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그 날, 그 부대에서 -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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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 A


"오 어서와요."

어슴푸레한 조명이 비추는 은은한 바 테이블.
그곳에 나는 익숙한 기분으로 앉았다.

"무슨 일 있어?"

사장님과는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단박에 내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셨다.
나는 익숙하게 사장님이 내오는 위스키를 한 잔 받아 들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일이 손에 잘 안잡히네요."

글라스에 부어진 위스키에 코를 대고 한 껏 숨을 들이마셨다.
강렬하면서도 진한 위스키의 향이 목 안쪽까지 깊숙하게 젖어들었다.

"좀 오래가는 것 같은데, 그냥 아예 휴가를 좀 내고 쉬는 게 어떠실까."
"일단 휴가는 냈습니다. 딱히 피곤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갑자기 뭔가가 발목을 잡듯이,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급기야는 상사에게 왜 그러느냐는 소리까지 들었을 때는,
이미 내가 손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넌지시 어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니 요즘 왜이렇게 실수가 잦아 자네?"
"죄송합니다."
"요즘 보면 자네 마음이 딴데 가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
"아닙니다. 없습니다……."
".......아무튼 이런 실수 계속 하면 나도 커버치기 힘들어.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주의하겠습니다."
"너무 힘들면 연차 내고 쉬어. 내가 위에 잘 얘기해둘게."
"예……."

결국 나는 떠밀리다시피 연차 신청을 하고 쉬게 되었다.
사외 협력사에 영향을 미치는 큰 실수까지 저질렀을때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잘리지 않은 것에 감사를 해야할 뿐.


"확실히 해성씨답지 않네 그런 건."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내 의견에 동조한다.
확실히 최근 나는 뭔가가 이상했다.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좀 다녀와요. 어쨌든 오래 쉬잖아."
"네…… 그러려구요."

온더락으로 한 잔 더 부어지는 위스키를 쳐다보면서,
나는 마침 생각난 기차표를 스마트폰 액정으로 확인했다.

어플에는, '서울 - 부산' 이라고 쓰여진 열차표가 떴다.

그냥 갑자기 생각난 건,
부산에 간지 무척 오래됐다는 사실이었다.
그냥 겨울바다나 구경할까 싶어서, 나는 무심코 부산행 열차를 예매했다.

그런 스스로에게 놀랐다.
나한테 그런 낭만이 남아있었나?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나는 조금 취해두고 싶었다.




- 11.


혹서기가 다가올 무렵, 전반기 훈련들이 대충 마무리 되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일단은 박상욱 병장의 전역이 있었다.
2주 간 쥐죽은듯이 지내던 그는 전역날 마저도 딱히 나한테 존재감이 없었는데,
친했던 상병장들이 그를 배웅하러 나가자는 말을 해서 나는 억지로 같이 끌려나가야 했다.
당연히 사이가 안 좋기로 소문나있던 정해성 일병님은 끝까지 나가지 않았다.

"갈게!"

딱 한마디 하고는 바로 나가버리는 박상욱 병장님.
내 눈치를 안봐도 된다는 뜻이었을까 한결 후련한 표정이었다.
한편으로 나는 그런 그가 짜증이 날 정도로 싫었다.
그래서 그냥 그가 전역하는 것도 보고싶지 않았는데……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몇몇 사람들의 진급이 있었다.
9월이 되면서 정해성 일병님은 상병을 달았다.
나는 10월이나 되어야 일병을 달 수 있었다…… 
일단 진급을 해야 어딘가의 처부에 전화를 걸때도 좀 편할 것 같았기 때문에도 빨리 나는 진급을 하고 싶었다.

가장 큰 것은 신병 위로휴가였다.
보통 이등병 말~일병 초에 쓰는 이 휴가는 나는 도통 바빠서 쓸 겨를이 없었다.
한인혁 일병님도 그제서야 겨우 나갔다 오셨고, 나한테 잔뜩 뭘 하고 왔는지 설명하는데 그게 너무너무 달콤하게 들렸다…….
나도……. 휴가 가고싶다………

하지만 연중 훈련계획서를 보니 내가 휴가를 편하게 나갈 길은 아직도 요원해보였다.
게다가 계시던 과장님은 임기가 모두 끝나버려서……
마침내 올게 오고 말았다. 동원과장님이 작전과장으로 새로 들어오신것이다.

