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심리학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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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는 상상 이상으로 보수적인 집단이야. 진오 너나 나 같은 사람을... 아주 경멸하지.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 본질을 그들에게 들킨다면, 난 그 즉시 짐 싸고 물러나야 할 거야. 아마 그대로 영원히 매장되겠지. 명예를 잃는 게 두렵진 않아. 다만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이 학문을 계속할 수도,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람을 느낄 수도 없게 될까봐 그게 무서운 거지. 그건 정말 죽기보다 싫거든.”
“......”
“그렇지만 웃기게도 여성 편력에 대해서는 오히려 말도 안 되게 관대한 집단이기도 해. 그것이 직접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 논란이 되지만 않으면, 서로가 서로를 눈감아주는 꼴이지. 어리석은 몇몇은 한 술 더 떠 자랑처럼 여기기도 하고. 추하지? 난 그 점을 심리적으로 이용한 것뿐이야. 결혼하지 않는 이유도 귀찮게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내게 정 주려는 여성들의 헛수고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으니까. 물론 알면서도 들러붙는 바보들도 있지만.”
나와 같은 사람. 나와 같은 사람... 분명 그는 방금 전 그렇게 말했다. 그가 나와 같은 게이였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나한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일주일 내내 압박감에 시달리며 그런 끔찍한 악몽까지 꿨었는데. 방금 전 죄를 짓고 그의 심판만을 기다리고 있던 내게, 이런 과분한 행운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환희와 혼란이 뒤섞인 마음에, 그간 줄곧 궁금했던 질문을 꺼낸다.
“어째서... 저입니까.”
“...?”
“저는 전공 학생도 아니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만약 제가 교수님을 해코지할 마음을 먹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면요. 악의를 품은 학계 누군가가 사주한 사람이었다면요. 섣불리 저를 믿으시는 건 너무 위험한 것 아닙니까.”
“아니잖아.”
“...!”
“그러면 된 거다.”
내 왼손을 감싸 쥐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간다. 거기에 진지한 눈빛이 더해져,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진다.
“심리학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의 감이야. 아직 한참 부족한 실력이긴 하지만. 내게 적대감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정도는 말만 몇 마디 섞어 봐도 나름 정확하게 구분할 줄 알거든. 그런데 사실 네 경우엔... 오히려 좀 어려웠어. 너무 노골적으로 호의적이라서... 혼란스러웠거든. 흠흠. 심지어 외모가... 내가 아주... 선호하는 이미지이기도 하고.”
화끈.
마지막 말을 할 때는 슬며시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며 입을 삐죽이는 그의 모습. 처음 보는 그의 부끄러워하는 표정이다. 그의 칭찬 한 마디에, 맥박이 한계치에 다다를 만큼 빠르게 뛰며 온몸이 터질 듯 뜨거워진다. 그 또한 내 외모가 마음에 들었다는 그 말이 부끄러우면서도, 날아갈 것 마냥 한없이 기쁘다.
“어째서 너냐고 물었지.”
“...?”
“처음 만났던 카페... 사실은 커피가 아닌 너 때문에 들어간 거였어. 그날의 화를 잠시 잊게 될 만큼, 정말 오랜만에 아주 마음에 드는 친구가 안에 있었거든. 긴장 많이 했던 나보다도 훨씬 더 크게 긴장한 네가 실수 연발이라, 괜한 짓을 한 건가 바로 후회했지만.”
“...!”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휘발성 호감 그 이상은 아니었지. 학계에 몸담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고 홀로 지내기로 결심했었으니까.”
두근두근.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가슴 속에서 터져버릴 것 같다. 그게 우연한 만남이 아니었다니. 나를 보고 일부러 찾아 들어온 걸음이었다는 사실을 내 귀로 직접 듣고도 믿기가 힘들다.
“헌데 너라면 기분이 어땠겠니.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친구가... 내 수업에 들어와 떡하니 앉아있는 모습을 본다면.”
“......”
“크게 놀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생각했지. 처음부터 들어오던 학생도 아니고, 그것도 청강으로? 우연치고는 너무 기막힌 타이밍에... 누가 봐도 이상하다 느낄만한 상황이잖아. 그 때부터 의심은 있었지.”
스윽.
그가 손을 옮겨 이번에는 내 왼쪽 어깨 위에 슬며시 얹는다. 자연스레 서로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다. 마치 높은 고도의 산 정상에 올라와있는 것처럼 숨이 가빠진다.
“그날 저녁. 네가 학교 후문에 서서 울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순간. 엉뚱하게도... 나는 너를 완전히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너를 위로해주고 싶다는 내 생각에 놀라며, 내 감정에 대한 확신 또한 갖게 되었지. 그날 내 차를 태워주겠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큰 결심을 했던 건지 넌 모를 거다. ”
“...!”
...봤었구나. 일언반구 언급 없이 바로 후문사로 같이 가자했었기에, 그가 전혀 알아채지 못 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민망해 할까봐 일부러 모른 척 배려했던 것이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다. 너무나 놀라운 사실들이 연거푸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와, 한꺼번에 받아들이기가 버겁다.
“그리고 오늘. 네가 보인 행동에, 혹시 너의 감정이 나만의 착각이 아닐까 늘 노심초사하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그 순간엔... 나도 정말... 가슴이 벅차더구나. 사무실부터 이 차 안으로 걸어 들어올 때까지 그 길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툭.
“맞아. 나도 같은 마음이다. 지금껏 널 만났을 때의 나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엔... 너라는 강한 동기가 있었어.”
어깨를 지나 어느새 내 머리 위로 올라온 그의 큰 손이, 한 두 차례 부드럽게 뒷머리를 쓰다듬어 내린다. 용서받는 듯 따뜻한 느낌. 이제껏 가슴 한 구석을 짓누르고 있던 죄책감이 눈 녹듯 사라진다. 기쁜 감정도 이렇게 격하면 눈물이 나는구나. 그의 진심이 내 황량했던 마음에 맞닿은 순간, 민망함을 느낄 새도 없이 눈물이 두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 단비처럼 마음을 적신다. 혼자 끙끙 앓으며 짊어졌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것도 모자라,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마음을 확인한 지금. 이거 악몽 꿨다고 신이 보상해주는 달콤한 꿈은 아니겠지. 행운과 노력이 겹쳐 이뤄진 이런 엄청난 행복을, 과연 내가 바라도 되는 걸까. 정말 게이인 내 삶에도, 진실한 사랑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오랜 기간 사랑에 대한 불신과 혼란스러움으로 견고히 쌓아올려진 나의 마음의 성벽은, 이어지는 태형주 교수의 수줍은 고백에 일순간 모두 허물어진다.
“너라면 나도 욕심 내고 싶다. 힘든 사랑이 어차피 우리네 삶의 숙명이라면... 함께 하자, 진오야."
"...!"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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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올려주세요 현기증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