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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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너를 좋아해 (2)
집으로 돌아가며 재은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민재는 회사가 바빠질 것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민재 성격에 회사 일이 바빠져 만날 수가 없다면 미리 얘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은정이 공업소에 나타나서 소란을 일으킨 날 이후 갑자기 바빠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문득 그날 은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반드시 후회하게 해 줄 것이라는 말.
그날 밤 재은은 인터넷을 뒤지며 민재의 회사와 은정의 세나 그룹에 대한 자료를 검색했다. 세나 그룹은 10대 그룹 중의 하나라 관련 기사가 넘쳐났지만, 민재 회사에 관한 기사는 찾기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검색하다가 문득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 미영산업, 채권 상황 악화. 세나 그룹 등 돌리나.
재은이 얼른 그 기사를 클릭했다. 최대 납품처인 세나그룹에서 최근 대금결제를 전면 재검토하면서 미영산업의 자금 사정이 악화했다는 짧은 기사였다. 기사에는 민재 아버지인 듯한 미영산업 대표이사의 굳은 표정이 찍힌 사진이 실려 있었다.
설마 고은정이 손을 쓴 것일까? 세나 그룹 회장의 딸이라는 지위가 한 회사를 좌우할 정도로 그토록 힘이 있는 자리일까? 그쪽 세계의 생리를 모르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은정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다음날 오후, 재은은 이전에 민재에게 받았던 외제차 전문 영업점에 전화를 걸었다. 차 문제로 은정과 얘기할 게 있다며 은정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민재의 이름을 대니 의외로 쉽게 알려주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가 간 지 한참이나 되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기에 끊으려는 찰나, 신경질적인 고은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고은정씨죠? 저 설재은입니다.”
“누구라구요?”
“여, 여기 불은동 **공업소입니다. 민재 형 차 접촉사고가 났던….”
“아, 난 또 누구라고. 당신이군. 용건이 뭐지?”
“한번 뵐 수 있을까요? 민재 형에 관한 얘기입니다.”
“민재씨 얘기를 내가 왜 당신에게 들어야 하지?”
“오해하고 계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설명을 좀 드리려고요. 민재 형에게는 말하지 말고 그냥 둘만 만났으면 합니다.”
전화를 끊고 재은은 심호흡을 했다. 내일 오후 세시에 고은정과 만나기로 했다. 내일은 휴가를 좀 써야 할 것만 같다.
****
방송국에 처음 들어간 재은은 한참을 헤매고서야 겨우 고은정의 대기실을 찾을 수 있었다. 재은이 노크한 다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은정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거울을 통해 재은을 바라보았다.
“거기 앉아. 시간도 얼마 없으니 본론만 간단하게 말해.”
고은정이 살갑게 대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쳐다보지도 않을지는 몰랐다. 재은은 약해지려는 자신을 다독이며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혹시 지난번 일 때문에 민재 형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습니까?”
잔뜩 긴장하고 있어서인지 재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흥! 네가 뭔데 그런 것을 묻는 거지? 정말 민재 씨랑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 줄로 착각하나 보지?”
은정이 실내인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배에 불을 붙였다.
“또 내가 그랬다면 어쩔 건데?”
고은정이 거울 속 재은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뿌연 연기에 순간 재은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오해가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 전날, 민재 형이 공업소에 왔을 때 마침 동네 양아치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 양아치가 형 차를 보더니 돈이라도 뜯어낼 요량으로 형에게 접근했어요. 그런데 형이 그걸 눈치채고 먼저 받아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민재씨가 거길 왜 가냐고. 그 변두리 공업소에 계속 갈 일이 없잖아?”
“그건….”
재은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은정은 어디 계속 얘기해 보라는 투로 재은을 빤히 쳐다보았다. 재은이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자신이 마무리 지어야 한다. 무릎 위에 놓인 재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 저희 공업소에 왔던 날, 제가 주제넘게 민재 형 차를 손보는 바람에 재수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 비용이 약 1600만 원쯤 나왔는데 제가 아직 못 갚았어요. 그것 때문에 계속 온 겁니다. 조만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비용을 갚겠습니다. 그러면 민재 형도 더 이상… 저희 공업소에 올 일은 없을 겁니다.”
민재가 더 이상 올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는 말을 억지로 밀어냈다. 말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심장이 시큰거렸다. 지난번에 민재가 수줍게 웃으며 보여주던 10가지 위시리스트가 떠올랐다. 그 소원들은 아무래도 들어주지 못할 것 같다.
은정이 몸을 돌리더니 담배를 꼬나문 채로 재은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 일로 민재 형 회사가 파산위기라는 기사를 봤어요. 민재 형이 요즘 몇 주째 퇴근도 못 하고 있어요. 두 분, 결혼할 사이잖아요? 그리고 민재 형 부모님은 시부모님이 되실 분들인데 이렇게 심하게 해도 되나요?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서 시건방지게 훈계질이야? 민재씨랑 내가 결혼한다고 해도 우리 두 사람은 절대 동등해질 수가 없어. 그룹사 회장 딸과 납품업체 대표 아들이 어떻게 같아? 아무리 사회생활을 안 해봤다고 해도 그 정도 머리도 안 돌아가니?”
고은정이 다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하민재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 그 사람 차뿐만 아니라 그 사람 아버지 회사도 내가 구해준 거라고. 하지만 그 사람이 내게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내게 이래서는 안 되지. 정신 차리고 내 앞에 와서 싹싹 빌기 전까지는 절대 용서해주지 않을 거야.”
은정이 재은을 향해 다시 연기를 뿜어냈다.