"아오……."

새로 오신 과장님은 들어오자마자 절규를 하셨다.
전임 과장님이 떠나면서 업무용 컴퓨터를 죄다 포맷을 시켜버려서 남아있는 자료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통신병 말로는 그 컴퓨터가 부대에서 제일 문제였긴 했다고 한다.
비문성 파일이 너무 많은데 함부로 건들수도 없어서 보안감사때 제일 힘들었다고…….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거하게 터뜨리고 가버리시면…….
새로 오신 과장님과 나는 그저 맨 땅에 헤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예전엔 그래도 점호 전에는 어떻게든 퇴근을 하려면 할 수는 있었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일단 작전업무를 과장님이 전혀 모르는데다가,
여태까지 전임 작전과장님이 몰라 안해! 하고 미뤄뒀던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작전과의 담배연기는 하루하루 더 짙어질 뿐이었다.

"우리 이러다가 폐암 걸려 죽는거 아냐?"
"글쎄…… 그 전에 과로사로 죽지 않을까?."

원준이가 폐암걱정을 하자 나는 넌지시 그렇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제 시간에 잘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지가 꽤 오래 됐으니까.

원준이는 정보병이여서 작전업무쪽은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같이 사무실을 쓴다? 정도에 의의를 둬야만 했다.
딱 어느정도냐면 내가 자리를 비우면 전화받아주는 정도.
그래서 이 쏟아지는 작전 업무는 오롯이 내가 감당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일단 최우선 업무는 9월 말쯤에 박혀있는 유격훈련이었다.
초안을 짜기를 수십번, 인근 부대 협조업무 수십번,
사실 전반기에 처리하려고 했던 훈련이었지만 인근 부대 모두가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유격장 예약이 풀로 잡히는 바람에 우리 부대는 혹서기를 피해 느지막한 하반기에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게 하필 이렇게 바쁜 시기에 맞물릴줄이야.

그리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체력이 워낙 딸렸던 나는 훈련소에서 하루만 체험했었던 유격 PT체조를 떠올리면서 치를 떨었다.
어떻게든…… 열외해야해…….
초안을 짜 내려가면서 나는 그런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대대장님 정신교육이 있었다.
꽤 큰 정신교육이라 예하 동대 상근예비역까지 죄다 불러모아서 하는 규모였다.
당연히 대대원들은 최소인원 제외 전 인원 참석이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작전과는 예외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대대장님이 따로 불러내는 정도가 아니면 모든 호출에서 예외가 된지 오래였다.

"너 어디가려고."
"ㅇ…...아닙니다."

슬금슬금 작전과를 벗어나려던 나는 작전과장님한테 덜미를 붙잡혀 PC앞에 처박.힐 수 밖에 없었다.
뭔 업무는 이렇게 해도해도 끝이 안나고……. 해도 돌아오고 또 쌓이고……..

"살려줘……."

내가 맥없이 그렇게 얘기하자, 서류더미에 파묻힌 원준이는 흘깃 보더니 그냥 업무를 계속할 뿐이었다.
쟤도 고생이 많구나…….

그렇게 업무를 조금 하고 있자니 갑자기 작전과 문이 똑똑 하고 소리가 났다.
달칵 하고 열렸을 때, 나는 그 소리를 낸 주인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해성 상병님이었다.

"충성! 상병 정해성 작전과에 용무있어 왔습니다."

과장님은 줄담배를 피다가 조금 눈을 가늘게 뜨더니, 

"오 해성이구나. 뭔일이야."

정해성 상병님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아니 이 사람…… 모르는 간부가 없네. 중대 사람인데도.

"그, 죄송한데 혹시 김보현 이병 사무실에 남아있어야 합니까?"

순간 이름이 불린 나는 저절로 귀가 쫑긋했다. 나? 왜?
과장님도 의아한지 눈을 가늘게 떴다.
하기사 계원 데려간다는 말에 호의적인 과장이 어디 있을까.

"왜?"
"3중대장이 근무인원이 없어서 한 타임만 좀 부탁드린다고 했습니다."
"얘를? 아 너 맞다 소속 3중대였지?"

사실 진즉 수정됐어도 할 말 없는 이상한 소속이긴 했지만,
나는 일단 사실이 그랬으므로 그냥 예, 하고 대답했다.

