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프린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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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9월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한낮에는 30도를 웃돌고 있었다.
목을 조이는 듯한 느낌과 가끔씩 고개를 숙이고 서류정리를 하는 경우에 넥타이의 매듭부분의 볼록한 부분이 어쩌다 목 언저리에 닿을 때면 간지러움까지, 와이셔츠는 둘째 치고 라도 넥타이를 하루 종일 매고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데 며칠이 걸렸다.
이제 출근하면서 사무실 직원들과 웃으면서 인사를 할 만큼, 출근하면 그날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할 만큼 정훈은 익숙해져 있었다. 출근 첫날에는 마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이방인처럼 하루 종일 불편한 마음에 주변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가시방석에 앉은 듯 했다.
하지만, 이제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창밖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에 고개를 돌려 창문에 드리워진 플라타너스 가지의 그림자와 건너편 건물위로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 볼 때면 그를 찾아온 변화에 형언 할 수 없는 행복감에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끊임없이 그의 귀를 자극하면서 들려오던 기계음 소리와 먼지로 자욱한 현장 안에서 답답한 마스크를 쓰고 박스작업을 할 시간에 그는 이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여기저기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전화벨 울리는 소리, 조용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는 직원들의 목소리만 들리고 있는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원하면 아무 때나 커피도 편하게 마실 수도 있었고, 화장실 갈 때마다 보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사실 출근 첫 날, 그는 자신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윤지호 대리에게 화장실 좀 갔다 오겠다고 말을 했다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었다.
컴퓨터로 무슨 작업을 하고 있던 윤대리는 그의 말을 듣고는 그를 올려다 보고는 픽 하고 웃었다.
“오정훈씨, 화장실 가는 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건데? 왜, 같이 가달라고?” 그의 말에 옆에 앉아있던 여직원들이 까르르 웃었고 정훈은 홍당무가 되어서 머리를 긁적거렸었다.
그가 여전히 가끔씩 부담스러운 것은 전화응대였다. 같은 사무실에서 매일 보는 직원들의 얼굴과 이름은 모두 익혔지만, 옆의 사무실과 위층의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이름을 여전히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그는 전화를 받은 후에 가끔씩 직원의 이름이 헷갈리는 경우가 있었다. “죄송하지만 어느분을 찾으시는지 성함을 다시 한 번만 말씀 좀....” 하고 말 할때는 완전히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조은영씨가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곧 직원들의 비상연락망을 주겠다고 했지만, 1년 전 것이라 다시 정리하고 건네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며칠째 그녀는 그 약속을 잊은 듯 했다.
나른한 오후 서너시경에는 어김없이 경리과 윤지영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제 빨리 번호를 불러봐요. 오늘은 나이순으로...”
“아 지영아! 무슨 나이순이야! 너 죽을래?” 영업부의 전윤자씨가 그녀를 보고는 눈을 흘겼다.
“아, 언니 미안 미안.. 그럼 키 순으로?”
그녀의 말에 관리부 부장님이 그녀를 보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죄송해요. 부장니임.”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숙였고 주변에서 큭큭거리면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그들이 그렇게 사다리를 타면서도 항상 정훈은 제외 시켰다. 첫 월급을 받고 난 다음에야 사다리를 탈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고 했다.
“지금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을 때가 좋아요. 한번 월급 타면 그 다음부터는 싫어도 같이 타야 하니까....” 거의 착취하다시피 해서 걷은 돈을 가지고 떡볶이를 사러 간다고 슬리퍼에서 구두로 갈아 신으면서 윤지영씨가 그에게 씽긋 하고 웃어보였다.
수요일 새벽 1시, 새로 과외를 시작한 용준이와의 수업을 막 끝내고 있었다.
“16일에 9월 모의고사지? 잘 봐야 될 텐데. 어머님 기대 많이 하시는 것 같던데...” 정훈이 가방에 책을 넣으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과외 다시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다고요. 첫술에 배부를 걸 기대하면 안 되죠.” 책을 접고 책상을 대충 정리하면서 용준이 대답했다.
“그래도 마음은 너무 편해요.” 용준의 말에 정훈이 가방의 지퍼에 손을 뻗치다 말고 용준에게 얼굴을 돌렸다.
