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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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너를 좋아해 (1)



“미안해. 많이 놀랐지?”


경찬 차 안에서 민재가 재은의 손을 꽉 잡았다. 재은은 그때까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제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은정이가 워낙 있는 집에서 자라서 성격이 좀 제멋대로야. 여배우라 말 같은 것 좀 조심히 하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도….”


“난 괜찮아요. 그보다 형은 저를 데려다줄 게 아니라 은정씨에게 가야 하는 것 아니에요? 화가 많이 난 것 같던데. 역시 어제 그 사고 때문에 그런 것이겠죠?”


이번에는 재은이 조심스레 민재 눈치를 살폈다. 잘은 모르겠지만 민재와 은정의 관계는 평범한 남녀 관계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민재는 여자친구인 은정에게 망신을 당했다. 민재가 타고 다니는 차를 은정이 사준 것 같았고 은정은 들으란 듯이 일부러 생색을 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으로 보건대 차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약점이라도 틀어쥔 사람처럼. 


재은의 위로에 민재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역시 힘든 걸까.


“괜찮아. 이 짓을 벌써 3년째 하고 있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될 뿐이야. 그러고 보면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거 순 거짓말인 것만 같아.”


민재가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 이면에는 자신이 짐작할 수 없는 아픔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잠깐이긴 하지만 민재에게는 아무런 고통도, 아픔도 없을 것이라며 철없는 생각을 했었다. 미안했다. 


“이 차 생각보다 괜찮죠? 경찬이 형이 차를 끔찍이 아껴서 저도 아직 한 번도 빌려보지 못했어요.”


재은의 말에 민재가 의외라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래? 차가 생각보다 깔끔하네. 그 친구 생긴 것과는 달리.”


“하하하. 경찬이 형 취미가 차 광내기예요. 맨날 얼마나 열심히 닦는지…. 그런데 형에게 이렇게 척 빌려주는 것 보면 인상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나 봐요.”


민재는 골목길에서 경찬과 주먹다짐을 하던 때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뭐, 내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지만.


“남자들끼리만 통하는 그런 게 있어.”


민재가 눈을 찡긋했다.


“에? 나는 뭐 남자 아닌가?”


“너는 엄밀히 말해서 우리 과는 아니지.”


재은이 입을 삐죽 내밀자 민재가 재은의 뒤통수를 손으로 헝클었다. 재은과 함께 있으니 은정에게 받은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오늘 우리 둘 다 기분도 별론데 같이 영화나 보러 갈까?”


“그거 위시리스트에 있던 거죠? 같이 영화보기.”


“맞아. 눈치챘구나. 하하하. 내가 영화를 좋아해서 그래. 대신 장르는 공포. 어때?”


“공…포요?”


보기보다 겁이 많은 재은이 유일하게 안 보는 영화 장르가 공포물이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 기왕 맞춰 주려면 끝까지 맞춰 주는 게 좋겠지.


“그래요. 까짓거 보러 가요.”


호기롭게 말하는 재은을 민재가 흘깃 보더니 다시 재은의 뒤통수를 헝클었다. 뒤통수가 동그래서 한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날 저녁, 민재는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보통 영화 볼 때는 워낙 집중하는 타입이라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날은 정말 영화 내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놀란 재은의 눈동자, 움찔거리는 몸짓, 무서워서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거나 자신의 손을 꽉 움켜쥐던 재은의 느낌뿐이었다. 그런 느낌이 얼마나 가슴을 두근거리고 만들던지…. 


재은을 위로한답시고 영화 보는 내내 재은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어쩌면 영화관이 어두워서 좀 더 용기를 낸 것인지도 모른다. 품속으로 안겨드는 재은을 보며 이래서 연인들이 일부러 공포물을 보러 오는구나 싶었다. 그래서인지 시체가 살아서 움직이는 공포물을 보면서도 민재는 내내 입가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재은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난 뒤에도 녀석의 체온과 숨소리가 여전히 팔에 남아있었다. 


****


연말이 지나고 해가 바뀌었다. 섣달 그믐밤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일을 나가셨고, 동생 지은이는 친구들과 새해를 맞이하겠다고 해서 특별히 외박을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올해 연말에는 어쩌면 민재와 함께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올해도 여전히 혼자 쓸쓸히 새해를 맞이했다. 


