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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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키스의 대가
“형, 뭐야. 설마 오늘 레이싱 하려는 거야?”
재은이 화난 눈초리로 민재를 바라봤다. 통화 내용으로 봐서 분명했다. 민재가 레이싱을 좋아하는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만난 지난 3개월 동안 한 번도 레이싱에 참가한 적은 없었다. 말이 좋아 레이싱이지 도심을 질주하는 광란의 질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그 미친 짓을 설마 민재 형이 한다고?
재은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민재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 거 아니야. 오해하지 마. 너도 알겠지만 레이싱을 하려면 이런 일반 차로는 안 돼.”
민재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레이싱을 하는 차는 민재가 이전에 몰던 람보르** 같은 수퍼카나 외제차 스포츠 세단, 혹은 특수 개조를 한 국산차였다. 지금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차는 스포츠카이기는 하지만 일반 차라 레이싱에 참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럼 뭐야?”
“이따가 가서 오랜만에 동호회 애들이나 좀 만나려고. 나는 가더라도 참가는 하지 않을 거야. 다만 구경만 좀 하려고 하는 거지.”
“거짓말 마. 아까 운전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느니, 국산 차의 저력을 보여준다느니, 했잖아?”
민재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그냥 해본 소리야. 이런 일반 차로 내가 어떻게 걔네들이랑 시합을 해?”
“정말이야?”
“정말이야. 너 데려다주고 잠깐 가서 애들 얼굴만 볼 거야.”
“몇 시에 보기로 했는데?”
“밤 12시”
“밤 12시?”
재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밤 12시면 광란의 질주를 하기에 딱 좋은 시간 아닌가. 재은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자 민재가 재은의 눈치를 봤다.
“그냥 가서 애들 시합하는 것만 보고 들어갈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끝나고 들어갈 때 문자 할게.”
민재가 자동차 레이싱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계속 안 된다고 우기기도 좀 그랬다. 심지어 지난번에 민재가 보여주었던 10가지 위시리스트 항목에도 있었던 것 같다. 같이 자동차 레이싱 참가하기.
“어쩔 수 없네. 대신 절대 위험한 짓 안 하겠다고 약속해.”
“당연하지. 나도 이제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데 위험한 짓을 어떻게 해?”
민재가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쳇. 말이나 못 하면 얄밉지나 않지.”
서울에 도착한 다음 두 사람은 오붓하게 저녁을 먹었다. 재은은 계속 레이싱이 마음에 걸려 저녁을 먹을 때 말이 별로 없었다.
“사실 오늘 가서 동호회 애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거야.”
저녁을 깨작거리는 재은을 바라보던 민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도 그런 질주가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잘 알아. 예전에야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으니 그랬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어. 그래도 친한 녀석이 몇 명 있어서 오늘 가서 인사라도 하려는 거야.”
재은이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마음 한 편에서는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괜히 못 하게 했나 싶어 짠한 생각이 들었다.
재은이 탁자만 바라보자 민재가 재은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우리 재은이, 서방님 생각에 걱정이 많은가 보구나. 안 되겠다. 내가 안 갈게. 그럼 되지?”
“쳇!”
재은이 민재를 쏘아보았다.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넙죽 ‘그래, 가지마’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가. 대신 약속 지켜.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말.”
“그래.”
민재가 웃었다. 여전히 재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리고 오늘은 나랑 같이 가.”
“응?”
뜻밖의 말에 민재가 눈을 치켜뜨며 의아한 눈빛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형 혼자 보내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려. 불안하단 말이야. 옆에 나라도 타고 있으면 형이 질주를 하고 싶어도 안 하겠지. 아니면 같이 죽던가.”
재은으로서는 큰 결심을 한 셈이었다. 시무룩한 재은의 표정과는 달리 민재의 눈이 반짝거렸다.
“집은 어떡하고?”
“벌써 지은이에게 연락했어. 오늘 일이 좀 있어서 새벽에 들어갈 것 같다고.”
갑자기 민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민재가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예스!’라고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좋아?”
“당연히 좋지. 다들 애인 데리고 온다는데 나만 혼자 가면 서러울 뻔했잖아. 내가 애인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예쁜 애인이 있는데.”
민재의 우스갯소리에 재은이 피식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유치하다, 하민재 아저씨.
사실 민재는 오늘 낮에 동욱에게 ‘다들 여자친구를 데려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재은을 데려가고 싶었다. 물론 사람들 앞에서 커밍아웃할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다들 애인과 같이 온다고 하니 자신도 재은을 데려가고 싶었을 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레이싱도 보여줄 겸.
그런데 재은이 함께 가겠다고 하니 기분이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다. 재은이 그런 민재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어, 형 정말 왔네?”
“어, 동욱아. 오늘 꽤 많이 모였네?”
“그럼. 봄도 왔는데 이제 슬슬 활동 좀 해줘야지. 근데 형은 정말 안 할 거야?”
아까 낮에 통화했던 동욱이라는 동생인가 보았다. 생긴 건 멀끔한 게 전혀 폭주족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러고 보니 민재 형도 이런 걸 좋아하게는 안 보인다.
동욱의 등 뒤로 람보르**를 비롯해서 페라*, 포르*, 벤* 스포츠 세단 등 수퍼카 열서너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어느 차에선가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호회 회원들로 보이는 젊은 남자 몇 명이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하나같이 몸매가 쭉쭉 빵빵인 여자들이 아직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게다가 한쪽 구석에서는 즉석에서 자동차 불법 개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두 처음 보는 생경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야?”
“응, 나 아는 동생이야.”
