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여우 15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본문
게슴츠레해진 그의 눈에 누군가가 그의 맞은편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초점이 맞지 않는 그의 시야에, 한심하다는, 혹은 황당하다는 듯한 하준의 표정이 들어왔다.
“혼자서 많이도 마셨네.” 어이없다는 듯, 재훈을 빤히 보고는 하준이 피식하고 웃었다.
“젓가락하고 술잔도 하나 밖에 없는 걸 보면 같이 온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하나, 둘, 셋” 그가 손을 들어 검지손가락으로 테이블 한쪽에 올려져 있는 소주병의 숫자를 세었다.
“넌 뭐냐?” 술에 취해 부정확해진 발음으로 재훈이 그를 노려보았다.
“혼자서 조용히 술 한잔 하려고 했더니... 술 맛 떨어지게... ”
“그러셔?” 다시한번 어이없다는 듯 하준이 히죽거렸다.
“혼자서 조용히 술 한잔 할 사람이 종로에 온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거 아냐?”
“......”
“게다가 어디 한구석에 있는 작은 술집도 아니고 흔하게 자주 오던 술집에서 이렇게?”
빈 소주잔을 손에 쥐고 벌개진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재훈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어이없다는 듯 그는 피식하고 웃었다.
“오다가다 아는 사람 마주치게 될 것이란 걸 생각하지 못한것도 아닐텐데....”
“이 자식.”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하준을 가리키면서 재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거짓말 하는 줄 아냐?”
“사실, 대화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건 아니고?” 잠시동안 그런 재훈을 멀거니 바라보던 하준이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실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던거지?”
그의 말에 재훈이 손을 들어 팔을 저었다.
“많이 취한 거 같은데 혹시 데려다 줄 수있어? 카운터에서 술에 취한 재훈을 계속 눈여겨 보던 사장이 다가와 하준에게 물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아는 사람들하고 곧 이태원으로 넘어가야 해서요.“
”그럼 어떻게 하지?“ 참....” 그녀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재훈을 내려보다가 카운터 앞에서 그녀를 부르는 손님에게 몸을 돌렸다.
“완전히 꽐라가 된 거 같은데.... 정말, 혼자 집은 어떻게 가냐?” 마치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하준이 재훈을 바라보았다.
“혜원이 누나 불러줄까?”
“노. 노.” 힘겹게 고개를 저은 후, 재훈이 손을 뻗어 술병을 쥐고 자신의 빈 술잔에 병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빠져나온 병이 테이블 위에서 구르면서 소주가 테이블 위로 쏟아져 흘러 나왔다.
“아, 정말!” 피할 수도 없이 한순간 쏟아져 내린 술에 자신의 허벅지가 젖어버린 하준이 벌떡 일어나서 짜증섞인 표정으로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 보았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바이트 생이 잰 걸음으로 다가와 행주로 테이블 위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휴지로 자신의 바지를 닦아내고는 하준이 카운터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던 사장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얼음이 들어있는 물잔을 재훈의 앞에 내려놓고 하준이 다시 그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형, 혜원이 누나한테 차였냐?”
그의 말에 재훈이 피식하고 웃고는 물잔을 들고 벌컥거리면서 크게 들이켰다.
손가락을 물잔 안으로 집어넣어 커다란 얼음 덩어리 하나를 꺼내서 손아귀에 쥐고 재훈이 자신의 얼굴에 슬며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런 재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혜원이 누나와 결혼문제가 아니면 이렇게 혼자서 지지리 궁상을 떠는 다른 이유라도 있는거야?”
“........”
“차인 게 맞는 것 같구만, 뭘.” 하준이 히죽거렸다.
“야, 이제 여자한테서도 까이고...”
“야!” 그런 하준을 재훈이 노려보았다.
“아니다...” 다시 그가 시선을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물잔에 두었다.
“그냥, 뒤죽박죽이 된 내 인생.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제대로 정리 해보려고...”
그가 말을 잇기 전 물잔을 들고 다시한번 벌컥거리면서 들이켰다.
“혜원이네 할머니 뵙고 안되겠다고 했는데......” 말을 멈추고 그가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내 발을 잡고 놓아주시질 않는다.”
“그거야, 그 할망구가 형을 물로 봐서 그러는 것 아냐.”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 재훈을 바라보면서 하준이 피식하고 웃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사이었잖아. 안 그래?”
그가 여전히 꼼짝 않고 있는 재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혜원누나랑 그거 했냐?”
그런 하준의 말에 재훈이 고개를 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것도 아니면.....내 말대로 형이 만만하게 보이니 자기 영역 넓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
”와, 그 할망구. 노망 날 나이 다 돼서 정말 탐욕스럽네.“
하준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고는 다시 재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그 노인네가 형이 이쪽이라는 것도 아는 건 아니지?“
그의 말에 재훈이 고개를 들고 하준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술에 취해 두 뺨은 붉게 변한채로 굳게 닫힌 입과 어두워진 표정으로 잠시동안 그는 그렇게 하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하준이 휴대폰의 진동을 느끼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한순간 들여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제 가봐야겠다.“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한순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이던 그가 아무 말 없이 재훈을 돌아보고 손을 들어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설마 그 노인네가....“
한순간 그렇게 중얼거리던 재훈이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일까지도 확대해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서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 했다.
물주전자를 들고 아르바이트생이 그에게 다가와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 그의 물잔을 얼음물로 다시 채웠다.
