속에서도 조교의 감시하에 운동장을 뛰게 했다는 얘기를 할 때에는 정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면서 자신의 거칠고 딱딱한 군살박힌 두손을 꼭 맞잡는 것을 그는 볼 수 있었다. 


 


출근해서 오전에 미팅을 끝내고 그는 워커씨를 태우고 청주공장을 구경시켜주기 위해서 차를 미리 회사 건물 앞에 세워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밤 술이 과했던지 사장님과 워커씨는 물론 부장도 회사에 30분이 늦게 출근을 했다. 듣자하니 새벽 4시까지 맥주에 양주에 폭탄주까지, 아주 질펀한 밤을 보낸 듯 했다. 


어제 일찍 빠져나오길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라디오를 틀어서 음악을 듣다가 정훈에게 어제 잘 들어갔는지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그 문자에 대한 답문자는 그가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사무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워커씨만큼 그렇게 그가 기다리는데도 오지 않았다. 

마침내 조바심이 난 현준은 연희에게 간단한 인사와 함께 정훈은 어떤지 슬쩍 묻는 문자를 보내보았다.


이번엔 그가 보내기가 무섭게 그녀에게서 답문자가 도착했다.


정훈의 어머님이 새벽에 돌아가셔서 아침에 대전에 급하게 내려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도 퇴근후에 가 보려고 한다고 그녀는 덧붙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도 같이 가봐도 되겠냐는 문자를 그녀에게 보냈다. 


그리고 휴대폰을 내려놓는 순간 자동차의 뒷문이 열리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워커씨가 차에 올랐다.


 


오후에 아산공장에서 다시 올라와서 퇴근시간 무렵에 부장이 그를 불렀다.


“어제는 내가 큰 맘 먹고 희생을 했으니까 오늘은 정현준대리가 워커씨좀 모셔.” 


말을 끝내고 부장은 옆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고 있는 워커씨에게 오늘 밤에 회사가 준비한 그를 위한 스케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노,노,노,노.” 연거푸 “노” 라는 말을 반복하더니, 워커씨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오늘은 일찍 호텔로 돌아가서 푹 쉬어야겠다고 단호히 거절을 했다.


아침부터 화장실을 계속 들락거리느라 고생했다면서 오늘은 좀 푹 쉬고 싶다고 그는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한방 날리려다가 헛디뎌서 자신이 미끄러져 버린 사람 마냥 그렇게 불만족스럽고 불쾌한 표정으로 부장은 현준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그냥 호텔까지 모셔다 드리고, 대신 내일 접대는 정대리가 알아서 다 해.  난 내일 거래업체와 약속이 있어서 일찍 퇴근해야 한다구.” 


 

병원까지 가는 길은 찾기 쉬웠지만 좁은 주차장과 좁은 골목으로 마땅히 주차할 만한 장소가 없어서 몇 번을 병원근처를 돌다가 현준은 먼저 연희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두 블록을 더 가서 차를 세운 다음 여전히 더운 한 여름밤의 열기 속에서 검은 정장을 한 채로 전력질주를 했다. 


누군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를 보기 직전에 가장 조바심이 난다는 것을 그는 그 순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달려와서 영안실 문 앞에서 멈춰서는 다시 머리와 옷매무새를 살피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땀을 닦은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한구석의 테이블에 서너명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또 서너명의 아주머니들이 그 옆에서 쭈그리고 모여서 두런거리며 대화를 하다가 그를 보고는 “아이구 아이구” 하면서 한번 곡소리를 냈다. 


구두를 벗고 조의금을 건넨 후 먼저 들어간 연희와 같이 서 있는 정훈을 발견했다. 


피곤에 지쳐서 잿빛의 얼굴이 된 채로 그렇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흐린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훈을 마주보면서,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혼란스럽고 복잡했던 감정의 실체가 훨씬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30년이 넘도록 자신의 삶 속에서 그가 해결하지 못하던 그의 감정의 숙제를 그가 끙끙거리면서 씨름해왔던 조각 그림 맞추기 퍼즐이 한순간 완성된 모습을 얻은 듯 보였다.


   


새벽 두시.


침대에서 뒤척거리면서 오지 않는 잠을 청하다가 현준은 몸을 일으키고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2년전 그가 담배를 끊기로 작정한 후에, 그는 피우던 담배를 버리는 대신, 서랍 어딘가에 넣어 두었었다. 그렇게 손에 닿는 곳에 담배를 두고도 확실하게 끊어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테스트하기 위함이었다.


맨 아랫 서랍 안쪽에서 그는 그가 넣어두었던 담배갑을 찾아내고는 한 개비를 꺼냈다. 그리고 책상위의 반쯤 타다 꺼진 모기향 옆에 놓여있는 라이터를 들고 베란다로 조용히 걸어갔다.


정훈에 대한 그의 감정이 선명해 지면서 또 한편으로 또 다른 실타래가 꼬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항상 인생은 복잡하게 얽혀가는 것인가 보다 하면서 그는 담배를 한모금 깊이 들이마셨다. 이질적인 향이 목구멍을 채우면서 불쾌함이 그의 입안을 채웠지만 그는 그대로 끝까지 들이마시면서 가만히 서서 멀리서 달려가는 차량들이 발산하는 빛의 꼬리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인생 30년 넘게 그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대학 재학시절 술자리에서 실연의 아픔 때문에 울고불고 하던 친구 녀석을 그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었다. “사랑이 밥 먹여주냐? 싸구려 감정가지고 오바하기는...” 그는 그렇게 콧방귀를 끼었었다. 


이제 그에게 늦게 찾아온 이 감정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면서 머리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파트 입구쪽에서 술이 취해 늦게 귀가하고 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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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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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 작성일
잘읽었습니다.
문장 한귀절 한귀절이 모두 주옥같습니다.
눈물이 나는군요.
그래도
어려움과 아픔이지만
항상 긍정과 희망이 보여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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