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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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설재은 (2)
바에서는 경쾌한 댄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말인 데다 시간대가 늦어서인지 테이블이 다 찬 상태였다. 두 사람은 별수 없이 테이블이 아닌 바에 앉았다. 민아는 바텐더와 금방 친해져서 재은을 홀로 두고 바텐더와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여기저기서 자신을 흘깃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재은은 신경 쓰지 않고 맥주만 마셨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편한 시간인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갓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노랑머리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형, 저... 연락처 좀 주시면 안 돼요?”
노랑머리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얼핏 뒤를 보니 노랑머리 친구들이 구석에 앉아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노랑머리를 응원하고 있었다. 번호 따오기 내기라도 한 듯했다.
어린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재은이 일부러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불필요한 인연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어중간하게 아는 사람만 많아지면 서로 피곤해질 뿐이다.
“안 되는데?”
재은이 단박에 거절하자 노랑머리는 얼굴을 붉히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는 후닥닥 자리로 돌아갔다. 노랑머리 친구들이 까였다고 놀려대는 소리가 재은의 귀까지 들렸다.
‘귀여운 녀석들.’
재은이 속으로 웃으며 맥주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옆 테이블에서는 갑자기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애 하나가 한창 자신의 연애담을 푸는 중이었다.
“그 자식이 자기가 먼저 보자고 해놓고서는 처음부터 계속 술만 마시더라고.”
“진상이다. 그래서? 그냥 돌아오지 그랬어?”
“보나 마나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겠지. 그러니까 술도 못 마시는 애가 새벽 네 시까지, 그것도 그 사람과 단둘이서 바에서 죽치고 있었겠지. 넌 얘를 하루 이틀 보냐?”
그러자 이야기를 꺼낸 녀석이 까르르 웃더니 친구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넌 나를 너무 잘 알아.”
“그래서 어떻게 됐어?”
“한마디 말도 없이 술만 마시던 그 자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집으로 가겠다는 거야. 술은 꽐라가 되어서.”
“그냥 길에 버리고 가지 그랬어? 그걸 또 챙겨줬지? 어이구, 내가 못 살아.”
“어떻게 길에 버리고 가? 그러다가 퍽치기라도 당하면 어떡해? 별수 없이 택시를 잡아서 태워 보내……려다가 나도 같이 탔지. 도저히 걱정이 돼서 혼자서는 못 보내겠더라고.”
“지랄. 걱정이 되기는. 마음에 들어서 탔겠지.”
어찌나 잘 아는지 완전히 족집게다.
“그래서? 그래서? 같이 잤어? 응? 응?”
다른 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역시 제일 궁금한 부분이다.
이야기하던 녀석이 부끄러운지 배시시 웃었다.
“그걸 뭐하러 물어? 이 자식 표정 보면 몰라?”
“크! 어땠어? 컸어?”
녀석 친구들이 모두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친구 입만 바라보았다. 당사자는 얼굴이 잘 익은 찰토마토처럼 빨개져 터질 것만 같았다.
“나쁘지는, 않았어.”
“어떻게 안 나빴는데? 속 시원히 얘기 좀 해봐.”
“휴지심 보다 훨씬 굵었어.”
“캭! 어떡해. 휴지심 보다 훨씬 굵었대.”
옆 테이블에서 갑자기 난리가 났다. 다들 소리를 지르는 통에 다른 테이블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쪽을 쳐다볼 정도였다.
옆 테이블 애들이 주위 눈치를 보더니 다시 속삭였다.
“그래서 사귀기로 한 거야?”
“응.…”
수줍게 얘기하는 친구의 어깨를 다른 두 녀석이 난리가 난 듯 마구 때렸다.
“좋겠다, 좋겠어. 드디어 너도 솔로 탈출이구나. 그것도 대물이라니 복 받은겨!”
또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바로 옆 테이블이라 어쩔 수 없이 모두 들어버린 재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휴지심이면 별로 굵은 것도 아닌데? 암튼 좋겠다. 그 나이에 벌써 연애도 하고…. 이 형아는 언제 한번 해보냐?’