더러워진 채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그의 휴대폰은 이제 새벽 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순간 피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침대에 눕고 싶었다.
대리를 불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주차해 놓은 주차장은 꽤 멀었다.
그는 슬며시 몸을 일으켜 보았다.
비틀거리는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탱하기도 힘들었다. 그는 그냥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한순간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될대로 되라‘ 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방법이 없으면 가계 밖에서 그냥 하룻밤 보내면 되는 거였다. 날도 따뜻한데 얼어죽을 일도 없을 것이니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었다.
아니, ’얼어죽을 일도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피식 하고 웃었다.
그렇게 한손으로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괴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 그의 앞에 누군가가 다가와서 섰다.
힘들게 고개를 들고 재훈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데려다 줄게. 집에까지.“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그렇게 차분하게 말하는 그를 놀란 눈으로 재훈이 바라보았다.
”나....“ 여전히 똥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면서 재훈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술 안취했어.“
”자동차 키 줘.“ 그런 재훈의 말을 무시하고 그가 재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슬며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재훈이 키를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차는 항상 주차하는 곳에 있지?“
그의 말에 재훈이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을.....“ 재훈이 옆에 놓인 자신의 가방에 손을 뻗었다.
”내가 했어.“
그렇게 말하고 그가 재훈의 가방을 들고 자신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팔을 뻗어 재훈을 부축하면서 일으켜 세웠다.
”걸을 수 있지?“ 그의 말에 재훈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에게 기대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집 앞의 가로등 아래에 그의 차가 멈추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운전석에서 안전벨트를 풀고 있는 그를 돌아보면서 재훈이 물었다.
”그 술집 이모가 전화했었어. 너랑 합석하고 있던 사람한테서 내 전화번호 알아냈다고... 너 만취했는데 아무래도 혼자가기 힘들 것 같다고 데려가라고...“
그렇게 말하고 손하가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그 이모 아직 우리 사귀고 있는 줄 알고 있나보다.“
겸연쩍은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 재훈도 조수석의 차 문을 열었다.
”조심해서 들어가.“ 재훈을 보고 손하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로등 빛을 가로막고 있는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푸르른 이파리들이 지나가는 산들바람에 그들의 머리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손에 자동차 키를 건네주고 손하가 돌아섰다.
재훈이 손을 뻗어 그런 손하의 팔을 슬며시 잡았다.
몸을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손하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재훈이 잠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어두운 나무 그늘 아래에서도 재훈은 손하의 맑은 눈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처음 손하와 카페에서 마주 앉아있었을 때처럼, 그런 그의 눈은 우수에 차 있었다. 이마를 가리고 있는 길어진 앞 머리카락의 몇 가닥이 싱그러운 밤 바람에 날리고 양 볼에 얇게 패어있던 보조개가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잠시동안 그렇게 빤히 그를 바라보던 재훈이 한걸음 다가서서 가만히 손하를 끌어안았다.
그런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손하가 양손으로 그를 슬며시 밀어냈다. 하지만 그를 껴안고 있는 재훈은 자신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냥. 잠시만....“ 마치 애원하듯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를 잡고 밀어내던 손하가 양손에 힘을 빼고 팔을 자신의 허리 옆으로 떨구었다.
재훈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손하의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런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다시 손하가 그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팔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는 손하를 꽉 붙잡고는, 자신에게 당겨서 슬며시 키스를 했다.
마치 체념한 듯,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손하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입술을 떼고 재훈이 두 손으로 손하의 볼을 슬며시 만졌다.
”너가 너무 그리워서....“
일그러진 얼굴로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재훈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동안 재훈을 바라보던 손하가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넌 내가 그리운 게 아니야.“
”......“
”그냥. 네 현실이 힘들어서 도망갈 구멍을 찾는데, 그게 나인 것 뿐이야.“
”아냐.“
그렇게 말하는 손하를 보면서 재훈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무 못돼먹고 어리석어서.... 네가 얼마나 나에게 소중했는지 깨닫지 못했던거야.“
그가 손하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저지른 일... 아무리 용서를 빈다고 해도, 나 때문에 생긴 상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잘 알아.“
손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재훈의 눈꼬리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떻게..한번만...“
그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양손으로 손하의 팔을 앞으로 당겼다.
”제발....“
”.......“
”똑같은 잘못 두 번다시 저지르지는 않을거야.“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경련이라도 일으키는 듯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의 입술의 끝에 닿았다.
”거기 누구야?“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대문이 열리고 그의 어머니가 밖으로 나와 나무 그늘 아래에 서있는 그들을 보았다.
”너!“
손하를 발견한 그녀가 마치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얼굴에 분노가 가득한 채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그녀가 잰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 정도 경고했으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야 할 것 아냐!“
이성을 잃은 듯 보이는 그녀가 손하를 향해서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하지만, 그 순간 그 둘 사이에 뛰어들어 손하를 가로막은 재훈의 이마를 커피잔의 모서리 부분이 헤집고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이마를 움켜쥐고 재훈이 마치 무릎을 꿇듯이 땅에 쪼그리고 앉았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bbs/profile.php?mb_id=formylife" data-toggle="dropdown" title="그리고함께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 그리고함께</a> <ul class="sv dropdown-menu" role="menu"> <li><a h님의 댓글
- <spa…
- 작성일
장면이 많지 않음에도
장면이 주는 긴장감이나 재미는
풍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