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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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터에서 믿을수 없는 하루밤을 함께지낸후,
그러지 않으려 최대한의 노력을 한듯 했는데도 불구하고
형님과의 관계는 견딜수 없을만큼 어색해져 있었다.

월드컵의 신화가 마무리되고, 텔레비젼에서는 온통 월드컵의스타들을 되집는 동안,
나 또한 쉽사리 형님께 전화를 걸지 못하고 있었다.

가을이 시작되는 듯한 날씨였지만 오후는 온통 뜨거운 햇살이었다.
계절이 그 즈음이면 회사의 일에도 다소 변화가 생긴다.
빙과류 영업소에 일하는 나에게 가을은....
어쩌면 휴식같은 계절이다.
영등포 창고에서 물건 하역을 보고, 낡은 내 소나타에 몸을 실을 무렵 전화가 걸려왔다.
직감처럼 형님이라 생각했고
내 예감은 적중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전화를 하지 못했단다.
오랜만에 만나자고 부른곳은 청담동의 어느 오피스텔이었다.
확실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형님말투에서 이혼소송이 마무리된것이 느껴졌다.

오피스텔 1층 라운지를 들어설 무렵, 3층 커피숍으로 오라고 다시 전화가 왔다.
벤자민 화분이 군데군데 놓인 상쾌한 실내분위기에 저쪽 창가쪽에 형님이 보인다.
누군가와 함께 대화중인듯 하여, 손짓을 보내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했다.
손님이 많지 않아서, 형님과 낯선 사내의 대화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일본에서 온 바이어인듯, 형님의 유창한 일어대화가 간략히 마무리되어가는 중인듯 했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형님이 내 앞자리에 와 앉아 있었다.

"뭐, 많이 바쁘셨난봐요?"
오랜만의 어색함을 달래는 인사에 형님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해 왔다.
조금 살이 빠진듯한 얼굴에 말쑥하게 면도가 된 얼굴이라 그런지
오히려 전에보다 젊어진 얼굴이었다.
"넌 어떠냐?"
"허~ 뭐 그렇죠  뭐 이젠 좀 덜 바쁠거구요."
무미건조한 인삿말들을 건네다가 형님이 새로 마련한 오피스텔로 자리를 옮겼다.

"수유동 집은 정리했어.
 당분간 여기서 지낼거야.
 좁긴해도 혼자 지내기엔 괜찮더라구..."
"좋아보이네요. ...
 저 좀 씻을게요."
차마 형수님과의 일에 대해서는 물어보기가 그랬다.
좁지만 깔끔한 실내에 형님다운 가구배치가 인상적이었다.
요즘 운동을 하시는지 바벨세트가 창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간단히 땀을 씻어내고 나오니 형님은 소파앞에 신문지를 쭉 깔고는 그위에 맥주랑
안주들을 내놓고 있었다.
"좁아서 테이블같은건 없어, 그냥 편하게 이렇게 앉아서 먹자."
형님처럼 나도 트렁크에 런닝셔츠 차림으로 소파앞에 등을 기대고 앉아 맥주병을 땄다.
시간은 8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별 말없이 두어병의 맥주가 비워지고
형님의 잔잔한 말들이 조금씩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 내 귓전에 와 닿았다.
- 많이 미안했다.
  ......
  너한테만은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말야.
(괜찮아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 참았다.)
  그래도 다행이네, 내 전화받고 이렇게 와주니 말이야...
  ......
  이제 난 혼자라고 생각하니 홀가분하다가도 좀 적적하기도 하고 그러네..
  허허허.
  어쨌든 집사람이랑 정리한건 잘 한거 같다.
  어차피 끝까지 가기엔 그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거였어.

형님의 말끝이 조금씩 흔들리는 듯 했으나, 여전히 강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이쯤... 나도 무언가 말을 해야할것 같았다.
"사실 많이 놀라긴 했어요.
 그리고,....
 또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뭘말야? 뭘 어떻게 해?"
"흐흐 형님하고 나하고의 ... 뭐 그런거 있자나요.
 사실 나도 형님 참 좋아하고 또 믿고 그러긴 했는데
 그날 형님이 제게 한 행동은 사실 굉장히 충격이었거든요."
형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계속 미안해 하실 필요는 없어요."
다시 둘다 말없이 맥주잔을 비워내기시작했다.
취기가 오른 형님은 얼굴에서 목까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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