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소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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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기를 확인하는 거래처로부터의 전화부터, 교정된 도안을 확인하는 작업 후 첨가된 내용을 의뢰하는 거래처의 연락으로 오전부터 숨을 쉴 틈도 없었다.
미리 주문해 놓아 불어터져 버린 자장면을 억지로 입에 넣고 난 후, 간신히 한 숨을 내 쉬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하고 지환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어 그에게 등을 돌리고 창밖을 향해 앉아있는 나에게서 다시 시선을 돌려 휴대폰을 손에 쥐고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세요.”
사무실을 나와 복도의 창문을 열고 지환은 창밖으로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5월의 미지근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지나갔다.
"장현이란 분 왔었어요.“
우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한테는 지환씨에게 당분간 연락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는데.....”그가 말끝을 흐렸다.
벌 한 마리가 윙 소리를 내며 날아와 그의 머리위를 맴돌다가 열린 창문 안으로 들어와서 복도의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그냥 궁금한게 있는데 혹시 지환씨가 아는 게 있나 해서요.”
“뭔데요?” 담담한 투로 지환이 물었다.
“예전에, 지환씨가 저한테 물은 적이 있었죠? 형이 죽은 것이 확실하냐고....”
“.........”
“그때는 지환씨의 말이 터무니 없다고만 생각해 버려서 그냥 내 말을 믿어주지 않고 나를 의심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연히 말을 꺼냈다가 상처만 받았던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을 잇기 전 그의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지환씨 형이라는 분이 저를 찾아와서 묻더라구요. 형이 죽은 것을 어떻게 확인했냐고...”
“.......”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혹시 아직까지 내가 모르고 있는 어떤 일이 정말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
“ ‘형이 죽었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했느냐’ 고 묻더군요. 그래서 ‘소방대원이 먼저 알려주었고 나중에 경찰이 병원에 찾아왔을 때 화재 현장에서 죽은 사람의 소지품에서 그가 이준하라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들었다 고 했어요.”
“.......”
“화재가 났다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정확한 날짜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하나씩 모두 꼬치꼬치 물어 확인해보고는, 지환씨를 포함해서 아무하고도 당분간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하더군요.”
“........”
“왜 그러는지 물었는데, 며칠 지나면 다 알게 된다고..., 그냥 며칠 동안만 사람들 만나는 것을 자제하고 조용히 지내달라면서....지환씨가 곤란해질수도 있다고.......”
“.......”
“영문도 모르면서도 전 그러겠다고 약속했어요.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
“혹시......”
다시 말을 꺼낸 우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환씨가 우리 형에 대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소문이라도 들은거예요?”
“.......”
“혹시.... 우리 형이.... 살아...있나요?”
안으로 날아 들어와 복도 끝으로 가버렸던 벌이 다시 지환의 머리 위로 날아와서 윙윙거렸다.
그 한 마리가 내는 소리가 마치 수십마리가 내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 여기 저기에서 정신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우안이 마음에 두고 있다는 그의 말에 비웃는 듯 피식 웃어버리던 준하의 얼굴이 순간 지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예요.”
차분한 목소리로 지환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분은 10년전에 화재로 죽은게 맞아요.”
시끄럽게 윙윙 거리던 벌이 마침내 열린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리고 복도는 다시 고요해졌다.
“역시....”
우안의 헛된 희망의 사라진 기운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에서 나뭇가지에 매달린 초록의 이파리들이 스쳐가는 바람에 나지막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시한번 골목 안쪽에서 불어온 한줌의 바람이 지환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한참의 침묵 후에 다시 우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도로가 있는 쪽에서 학교를 파한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러는 웃고, 더러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크게 떠들고, 누군가는 입 밖으로 욕을 했다.
귀에 대고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에서 땀이 나고 더워진 온기가 귀 주위에 느껴졌다.
“고맙습니다.”
마침내 다시 우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은 꼭 지킬게요. 고맙습니다. 지환씨.”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지환은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
우안에게 말해버린 대답이 옳은 것인지 끊임없는 의문 부호가 그의 머리 속에서 번졌다.
사망자가 없는 단순 화재라면 그렇게 지나갔을 일이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에도 관련된 사람들의 주변에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경찰에서도 아직까지 그 사건이 미해결된 채로 남아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경찰에서 우안에게 확인을 해 준, 그 죽었다는 이준하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이 쉴새없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차서 그를 괴롭혔다.
