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곰이 떠오르는 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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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날 반지를 모텔에 두고 잃어버렸어요'

'박히느라 아주 정신이 나갔었나 보네. 기억엔 오래 남겠다'

종철의 말 대로 영원히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곤, 다음 날 아침에도 종철의 손장난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던 승환. 아침부터 잠들어 있는 승환의 꼬추를 주물럭대고 있던 종철은 눈을 뜬 승환의 바로 앞에 얼굴을 맞대고는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부터 한 번 더 속궁합을 맞추고야 겨우 모텔에서 나올 수 있었던 승환은 심지어 정신이 없어 모텔에 커플링을 두고 나왔었단다.

남자와의 첫 섹스. 그 후유증은 오래갔다. 생전 내보지도 않던 하이톤의 신음을 뱉고 밀려오는 흥분감에 울먹이다보니 남자로서 자존심을 잃은 듯한 감정을 느낀 승환. 지금껏 내가 살아온 나의 모습이 내가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잠시 지나가는 어떤 독한 바이러스 같은 관계일까. 그렇게 승환은 종철과 한 달은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바로 사귄 거고?'

몰입도가 높은 승환의 이야기에 이후 전개가 궁금하다고 질문을 건네는 남우. 결국 이 이야기의 결말은 두 사람이 연인 관계가 된 것임을 알기에 남우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승환은 아직 아니라고 살짝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아뇨. 한 달은 안봤어요, 제가 피했어요.'

'왜'

'저도 남잔데 그런 일을 당하니까 좀 그렇잖아요. 그 기억에 수치심이 많이 들어요. 아 아직도 엄청 쪽팔려.'

'일을 당하기는. 너도 좋아서 한거면서'

'좋긴 무슨요. 뭣도 모르고 한 거죠'

'그리고 수치심 그건 너가 즐기면 좋은 건데'

남우는 애써 종철이 전해줬던 감정을 부정하기라도 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승환에 흥미로워하며 말을 잇는다. 수치심이 좋은 거라는 말에 표정을 찡그리지만, 결국 한편으론 무슨 느낌인지 알겠다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승환.

'근데 그 한 달동안 결국 결혼도 없던 일 되고, 여자친구랑도 헤어지고 했네요.'

'봐봐. 좋았으니까 니 마음이 알아서 종철이 만날 준비를 한 거지.'

'좋은 게 아니라니까요. 그냥 너무 쎘어요. 기억이. 뭐... 좋다기 보다는. 아,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거죠. 네 좋았네요 그 때는.

'너는 니 전 남친을 원망할 순 있어도 부정하지는 마. 니가 애냐. 없어 보이게. 결국 그것도 다 그 때의 니가 판단하고 행동한 거잖아. 아무튼 종철이 전략을 잘 세웠네. 선 섹스 후 연애. 그거 한 번 맛보면 훅 넘어트리기가 쉬워지지'

'쯧'

남우는 그저 능글맞게 말하며 재밌다고 웃지만 승환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래, 누굴 탓하랴 남우 형님의 말대로 종철의 전략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내 잘못이지.


















빵빵-

집을 나오는 승환. 무더운 여름 날, 덥긴해도 날씨가 화창하니 좋다. 편한 츄리닝 반바지에 스포츠 브랜드 반팔 티셔츠를 입고 나오는 승환의 몸이 그새 더욱 건장하게 뻠핑되어 차오른 것 같다. 그런 승환을 보고는 차 안에서 클락션을 빵빵거리는 종철. 승환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종철의 차를 발견하고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다가와 자연스레 조수석에 탑승한다.

덜컥-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네요'

'우리 귀욤둥이 보러 오는데 고생은 무슨. 내가 휴무날 괜히 귀찮게 구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귀찮은 거 아니지?'

꾸욱-

그렇게 조수석에 타며 안전벨트를 매는 승환의 볼을 꼬집어 늘려보는 종철. 승환이 이뻐죽겠다는 표정이다. 이제는 이런 스킨십이 익숙해진 사이. 저항없이 그저 태연한 눈으로 종철과 눈을 맞추며 묻는 승환.

'애인이 귀찮으면 내가 뭐하러 형이랑 사귀고 있어요'

'왜 귀찮을 수도 있지. 승환이가 착한거지. 성격도 착해 얼굴도 착해. 어우 섹시해. 이 착한 몸매 좀 봐라'

결국 이럴 줄 알았다. 종철은 승환의 볼을 꼬집던 손을 내려 승환의 가슴을 만지고 뱃살을 주물럭대며 내려가다 가랑이로 손을 집어넣는다.

그러면서도 능숙하게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출발하는 종철. 그래도 승환은 이제 사귄지 세 달은 되었다고 예전과는 전혀 다른 여유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남자친구가 된 종철이 자신을 만지든 말든 그저 휴대폰을 들어 드라이브를 할 때 듣곤 했던 노래를 틀기 시작하는 승환. 승환이 좋아하는 임창정의 노래. 종철은 어떤 노래든 승환이 좋다면 별 신경 안 쓰더라.