"근데 왜 하필이면 얘냐?"
"지금 다 정신교육 참가하라는 말이 있어서……. 가용인원이 김보현 이병밖에 없습니다."
"휴…….."

과장님은 담배연기를 기관차처럼 뿌우- 하고 천장으로 뿜어올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눈으로 '너는 왜 그런 애매한 포지션에 있어서…….' 하고 얘기하시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나는 가끔씩 3중대원이라는 명목상 포지션때문에 가끔씩 불려나갈 때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 나보다 원준이가 더 바빠보여서 경계근무 지원이라면 내가 나가는게 더 옳아 보이기도 하고.
사무실 바깥 공기도 너무 쐬고 싶었다. 점호를 제외하면 막사바깥으로 나간지 한 한 달은 된 것 같았다.

결국 과장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셨다.

"갔다와라."
"이병 김보현! 알겠습니다."
"대신 딱 한 타임이다. 갔다가 도로 와서 업무일지 만들어야 하니까 너도 빨리 복귀하고."
"알겠습니다."

나는 부럽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원준이한테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 재빨리 정해성 상병님을 따라 나섰다.
경계근무를 서는데 그게 또 정해성 상병님이랑 같이 선다니,
사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요즘들어 정해성 상병님이 부쩍 나랑 가까워 진 기분이 들었다.
신병때에 비하면 말도 필요없고, 지금같은 상황에서도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됐을텐데 나를 빼주는 것도 그렇고.
여전히 무뚝뚝한건 그대로…… 이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내심 그가 계속 뭔가 챙겨주려 한다는 것을 느꼈다.

"좋냐?"

생활관에서 근무투입을 준비하면서 대뜸 정해성 상병님이 그렇게 물어왔다.

"잘 못 들었습니다?"
"좋냐고 ㅋㅋ 되게 좋아하네."

내가 못들은 척을 하자 정해성 상병님은 피식 웃으면서 그렇게 대꾸했다.
찜통 더위긴 하지만…… 숨 막히고 담배연기 폴폴나는 사무실보다는 백배정도 낫다.

"좀 고민했다. 날이 더워가지고 데리고 나가면 힘들어할까봐서."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정해성 상병님이랑 서는 근무라 좋습니다."
"지.랄하네 ㅋㅋ 에어컨 바람 쐬면서 일하는 행정병 주제에."

정해성 상병님은 그렇게 나한테 핀잔을 줬다.
웃으면서 하는 얘기여서 진심이 아닌 건 누가봐도 당연했고,
나는 그렇게 툴툴대는 정해성 상병님이 싫지 않았다.

"저랑 업무 바꾸시겠습니까?"
"됐어. 간부는 중대장 하나로 족하거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정해성 상병님.
그럴 만도 하다. 3중대장님은 무척 엄하기도 하셨고,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이기 때문에 분대장들이 다들 학을 뗄 정도였다.
실제로 분대장을 달고 나서 매일 결산때마다 중대장실로 불려갔다 나오는 정해성 상병님의 표정은 늘 최악이었다…….

정해성 상병님과 나는 단독군장을 차고 K2 소총을 어깨에 매고
나란히 경계근무지로 올라갔다.
탄약고 감시 근무였던 우리는 무더위속에서 찬찬히 부대 전경을 바라보게 되었다.

꽤 오래간만에 서는 경계근무였다.
매일 상황근무에 지쳤던 나한테는 볼거리였겠지만, 정해성 상병님에게는 매일의 일상이겠지.
그런 사람의 시각에서 쳐다보는 전경은 또 어떨까.

여름의 뜨거움이 초소 바깥으로 쨍하게 내려쬔다.
방탄모 아래로 정해성 상병님은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요즘은 별 일 없냐?"

그렇게 넌지시 물어오는 정해성 상병님.

"많이 배려해주셔서 요즘은 업무 말고는 별 일 없습니다."
"내가 널 뭘 많이 챙겨주냐. 해준게 없는데."
"요전에 일도 그렇고, 많이 챙겨주시지 않습니까."
"야 그거는……. 그렇게 했어야 맞는거니까 그랬고."

그렇게 말하면서 정해성 상병님은 쓱 하고 어깨에 손을 탁 올렸다.
정해성 상병님이 나한테 손을 얹는 건 무척 오래간만의 일이어서 나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리고 뭐……. 너가 빨리 얘기해줘서  일이 원만하게 해결된 것도 있고."