결국에는,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방을 나왔다.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걸어와서 불을 켠 후, 지환은 깜짝 놀랐다.
식탁에 앉아서 팔꿈치를 괴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장현이 앉아 있었다.
지환이 그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꼼짝 않고 그는 그렇게 굳어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저.....형.”
낮은 목소리로 마치 속삭이듯이 지환이 그를 불렀다.
“왜?”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가 지환을 바라보았다.
“잠은 왜 안자고 나왔어?”
“물 좀 마시려고요.”
냉장고 문을 열고 지환이 물병을 꺼내어 두 개의 컵에 따르고는 하나를 장현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슬며시 의자를 빼내어 식탁의 모서리 근처에 앉아서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는 곁눈질로 슬며시 장현을 바라보았다.
“왜?”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런 지환을 돌아보았다.
“형은 왜 안주무세요? 무슨 일 있어요?”
“자다가 화장실 가고 싶어서 잠시 나왔다. 어서 들어가서 자라.”
지환에게서 그가 다시 시선을 돌리고 양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네.”
다른 말을 할 것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물잔을 손에 들고 지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자리에 누워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지환은 슬며시 장현이 걱정이 되었다.
자신으로 인해서 공연히 쓸데없는 일에 말려들어 어떤 고민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신이 의도치 않게 부담이 되어버린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돕기위해서 벌인 일이었다. 누군가를 힘들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주방에 앉아있던 그의 모습에, 펑펑 눈이 쏟아지던 지난 겨울 어느 날, 회사 상가건물의 앞에서 사장님을 만나러 오던 장현을 만났던 때가 갑자기 떠올랐다.
거래처에 컨펌을 받기 위해 지환은 도안이 들어있는 서류를 가방에 넣고 거래처로 향하던 길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는 지환에게 환하게 웃으며 그는 슬그머니 다가왔다.
입 주위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속꺼풀이 보이도록 한쪽 눈을 찡긋 거리면서 그는 지환을 바라보았다.
긴 팔을 뻗어 옆에 서 있던 나뭇가지 위에 쌓여있던 흰 눈을 긴 손가락으로 한줌 쥐고는 그는 지환에게 슬며시 다가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런 그의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그는 그런 장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을 보고 밝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 지환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설레었었다.
겨울바람에 헝클어져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슬며시 가려진 그의 반듯한 이마, 가지런한 그의 짙은 눈썹, 강인함과 섬세함의 느낌을 동시에 주는 그의 콧날, 고르고 하얀 이를 드러내고 있는 그의 부드러운 입술, 서늘한 바람에 가볍게 흩어지는 그의 앞 머리카락......
그의 그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순간 잔뜩 긴장되어있던 지환을 바라보면서 장현은 자신의 손안에 쥐고 있던 딱딱해진 눈 뭉치를 지환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에 있는 눈덩어리에서 지환의 시선이 그의 입으로 옮겨갔다.
아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궁금해졌다.
“너, 이거 하나면 어떤 새끼든지 한방에 기절 시킬 수 있다. 어디를 겨냥해서 어떻게 까는지 궁금하지?”
‘그럼 그렇지.’ 지환은 허탈한 표정으로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절대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일관성 있는 그를 보면서 한순간 바람이 빠져 나가버린 듯 허무해진 마음에 슬그머니 화가 나 버린 지환이 대답했다.
“아니요. 전혀요.”
그의 대답에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던 것을 떠올리면서 지환은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보름 정도라고 했다.
그때가 지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누구의 노력으로 해결 될 일이 아니라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그냥 느긋하게 다른 생각 말고 지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장현은 말했었다.
그렇게 시간만 가면 되는 것이라고, 어떤 진실은 알려지지 않는 편이 나은 것이라고, 우안에게 한 자신의 대답이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지환은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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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참잘쓰십니다.
시티엔 어디서 이런 보석같은 분들이 한번씩 주기적으로 나타나는지 놀랍기만 하네요.
긴장마와 곧다가올 무더위 열대야로 인한 건강에 유의하시고 다시한번 좋은글 읽을수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티엔 어디서 이런 보석같은 분들이 한번씩 주기적으로 나타나는지 놀랍기만 하네요.
긴장마와 곧다가올 무더위 열대야로 인한 건강에 유의하시고 다시한번 좋은글 읽을수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