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심리학 (2)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본문
“다녀왔습니다.”
“어, 아들. 왔어?”
지친 몸을 끌고 현관에 들어서자, 엄마가 부엌 식탁에서 양파와 마늘을 까며 식재료를 다듬고 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따뜻하고 익숙한 그 모습에, 좁고 오래된 집이라도 내 집이 최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킁킁.
“이거... 된장찌개 냄새야?”
“응. 차돌 넣고 끓였는데, 밥이랑 좀 줄까?”
꼬르륵.
뱃속이 요란하게 울리고 군침이 감돈다. 이 시간에 엄마표 차돌된장찌개라니. 먹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요즘 부쩍 살이 더 올라 몸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기에, 쉽사리 먹겠다 대답하지 못 한다. 아직까지는 소위 통근 경계선에 아슬아슬 걸친 몸이라 그럭저럭 봐줄만 했지만, 더 방심하다간 순식간에 뚱남이 되어 바닥을 굴러다니고 말거다. 작심삼일도 삼일은 지킨다 했다, 현진오. 결심한지 얼마나 됐다고. 그 잠깐의 행복을 참지 못해, 먹고 나서 또 후회하는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아냐, 나 살 빼야 돼. 아침에 일어나서 먹을게.”
“남자가 무슨 다이어트? 지금 튼튼해 보이고 딱 좋구만. 그리고 니가 아침을? 오전 수업도 간신히 들어가면서 무슨.”
“......”
“그러지 말고 있을 때 반 공기만 먹어. 알바하고 바로 왔을 시간이니 아직 저녁 안 먹었을 거 아냐.”
빠른 손놀림으로 어느새 식탁을 정리한 엄마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벌써 냉장고에서 부산하게 반찬 몇 가지를 꺼낸 후 찌개를 그릇에 담아낸다. 맛있게 차려진 식탁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도저히 밀려오는 식욕을 참을 수가 없다. 몰라, 원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니까.
드르륵, 털썩.
“그럼 기왕 먹는 김에... 밥 한 공기 꽉꽉 채워서 줘.”
“그래, 잘 생각했어. 엄마 밥은 하나도 살 안 찌는 거 알지?”
그 말 믿고 먹었다가 이렇게 불었는데 무슨. 그런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내 손은 이미 본능에 의해 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빠른 속도로 눈앞의 밥과 반찬을 숟가락으로 떠 입에 우겨넣는다. 후루룩 맛보는 뜨끈한 찌개 국물.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기막힌 맛이다. 그래, 이 맛을 어떻게 참아.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 아니다. 수업 끝나고 아르바이트까지 하고 온 오늘 같은 날엔 유난히 더 배고픔을 견디기가 어렵다. 어느새 반 공기를 넘어 밥그릇의 밑바닥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아쉬워질 때 쯤.
“진오 넌 자취하고 싶은 생각 없어?”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아니, 그냥. 네 나이 또래 애들은 다 독립해서 혼자 살아보고 싶어 하잖아. 그래야... 엄마 몰래 막 연애도 해보고 그러지.”
“......”
또 시작됐구나. 엄마는 가끔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있다. 다른 집 자식들이 아무리 조르고 애원해도 부모가 안 된다며 하지 말라고 잡아뗄 만한 일들을, 엄마는 오히려 가끔 한 번씩 내게 권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억지로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려도, 애늙은이 같은 내 어리광을 받고 싶어서 그런다며 씨익 웃곤 했다.
“연애는... 지금도 얼마든지 몰래 할 수 있어. 그리고 그거 다 돈이잖아. 집 떠나도 결국 돈이고.”
“......”
“난 이 집이 좋아. 엄마 밥이 좋고.”
그 말을 듣고 맞은편에 앉아있던 엄마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래, 넌 결국 엄마가 좋은 게 아니라 엄마 밥이 좋은 거겠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 밥도 엄마의 일부잖아. 그러니 어쨌든 엄마가 좋은 거 맞아.”
“하여튼 말은.”
밥그릇에 붙은 밥알을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모으며 하는 변명이라니, 내가 봐도 참 설득력이 전혀 없어 보인다.
“먼 거리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다가는 몸 버려. 그러지 말고... 학교 근처로 방 하나 알아봐. 엄마가 큰 맘 먹고 비용 대줄게.”
“없는 형편 뻔히 내가 다 아는데 방은 무슨 방. 요즘 월세가 얼만 줄 알고. 혹시 엄마... 복권 당첨됐어?”
“으휴, 어르신 또 초를 친다, 초를 쳐. 그랬으면 아예 집 사서 이사를 갔지.”
“......”
“엄마 새로 일 하나 더 구했거든. 페이가 엄청 좋아. 당분간은 먹고 살 걱정 안 해도 될 정도로.”
탁.
“엄마!”
“아휴, 깜짝이야! 귀 떨어지겠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버겁잖아. 엄마가 이팔청춘도 아니고 어떻게 여기서 일을 더 해?”
아쉬움이 마저 남아 빨고 있던 숟가락을 식탁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버럭 화를 낸다. 가끔 들어서 알고 있다. 늦은 새벽 화장실에 가기 위해 거실을 가로지를 때면 엄마 방에서 들려오던 끙끙 앓는 소리. 지금도 나 때문에 무리해가면서까지 버텨내고 있다는 걸.