그렇게 정해성 상병님은 작은 목소리로 부연 설명을 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안 그랬으면 저 이미 주먹 날렸을지도 모릅니다."
"임마 그런건 짬 좀 먹고 해. 그래야 커버도 쉬워 ㅋㅋㅋ"
"그래도…… 그때는 박병장이 사람처럼 안보였어서……"
"그건 그럴 만 했지. 잘 됐어 그냥. 너는 사람 안때렸고, 사과 받았고."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어깨에 올려진 손이 너무 신경쓰인 나머지 할 말을 까먹고 말았다.

"뭔가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까먹었습니다."
"엉?"
"어……."

내가 머뭇거리자 그제서야 정해성 상병님은 당황하면서 손을 재빨리 내렸다.

"아 그랬냐? 좀 일찍 말하지."

저 덩치가 당황할 때 마다 왠지 모르게 자꾸 귀엽다고 생각해 버리게 됐다.
그냥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너무 좋았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그 만의 따뜻한 그런 모습.
그게 너무 인간적이어서 좋았다.

"아닙니다 ㅋㅋ 계속 하셔도 됩니다."
"야 이등병이 웃게 돼있냐?"
"저 곧 일병 됩니다. 이등병 뗍니다."
"그래봤자 일이등병이잖아. 넌 한참 멀었어 임마…...ㅋㅋㅋㅋ"

그제서야 정해성 일병님은 표정을 풀고 웃기 시작했다.
저게 정말로 저 사람의 진짜 표정이겠지.
그리고 그걸 나한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이미 두터운 신뢰를 말하고 있었다.

한여름의 새파란 하늘이 우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매미소리와 뜨거운 열기 속에서 나는 그 시간이 기분좋게 흘러가는 것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냥 이 사람과 있으면 늘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그냥 계속 같이 있고싶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저 구름처럼 말이다.



- 12.


정해성 상병님과 급속도로 친해지는 건 무척 좋은 일이었다.
단지 나는 이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주목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거의 전 3중대원들이 신기해 할 정도로 정해성 상병님은 나한테 잘 해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겉은 그렇지 않았지만……

정해성 상병님은 나랑 같이 있으면 가끔 나사빠진 행동을 하다가도,
다른 사람들이 있거나 하면 재빨리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그게 내 눈에는 너무 노골적으로 띄긴 했지만 아직까지 그건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중대 내에서 평판이 좋은 정해성 상병님이 나한테 잘 해주는 것 같다는 소문이 나자,
작전병으로 사실상 업무열외를 하는 나한테는 오히려 이미지가 좋아지는 효과를 냈다.

한 번은 야근을 한답시고 심지어는 저녁밥도 못먹고 늦게나마 PX에서 빵을 먹고 있을때였다.
원준이도 오늘은 야근이 길어져서 내가 간신히 먼저 퇴근할 수 있었다.
유격훈련 상황판을 만드는 작업이었는데…… 상황판이 무슨 나보다 더 큼지막한 거라…….

퀭한 눈으로 빵을 뜯고 있으니, 중대 2소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보아하니 소대 회식인거 같아서 나는 얌전히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다.

"오 뭐야 보현이잖아?"

제일 먼저 나를 알아본 건 견장을 찬 2소대 분대장님인 강혁 상병님이었다.
정해성 상병님보다 3개월 빠른 군번인 강혁 상병님은 나를 꽤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우리 때매 자리 옮기지말고 같이 먹어 ㅋㅋ 남이냐 우리가"

강혁 상병님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같이 소대 회식에 끼워주셨다.
얼떨결에 나는 2소대가 조리했던 냉동을 몇개 집어먹게 되었다.

2소대에는 나보다 일자가 느리지만 원준이랑 같은 날짜에 입대한 동기 녀석이 하나 있었다.
가끔씩 만날때마다 나는 중대 사람들 업무나 사람들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오늘도 만나자마자 앉아서 조용하게 나한테만 들릴 정도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넌 좋겠다……"
"왜 또 ㅋㅋ"
"정해성 상병님이 너 엄청 챙겨주시잖아."
"에이 그건 과장이 좀 심한데. 나도 엄청 혼나."
"무슨 소리야. 정해성 상병님이 그 정도 봐주는 후임은 너 밖에 없어."