“전에도 과외를 하긴 했었어요. 근데 그 과외선생님이 서울대 나왔다던데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똑똑하다고 자신이 말하곤 했어요.” 말을 멈추고 그가 씩 웃었다.
“전 첨엔 그런 선생님이 좋은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반드시 좋은 것 만은 아니더라구요.”
“왜?” 이제 가방의 지퍼를 채우면서 정훈이 물었다.
“자신이 머리 좋으니까, 나도 그럴 줄 생각하는 경향이 있더라구요. 첨엔 모르면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는데, 나중엔 막 답답해 하더라구요. ‘한 두번 말하면 아는건데 왜 모르냐’구....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지, 몰라도 아는 척하기 시작했어요. 진도는 정신없이 빠르게 나가는데, 전 1장부터 무슨 내용인지 몰랐어요. 1년을 과외했는데, 완전 시간 낭비였어요. 스트레스는 만땅이었고...” 용준이 쓴 웃음을 지었다.
“나중엔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맞아죽을 결심하고, 엄마한테 과외 선생님 좀 바꿔달라고 말했어요. 다 내 잘못이라고 그냥 죽도록 혼내고 선생님만 바꿔달라고....”
말을 멈추고 용준이 가방을 메는 정훈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머님이 내가 붙인 과외 전단지 보신거구나?” 정훈이 씩 웃었다.
“아닌데요?”
“아, 그럼 너가 본거야?”
“사촌 형이 엄마한테 선생님 소개 한 거예요.”
“아, 그럼 그분이 보셨나?”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정훈의 머리속으로 갑자기 혹시나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혹시 그가 용준이의 사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뛰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정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용준아, 혹시....”
“네?” 현관문의 손잡이에 손을 대다가 갑자기 돌아서는 정훈을 용준은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바라보았다.
“너네 사촌 형이 혹시...... 정....현..준 아니니?” 입안이 바싹 마르고 숨이 가빠지면서 정훈은 시선을 용준의 입술에 고정했다.
“아닌데요. 그 형은 이 진수예요.”
“아....... 그래.... 그럼 토요일에 보자..”
용준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 보이고는 정훈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긴장이 풀리고, 순간 잔뜩 부풀었던 기대감이 빠져나가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자전거에 올라타서 페달을 밟으면서 서늘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그를 밀어낸 것인데도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은 왜 인지, 자신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며칠 전, 용기를 내어 현준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을 때가 생각이 났다.
입사를 축하한다고 회사 직원들이 마련한 자리에서 예의에 벗어날까봐 따라주는 대로 그는 받아마셨다. 꽤 많이 마셨지만 잔뜩 긴장을 한 터라서 그는 별로 취하지 않았었다.
회식이 끝난 후부터 취기가 몰려와, 집 앞의 공터를 휘청거리는 걸음을 힘들게 옮기는 그의 머리에 현준이 떠올랐다.
술기운에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갇혀 있던 우리에서 탈출한 야생동물처럼 그의 마음속에서 날뛰었다.
현준을 향한 그리움이 터져나와 그의 눈앞을 가렸다.
그를 만져보고 안아보고 싶었다.
간절한 마음에 떨리는 손으로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손에 들고 현준의 번호를 눌렀다.
핸드폰을 귀에 붙이고 그는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그가 얼마나 현준을 그리워했는지 고백하려고 잔뜩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귓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현준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의 ‘방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확인하시고 다시.....’ 라는 말에 놀라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으로 인해서 휴대폰 번호까지 현준이 바꾸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그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던가 하는 생각에 죄책감과 절망감이 밀려와 앞을 가려서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길 옆의 전봇대를 붙들고 서서 이마를 서늘한 전봇대의 콘크리트 표면에 대었다.
현준에게 쏟아냈던 그의 이기적인 말과 행동에 대한 후회로 자기 자신이 역겨워졌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그를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뒤늦은 후회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다시 그를 볼 수 있다면, 딱 한번만이라도 그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솔직하게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그를 생각해왔는지, 자신이 얼마나 그를 그리워 해 왔는지.....
그는 전봇대가 마치 현준인양 그렇게 그것을 끌어안고 자신의 행동에 용서를 구했다.