“제가, 제가 없어지면 되잖아요. 그러면 두 분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요? 제가 당장 내일이라도 돈을 구해서 민재 형에게 갚을게요. 그러면 형이 더 이상 나를 찾아올 일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우리 공업소로 오지 말라고 형이 알아듣게 얘기해 놓을게요. 제발 형네 회사를 좀 살려주세요.”
재은이 은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정말 민재 형을 좋아하나 보다. 내가 이 사람 앞에 무릎을 꿇다니. 재은이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자존심 따위 아무래도 괜찮아. 아니, 무릎 꿇는 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민재 형이 좋아질 수만 있다면….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재은을 잠시 내려다보던 고은정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눈꼴 시려서 못 봐주겠네. 너 지금 무슨 삼류 신파 영화 찍니?”
고은정의 비웃음에도 재은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비웃어도 좋아요. 민재 형만 살려주세요. 그것만 약속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좋아하는 만큼 참는 거다. 민재형을 정말 좋아하니까… 그만큼 참을 수 있어야 해.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매니저인 듯했다.
“은정아, 빨리 준비해. 곧 촬영 시작이야. 이크! 이 사람은 뭐야?”
노골적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재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은정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일어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얼마든지 받아도 상관없어.
아니나 다를까 은정은 재은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옷을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호호, 신경 쓰지 마.”
고은정이 재밌다는 듯 재은을 흘깃 보더니 문을 탁 소리 나게 닫고 나갔다.
재은이 무릎 위에 놓인 주먹에 힘을 주며 약해지려는 자신을 다독였다. 민재 형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한심했다. 질끈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것밖에 해줄 게 없다면 이것이라도 해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꿇어앉은 다리는 저리다 못해 감각이 마비되었다. 조용한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제 심장이 뛰는 소리뿐이었다.
불과 3주간 봤을 뿐이다. 3주간의 인연이 전부다.
그리고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다시 3주가 흘렀다. 공업소에 왔다가 가는 사람들처럼, 민재도 그렇게 스쳐 가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중에는 가끔 단골도 있기에 몇 개월, 몇 년을 알고 지낸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민재와 만났던 3주의 무게는 다른 사람들과 알고 지낸 몇 년과 달랐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재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봄날이었다. 그 기억만으로도 평생을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
처음 봤을 때부터 민재가 특별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민재와 눈을 마주친 순간, 제 영혼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에 두려움마저 들었다. 그때 심장이 속삭였다. 이 사람이 바로 내 운명이라고.
이렇게 앉아있으니 민재 형에게 ‘임자 있는 사람에게는 관심 없다’고 말한 게 후회스럽다. 관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어서, 민재 형이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바랐기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낯선 공간에 앉아 다시 민재 형과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힘들어도 참아내야 한다. 내가 민재 형을 정말 좋아하니까.
아무리 힘들더라도 민재 형은 지금 훨씬 더 힘들 테니까….
고은정이 다시 대기실로 들어선 때는 여섯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 짜증 나. 그 피디, 사람 정말 피곤하게 해.”
“네가 좀 참아. 다른 배우들은 박 피디 앞에서 찍소리도 못해. 그래도 너니까 박 피디가 그 정도로 굽히고 들어온 거야.”
복도에서 고은정과 매니저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때까지 재은은 자세도 바꾸지 않은 채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매니저가 재은을 보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정아, 나, 나는 차에 가서 기다릴게.”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고은정이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 보기보다 독한 구석이 있구나.”
“민재 형을 살려준다고 약속해 주기 전까지는 이 자리에서 절대 일어서지 않겠습니다.”
재은의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하지만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고은정이 허공을 향해 담배 연기를 ‘푸’ 하고 내뿜었다. 한참을 그렇게 재은을 쳐다보던 고은정이 담배를 재떨이 비벼껐다.
“너 하는 것 봐서. 네 말대로 민재 씨와 확실히 정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 생각해보겠어.”
고은정의 입에서 드디어 재은이 바라던 답이 떨어졌다.
“고마워요. 민재 형과 제가 두 번 다시 볼 일은 정말 없을 거예요.”
재은은 일어나려고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넘어질 뻔했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리가 풀릴 때까지 한동안 그대로 있어야 했다.
고은정이 담배를 피우며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다음날 재은은 지은이 대학 갈 때 쓰려고 그동안 부어왔던 적금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았다. 월급은 적고 돈 들어갈 때는 많아서 지난 몇 년간 쉬지 않고 모았지만 겨우 천오백만 원이 전부였다. 이 통장을 해지할 때는 지은이 대학등록금 낼 때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통장을 내려다보던 재은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은행 창구로 갔다. 부족한 금액은 사장님께 부탁해서 이달 월급을 좀 당겨서 받기로 했다.
재은은 예전에 민재가 준 계좌로 돈을 입금한 뒤 문자를 남겼다.
- 청구했던 돈, 계좌로 송금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짧은 문장 하나를 쓰는데 몇 번을 썼다가 지웠는지 모른다. 정말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차마 ‘보내기’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망연자실하게 문자를 내려다보던 재은이 드디어 ‘보내기’ 버튼을 터치한 다음, 휴대전화를 꺼버렸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순간,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바깥이 이미 캄캄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입맛도 없었다. 재은은 누운 채 휴대전화를 잠깐 켰다. 부재중 통화 수신이 10건도 넘게 와 있었다. 대부분이 민재였다. 재은이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섬에 혼자 고립된 것만 같다. 천장으로 민재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띠링, 소리가 나며 폰이 꺼져 있을 때 수신되지 못했던 문자가 연이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 재은아, 너 이 자식. 이게 다 뭐야?
- 재은아, 전화 좀 받아. 왜 전화를 안 받아?
-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 이러지 마. 재은아.
민재가 자신에게 하소연했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지 말라고.
재은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민재의 문자를 열지도 않고 모두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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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는 좀 뻔한 신파입니다.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 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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