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바다... 그리고 두 사내 (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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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두마리의 곰같은 사내가 서 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나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한 철호형이 쑥스러운 듯 자꾸 먼 산만 바라본다.
"형... 여긴 언제..."
"너랑 울진에서 헤어진 다음 바로 여기로 온거야. 집주소는 모르고 여기 산다는 것만 아니까..."
"그래서 무작정 기다리신 거에요?"
"헤헤 그럼 어떻게? 이 못난 형이 기다려야지..."
"그럼 차 안에서 기다리시지 굳이 왜 이 비를 맞아가며 기다려요? 제가 뭐라고..."
"뭐긴 뭐야? 형이 아주아주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동생이지~"
아까 사랑이란 말을 한 번 해본 탓인지 이번엔 전혀 주저함이 없는 철호형.
지금 이 순간 쏟아지는 비가 너무나도 고맙다.
형의 마음씀씀이에 감동받아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굳이 감출 필요가 없으니까...
철호형은 나랑 같이 갈데가 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잠시 차에서 기다리라 하고 집에 올라가 여분의 옷을 챙겨 나온다.
나랑 덩치가 비슷한 그가 갈아입을 면티와 반바지도 빼먹지 않고 챙긴다.
내가 비를 덜맞게 오피스텔 입구에 바짝 붙여 놓은 형의 레인지로버가 보인다.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가 형에게 반바지와 셔츠를 건네며 말한다.
"형 얼른 이걸로 갈아 입으세요."
"와~ 우리 지웅이는 역시 형 생각 많이 하는구나~ 헤헤... 너무 기분 좋은걸~"
함박 웃음을 짓는 그의 표정을 보는게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어? 그런데 손은 왜 그래? 나랑 헤어진 사이 어디서 다친거야?"
깜빡하고 그에게 붕대 감은 손을 보여준 나.
얼른 손을 감추며 얼버무린다.
"아까 동서울 도착해서 술 좀 먹다가 실수로 날카로운데 찔렸어요... 저 참 못났죠?"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
"휴... 형이 미안하다. 아까 낮에 그 일만 없었어도 형이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줬을텐데..."
"저 괜찮아요 형. 이젠 아무 느낌도 없는걸요? 형이나 얼른 젖은 옷 벗고 이걸로 갈아 입으세요~"
"헤헤... 지웅이가 형한테 준 첫 선물인데 아까워서 함부로 못입겠는걸?"
입고 있던 젖은 셔츠를 벗어 차창 밖에서 물기를 짜내는 철호형.
뒷자석에서 아까 낮에 우리 몸을 닦았던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은 그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헤헤... 이제 슬슬 출발해볼까?"
"형... 이러고 웃통 벗은 채로 운전하시려구요?"
나야 그의 벗은 몸을 보는게 좋지만, 예의상 안 물어볼수가 없다.
"뭐 어때? 한밤중인데다가 어차피 내 벗은 몸 온 국민이 다 봤는데 뭘 감출게 있다고~"
틀린 말이 아니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기분 좋게 차를 출발시키는 철호 형.
차 안은 따스한 바람으로 가득차고 아까 마신 양주에 취기가 슬슬 올라온다.
"형... 죄송한데 저 너무 졸려서요... "
"아... 아까 술 마셨다고 했지? 많이 마셨어? 혹시 나때문에..."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깨무는 철호 형. 그의 잘못이 아니라 말해주고 싶다.
대신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형의 튼실한 허벅지 위에 내 손을 올려 놓는다.
"형... 다 내가 선택한거에요... 형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그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린다.
그의 손이 참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래... 너 잠들기 전에 하나만 얘기해 줄게."
"그게 뭔데요... 철호형?"
"어제 우리 휴게소 들렀을때 너 화장실 잠깐 다녀온 적 있거든"
"네... 저도 기억나네요..."
"그때 봤어. 너 백팩에서 삐져나온 청첩장을... 오늘 날짜가 적혀 있더라?"
"그... 그럼 형 혹시 오늘 울진 내려오신게..."
철호형이 따뜻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한다.
"그래. 그때 짐작은 했어. 바로 다음날 울진에서 할 일이 있는 니가 나 때문에..."
형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온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는 내 심장도 같이 떨려온다.
"나 때문에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함께 따라와준걸..."
"형..."
"니 마음은 알았지만 혹시 니가 눈치챌까봐 내색하지 않으려고 무지 애썼다, 나~"
지금 철호형의 한손은 운전대 위에 있고 다른 한 손은 내 어깨위에 있다.
내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 마치 내 온 몸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그때 결심했지. 너 모르게 나도 오늘 울진가서 깜짝 놀라게 해주자고."
"......"
"솔직히 난 니가 토요일에라도 전화해 주길 바랬어. 사실 울진에 볼일 있었다고
그런데 형 혼자 보내기 싫어서 같이 왔다고, 그러니까 일요일 울진에 같이 가주면 안되겠냐고..."
