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해바라기의 노래 (3)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본문
화요일 오후 6시.
광화문 대형서적 근처의 건물 안 로비.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높다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예전 처음 봤을 때 ‘왜 호텔 로비에 있어야 할 게 여기에 있지?’하는 궁금증이 들었던 기억까지 생생했다.
로비 한쪽 모서리의 거대한 통창 앞에 푸르른 잎을 내고 있는 식물들.
파인애플 나무를 닮은 열대식물과 그 앞에 온갖 초록색 이파리의 화초들.
그리고 그 앞의 작은 수조.
손가락만 넣으면 만져질 듯, 일렁이는 맑은 물속에 빛을 내는 하얀 자갈과 조약돌.
그 주변을 한가롭게 맴돌며 입을 뻐끔거리는 손바닥만한 붕어들.
너무 큰 모양새에 나는 잉어일 거라 했지만 지호는 붕어라고 고집을 피웠다.
자신의 주장에 수긍해주지 않는 나를 보며 얼굴이 벌겋게 변하는 그의 양 볼을 보고 나서야 나는 ‘붕어’라고 꼬리를 내렸었다.
저 안에 있는 오렌지색이 박혀있는 은빛 물고기가 잉어이든 붕어이든 무슨 상관인가.
그런 걸로 토닥거릴 수 있는 연인이 옆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물론 이 모든 것은 조작된 기억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이 얼굴에, 이 몸에, 쉬운 다섯 먹은 아줌마는 절대로 그런 실제의 기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잠시 거울 따위는 보지 않기로 했다.
그저 먼발치에서 기억을 찾아 따라가 보겠다는데 내 생김새를 떠올리며 자괴감과 괴리감에 슬퍼할 필요 없다.
시간이 흐르며 한산했던 로비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널따란 건물 로비를 지나 회전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퇴근길의 직장인들 수가 많아지기 시작한 이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리석 바닥에 경쾌하게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는 하이힐을 신은 한 무리의 여직원들이 내 앞을 지나쳤다. 예쁘게 화장한 모습으로 모두 활짝 웃음을 지으며 대화 삼매경에 빠져있다.
앞길이 구만리인데다가 저렇게 모두 건강하고 예쁘니 왜 그렇지 않겠나.
나도 예전엔 저랬겠지? 하는 생각이 언뜻 머릿속에 떠올랐다.
“..으흐흐흐으.”
아련한 추억으로 그리움의 감정이 몰려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도 모르게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역시 나는 내가 쓰던 소설의 주인공이 사무치게 되고 싶었나 보다.
상당히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긴 하지만 뭐, 어쩌겠나. 사람마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다를 터이니.
한순간 지난 10년 동안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 궁금증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 번쩍 들었다. 그 아파트에서 혼자 그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가 하는 것의 해답은 마치 복잡한 미로를 헤매던 탐험가의 머리처럼 얽혀있었다.
답은 이렇게 단순한 것이었거늘.
‘BL 작가.’
아마도 틀림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픈 욕망에 내가 쓰려는 소설의 주인공이 될만한 남자들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서?
“아...!”
내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종로와 이태원의 추억들.
종로 3가의 대로에 줄지어 있는 포차의 추억.
좁고 어두운 뒷골목을 누비며 수많은 젊은 남자들과 웃음을 터뜨리며 신나게 보냈던 그 많은 화려했던 시간.
그것은 내가 1인칭의 시점에서 겪은 것이 아니었다.
애틋한 눈으로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갈구하며 그것을 소설 속에 옮겨 넣다가 어느 순간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정말 나의 기억인 것처럼.
드디어 머릿속에 엉망으로 엉켜있던 모든 실타래가 풀려나가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바로 그때,
그런 나의 시야에 너무나도 익숙한 남자가 나타났다.
한순간 내가 서 있던 땅은 천 길 아래로 푹 꺼져버렸다.
심장은 펄펄 뛰다 못해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는 에너지를 입 밖으로 터뜨렸다.
나도 몰래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아내려고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강지호’
세련된 네이비색 세미 정장으로 가린 178의 균형 잡힌 멋진 몸매.
자연스럽게 내린 앞머리 끝이 눈썹 아래로 내려오고 살짝 웨이브 진 옆머리는 얌전하게 뒤로 넘겼다. 짙은 눈썹 아래 옅은 쌍꺼풀 속의 긴 속눈썹. 장난기 어린 눈동자.
곧게 내려온 콧날에 항상 웃고 있는 도톰한 입술.
같은 회사 동료 두 명과 무언가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다.
“...그럼 지금 저도 잠깐 들르죠. 뭐.”
나의 곁을 스치며 지나가는 그가 동행인들에게 건네는 그의 목소리.
내 귓속을 파고들며 머릿속 구석구석을 점령하고 있다.
“사랑해.”
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나에게 속삭였던 바로 그 목소리.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더듬으며 미소 짓던 그의 눈빛.
나의 입술에 맞닿던 그의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살며시 내 입속을 탐험하던 그의 달콤한 혀.
한순간 몰려온 현기증에 몸의 균형을 잃었다.
“어! 괜찮으세요?”
뒤따라오던 다른 남성들이 비틀거리는 나를 잡아 부축했다.
“고맙습니다.”
팔을 잡아준 남자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시선은 앞으로 지나친 강지호를 향해 돌아갔다.
