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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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첫인상 (3)


재은이 일부러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섰다.


“차를 상당히 험하게 모나 봐요?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차인데 부품 마모가 상당히 심하군요. 점화 플러그와 케이블, 변압기를 모두 교체하셔야 하는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 정비소에는 이 차에 맞는 부품들이 없군요. 대충 응급조치를 취해 놨으니 외제차 전문 정비소로 가서 말씀드린 세 가지를 바꿔 달라고 하세요. 가격은 점검비 3만 원에 오일 교체 4만 원 해서 총 7만 원 되겠습니다.”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지갑에서 현금 7만 원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감사합―”


인사를 하는 재은의 손바닥에 남자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재은은 영문을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여기.”


남자가 손가락 끝으로 재은의 뺨을 살짝 쓰다듬더니 그대로 차에 올랐다. 


당황한 재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남자는 재은을 향해 피식 웃으며 손을 들더니 차를 몰고 나갔다. 


재은은 얼떨결에 방금 남자의 손길이 스치고 지나간 부분을 만졌다. 남자가 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을까? 알 듯 말 듯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씨이.”


머릿속이 복잡한 재은이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는데 무엇인가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가 준 손수건이었다. 

재은은 얼른 손수건을 주웠다. 남자에게서 나던 콜론 향수 냄새가 손수건에서 났다. 가슴이 또 두근거렸다.


사무실 안에서 보고 있던 호식이 차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자 재은에게 잽싸게 다가왔다. 재은은 호식이 볼세라 손수건을 얼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놈 정말 정신 나간 놈일세. 그런 차를 끄는 놈이 뭐 한다고 이런 데를 와? 그래, 문제가 뭐였어?”


“점화 플러그하고 변압기 문제였어요. 우리는 부품이 없어서 외제차 전문점으로 가라고 했어요.” 


“내 말이 그거야. 뭐 한다고 이중 일을 해? 아무리 돈이 쳐 남아돌아도 그렇지. 그리고 그놈 눈빛 봤냐? 사람 대놓고 무시하는 눈빛? 아휴, 내가 이래서 잘사는 놈들은 꼴 보기가 싫어.”


호식이 남자의 흉을 보며 수다를 떨었다. 재은은 그런 호식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려 들었다. 코끝에서 자꾸만 콜론 향이 맴돌았다. 


“참, 그런데 같이 왔던 여자 있지? 왕싸가지 밍크코트? 김양이 그러는데 그 여자가 탤런트 고은정이라네? 나도 어디서 봤다 싶었는데 TV에서 본 거였어. 허 참, 그럴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찍어 두는 건데.”


호식이 흉을 보면서도 아쉬운 듯 구시렁댔다. 

재은은 그런 호식을 내버려 두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까 먹던 라면은 이미 치웠는지 없었다. 새삼 허기가 몰려왔다. 


신문을 보던 경찬이 재은에게 툭 내뱉었다. 


“고생했다.”


“고생은요 뭘.”


경찬이 신문 너머로 재은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티슈를 건네주었다.


“얼굴에 기름 묻었다.”


“아, 네.”


경찬의 말에 주머니 속에 있는 손수건이 생각났다. 


“으, 배고프다. 라면 하나 더 먹어야겠어요. 또 드실 분 있어요?”


조금씩 내리던 싸리 눈이 어두워지면서 굵은 함박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 추운 날씨였지만 재은은 이상하게 마음이 들떠 전혀 추위를 느낄 수가 없었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손수건 냄새를 다시 한번 맡아보고 싶었다. 사무실 유리창에 반사되는 불빛에 그 남자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

 

밤새 내린 눈이 발목까지 빠질 만큼 두툼하게 쌓였다. 하루종일 제설차가 다니며 염화칼슘을 뿌려대서인지 도로에는 눈이 모두 녹았지만 인도에는 여전히 솜이불 같이 덮여 있었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꾹꾹 눌러 찍은 도장처럼 그 위에 흔적을 남겼다.


재은은 형들이 오기 전에 미리 눈을 치워둘 요량으로 아침 일찍 출근했다. 평소 같으면 눈 치우는 일이 고역이었겠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한참 눈을 쓸고 있는데 경찬이 그다음으로 출근했다.


“안녕하세요, 형?”


“일찍 나왔구나.”