재은이 맥주를 병째 잡고 마시는데 바텐더가 마티니 한 잔을 재은 앞에 내려놓았다.
“저 안 시켰는데?”
“저분이 사는 겁니다.”
바텐더가 눈웃음을 지으며 안쪽 테이블을 가리켰다.
구석진 테이블에 혼자 앉은 사십 대 초반의 남자가 재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머리는 포마드를 잔뜩 발라 뒤로 넘기고 손에는 명품으로 보이는 시계와 반지를 끼고 있었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턱을 받친 모습이, 재은에게 ‘너 이거 보이니?’하고 묻는 듯했다.
재은은 남자가 자신에게 술을 보내자 부담스러워 받지 않으려고 했다.
“혹시 저희 가게는 처음이신가요? 보내온 술은 물리치지 않는 게 이쪽 세계 매너랍니다.”
바텐더의 말에 재은은 내키지 않았지만 별수 없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거 너 마셔.”
재은이 마티니 잔을 민아에게 주었다.
“이걸 왜 내가 마셔? 저 남자에게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
민아가 술잔을 다시 재은 앞으로 밀었다.
“나 마티니 안 마시는 거 잘 알잖아. 그냥 네가 마셔.”
“야, 저 남자 우리 쳐다본다. 아예 일어나서 이쪽으로 다가오는데?”
재은이 남자 쪽 테이블로 고개를 돌리려는 데 마티니 남은 이미 재은 앞에 서 있었다. 짙은 향수 냄새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합석해도 될까요? 아까부터 유심히 봤는데 정말 제 스타일이시네요.”
마티니 한 잔 줬다고 당연하다는 듯 합석을 요구하는 남자가 불쾌해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안 되겠는데요?”
“예?”
“그쪽은 정말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직설적인 재은의 화법에 남자가 적응이 안 되는지 눈을 부릅떴다.
옆에 앉은 민아는 남자 몰래 재은에게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아휴, 미친.년.
“아, 예….”
남자가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테이블로 되돌아갔다. 재은을 한 번 노려보기까지 하면서.
“엔간히 좀 하지. 저 사람은 술 주고 수모당하고 이게 뭐냐?”
민아가 재은에게 정나미 떨어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라고 그래? 싫은데 사귀자고 그래?”
재은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맥주병을 비웠다.
*
“아 글쎄, 나는 여기 안 간다니까 그러네.”
바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아 참, 여기 그런데 아니라니까요. 그냥 딱 술 한 잔만 마시고 가요. 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봐도 게이바인데.”
“아 참, 형! 자꾸 이러면 누나한테 일러요?”
“뭐라고? 네가 나 데리고 게이바 갔다고? 네 누나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나중에 누나랑 결혼하면 오고 싶어도 못 오잖아요. 그냥 다양한 경험하는구나 생각하고 좀 들어가요. 사람들 쳐다보잖아요.”
문이 열리는 순간, 재은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옆에서는 민아가 흥분해서 난리였다.
“내가 말했지? 거봐, 정말 왔잖아. 아 씨, 이럴 때 눈도장 좀 찍어야 하는데.”
민아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바에 있던 사람들도 연예인 고은수가 들어오자 노골적으로 힐끗거렸다. 그중에는 대놓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고은수는 오히려 그런 시선을 즐기는 건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같이 온 저 남자는 누구야? 애인인가? 고은수 뺨치게 잘 생겼네?”
민아가 목디스크 걸리기로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목을 쭉 뺐다. 모든 사람이 고은수를 바라볼 때 재은의 시선은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고은수 옆에 있는 남자. 바로 왕재수 하민재였다.
민재가 재은이 앉아 있는 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은은 깜짝 놀라서 손으로 얼른 얼굴을 가리고 돌아앉았다. 어차피 조명이 어두워 가까이서 보지 않는 이상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재은은 민재가 혹시라도 알아볼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손가락 틈으로 보이는 민재는 정장이 아니라 핏이 좋은 청바지와 하얀 티,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요근래 며칠 동안 봤던 모습보다 훨씬 섹시한 느낌이었다.
