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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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병실에서 (1)
민재는 옆에서 어머니가 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자신은 어리석게도 재은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었을까.
뻔히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한 말인데 왜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당시 차가 전복되면서 민재는 정신을 잃었다. 그래도 안전띠를 하고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민재는 원래 레이싱을 할 때 안전띠를 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갑갑하면 기어 변속이라든가 핸들 조작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0.01초를 다투는 순간이 많기에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안전띠 같은 것은 하지 않게 됐다. 사실, 레이싱에 참가하는 녀석들 중에서 안전띠를 하는 녀석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고가 나기 직전, 민재는 재은을 놀라게 하려고 차를 흔들었고, 겁을 먹은 재은이 재빨리 안전띠를 하며 민재에게도 안전띠를 하라고 재촉했다. 그때 불안해하던 재은을 안심시키려는 마음에 순순히 재은의 말에 따랐던 것이 지금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였다.
재은과 달콤한 키스를 한 다음, 차를 출발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차량 한 대가 엄청난 속도로 들이받았다. 차가 전복되면서 에어백이 터져 나왔고 그 뒤로는 의식이 없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목과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병원에 누워 있었다. 의사는 그렇게 큰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골절된 부위는 없다고 했다. 다만 뼈에 금이 간 부분과 인대가 늘어난 부분, 찰과상으로 인한 파상풍, 그리고 사고 후유증이 있을 수 있으므로 한 달은 입원해야 한다고 권했다.
민재는 정신이 들자마자 재은부터 찾았다. 어머니께 자기 옆에 있던 친구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다급하게 물었지만 어머니는 누구를 말하는 건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불안해진 민재가 재은에게 전화하려고 휴대전화를 꺼내는 순간, 동욱에게서 전화가 왔다.
- 형, 괜찮아? 몸은 좀 어때?
- 아, 동욱아. 나 지금 좀 급하게 연락할 때가 있어서 좀 이따 다시 전화할게.
- 형 사고 난 거, 신고한 사람 나야. 내가 직접 한 건 아니지만….
그 말에 민재가 전화를 끊으려다 말았다.
- 뭐라고? 그럼 넌 알겠구나. 그때 내 옆에 있던 애는 어떻게 됐어?
- 아, 그 사람? 그…, 그 사람은…, 다친 데가 별로 없어서 금방 퇴원했어.
- 그래? 천만다행이구나. 난 또 그 녀석 크게 다친 줄 알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그때 재은이 다치지 않았다는 동욱의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재은이 다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에 그 말을 덥석 그대로 믿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동욱이의 말투가 수상하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을 텐데….
- 그런데 도대체 어떤 새끼가 사고를 낸 거야? 누구야? 우리 동호회 애들은 아니지? 내가 그때 제일 뒤에 있었으니 우리 애들은 분명히 아니야.
- 그, 글쎄. 누군지 모르겠어. 경찰 말로는 CCTV 기록이 너무 흐릿해서 범인을 찾을 수가 없대.
- 흥. 찾을 수가 없는 게 아니라 찾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민재가 냉소를 띠었다.
- 형, 아무튼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도 회복 중이니 무리하지 말고 얼른 쉬어. 다음에 시간 나면 한번 갈게. 아 참, 그리고 노파심에서 하는 얘긴데 우리가 레이싱 한 거 꼭 비밀로 해줘. 뭐, 형도 우리 처지 잘 알겠지만.
- 그래. 알겠다.
- 응. 그럼 끊어.
동욱과 통화를 하고 나자 민재는 좀 안심이 되었다. 재은이 대신 자기가 더 많이 다쳐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좀 진정된 민재가 재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 가서야 재은이 전화를 받았다. 재은이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유난히 잠겨 있었지만 그때는 설마 아파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 괜찮아? 먼저 퇴원했다며? 다친 데가 별로 없어서 다행이다.
- 그러게. 형은? 많이 다치진 않았어?
재은이 생각보다 차분하게 물었다. 그때는 그게 상당히 서운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들었던 것만 같다.
- 아니, 아파 죽겠어. 나 병문안 와서 간호 좀 해줘.
- 피, 엄살쟁이네. 목소리 들어보니 멀쩡하구만.
- 그렇다고 설마 병문안 한 번도 안 올 건 아니지?
- 가긴 할 텐데, 당분간은 못 갈 것 같아. 일이 좀 밀려서…. 조금 한가해지면 갈게.
- 쳇. 서방님이 아프다는데 일이 우선이네. 나 삐질 거야.