평소와는 달리 유쾌한 재은의 목소리에 경찬이 재은을 쳐다보았다.


“어제 무슨 일 있었냐? 기분이 좋아 보이네.”


경찬의 말에 재은이 씨익 웃었다. 하얀 치아가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다.


“제가 눈을 좋아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이상하게 기분이 좋네요. 하하하.”


그 말에 경찬이 다시 미심쩍은 눈길을 던졌다.


“눈을 좋아하면 둘 중 하난데... 애 아니면 강아지. 너는 어느 쪽이냐?”


평소 무뚝뚝한 경찬이 농담이랍시고 한 말에 재은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형.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요. 아재 소리 들어요. 크크크.”


재은의 말에 머쓱해진 경찬이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다짜고짜 재은의 손에서 빗자루를 뺏었다. 그리고는 눈 덮인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춥다. 너는 들어가서 커피나 타.”


장갑도 안 낀 재은의 손을 보며 경찬이 말했다. 


저 형, 생긴 건 꼭 조폭 두목 같은데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단 말이야.

재은이 경찬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참 눈을 쓸던 경찬은 그때까지도 재은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경찬의 입꼬리도 어느새 미세하게 올라갔다.


****


전날 밤 내린 눈 때문인지, 날씨가 추워서인지 그날도 여전히 손님은 없었고 양 사장은 하루종일 죽는소리를 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호식이 한마디 하면 양 사장이 또 그걸 가지고 걸고넘어져 티격태격하는 통에 온종일 그다지 무료하지는 않았다.


해가 어느새 서산마루에 걸려 석양을 찬란하게 뿜어낼 무렵, 부르릉하는 차 소리가 났다. 아마 오늘 첫 손님이지 싶었다.

월급날은 다가오는데 온종일 손님이 없어 가시방석이던 재은은 막내답게 차 소리를 듣자 가장 먼저 튀어 나갔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


재은은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들어온 차 문이 열리더니 짙은 선글라스를 쓴 훤칠한 남자가 내렸다. 어제 그 왕재수 새끼였다. 오늘은 혼자였다.


“뭘 그렇게 멀뚱멀뚱 쳐다보지?”


“왜, 또… 오셨습니까?”


재은이 의아한 눈길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설마 어제 준 손수건 받으러 온 건 아니겠지?


람보르**가 또 오자 양 사장과 호식도 밖으로 나왔다. 외제차가 이틀 연달아 자기네 공업소에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재은의 말에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고객에게 하는 말치고는 상당히 무례하군. 여기는 직원 서비스 평가 안 하나? 서비스 태도 점수에 0점을 주고 싶은데 말이야.”


오자마자 시비를 거는 남자의 말에 재은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온종일 손님 한 명 없다가 문 닫기 전에 나타난 첫 손님이 이런 상 또.라이라니. 

어제 남자의 손길에 잠시 설렜던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재은은 차마 말은 못하고 눈빛만 이글거리며 남자를 쏘아보았다.


“아, 그런 뜨거운 눈빛, 상당히 부담스럽군.”


남자가 능글맞게 농담을 해댔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19금 드립을 치고 싶은 건가?


재은이 화를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는 동안 양 사장이 가식적인 미소를 띠고 물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고객님?”


하지만 남자는 양 사장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재은의 코앞에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재은이 묻자 남자가 그제야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손해배상 청구서”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양 사장과 호식은 놀라서 얼른 재은의 손에 들린 서류를 뺏어 훑어보았다.


“옴마야, 이게 대체 얼마라는 소리여?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처, 천만?”


양 사장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호식을 쳐다보았다. 호식의 눈도 튀어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1,678만원?”


호식의 입에서 숫자가 튀어나오자 재은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듯 호식의 손에서 서류를 낚아챘다.

 

서류 상단에는 에이스 외제차전문정비소라는 상호가 보였고 중간에는 정비 잘못으로 부품을 다시 교체했다는 말과 함께 교체한 부품의 종류와 내역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단에는 합계 16,780,000원이라는 아라비아 숫자가 굵게 표시되어 있었다.

재은이 남자에게 서류를 내밀며 싸늘하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왜 이걸 제게 주는 거죠?”


“너한테 청구해야 하니까.”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나한테 청구한다니요?”


“잘못되면 책임진다며?”