TV에서는 제야의 종 타종 광경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무릎을 세운 채 이불을 덮고 TV를 보던 재은이 참지 못하고 또 휴대전화를 슬쩍 보았다. 아직도 민재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영화를 보고 헤어진 뒤 민재를 보지 못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갔다. 출근하듯 매일 같이 들르던 민재가 그날 이후로 딱 한 번 전화만 했을 뿐이다. 회사 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져서 통 시간 내기가 어렵다며….


민재의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이런 날 문자 한 통 안 주는 것이 못내 서운하기만 했다. 

서운하다니, 말도 안 돼. 

민재를 밀어낸 것은 자신이었다. 임자 있는 사람에게는 관심 없다고 딱 잘라 말했던 사람이 바로 자신 아니던가. 그러니 민재가 연락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리고 위태롭게만 보이던 민재와 은정의 관계. 분명히 잠깐 문자 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민재도 이제 마음을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변두리 공업소 말단 직원인 자신을 민재가 뭐가 아쉬워서 붙잡겠는가. 그 생각을 하자 왠지 울컥했다. 


“아 씨, 이럴 줄 알았다면 민아랑 술이나 한잔하러 나가는 건데.”


새해 첫날 새벽을 재은은 그렇게 혼자서 꼬박 세웠다. 가슴 한쪽이 자꾸 먹먹했다.


****


정초에는 연휴가 있어서인지 시간이 빨리 갔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해가 된 지도 벌써 두 주가 지났다. 아직도 민재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민재를 보지 못한 지 벌써 3주가 지난 셈이다. 민재를 알고 지낸 기간 만큼, 민재를 보지 못한 시간이 흘러갔다. 


바쁘겠지. 회사가 어렵다고 했으니 정말 바쁠 거야. 

얼마나 바쁠지는 일반 기업체에서 일해보지 않은 재은으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꼭 시간에 비례하지는 않나 보다. 민재를 봤던 시간만큼 보지 못한 시간이 흘렀으니 기억이 희미해져야 맞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민재 얼굴이 더 또렷이 떠올랐다. 왜 오지 않는 건지, 왜 연락도 한 통 없는 건지 궁금해도 그동안은 먼저 전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재은은 퇴근길에 충동적으로 그만 민재의 번호를 누르고 말았다. 

잠깐이라도 민재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바쁘지만 잘 지낸다는 한마디만 들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뚜르르르르.

바쁜데 전화해서 싫어하는 건 아닐까? 혹시 내가 중요한 순간에 방해하는 건 아닐까? 신호가 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별별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잠시 뒤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민재가 아니었다.


“네. 하 상무님 휴대전화 대신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재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민, 민재 형 전화 아닌가요?”


“하민재 상무님 전화 맞습니다. 상무님이 지금 회의 중이시라 제가 대신 받았습니다.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후, 후배입니다. 언제쯤 전화하면 통화 가능할까요?”


수화기 저편에서 뭐라고 급하게 소리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수선한 사무실 분위기가 전화기를 타고 재은에게까지 전달될 정도였다. 이렇게 안부 전화하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글쎄요. 요즘 회사가 비상사태라 며칠째 계속 퇴근도 못 하시고 계십니다.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알 수가 없네요.”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피곤에 절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바쁘기에 퇴근도 못 한다는 걸까. 밥이라도 먹고 일을 하는 걸까.

도로변을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이 동그랗게 번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민재가 너무 보고 싶었다. 자신에게 수시로 장난을 걸던 민재의 눈빛과 다정한 목소리가 그리웠다. 


재은은 걷다가 멈춰 서서 눈을 꼭 감았다. 심장이 민재를 내놓으라며 아우성쳤다. 

안 된다. 포기하자. 아무리 되뇌어도 심장은 떼쓰는 아이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민재의 얼굴을 보지 않고는 전혀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 가서 얼굴만 보고 오자. 먼발치에서 잠깐만이라도 보고 오자. 

재은은 집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민재 회사로 향했다. 지은에게는 오늘 좀 늦을지도 모른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재은의 공업소에서 민재네 회사까지 대중교통으로 가는 데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세 번 갈아타고, 길을 몰라 한참 헤맸다. 