민재가 이렇게 소개할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는 듯이 재은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나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유도 없이 커밍아웃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 형! 오늘 여자친구 데리고 오라니까. 남자를 데리고 오면 어떡해? 하여튼 말은 징그럽게 안 들어요.”
여자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며 민재에게 핀잔을 주던 동욱이 갑자기 재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민재 형이랑 정말 친하신가 봐요. 오늘은 애인 데리고 오는 날인데. 나중에 은정이 누나 질투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하하하. 어쨌든 환영합니다. 딱 보니 소싯적에 액셀 좀 밟아보신 것 같은데요?”
“얜 그런 것 몰라. 그리고 나 은정이랑 헤어졌으니까 앞으로 은정이 얘기 내 앞에서 꺼내지 마.”
동욱이 은정이 얘기를 꺼내자 민재가 서늘한 눈빛으로 선을 그었다.
“정말? 형, 대박! 은정이 누나 같은 최고 미인을 왜?”
“시끄러워. 빨리 가. 곧 시작할 것 같은데.”
민재가 동욱을 밀어내자마자 주최자인 듯한 사람이 시작을 알렸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다들 정리해 주세요.”
2열로 길게 늘어선 열세 대에 달하는 수퍼카들이 시동을 걸자 굉음과 함께 일제히 전조등이 켜졌다. 제일 뒤쪽에 서 있던 민재도 시동을 걸었다.
“형은 안 한다고 했잖아?”
재은이 놀라서 물었다.
“안 해. 걱정 마. 여기서 세하리까지는 정상 속도로 가. 레이싱은 세하리에서 시작될 거야. 거기서 2km 정도 롤링이 진행돼. 그것만 보고 가자.”
“롤링?”
“일정한 속도로 가다가 정해진 구간에서 속력을 내서 결승점을 먼저 통과하는 것을 롤링이라고 해. 지금까지 나보다 우승을 많이 한 사람은 없었어.”
민재가 옛날 생각을 하는지 미소를 지었다. 레이싱 카들은 굉음을 내도록 튜닝한 차들이 많아서 열세 대에 달하는 차들이 도로에 들어서자 요란한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좀 시끄럽지?”
민재가 재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한 손으로 재은의 손을 슬쩍 잡았다 놓았다. 재은은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뉴스에서나 보던 폭주족 레이싱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재은이 긴장하자 민재는 재은을 놀리려고 일부러 차를 양옆으로 크게 출렁거리게 했다.
“뭐, 뭐하는 거야?”
재은이 사색이 되어 옆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우리 재은이, 정말 겁이 많구나?”
민재가 짓궂게 웃으며 또 차를 출렁거리게 했다.
“하지 마!”
재은의 안색이 대번에 새파래졌다. 잠시 후 교차로가 나오자 레이싱 카들도 일제히 빨간 신호등에 맞춰 차를 멈췄다. 반대편 차선과 다른 쪽 차선에는 일반 차량 몇 대가 역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휴.”
차가 멈춰 서자 재은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재은을 쳐다보며 피식, 피식 웃던 민재가 갑자기 한 손으로 재은의 목을 잡아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읍!”
재은은 난데없는 키스 세례에 당황했지만 민재의 부드러운 혀가 제 혀를 밀며 입안으로 들어오자 몸이 나른해져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재은이 입을 벌려 민재의 혀를 받아들였다. 민재의 뜨거운 숨이 입술에 와 닿았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이렇게 훅 들어오는 입맞춤도 좋았다.
민재는 신호가 바뀐 줄도 모르다가 뒤차가 경적을 울려서야 겨우 입을 뗐다.
****
은수는 눈앞에서 일어난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앞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민재가 맞았다. 그런데 그 옆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옆에 탄 사람이 남자라는 것. 그리고 방금 민재가 그 남자와 신호가 바뀌는 줄도 모르고 십몇 초간 진한 키스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동욱이는 오늘 레이싱에 참가하려면 꼭 여자친구를 태우고 와야 한다고 했다. 여자를 태우고 오기는커녕 여자에게 관심조차 없는 은수는 콧방귀를 뀌며 차라리 가지 않겠다고 했었다. 어차피 민재 형도 오지 않을 테니 가봤자 의미도 없을 것만 같았다. 민재 형과 누나가 냉전 중인 것은 반길 일이지만, 그래서 민재는 더욱 오늘 레이싱에는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옆자리에 앉힐 여자친구가 없으니까.
그런데 동욱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민재 형이 왔다고.
은수는 간만에 민재와 레이싱을 하며 지난번 키스 사건 이후로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민재를 볼 생각에 흥분하며 서울에서부터 미친 듯이 질주해서 왔건만,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민재가 다른 남자와 농밀한 입맞춤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자신이 입맞춤을 애걸했을 때는 얼음장같이 싸늘한 냉기만 뿜어내던 사람이.
“씨벌, 하민재. 네가 나 말고 다른 남자를 만나?”
민재 차를 노려보는 은수의 눈이 섬뜩한 빛을 뿜어냈다. 뱃속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뜨거운 기운이 화르르 솟구쳐 올라왔다. 주변이 뿌옇게 변하더니 눈앞에는 오로지 민재와 그 옆에 앉은 새끼만 보였다.
“그래, 하민재. 어디 끝까지 한번 가보자. 씨벌. 네 눈앞에서 네 옆에 있는 새끼가 죽어 나자빠지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말 궁금하네. 씨벌.”
은수가 광기에 사로잡힌 채 핸들을 내려치며 혼잣말을 했다. 시선은 여전히 민재 차를 향하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액셀을 힘껏 밟았다. 은수의 수퍼카가 순식간에 최대 속력에 도달하며 앞차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쾅!
민재 차가 순식간에 앞으로 튕겨 나가며 전복되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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