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11) - 재영과 민석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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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은 안쓰러운 눈으로 주저앉아 있는 민석을 내려다 보며, 갤X시핏을 건네준다.
구급차가 도착하고, 민석은 들것에 실려 들어간다. 일부러
재영의 눈을 안 보려는 듯, 눈을 감고 있다.
구급차가 떠나고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재영은, 이내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
자취방에 와 다시 자리에 앉아보지만, 공부하던 것에 다시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 괜히 집 앞에서 보자고 했나. 그냥
중간 지점에서 보자고 할 걸 그랬나.’
‘아냐, 사고 난 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중간
지점이라고 사고 나지 말란 법 있냐. 이상한 걸로 자책 마.’
‘아니 근데 지금 이 걱정은… 그냥 인간된 도리로써 하는 거야, 어제 그렇게 보낸 미안함 때문이야,
아니면… 경한이에 대한 미련 때문이야? 하… 20대 철부지 때도 아니고 지금 이 고민 하는 게 맞아?’
원래 머리가 복잡할 때 곧잘 일로 도피하는 재영이지만, 이번 건은 좀체 그
방법도 통할 것 같지 않다.
‘아니 잠깐 근데… 나 지금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불안한 직감. 뭐지? 그게 뭐지?
‘…아! 운전자 연락처!’
미친… 운전자 연락처를 내가 받았잖아.
정신이 없어서 (게다가 그런 감정 싸움을 했으니…) 연락처를
민석 씨한테 전달을 못 했네?
게다가 운전자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 사람 냅두고 혼자 멍 때리다가 집까지 왔네?
‘와… 박재영 너 제정신이냐. 어제
오늘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사는 거야.
회사 일 처리를 이렇게 했으면 너 당장 징계감이야. 하…’
재영은 본인의 형편없는 일처리가 믿기지 않는다. 평소의 평정심은 다 어디 간 거야.
‘아니 근데 그 운전자도 웃기네… 아무리 지 혼자 패닉이 왔어도 그렇지
나를 보호자로 인지하고 있었으면 내가 그 자리 뜰 때 잡았어야 하는 거 아냐?
아니면 아싸 그냥 간다 개이득 뭐 이런 거야? 에이 설마 애도 아니고.’
‘아니 잠깐만… 운전자가 양심이 있으면(?) 구급차를 따라가지 않았으려나?’
‘아니야… 그건 또 모르지. 운전자가
제 딴에는 엄청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서 그렇게 급발진을 한 걸 수도.
일단 자기 급한 일 처리하고 이쪽에서 연락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지도.’
‘아니 근데 또 눈 앞에서 나랑 민석 씨랑 싸우는 걸 봤잖아?
게다가 내가 구급차 같이 타고 따라가지도 않았으니, 내가 민석 씨 보호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 테고.
그러면 민석 씨한테 본인 연락처를 다시 주기 위해서라도 따라갔어야 하지 않나?’
‘아 맞다 참 그 사람 완전 패닉이었지.
나랑 민석 씨가 싸우고 어쩌고 이런저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 못했을 수도. …그래, 그러고도 남아.’
생각이 이리저리 튄다. 이럴 때 가장 확실한 건… 받은 연락처로 일단 운전자랑 직접 얘기해 보는 것.
신호음이 가고, 딸깍, 받는다.
“여보세요?”
“아 예, 좀 전에 횡단보도 앞 사고 때문ㅇ…”
“아아! 네 어떡하죠? 너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ㅠㅜ…. 보험사에는 방금 저도 전화했는데.”
“아, 그게 아니라, 그… 제가 사고 당사자가 아니어서요. 혹시 아까 구급차 따라가셨나요? 지금 병원인가요?”
“네? 아… 그… 아까 그 분 보호자 아니세요?”
…후우. 맞네. 정신 놓고 있어서
하나도 제대로 안 봤네 이 사람.
아니 애초에 호칭은 ~씨인 데다가 서로 존댓말로 말하는 사이가 보호자일 리가 있나?
아.. 하긴 그럼 거기서 보호자인 것마냥 나서서 운전자 연락처 받은 난 뭐야. … 맞네, 내 잘못이네, 내
잘못.
… 됐다, 일단 이 사람이랑 지금 뭘 얘기하는 건 의미 없어.
… 민석 씨가 불편해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민석 씨한테 염치불구하고 한 번 더 연락해서 이 사람 연락처 알려 주는 수밖에.
“아아… 네 일단 알겠습니다. 그, 제가 보호자는 아니구요,
좀 이따 당사자 보고 직접 통화하라고 하겠습니다. 네네,
일단 들어가세요.”
대충 통화가 마무리되고, 잠시 또 멍해진 재영.
‘아니… 어제 오늘 불과 24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일들이야?’
그러게 왜 해본 적도 없는 마사지를 받겠다고…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 사단을 만들었냐 나
새끼야…
후, 침착하자 침착해. 나답지 않아.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마치 업무 처리 하듯이. 후-우 심호흡. 음, 좋아.