“별 거 아냐. 그냥 집 청소 좀 보조하고 고양이 밥만 제때 주면 되는 일이야. 보수 좋은 것 치고 충분히 할 만하겠더라. 지금 하는 일이랑 시간도 안 겹치고.”
“가정부 같은 거야? 그럼 더더욱 반대야. 남 싫은 소리까지 들어가며 엄마가 그 일을 왜 해. 하지 마.”
“일할 거리가 많지 않으니까 하는 거야. 나도 힘들면 절대 안 해. 얼마나 오래 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
“엄마같이 못 배우고 할 줄 아는 거 없는 사람한테는 이런 기회가 자주 오질 않아. 그러니 진오 너는 공부 열심히 해. 그거 집중하라고 이런 잔소리 하는 거야. 엄마는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면 그걸로 만족하겠지만, 그러려면 고를 선택지의 폭이 넓어야 하니까. 기껏 좋은 대학 가놓고 비싼 등록금 내버리지 말고. 알았지?”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그런데 아무튼 난 엄마가 그 일 하는 것도, 내가 집을 나가는 것도... 다 싫어.”
드르륵. 성큼성큼.
속이 상해 식탁에서 먼저 일어나 등을 돌려 내 방으로 향한다. 뒤에서 엄마가 다급히 소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야, 그러면 알바라도 그만 두든지.”
“그것도 싫어.”
벌컥, 탁.
“후...”
엄마가 저럴 때마다 꼭 이렇게 화를 내고 안 좋게 돌아서게 된다. 사실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엄마에게 고맙고 미안해하면서도, 겉으로는 어른스럽지 못하게 툴툴대기만 하는 모자란 내가 싫다. 왜 이래야만 할까. 또 엄마는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만 할까. 이 모든 미움과 원망들이 쌓여 돌고 돌다가 그 끝엔 늘 한 사람에게로 향해 가 닿는다. 생각하기도 싫은 얼굴과 이름의 그 사람. 세월이 지나 간신히 의식 저편에 가라앉은 그 강렬하고 무서운 기억들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려 하는 것을 막아보려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끝없는 그 심연 속으로 또 다시 잠식되기 전에, 생각을 돌려 얼른 컴퓨터 앞에 앉아 다른 일을 찾아 집중해본다.
딸깍. 드륵드륵.
“교양심리학...교양심리학...”
겨울이 물러난 자리에 꽃샘추위가 남아 아직은 쌀쌀할 무렵인 3월. 수강 정정 기간이라, 수강신청 페이지에서 이번 학기에 열린 모든 과목을 열람할 수가 있었다. 교양심리학이면 교양 수업이겠지. 전공이면 곤란한데. 그렇게 몇 페이지 정도의 다른 교양 과목들을 지나치자,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같은 이름의 수업을 교양과목 리스트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물론 이것만으로 모든 것을 확신할 수는 없다. 정황 상 이 수업 교수일 확률이 높긴 하지만... 혹시 수업을 듣는 늦깎이 복학생일 수도 있고, 심지어 이 수업과 전혀 관련 없는 다른 학교 사람이 우연히 같은 이름의 교재를 가지고 카페에 방문한 것일 수도 있었다.
“교수 이름이... 태형주?”
왠지 어디서 본 듯한 이름. 우리 과 전공교수님도 아니니 분명 처음 보는 이름에, 알고 있을 리 없는 사람일 텐데. 이 기시감은 뭐지? 우선은 그가 이 과목의 교수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교수진 명단을 확인해보기로 한다. 심리학 관련 교양수업인 만큼 심리학과 교수겠거니 짐작하여 학과 소개 탭을 열자,
“어?”
태형주. 심리학과 정교수. 맞다. 분명 낮에 봤던 그 사람이다. 지금보다 한참 젊은 시절에 찍은 사진을 그대로 쓰고 있어 부분 부분 얼굴이 묘하게 다르고 반테 안경에 눈매가 다소 가려져 있긴 했지만, 이 시크한 무표정에 선 굵은 잘생긴 얼굴은 분명 오늘 낮에 본 그 중년 남자가 맞았다. 사진 위로 오늘 봤던 그의 모습이 겹쳐 그려지며 또 다시 혼자 가슴이 벅차오른다.
“후우. 우리 학교 교수였구나.”
마음만 먹으면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있겠다는 점에 쾌재를 부르긴 했지만, 막상 구체적인 계획을 짜서 실행으로 옮기자니 적잖이 고민이 된다. 물론 이 수업을 신청하고 듣는 게 그를 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좋은 방법이겠지만... 그러려면 이미 내 생활패턴에 맞게 완벽히 짜놓은 시간표를 정정해야만 했다. 심지어 시험만 잘 보면 학점 퍼주신다고 소문이 자자한 늙은 전공교수님의 수업과 시간표가 하필이면 딱 겹친다. 어떻게 따낸 꿀수업인데. 이 과목을 빼고 교양심리학을 넣는 게 과연 현실적으로 옳은 선택일까.
“뭐야, 신청인원이... 달랑 9명?”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