실제로 와 보니 정말 먼 거리였다. 차를 타고 오긴 했지만 민재는 이 거리를 지난 3주간 매일 같이 왔었다. 자신을 보러….


재은이 민재네 회사에 도착하니 벌써 9시가 훌쩍 넘었다. 민재네 회사는 크지는 않았지만 견실해 보이는 중견기업이었다.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회사 건물 전층에 아직 불이 환했다. 재은은 차마 회사 안으로 들어갈 용기는 안 나서 회사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불 켜진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 건물 어디쯤 민재가 있을까. 수트를 입은 모습은 꽤 괜찮았었는데…. 정장을 입은 민재를 훔쳐보던 자신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민재의 회사 앞에서 민재를 기다린 지 두 시간이 흘렀다. 발을 동동거렸지만 그새 발가락이 얼었는지 감각이 없었다. 이번 겨울은 한파가 극심해서 낮에도 밖에서 10분을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재은은 이 겨울밤, 벌써 두 시간째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건물 사이로 부는 칼바람이 재은의 얇은 외투를 뚫고 들어왔다. 재은이 빨갛게 언 양 볼과 코끝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동안 건물 밖으로 몇 사람이 나오긴 했지만 민재는 아니었다. 이렇게 무작정 민재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정말 순진한 생각이었나 보다.


포기하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건물 안에서 낯익은 얼굴이 걸어 나왔다. 덥수룩한 수염, 헝클어진 머리, 풀어진 넥타이, 구겨진 와이셔츠. 피곤에 절은 모습이었지만 분명히 민재였다. 재은은 한달음에 민재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민재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꾹 눌러 참아야 했다.


민재가 퀭한 눈으로 재은이 있는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재은은 오히려 건물 옆 어두운 그늘로 몸을 더 숨겼다. 왠지 지금 민재 눈앞에 나타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민재는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전화가 울리자 민재는 담배를 피우지도 못한 채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인상이 굳은 걸로 봐서는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통화를 하다가 일이 잘 안 풀리는지 민재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담배를 도로 집어넣고는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재은은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민재의 초췌한 뒷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머릿결을 흩날리는 데도 춥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저 민재가 안쓰럽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거기 누구요?”


재은이 서성이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회사 정문 경비실에서 아저씨 한 분이 밖으로 나왔다.

재은이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누구를 좀 찾으러 왔습니다.”


“누굴 찾소?”


“하민재씨라고….”


“하민재?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사장님 아드님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 말에 경비 아저씨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하 상무님 말이군. 상무님과 무슨 사이에요?”


경비 아저씨가 재은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후, 후배예요.”


“후배면 왜 전화를 하지 않고?”


“요즘 바쁜지 통화가 안 되어서 직접 보러 왔죠. 그런데 방해될까 봐 그냥 가려고요.”


방금 멀찌감치서 민재를 봤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아까 하 상무님, 담배 피우러 잠깐 나오시는 것 같던데. 참, 하 상무님도 불쌍하지. 퇴근을 못하신지가 벌써 이 주가 넘었을 거요. 대기업 횡포도 이만저만 해야지, 이건 뭐, 사람 피를 말리니….”


대기업이라는 말에 재은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대기업이라니요? 어디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어디긴 어디야, 세나 그룹이지. 세나 그룹 회장 딸하고 우리 하 상무님하고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면서 이렇게 뒤통수를 치니. 쯧쯧. 세상에 정말 믿을 놈 하나 없어.”


한참 혀를 차던 경비 아저씨가 갑자기 손으로 입을 막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이고, 내가 실성을 했나,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 젊은이, 못들은 걸로 해줘요. 추운데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경비 아저씨가 황급히 경비실로 돌아갔다. 세나 그룹이라니. 어쩌면 고은정이 관련되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은이 불 켜진 건물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초췌한 민재 뒷모습이 떠올랐다. 

민재가 저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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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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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가슴 시린 이야기가 전개가 되는군요
ㅠㅠ 짧지 않은 글인데 너무 순식간에 읽어버리고 빨리 다음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몰염치한이 여기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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