재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폰을 들어 민석에게 톡을 보내 본다.
(재영) ‘민석 씨, 불편하신 거
압니다만 죄송하게 됐습니다, 운전자 연락처를 아까 깜빡하고 안 드렸네요.
운전자 연락처 010-XXXX-XXXX 입니다. 이
쪽으로 연락해서 대화 나누세요. 아무쪼록 쾌차하시구요.’
최대한 불편해 하지 않게, 대화가 이어질 빌미가 없게, 한 문장에 모든 내용을 담은 회심의 한 통.
‘응? 뭐야. 대화할 수 없는 상대라고?’
에러 메시지와 함께 톡이 보내지지 않는다.
‘뭐야… 그새 나… 차단한 거야? 들것에 실려 가는 와중에?’
와… 이 정도면 정성이다 진짜. 그 불편한 마음, 어떻게든 벽을 치고 싶은 마음. 너무 잘 알겠고요.
근데… 그래도 보험금은 받아야지. 그건 맞지.
‘아니 근데 날 차단했는데 무슨 수로 연락해?’
아… 주위에서 업무폰 일상폰 분리해서 쓰라고 할 때 말 들을걸. 딱히 불편함 없어서 번호 하나만 썼는데.
이럴 때 업무폰 있었으면 차단 안 된 그걸로 연락하면 되는 거 아냐… 하…
이제 와서 자책한다고 소용없다.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 번호를 하나 더 마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잊지 말자. 재영은 6년 동안이나 연애도 번개도
안 했다. 이런 경우의 수는 인생 계획에 애초에 없는 거였다고.
온갖 다른 수를 생각해 봤지만… 결론은 역시 하나다.
‘병실로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네. 어마어마하게 불편하겠구만… 문전박대나 안 당하면 다행인데.’
다행히 구급차에 적힌 병원 이름이 기억난다. 요새는 병원 이름이 따로 안 적힌 구급차도
많은데 천만다행.
XXX병원이면 이 동네에선 그래도 유명한 중형 병원이니까 더 쉽게 기억할 수 있던 것이기도 하다.
‘괜히 쓸데없는 고민 더 하다 시간 질질 끌지 말자. 어쩔 수 없어 한 번
더 불편해야 돼.’
다시 나갈 채비를 하며 머릿속으로 읊조리는 재영이었다.
*
전환하여, 들것에 실린 시점부터 민석의 시선.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그 사람부터 차단하자… 이제 서로 용건은 없으니까.’
잠시, 들것에 실려가던 민석의 시점으로 넘어와서.
왼쪽 손목에 갤X시핏을 차면서, 민석은 생각한다.
마침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 넘어진 게 불행 중 다행이다.
주머니에 있었으면 주머니에 손 넣으려다 허벅지가 눌리면서 엄청 아팠을 텐데.
아니 근데, 그 사람 차단하는 게 먼저야? 부모님한테 먼저 연락해야 하지 않아?
…뭐, 톡 차단하는 거 몇 초 걸리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손님을 차단하고, 어머니 번호로 통화를 시도하는 민석.
한동안 이어지는 연결음. 아… 하긴 평소 일요일 아침 생각하면 아직 주무실 시간이긴 해.
“… 어, 아들, 무슨 일이야. (희미하게 들리는 사이렌 소리) ? 뭐야 밖에 사고 났니?”
“… 어 그냥… 가벼운 접촉…? 아 직접 접촉하진 않았지만… 암튼 교통사고…”
“? 교통사고? 네가 당한 거야? 어쩌다가?”
“… 자세한 건 일단 치료받고 알려 드릴게요. 걱정하실까봐 일단.
아, 부딪힌 건 아니고 앞에서 멈췄는데 놀라서 넘어졌어요.
… 네. 네, 전화할게요.”
민석의 부모님은 기본적으로 아들에게 잘 해주시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금지옥엽처럼 키우진 않는다.
1녀 2남 중 가운데에 낀 둘째여서 그런 것도 있고, 오히려 방임형으로 자식을 키우시는 편.
방임형인데 아들에게 잘 해준다고 하니 모순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학창시절 공부도 그렇고 세 자녀가 다 알아서 해온 편이라서 굳이 터치를 안할 뿐,
자녀들 쪽에서 먼저 도움의 손길을 청하거나 하면 바로 신경 쓰시고 도움을 주시는 타입 정도인 것.
암튼… 그렇게 응급실에 도착해서, 이런저런 치료를 받는다.
근육이 좀 놀랐고 오른다리 뼈가 살짝 금갔지만 큰 건 아니고, 일주일 정도 깁스하면 될 정도.
예상대로 큰 건 아니어서 다행이다. … 일주일이나 꼼짝없이 입원해 있어야 한다는 건 너무 손해가 크다만…
아… 다음주 수요일에 하필 독서실 기간 다 되는 날인데 어떡하지.
… 어쩔 수 없네, 집에 있는 동생한테 부탁하고 용돈이나 챙겨줘야지. 아… 피 같은 내 돈.