겸손 그만 떨라고 하면서 냉동을 마구마구 집어먹는 동기녀석.
나는 다 먹은 카스테라 봉지를 쪽지모양으로 접으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같은 소대니까 그럴 수 있지 뭐."
"한인혁 일병님 보면 딱 답 나오잖아. 개 무섭다고 정해성 상병님."

생각해보니 한인혁 일병님은 여전히 정해성 상병님 아래서 오만 일을 다 하고 있었다.
곧 신병이 들어온다는 모양이지만, 그 전까지 실질적으로 우리 소대원은 단 두명이었으니까.

"그런가……. 나도 무서워 정해성 상병님."
"그건 그렇지……."

그렇게 말하다가 동기녀석은 전자렌지가 다 돌아가는 소리가 나자 부리나케 그쪽으로 가서 냉동을 건져내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군번이 꼬여버린 동기녀석에게 애도를 표하면서 나는 생활관으로 향했다.
먹은게 빵 밖에 없어서 배가 좀 고프긴 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걸로 오늘 일은 끝났다는 거지.

그러다가 문득 생활관 앞에서 정해성 상병님을 보았다.
정해성 상병님은 생활관 앞에 있는 생활관 배치도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나는 뭐가 이상하게 뽑혔나 싶어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달려갔다.
사실 이런 일들은 중대 행정반에서 하는 일들이지만, 나는 반쯤은 중대소속이어서 이런 자질구레한 행정 일들은 행정반 이지환 상병님을 도와서 해 주고 있었다.

생활관 배치도를 너무 유심하게 쳐다보고 있던 정해성 상병님은 내가 바로 옆까지 와도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배치도에는 각각의 인원 사진과 생년월일, 고향, 직책등이 나란히 표기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박상욱 병장이 전역했으니까 그걸 빼서 프린트를 했어야 했는데…… 거기까지는 미처 아직 신경을 못썼다…….

"그거 제가 고쳐놓겠습니다."

나는 그걸 보시고 있는 것 같은 정해성 상병님한테 옆에서 얘기를 걸었다.
순간 정해성 상병님은 깜짝 놀라더니 뒷걸음을 쳤다.

"ㅁ…...뭐야 갑자기"
"너무 유심히 보고 계시길래 뭐 틀렸나 하고 같이 보고 있었습니다."
"짜식이…… 왔으면 얘기를 하던지……"

정해성 상병님은 그걸로 됐다고 말하면서,

"천천히 해도 돼. 어차피 이거 너 일 아니잖아. 지환이가 하겠지 뭐."

너도 바쁘잖아, 라고 말하면서 어느샌가 내 편을 들어주고 있는 정해성 상병님.
확실히…… 언제부턴가 정해성 상병님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고 있었다.
그 일 때문인걸까…….
나는 이 사람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이렇게 관심을 받는 것도 너무 감사했다.

"아닙니다 저거 금방합니다. 뽑아 오겠습니다."
"ㅋㅋㅋ 됐어 임마. 내일 일과때 해."
"일과때 할 시간 없습니다 ㅋㅋ 금방 해오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후다닥 작전과 사무실로 들어가서 표를 불러왔다.
공유폴더에서 표를 열어서….. 표 채우기 취소하고…… 셀 병합…….

그러다가 슬금슬금 작전과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정해성 상병님이었다.

"들어가도 되냐?"
"괜찮습니다. 과장님 퇴근하셨습니다."

왠일로 과장님이 좀 일찍퇴근한 탓에,
나는 별 생각없이 정해성 상병님을 처부 사무실로 들였다.
생각해보면 정해성 상병님이 사무실에 간부가 없을 때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프린트를 걸어두고 정해성 상병님한테 스틱 커피를 하나 뜯어서 타 드렸다.
보글보글. 커피포트가 끓는 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되게 좁다…..."
"그런 말 많이 합니다. 저희가 본부 사무실 중에서 제일 작습니다."

나는 커피를 정해성 상병님께 드리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정해성 상병님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사무실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나는 그런 표정을 짓는 정해성 상병님이 신기해서 그냥 쳐다볼 뿐이었다.

"일하는데 고생 많겠네."
"아닙니다. 실제로는 그냥 앉아서 맨날 컴퓨터 두드리는게 답니다."
"겸손떨지마. 야근 하는 것만 봐도 각 나오는구만……."