남자가 거만한 투로 재은을 내려다보았다. 


“고, 고객님, 혹시 뭔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양 사장이 듣기에도 안쓰러운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하는데 갑자기 재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제가 어제 확실히 다 살펴보았습니다. 교체한 부품도 없는데 부품 교체가 잘못되었다니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재은이 열 받아 씩씩대는 데도 남자는 계속 얄밉게 능글거리기만 했다.


“못 믿겠으면 거기 전화번호 있으니 그쪽에다 전화해봐.” 


재은이 손해배상 청구서를 움켜쥐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다시 선글라스를 쓰며 딴청을 부렸다.


“거기 내 계좌번호도 적어 놨으니 내일까지 일시금으로 보내주면 좋겠군. 이런 사소한 금액으로 신경 쓰기 싫어서 말이야.”


재은이 청구서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터무니없었다. 이건 정말 아니다. 게다가 어제 자신이 한 조치는 올바른 조치여서 문제 될 게 없었다. 


수리 원인으로 적어 놓은 것도 말이 안 되었다. 국산 소형차에나 적용되는 방법으로 응급조치를 해서 비용을 청구한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그때 재은이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번쩍 쳐들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것 봐. 당신 혹시 자동차 전문 사기꾼 아니야? 경찰 불러 볼까?”


재은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기꾼이라, 하하하. 살다 살다 그런 소리는 또 처음 듣는군.”


남자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신분증을 꺼내 재은에게 보여주었다.


“확인해 봐. 영 찝찝하면 사진을 찍어둬도 좋아.”


재은은 남자가 준 신분증을 바라보았다.

하민재(夏民載). **년생. 

성이 여름 ‘하(夏)’ 씨라니 이름부터가 자신과 상극이었다. 재은의 성은 눈 ‘설(雪)’ 자였다.

그런데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재’ 자는 한자가 자신과 똑같다. 아버지 말로는 실을 ‘재(載)’ 자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던데. 


**년생이면 33살이니 재은보다 7살이나 연상이었다. 재은이 남자를 다시 한번 흘겨보았다. 그 나이로 보이지는 않지만, 나이 처먹고 정말 이러고 싶을까?


주소지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고동….


젠장. 도고동이면 차가 안 막혀도 여기서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거리다. 거기 사는 사람이 뭣 하러 여기까지 차를 끌고 왔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신분증이 설마 가짜는 아니겠지? 재은은 왠지 사기당하는 기분이라 얼른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경찰에 신고하면 알겠지. 협박만 해봐라.


민재는 재은이 돌려주는 신분증을 받더니 말없이 재은의 폰을 뺏어갔다.


“뭐하는 겁니까?”


재은이 민재의 행동에 사납게 항의했다. 하지만 민재는 태연히 재은의 폰에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잠시 후 민재의 폰이 울렸다. 


“오케이. 내일 입금하고 이 번호로 문자 한 통 해주면 탱큐. 입금 안 하면 내가 전화하지.”


민재가 재은에게 폰을 건네주며 씩 웃었다. 재은은 뭔가 굉장히 억울한 느낌이었다.

민재는 차를 타려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참, 워셔액이 떨어진 것 같은데 좀 넣어줄 수 있어? 워셔액은 여기서 넣어도 될 것 같은데?”


능글맞은 민재의 말에 재은이 노려보자 민재가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워셔액 넣어주면 모레까지 입금해도 봐주지. 뭐, 내가 그 돈 없다고 당장 아쉬운 건 없거든.”


민재가 재은을 향해 히죽 웃었다.

재은은 화가 나서 뚜껑이 열리려는 것을 겨우 참고 민재의 차에 워셔액을 보충해 주었다. 민재가 내보인 청구서가 터무니없는 사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마음 한편이 찜찜했기 때문이었다.


“땡큐, 설재은.”


작업복에 있는 명찰을 본 민재가 재은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공통점이 있군. 왠지 다음에 또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야. 후후.”


민재가 핸들을 잡고 재은에게 손가락 경례를 하더니 창문을 올리며 공업소를 빠져나갔다.


재은은 청구서가 구겨지도록 움켜쥐었다. 

재수 없는 새끼.

선글라스 너머로 웃고 있을 그 자식의 능글맞은 눈을 생각하니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온종일 좋았던 기분이 급격히 다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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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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