오른다리에 깁스한 채 누워서 천장 벽을 멍 때리며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후… 모르겠다. 일단 충분히 휴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니까, 더 생각하지 말고, 졸린데 잠깐 눈이나 붙이고 있자…
*
다시 재영의 시점. XXX 병원 로비. 재영은
접수처로 다가간다.
“저기요, 오늘 좀 전에 교통사고로 들것에 실려온 환자 혹시 퇴원했나요?”
“아 네, 환자분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 나 민석씨 본명 모르는데.
‘아… 카톡 계좌송금할 때 ‘표*석’이었으니까, 실명은
가운데 글자만 다르겠지.’
급한 상황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재영이었다. 용하네 그걸 다 기억하고.
“그.. 표민석?”
“아, 표은석 환자분 말씀하시는 거죠?”
“아, 네네 표은석이요. 걔 동생 이름을 잘못
말했네.”
어휴 사족을 왜 다냐. 암튼 찰떡같이 알아들으시는 분이라 다행이네.
그나저나 본명… 표은석… 이구나. 그래, 당연한 거지만… 경한이가
아니야.
“표은석 환자분 좀 전에 응급치료 받으시고 지금은 202호 병실에 계시네요.”
엥 바로 퇴원 아니고? 입원? 그 정도야? 하긴 뭐… 교통사고는 교통사고니까,
과소평가하지 말자.
“아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놀란 기색을 감추며, 인사하고 병실로 올라가…려던
재영.
‘불편해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나름
병문안인데… 그래도 뭐라도 들고 가야지.’
이내 병원 지하 매점으로 가 음료수 박스를 사 들고, 다시 병실로 올라간다.
202호. 4인 1실. 드르륵, 문을 여니 창가에 민석 씨, 아니 은석 씨가 보인다.
침대에도 표은석이라고 쓰여 있네. 어라, 오른다리엔
깁스까지 했네… 입원할 만하긴 했구나.
역시, 몸 좋고 건강한 거랑 사고로 다치는 정도는 전혀 상관 없는 법.
‘그나저나… 잠든 건가? 하긴 진이
빠지겠지.’
눈을 감고 있는 은석. 살짝 헝클어졌지만 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부스스한 가르마펌.
섹시하게 두터운 입술은, 립케어를 바른 건지 햇빛에 적당히 번들거려 도드라져 보인다.
‘눈 감은 모습도… 귀엽네. …경한이랑 똑 닮은
귀여움…’
환자용 침대 바로 옆 탁자에 음료수 박스를 놓고, 그 앞에 (아마도 보호자를 위한) 의자에 털썩 앉으며 재영은 생각했다.
‘아… 햇빛 뜨거울 텐데, 용케도
잠들었네. 커튼이라도 쳐 줘야겠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쪽으로 건너가 커튼을 친다.
이 때 눈에 들어오는, 창가쪽 벽과 침대 사이에 눕혀진 은석의 에코백.
딱히 보려던 건 아닌데, 그 안의 책 제목들이 얼핏 보인다.
‘CPA? CPA 준비생이었어? 대학생인 것 같긴 했는데.
아니 근데 CPA 준비생이 왜 그런… 일을…?’
편견인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 편견
자체는 축적된 데이터를 통해 위험의 경향을 피하려는 진화의 산물인 걸.
편견이 무차별적인 혐오와 배척의 근거로 활용될 때가 문제인 거지.
그러니까 마사지 쪽에 문외한인 재영의 ‘편견’으로는,
돈이 필요한데 기댈 곳이나 마땅히 돈 벌 수단이 없는 애들이 하는 게 마사지업이다.
마사지 업계의 생리를 아는 사람은 물론 그게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겠지만,
밖에서 보는 문외한인 제3자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재영의 선입견임을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본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에 잠시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재영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아니… 난 지금 보험금은 받을 수 있게 연락처만 알려주려고 온 거잖아.
이 이상은 더 알 필요도 없고, 민석… 은석
씨도 그건 싫어할 거야.
그리고 확실하게 알았잖아. 은석 씨랑 경한이는 완전 다른 사람이라는 걸.
나라도 누가 나를 자기 옛 애인이랑 겹쳐 보면서, 저리 가라는데도 자꾸 주위에서 얼쩡거리면
혐오스러울 듯.
작작 하자 박재영. 애 앞에서 어른스럽게 좀 굴어. 아까도
말했는데 어제오늘 너 너무 이상하게 뚝딱거려.’
그렇게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자기최면을 거는 재영.
“거기서 뭐하세요?”
짜증 섞인, 어제 오늘 듣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져 버린,
그러나 분명히 짜증 섞인 은석의 목소리가 재영의 귀에 꽂힌다.
*
이 다음부터는 '민석의 시선'이 아닌 '은석의 시선'이 제목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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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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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우리야 길어야 10분이지만
쓰시는 작가님은 몇 시간을 투자하셔도 결코 쉬운게 아닐텐데,,
아자!아자! 응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