점심 식사 후에 정훈은 지난 8월의 매출을 뽑고 있었다.
일일 매출과 주간 매출로 나누어서 작업을 끝냈지만 마지막에 영업부 직원이 반품전표를 컴퓨터에 입력하지 않아 누락되어 매출로 잡힌 것이 있어서 그는 자리에 앉아서 그 직원이 자신의 책상과 책꽂이를 다 뒤지면서 전표를 찾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오정훈씨.”
“네?” 뒤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돌렸다.
“지난 것이긴 한데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수출된 아이템하고 스펙하고 총 금액 좀 뽑아 볼 수 있을까?” 해외영업부의 이과장님이었다.
“예, 그런데 출력까지 하려면 5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요.” 정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잠시 기다리지 뭐.” 말을 마치고 그는 정훈의 옆자리에 앉아서 정훈이 작업하고 있는 컴퓨터의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의 시선에 부담을 느끼면서 그는 무역자료를 찾기 위해서 화면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정훈이 입사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프로그램이 업그레이드 되면서 몇몇 직원들은 오히려 불편해 했다. 아마 이과장도 차라리 출력까지 할 바에야, 뽑아서 가져가자고 정훈을 찾아온 듯 보였다. 정훈이 자료를 찾아 막 출력을 시작할 때 이과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야! 정현준! 너 임마, 어제 전화한다더니 왜 안했어?”
이과장의 말에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으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이과장을 돌아보다가 통화중이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이과장이 그에게 슬쩍 윙크를 했다. 정훈은 고개를 돌리고 창가에 있는 프린터를 바라보았다. 이과장이 요청했던 자료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 영국에서 2년이나 있다가 오게 되는거야? 런던이지? 좋네. 출발은 이달 말이지? 그래. 출발전에 함 봐야지, 언제 올래? 이번 주 일요일 저녁 7시에? 그때 괜찮아, 그런데 어디서? 아.. 거긴 너무 멀다. 그냥 공단입구에 있는 주원가든에서 보자.”
프린트가 된 자료를 손에 들고 정훈은 전화를 끝내는 그를 바라보았다.
“스테이플로...” 혀가 굳어버려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아 그에게 프린트 된 것을 내밀면서 그가 간신히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가져갈게.” 그가 서류를 건네받고 막 일어서는데 맞은편에 앉은 조은정씨가 이과장을 불렀다.
“과장님 전화왔어요. 그쪽으로 돌려드릴게요.” 조은정씨의 말에 이과장이 얼굴을 돌려 그녀를 한번 바라보고 책상위에서 울리는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네, 전화바꿨습니다. 이 진수입니다.”
(현준)
차에서 마지막 박스를 들고 셋방에 올라온 현준은 털썩 의자에 주저 앉았다.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짐이 꽤 많았다. 그래봤자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시 떠나야 할 처지였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꼭 필요한 것은 화물로 먼저 보내고 침대나 책상은 버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때부터 쓰던 것들이라 상당히 낡아서 남에게 주기도 부끄러운 것들이었다.
박스를 뜯어 옷가지를 정리하다가 순간 그는 지난 두세달 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손에 셔츠를 꺼내들고는 언제부터 그렇게 갑작스러운 변화의 급류를 타게 된 것인지 그는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훈이었다.
그의 삶의 소용돌이 속의 중심에는 정훈이 있었다.
비록 이제 그는 추억속의 인물로 되어 버렸지만 여전히 그의 존재 때문에 그의 삶이 통째로 바뀌어 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30년이 넘도록 그에게 삶이란 그저 잔잔한 호수에 떠 있는 종이배와 같은 것이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잔물결이 밀어내는 대로 그저 흘러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언젠가 종이배가 다 젖어서 더 이상 물 위에 떠 있지 못하는 날이면 그의 인생이 다 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또한 사회도 그가 남들과 똑같이 하기를 바란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선애의 얼굴도 떠올랐다.