재은의 말에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더니 재은이 ‘아기처럼 떼쓴다’며 나지막이 웃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재은이와 통화한 적은 없었다. 문자라도 올까 하고 휴대전화를 바로 옆에 두고 있었지만 일이 얼마나 바쁜 건지 간단한 문자 한 통도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바보같이.
“그나저나 뺑소니범을 잡아야 할 텐데 경찰은 뭣들 하는 건지, 원.”
민재 어머니가 혀를 차며 덧붙였다.
“아 참, 네 사고 소식 들었다면서 고 회장님께서 직접 전화하셨다. 그 양반이 웬일로 빨리 쾌차하면 좋겠다고 네 아버지께 얘기까지 하셨다더구나. 그리고 감사하게도 사람을 시켜 보약까지 보내셨어. 원기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이라며. 내 말 듣는 게니? 민재야, 듣고 있어?”
그때까지 딴생각을 하던 민재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고 회장님이 전화를 하셨다고요?”
“그래. 원, 정신을 어디에다 두는 게냐?”
“왜 하셨대요?”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겨 그동안 인사 한 번 제대로 받아준 적이 없던 사람이 안부 전화를 했다고 하니 뭔가 영 꺼림칙했다.
“회장님께서 은정이가 영화 해외로케이션 촬영 마무리하고 귀국하는 대로 식을 올리자고 하시더구나. 고맙게도 그 제안을 고 회장이 먼저 해주셨어. 네 아버지와 나도 당연히 흔쾌히 동의했고. 그러니 너도 그렇게 알고-”
“어머니! 저는 은정이와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민재가 어머니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며 소리쳤다. 아들의 단호한 말에 민재 어머니가 놀라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지난번에 아버지께 네가 직접 말씀드리지 않았어. 은정이와 조속히 결혼하겠다고 말이야.”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요. 그리고 생각해 보니,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얘, 민재야!”
“계속 그런 얘기를 하실 거면 돌아가세요. 지금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요.”
한 번도 대든 적이 없던 착한 아들 입에서 나온 소리에 민재 어머니는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여전히 할 말이 남은 듯 어머니가 입술을 움직이자 민재가 얼른 덧붙였다.
“어머니, 정말 혼자 있고 싶어요.”
“알았다. 그럼 집에 가서 옷가지 좀 챙겨올 테니 무슨 일 있으면 간호사를 부르거라.”
어머니가 가방을 챙기며 일어섰다.
****
어머니가 나가고 한참 뒤, 민재가 링거대를 붙잡고 일어섰다. 깁스를 한 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지만 목발을 짚고 링거대를 지팡이 삼아 의지하자 움직일 만했다.
사실 전혀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실은 병실 안에 화장실이 있긴 하지만 그동안 화장실은 혼자서 목발을 짚고 살살 움직여 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 민재가 가려는 곳은 몇 미터 거리의 화장실이 아니라 11층에 있는 재은의 병실이었다.
민재가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뒤 잠시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자신이 알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민재가 목발을 짚고 절뚝이며 힘겹게 움직여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간호사나 의사가 보면 뼈 안 붙는다고 호통을 칠지도 모르지만 어서 재은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1103호라, 1103호….
6층에서 11층으로 올라가 1103호를 찾기까지 30분은 걸린 듯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는 거동이 불편해서 자동으로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에 끼일 뻔했으나 같이 타고 있던 환자 보호자가 급히 문을 잡아주어 겨우 내렸다. 만약 문에 끼였다면 상처가 악화할 뻔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절뚝거리며 한참을 걸어가니 ‘1103호’라는 호실이 적힌 작은 플라스틱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민재가 숨을 꿀꺽 삼키고 1103호 문을 열었다. 1103호에 누워있던 환자들은 자신들보다 더 상태가 위중해 보이는 환자가 목발에 링거대까지 끌고 오자 신기한 구경이라도 난 듯 다들 쳐다보았다.
그 병실 제일 가장자리에 재은이 정말 자신보다 더 붕대를 많이 감고 누워 있었다.
재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민재는 울컥했다.
“재은아!”
“누구세요?”
재은 옆에 앉아 있던 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재에게 물었다. 지은 옆에는 경찬이 준 돈으로 산 음료수와 과일 봉지가 놓여 있었다.
“형!”
재은은 민재가 나타나자 급당황했다. 자신은 다친 데가 없다고 얘기했을 때 민재가 믿는 눈치라 설마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민재가 목발에 링거대를 끌며 절뚝걸음으로 재은에게 다가왔다.