흘끗 돌아본 그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몰래 얼른 시선을 돌렸다.
“저쪽에 잠시 앉으시죠.”
친절한 남자와 그의 동료들이 근처에 놓여있는 소파로 나를 데리고 갔다.
“괜찮으시겠어요?”
“예,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얼굴에 한 줌의 걱정과 또 한 줌의 미소를 띤 남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이고 다른 동행인들과 지호의 뒤를 따라 멀어져갔다.
핸드백을 열고 손수건을 꺼냈다.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톡톡 두드려 땀을 닦아내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건 노망이다.”
주책도 정도가 있지.
이 나이에, 이 아줌마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와서 무슨 터무니 없는 발칙한 상상을 하고 자빠진 건가.
얼마나 자신이 쓴 소설에 푹 빠졌으면 진짜 그랬던 것 같은 환각에까지 빠지고 있느냔 말이다.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닌, 셀 수 없이 많은 경험으로 익숙한 느낌마저 든다는 것은...
지*랄병이다.
다르게 생각하고 판단할 만한 것도 없지 않은가.
“아, 쪽팔려.”
나도 몰래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화끈거리는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내 나이의 아줌마는 이래선 안 된다.
교양있고 친절하며 동시에 냉정하고 약간은 냉소적이며 사리 분별이 명확해야 한다.
퇴근하는 사람들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다시 슬며시 건물의 회전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좀 전에 지호가 사라진 곳.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속에 남는 미련은 도대체 무엇일까.
정말 지*랄도 풍년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내가 속하지 않은 곳. 그리고 절대 속할 수도 없는 곳.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휘청거리는 발을 간신히 움직여 퇴근하는 젊은이들의 사이에 섞여 건물을 빠져나왔다.
왜 내가 여기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행당역에서 7분 거리.
나지막한 오르막길을 건네 볼 수 있는 작은 삼거리에 멍하니 내가 서 있다.
야트막한 언덕 위의 빌라가 시야에 들어오니 나도 몰래 한숨이 나왔다.
이제야 알겠다 왜 내가 여기 서 있는지...
내 잘못된 기억 속의 한유준이 이곳에서 가끔 강지호를 기다리곤 했다.
지저분한 집안을 보이기 싫어하는 이유로 지호는 나를 이곳에서 기다리게 하곤 했다.
삼거리에 있는 전봇대에 등을 기대고 언덕길을 바라보고 있을라치면 얼굴에 가득 웃음을 담은 그가 깡총거리며 뛰어 내려오곤 했었지.
그랬던 기억이 그리워 내가 마치 정말 한유준이 된 것 마냥 전봇대에 슬며시 등을 기댔다.
광화문에서 곧장 이곳으로 왔다.
잠깐 듣게 된 대화에서 그가 어딘가 들렀다 귀가한다 했으니 이렇게 기다리다 보면 그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을 것이다.
긴 여름의 낮이 끝나가고 있었다.
땅거미가 내 주변까지 기어와 어둠을 흩뿌리고 내 등 뒤 전봇대에 매달린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길가에 늘어선 작은 가게들의 창문 밖으로도 환한 빛이 새어 나올 즈음, 지호의 모습이 나의 시야에 나타났다.
멀리서부터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익숙한 모습과 걸음걸이.
손바닥을 펴고 이마를 덮은 앞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무의식적인 동작.
습관적으로 저스틴 팀버리이크의 Angeleyes 후렴구만을 중얼거리는 것마저...
소설을 빙자해서 저 젊은 남자를 죽자사자 따라다니는 난 병적인 스토커가 틀림없다.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기고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치면 안 된다.
회사 로비에서 이미 한번 마주친 적이 있기에 나를 기억하고 있기라도 하다면 곤란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5. 4. 3. 2. 1
마음속으로 그의 발걸음을 센 후 삼거리에 도착했을 거라 여겨지는 순간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방금 코너를 돌아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한 지호.
익숙한 뒷모습으로 성큼성큼 길을 올랐다.
곧, 시야에서 사라진 그의 모습이 아쉬워서 잠시 멍하니 그렇게 서 있었다.
소설을 쓰겠다는 미명하에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뒤를 밟으며 그를 관찰해왔던 것일까?
지금 내가 하는 바로 이런 식으로 스토킹하며 그에 대한 감정을 키워왔던 것일까?
내 자신을 한유준이라는 상대로 감정을 이입시켜서?
어이없는 현실에 기가 막히면서도 그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하고 싶은 이 이율배반적인 내 모습.
‘에그, 불쌍한 년. 그렇게 저 애가 좋았니?’
그런 나에게 측은지심까지 들고 있었다.
돌아가자.
멍하니 어두워지는 언덕길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렇게까지 좋다는데 어쩌겠니.”
자신의 갈증에 그렇게 굴복까지 하면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전봇대 바로 옆 상가가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5평 남짓의 오래된 식당의 현관문에 붙어있는 쪽지.
<임대문의>
순간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그래. 이거다.”
나는 지호가 좋아하는 음식 종류를 몽땅 꿰고 있었고, 그뿐 아니라 내가 만드는 요리에 지호는 완전히 길들여 있다는 사실.
틀림없이 나의 기억 속에는 내가 만든 음식을 맛보면서 감탄하는 그의 표정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슬그머니 휴대폰을 꺼낸 나는 어느새 눈앞에 보이는 전화번호를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