내가 상상도 못했던 말들을 마구 쏟아내는 철호형.
그의 말들에 놀란 나는 그저 입을 다문채 그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
"헤헤... 상상이 가냐? 이 곰같은 내가 니 전화만 기다리며 집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형..."
나도 모르게 몸이 그에게 기운다. 아니, 그가 내 어깨를 감싼 팔로 나를 끌어 당긴건지도 모르겠다.
내 얼굴이 두툼하면서도 푹신한 그의 젖가슴에 파묻힌다. 지금 이 느낌... 말로 표현할수 없을 만큼 좋다.
너무나 안락하고 포근한 기분에 내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내 이름을 부르는 형의 다정한 목소리가 점점 내 의식속에서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20.
차가 멈추는 듯한 느낌에 눈을 뜬다.
어제 마신 양주 탓일까? 살짝 두통이 느껴진다.
잠시 그대로 다시 눈을 감은 채 서서히 현실로 복귀해 본다.
그러자 내 가슴이 벅차 오르는 따스함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다시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본다.
차창 밖으로 동트기전 여명이 넓게 펼쳐진 바다 위에 반사되어 흩뿌려진다.
차 문을 열고 나가보니 철호 형이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 지웅이... 잘 잤어?"
내 기척 소리에 그가 뒤를 돌아본다.
너무나 매력적인 저음의 목소리... 나를 향해 미소짓는 그의 부드러운 얼굴...
이게 현실이라는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여기가 어디에요 형?"
"어디긴... 바닷가지. 내가 바다 좋아하잖아~"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옆에 나란히 선다.
그가 한 팔을 들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한다.
"사실 전에는 지웅이가 내 스킨쉽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도 좀 됬었거든... 이거 괜찮은 거지?"
그의 두툼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내 한쪽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며 대답한다.
"괜찮다마다요~ 저는 형의 모든게 다 좋습니다..."
"허허... 우리 지웅이 이제 돌직구만 던지네~ 좋다... 좋아~"
내 어깨를 감싼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형... 저 궁금한게 있는데요~ 저랑 울진에서 헤어지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이렇게 확 달라졌나 궁금하지?"
이런 내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그가 먼 바다를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지웅이가 날 많이 좋아한다는거... 내가 아무리 미련 곰탱이라지만 그걸 왜 모르겠냐?
그런데 내 성격이 좀 단순하다보니... 그냥 니 입에서 직접 듣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래서 어제 그런 질문들을 했었군요..."
"그래... 어느정도 확신은 하고 있었지만 확인하고 싶었어. 그래서 니 대답 듣고 많이 충격 받았지."
"좋아하지 않는다란 대답, 그리고 사랑한다는 대답 말이군요."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생각지도 못했거든.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할줄은... 그래서 충격이 컸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니까..."
또다시 떨리는 그의 음성. 나는 그의 넓찍한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기다려준다.
"형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게 너무 오랜만이었거든... 그래서 순간 온몸이 경직되더라.
얼어붙었다는 표현이 적당할거야... 그리고 갑자기 내 안에 더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온갖 감정들과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더라고. 그게 너무 압도적이어서 감당이 안될 만큼..."
"......"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도망칠수 밖에 없었어. 나도... 그저 나약한 인간인 뿐이니까..."
"형..."
날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한시간 넘게 미친듯 운전만 하다보니 서서히 내 감정을 바라볼 수 있게 되더라고.
처음엔 그냥 불안하고 무섭고 불편한 감정만 있는줄 알았는데 다른 것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거야~"
"......"
"왠지 모를 따스한 기운에 가슴이 벅차 오르는 느낌... 이런 설레임을 내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거지..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어. 그 느낌과 감정의 정체가 뭔지...
그래서 곧장 울진 버스터미널로 되돌아갔어. 혹시 니가 아직 그대로 있을까봐...그대로 있어주길 바라며..."
"철호형..."
이제야 모든 전후 상황을 파악하게 된 나. 폭발하는 감정에 흔들리는 나를 향해 철호형은
아직 중요한 얘기가 남아 있다는 듯.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어간다.
"기억나? 아까 씨름하러 가기전에 니가 나보고 왜 울진에 다시 왔냐고 물었을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걸 두고 가서 그걸 다시 찾으러..."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 울컥 하고 올라와 말을 잇지 못하는 나.
그런 내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형이 그윽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이젠 나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그래... 그 소중한게 바로 너야... 내가 사랑하는 내 동생 지웅이..."
"처... 철호형..."
눈을 감는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라는게 이런 거구나...
"고마워요 형... 나 같은 놈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줘서..."
또다시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서울로 오면서 흘렸던 눈물과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나오는 눈물이
이제는 수평선 위로 성큼 솟아 오른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최종회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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