실제로는 그거, 업무를 몰라서 찾아보면서 하느라 오래 걸리는 겁니다…….
나는 다 된 프린트를 들고 정해성 상병님을 모시고 처부 밖으로 나갔다.

여러모로 오늘은 그래도 좀 편안했다.
일과가 끝났다는 생각에 편안한 마음으로 나는 점호를 받을 수 있었다.



- 12. A


늘 상 있던 일처럼 생활관을 지나치는데,
늘 보던 배치표에서 조금 웃긴 걸 발견했다.

"ㅋㅋ……."

자세히 들여다보니 보현이 사진이 거기 있었다.
전입해서 막 찍었던 사진이라 그런지 어리버리한 표정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마 일병 진급때나 사진을 바꾸겠지.

많이 소심하기는 하지만, 처음에 전입와서 대뜸 작전병을 하겠다고 말하는 소신도 그렇고,
혼자 버티기 어려웠을 여러 일들에서 나름대로 부대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덕분에 좀 과하게 신경을 쓴 것 같기는 하지만,
소대원이라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하니까.

최근에는 빠르게 행정병 최선임을 달아서 그런지 어리버리함이 점점 줄고 있다.
사실 그건 그것대로 내심 아쉽긴 했다. 그런 점이 귀여운 것도 있긴 했으니까.
뭣보다 자신이 힘들다는 티를 중대원들에게 별로 내지 않는 것도 너무 기특했고.

"그거 제가 고쳐놓겠습니다."

갑자기 옆에서 소리가 나서 돌아봤더니, 보현이가 옆에 있었다.
순간 너무 놀라서 나는 어정쩡하게 뒷걸음을 쳐 버렸다.
속으로 얘가 내가 이러는 걸 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얘는 내가 표에서 박병장이 빠지지 않은 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줄 알았던 듯 하다.
나는 하지말라고 말렸지만, 이미 보현이는 작전과 사무실로 뛰어가고 있었다.
말릴까 생각하다가, 내심 얘가 일하는 사무실은 어떤가 궁금해져서 같이 들어가보기로 했다.

안은 생각보다 많이 좁았다.
군데군데 찌든 담배연기, 좁아터진 책상.
힘들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보현이는 나한테 커피를 건넸다.
곧 자야하는데…...
그래도 안마시고 버릴 수는 없었다. 아끼는 후임이 준거니까. 

내가 왜 이렇게까지 얘를 신경 쓰는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내버려두기에는 계속 눈에 밟히기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그냥 그런거라고 생각해두고 싶다.



- 13.


훈련 계획을 검토하는데, 숙영지 편성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당장 다음주가 훈련인데 왠지 이 항목이 비어있어서 나는 과장님께 질문을 했다.

"과장님 훈련계획에 빈 항목 있는데 제가 채웁니까?"
"그정도는 너가 하겠지 싶어서 비워 둔거야. 채워."
"아…… 알겠습니다."

늘어져 있는 공란의 표에 나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고민했다.
유격 훈련간 있을 숙영지 편성.
텐트를 칠 곳은 이미 과장님이 생각해두셨고, 내가 정할 수 있는 건 단지 그 텐트동에 들어갈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텐트 형태는 대충 4명에 하나씩 D형 텐트.
나는 막 PPT로 찍어낸 사다리꼴 도형을 바둑판 형태로 배열하면서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그냥 우리 소대는 우리 소대끼리 묶어버리면 될 일이네.
다른 소대는 인원이 많아서 몇 명은 다른 소대원들과 텐트조를 묶어야 했지만
우리 소대는 인원부족 상태라 다행히도 모두 같은 텐트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정해성 상병님이랑 같이 숙영을 할 생각을 하니,
생각보다는 그렇게 훈련이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열외하고 싶던 유격훈련이 썩 그렇게 나빠보이지 않는 건……. 기분 탓일까?
정해성 상병님이랑……

"뭐해?"

그러다가 옆에서 갑자기 소리가 나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ㅁ…...뭐야 갑자기."
"자는 거 같아서 불러봤어. 잘려면 생활관에서 자라고."