심장이 물색없이 쿵쾅거렸다. 더 있다가는 왠지 민재와 마주칠 것만 같았다.
“나, 나는 그만 가볼게. 지은이 학원 마치고 올 시간이라 가봐야 할 것 같아.”
재은이 벌떡 일어나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민재가 못 알아보도록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야, 설재은!”
민아가 황당하다는 듯 재은을 불렀다. 바에 있던 사람 몇 명이 민아와 재은을 쳐다보았다. 민재도 고개를 힐끗 들었다. 짜증이 가득하던 두 눈이 갑자기 생기를 띠었다.
“은수야,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민재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어, 매형? 화장실은 그쪽 아닌데?”
은수가 소리쳤지만 곧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묻히고 말았다.
****
지하철역으로 가는 재은은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에 온 눈이 얼어붙어 길이 상당히 미끄러웠으나 재은의 머릿속은 온통 민재 생각뿐이었다.
하민재 그 왕재수가 왜 거기에 왔을까? 고은수와는 무슨 사이일까? 설마 고은정과 고은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재은이 갑자기 멈춰 서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민재가 옆에 있다면 얼굴을 갈기기라도 할 기세였다.
젠장. 그 자식이 양다리를 걸치건 말건 왜 신경이 쓰이는 걸까.
첫날 차 안에서 훔쳐봤던 민재의 눈빛이 떠올랐다. 자신을 바라볼 때 짓던 장난기 가득한 눈빛과 달리 그때는 살짝 지쳐 보이고 공허함도 감도는 눈빛이었다.
말도 안 돼. 그 자식이 뭐가 부족해서?
부모 잘 만나서 젊은 나이에 명품 걸치고 수억 대를 호가하는 외제 차를 끌고 다니는데.
여자친구는 탑 탤런트이고, 처가 될 집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데 뭐가 부족해서?
생활비에, 아버지 약값에, 동생 학원비까지 걱정해야 하는 자신 같은 사람도 있는데.
문득 한우 꽃등심이 먹고 싶다던 동생 지은의 소박한 바람이 떠올라 콧등이 짠했다.
재은이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민재 생각을 몰아내려는 듯이.
“이런!”
재은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민재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그만 지하철역을 한참이나 지나쳐 버린 것이다.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 다음 지하철역으로 가는 것이 더 빠를 것만 같았다.
“그 자식이 뭐라고 나도 참….”
재은이 다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번화가를 벗어나서인지 주위에 인적이 거의 없었다. 가끔 도로를 오가는 차량 불빛과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을 제외하면 불빛도 별로 없었다.
또각또각.
그런데 아까부터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설마 했으나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저 발걸음 소리, 바에서 나왔을 때부터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싸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재은이 침을 꿀꺽 삼키고 걸음을 빨리하자 뒤따라오던 발걸음 소리도 빨라졌다.
뒤로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 얼른 가로등 뒤로 몸을 숨기는 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 지금 나를 쫓아오는 게 분명하지? 스토커인가?
옷차림으로 봐서는 아까 그 마티니 남 같다.
설마, 저 자식, 내게 차였다고 해코지라도 하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아까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침 얼마 전 이 일대에서 묻지 마 폭행으로 한 명이 죽었다는 기사도 생각났다.
보기보다 겁이 많은 재은이 다음 지하철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쫓아오는 사람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지라고 속력을 냈다.
그렇게 6, 7분 정도 달리자 드디어 지하철역이 눈에 들어왔다. 재은이 거친 숨을 내쉬며 지하철역으로 재빨리 뛰어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 재은의 팔을 휙 낚아챘다.
“으악!”
재은은 깜짝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마침 지하철역에서 올라오던 사람이 그 소리에 놀라 재은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뛰어? 졸지에 달리기 한번 잘했네. 헉헉헉….”
어라? 이 목소리는?
재은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뒤쫓아오던 마티니 남은 사라지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왕재수 하민재가 자신의 앞에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얄밉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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