“바보야, 이렇게 많이 다쳤으면서 왜 괜찮다고 거짓말했어?”
민재의 목소리가 떨렸다. 재은도 수액을 맞으며 목발까지 짚고 있는 민재의 모습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형이야말로 괜찮다고 하더니 이 꼴이 뭐야?”
민재가 재은의 침대까지 걸어와 목발에만 의지한 채 재은의 손을 잡았다.
민재가 제 손을 잡자 재은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형 상태가 어떨지 많이 궁금했는데 이렇게 보니 형이 다친 것이 속상하면서도 동시에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민재가 한참 동안 재은의 손을 놓지 않고 꼭 붙잡았다.
“오빠, 이 분은 누구셔?”
지은의 목소리가 들리자 재은은 그제야 얼굴을 붉히며 민재에게 붙잡힌 제 손을 뺐다.
재은이 손을 빼도 민재는 계속 멍하니 재은을 바라보았다. 눈을 떼면 재은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 이, 이분은….”
지은에게는 고등학교 동창들과 여행 간다고 했었다. 민재를 누구라고 소개해야 하냐, 재은이 잠시 망설이는데 민재가 불쑥 대답했다.
“이번에 같이 여행 갔던 재은이 친구예요.”
“예에?”
지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민재의 말에 재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형도 참, 나이 차이가 7살이나 나는데 친구라니. 자기가 그렇게 동안인 줄 아나?
재은이 말은 못하고 속만 타들어 갔다.
“하하하, 안 믿기죠? 맞아요. 사실 내가 나이는 몇 살 더 많아요.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학교를 여러 해 꿇은 바람에 재은이랑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실제로는 녀석이 나를 형이라고 부르지만요.”
거짓말도 어쩌면 저렇게 청산유수인지.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사기꾼이다.
그나저나 지은이가 속아 넘어갈까….
“아, 어쩐지. 우리 오빠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친구라고 하니 깜짝 놀랐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오빠 동생 설지은입니다.”
지은이가 깜찍하게 웃으며 민재에게 인사를 했다.
민재는 웃으면서도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뭐지?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여요? 내가?”
민재의 말에 재은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나이에 민감한지.
처음 봤을 때의 샤프하고 도도한 이미지는 깨끗이 잊은 지 오래다. 어쩌면 저게 본모습이리라.
“네. 한 대여섯 살? 많으면 일고여덟 살 정도?”
역시 동생의 눈은 정확하다. 지은의 대답에 민재가 ‘윽!’ 하고 짧은 비명을 지르며 억울하다는 듯이 재은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나름 동안이라고 자신 있어 하다가 지은이에게 나이를 정확하게 간파당하자 분한 듯한 표정이다.
그 표정에 재은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저 사람이 33살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흠흠. 동생이 눈썰미 하나는… 되게 깐깐하네.”
눈썰미가 좋다는 말인지, 나쁘다는 말인지 아리송하다.
민재가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얼마나 더 입원해야 한 대?”
“대략 한 달 정도?”
“그래. 나도 그 정도 있으라고 하더라. 여기 불편하지 않아?”
“아니, 뭐 딱히….”
사실 불편하다. 공동병실이라 시끄럽기도 하고,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것도 많고…. 하지만 이 병실이 제일 저렴한 병실이다. 치료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뺑소니 사고라 치료비 청구할 데도 없다.
“내 병실로 가자. 거기 2인실이라 침대가 하나 더 있어. 거기서 나랑 같이 있자. 그게 좀 더 편할 거야.”
“하지만 어떻게 그래? 형 가족분들도 오실 텐데….”
“뭐 어때. 둘이 같이 차 타다가 같이 사고 났으니 병실도 같이 쓴다고 하면 되지. 그리고 내 차, 동승자까지 보험비 처리돼. 그러니 쓸데없이 병원비 쓰려고 하지 마. 잠시만 기다려. 내가 병원에 말해놓을게. 동생은 오빠 짐 좀 챙겨놓고 있어요.”
민재가 다시 기우뚱기우뚱 목발을 짚고 링거대를 앞장세워 밖으로 나갔다. 민재가 나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지은이 민재가 나가자 재은에게 물었다.
“오빠 고등학교 동창 맞아? 암만 봐도 그렇게 안 보이는데?”
재은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거짓말을 해도 먹힐 만하게 해야지. 이거 원,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그, 그래? 맞아. 저 형이 원래 좀 노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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