원준이가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타이핑을 하면서 말했다.
밤 열한시.
상황실은 뭐가 재밌는지 박상인 상병님이랑 강혁 상병님이 떠드는 소리가 작전과까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뻑뻑해진 눈을 비비면서 생활관에 들어와 자리에 누웠다.
평상시대로 잠을 자고 있는 정해성 상병님의 얼굴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평온해 보였다.
늘 그대로인 하루하루.
그래도 점점 적응이 되어가는 부대 생활은 내게 있어서는 썩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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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요즘 잦은 야근을 시키네요.... 괜시리 작전병 생각나게.....ㅋㅋㅋ
덕분에 작업속도가 좀 늦어지고 있습니다 ㅠㅠ

말씀드린대로 작 중 언급되었던 사람들이 들어간 편제표를 간략하게 작성해 드립니다.
글 보다가 쉬불 이름 겁나 많이나오네 얘 누구였지? 하시던 분들은 보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ㅎㅎ

X대대는 감편 운용되는 향토 사단 예하 대대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간부들 짬이 좀 낮습니다...... 대대장 빼고 전부 위관장교에 중사 하사들 뿐이에요.
게다가 부사관은 등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우.....
아무튼 편제표에는 간부는 아마 직급이외로는 불리지 않을것이기에 간부들의 이름은 넣지 않았습니다.
편의를 위해 음슴체로 진행하겠습니다 ^^;;;


X대대 본부중대
 - 본부중대장(중위) : 3중대장이랑 인사과장 틈바구니에 껴서 맨날 까이고 소외당함...
 
- 정보/작전과 (정작과 혹은 작전과로 불림)
  - 작전과장(대위) : 간부사관 출신, 무려 병장 만기전역자.
  - 작전병 : 이병 김보현
  - 정보병 : 이병 정원준 (보현이와 동기, 보현이는 4월 초, 원준이는 4월 말군번임)

 - 통신대 (타 행정반 취급이지만 명목상 정보과 아래 편제라 정작과 소속임)
  - 통신소대장(소위)
  - 그 외 언급되지 않은 통신병 4명 있음

 - 인사과
  - 인사과장(중위) : 학군단 출신, 곧 전역함. 승리자임.
  - 인사병 : 상병 박상인 (인사/작전분대 분대장)
  - 인사병 하나 더 있음. 보현이보다 짬 낮음. 등장할지 모르겠음 ㅠ

 - 군수과
  - 탄약반장(하사), 보급담당관(하사), 군수과장은 공석으로 인사과장이 겸직중.
  - 1/3종 계원, 2/4종계원, 군수행정병, 탄약관리병이 있음. 총 4명.

 - 동원과
  - 예비군 관리대대라 동원과가 따로있음. 예비군분들 대대에 전화하면 얘네가 받음.
  - 동원과장(대위), 동원담당관(상사)
  - 동원병 2명 있음. 이 중 1명은 상근예비역으로 대대출퇴근.

 - 수송대 : 운전병 4명. 수송쪽 관리 간부는 보급담당관이 겸직.
 - 그 외 기타등등...... 이후로는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X대대 전투중대 : 단일 중대만 운용하며 3중대가 유일합니다.
설정상 대대가 너무 작아서 원래는 남남일 본부중대랑 같이 서로 짬대우를 해줍니다. 선후임 관계라는 말임.
 - 3중대장(대위) : 학군단 출신, 무려 인사과장 대학 선배임. 맨날 인사과장이 쫄아있음. 진급욕심 많음.
  - 전령(이라고 쓰고 행정반 노예라고 읽음) : 상병 이지환
    이지환씨는 이번에 연재하면서 설정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정해성 상병과 동기입니다.

 - 3중대 1소대 : 인원 5명

 - 3중대 2소대
  - 2소대 분대장 : 상병 강 혁 (정해성 상병보다 3개월 선임)
  - 2소대 분대원들 : 보현이 동기 하나랑 분대장 포함해서 총 4명

 - 3중대 3소대
  - 3소대 분대장 : 상병 정해성
  - 분대원 : 일병 한인혁, 이병 김보현 (보현이의 애매한 소속에 대해서는 1~2편을 읽어보시면 알게 됩니다)

 - 3중대 화기소대
  - 전역 3달 남은 병장이 분대장입니다. 화기소대는 3소대와 함께 생활관을 쓰고 있음.

그 외에도 엄청나게 설정만 많이했지만 쓰이지 못했던 것들은 언제든지 등장할 수 있습니다 ㅎㅎ

댓글은 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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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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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 작성일
재밋게 잘 읽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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