이런 변화가 선애의 입을 통해서 시작된 것이라고 처음에는 시작했지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의 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2년간 어쨌든 그녀의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곁에 있었기에 그녀에게는 거짓이 아닌, 솔직하게 말을 털어 놓는 것이 그녀에 대한 진실된 의무라고 그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항상 진실은 가슴을 찔러대는 비수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상처를 받은 만큼 그녀도 상처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삶 속에 그 둘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고 과거의 존재들이 되어 버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옷을 옆에 내려 놓고 몸을 일으켜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그가 정훈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였다.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와 그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슬며시 쓸어 넘기고는 그는 창틀에 팔꿈치를 괴었다.
더 이상 그가 할 일이 없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정훈의 근처에서 그를 지켜보고 싶었다.
정장을 하고 출근을 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현준은 상상해 보았다.
퇴근 후에,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함께 상사를 안주삼아 씹어대면서 술 한잔을 걸치고, 급여일에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수지를 맞춰보는 정훈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이제는 그가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 사로잡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그는 되뇌었다.
정훈의 곁에는 정훈이 진정으로 원하는 진실한 인연이 찾아 올 것이고 이제 정훈과 미래의 그의 인연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그가 물러서 줄 때였다.
새로 몸담게 된 회사에서 런던에서의 업무 수행 가능여부를 물었을 때에, 입사하면서 그런 기회를 잡게 된 것에 대한 다른 직원들의 부러운 시선은 둘째 치고, 그는 그것이 그로 하여금 정훈의 옆자리를 비워 놓도록, 그가 더 이상 그곳에 걸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운명이 전해주는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제 멀어져야 하는 정훈이지만, 현준은 그의 존재로 인하여 커다란 기쁨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는 누군가를 향한 진정한 설레임, 깊이를 알 수조차 없는 폭발하는 듯한 그러한 사랑의 감정을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은 사람들의 입에서 쉽게 나오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간절함, 따스함, 괴로움, 슬픔, 달콤함과 안타까움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섞어서 만들어 놓은, 화산에서 분출하는 용암과 같았다.
그렇게 늦게 정훈으로 인해서 그가 그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생기는 성적인 욕망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욕망 그 자체로서의 욕망일 뿐이었다.
외부적인 자극으로 안하여 생기는 욕망이 아닌 내부에서 가득차서 분출되는 욕망일 뿐이었다.
남자건 여자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으니 데이트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쩌다가 소개팅이라도 받을 라 치면 그는 시간낭비로만 여겨졌었다.
그러다 결혼할 시기가 되었다는 그의 어머니와 가족들, 그리고 주변인들의 말에 따라 때마침 그에게 같은 직장의 여직원으로부터 소개팅 제의가 들어왔고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선애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 그녀와의 만남을 알게 된 친구녀석들의 “예쁘다, ”봉잡았다.“, ”횡재했다“ 라는 말을 들으면서 타인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게 된 그녀가 괜찮은 상대로 여겨진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남들처럼 그렇게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늙어가는 삶의 흐름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정훈으로 인해서 그의 잔잔한 마음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을 때, 자신이 사회에서 터부시 되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 보다는 오히려 누군가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가슴이 설레고 누군가로 인한 감정으로 열정이 넘치고, 눈물을 흘릴수 있다는 것을 느낀 후에는 그는 그런 감정을 잃게 될 까봐 두려워졌다.
한밤중의 취중에 그가 한 말에 “정훈이 누구냐” 라는 그의 어머니의 질문에, 슬쩍 넘어가지 않고 ‘그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사내놈’ 이며, ‘그 없이는 그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해버린 것도,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그의 인생에 찾아온 유일할 수도 있는 정훈의 존재에 대한 간절함이 그의 전부를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제 그는 이렇게 홀로 남겨져 버렸다.
하지만, 그가 어디로 떠난다 하더라도, 정훈에 대한 그의 추억과 감정은 고스란히 그의 가슴속에 남겨져 있을 것이라고 그는 자위했다.
그리고 언젠가 운명이 그를 가엾게 여겨 준다면, 먼 발치에서 나마 정훈이 변모해가는 모습을 언뜻언뜻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우울해진 자신에게 타일렀다.
남아있는 짐을 정리하기 위해서 그는 다시 방바닥에 주저 앉아 바닥에 쏟아놓은 그의 물건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옅은 한 숨을 쉬고는 그의 개켜놓은 옷을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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