그리고 그렇게 외곽도로로 올라가는 차량. 차에 탄 이후 내내 만짐을 당한 승환의 꼬.추는 점점 발기가 되어 종철의 손을 가득 채우고, 그럴수록 종철은 더욱 가득 힘을 줘서 승환의 츄리닝 바지 위 꼬추를 기어 대신 쥐어잡듯 꾹 잡고 있다.

'아. 아파요.'

'으흐. 섹시한 새.끼'

'왜 또 욕이야'

'섹시한 내 남자친구. 후후. 언제봐도 따.먹고 싶게 생겼어'

'좋은 단어좀 써요. 누굴 따.먹기는'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승환. 여자친구와 사귈 때를 생각해봐라. 아무리 흥분돼도 따먹는다 뭐다 이야기 하면 바로 뺨따구 맞는 거지.

허나 종철이야 워낙 말도 험하고, 성욕이 강한 '남자'라는 걸 첫 날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남자들끼리 사귀는 데 내가 너무 점잖 빼는 건가 가끔 고민하기도 하는 승환이다. 그렇게 승환은 무심히 대답하면서 힐끔 운전을 하고 있는 종철을 바라본다.

그래. 이제는 인정하자. 내가 게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 불곰같은 남자를 바라보면 언제나 섹시함을 느끼고, 설레고, 흥분된다. 심지어 내 남자친구가 된 불곰이 날이 갈수록 이목구비가 진해지고 잘생겨지는 것 같다. 여자와 사귀었던 지난 날이 스스로도 믿기지를 않는다. 여자보다도 몇배는 더 깊은 감정과 흥분감을 주는 사람이 남자가 될 수 있었다니. 그렇게 승환은 자신의 불알을 주물럭대고 있는 종철의 손길에 살짝 자세가 불편하다고 엉덩이를 움직이면서도 미소를 짓고야 만다.


















'기다렸지. 매장 안이 시장 바닥이여. 이거 마셔. 이야 공기 좋네'

외곽의 카페에 온 두 사람. 굳이 괜찮다는데 승환을 자리에 앉혀놓고 야외 자리에서는 꽤나 떨어진 매장 카운터에서 커피를 직접 받아온 종철. 요즘은 이렇게 카페를 큰 규모로 짓는 게 유행인가보다. 예전에는 커피 한 잔 돈 오천원 주고 사먹는다는 거에 질색팔색을 했던 사람들이, 어느샌가부턴 사진 잘 나오면 오케이다, 자릿세를 받는 거다 싸고있다.

어쨌든 승환은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는 아이스 커피를 받아서는 고맙다고 종철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사람은 많지만 그래도 카페의 규모가 커서 자리가 듬성듬성 편하다. 이런 장소가 게이들이 데이트하기는 딱이긴 하다. 굳이 남 눈치 보지 않아도 할 말 다 할 수 있으니까.

호옵-

그렇게 승환의 맞은 편에 두 팔을 테이블에 대고 앉아서는 커피를 빨아 마시는 종철. 두툼한 팔뚝과 듬직한 덩치에 비해 컵이 좀 작아보여서 은근 귀엽다.

'우리 몇일만에 데이트 하는 거죠?'

'음 몰라? 쪼오옵-'

'한 이주 됐나?'

'그른가 몰라. 귀여워라'

워낙 승환 가게 일이 바쁘기도 하고, 이제 백일이 다가오는 시기도 되니 점점 데이트 간 주기가 길어지는 두 사람. 누군가 일방적으로 피하는 건 절대 아니다. 대화에서도 느껴지듯 종철은 크게 그런 것에 연연해하지는 않는 듯 하고, 승환 또한 피곤한 자신을 배려해주는 종철에게 고마운 게 더 크다.

그런 승환을 바라보다 또 귀여워 죽겠다고 볼을 살짝 꼬집는 종철. 우리 사이 몇일이고 뭐고 난 너가 좋아. 종철이 불곰같은 얼굴에 순한 눈웃음을 짓는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저 반전 미소는 여전히도 치명적이게 매력적이다. 허나 언제나처럼 살짝은 부끄러워 화끈해져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침착한 척 목소리를 뱉는 승환.

'형은 백일 이런거 챙기세요?'

'백일? 아 우리 만나는 거 백일 되는 날? 그 날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 되는 건가'

'글쎄요. 다음 준데 뭐하지.'

'승환이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내가 다 해줄게'

'풉'

짐작은 되겠지만 종철은 절대 섬세한 스타일은 아니다. 연애를 계획적으로 하는 타입도 아니다. 그저 전하고픈 감정이 떠오르면 바로 뱉는 스타일. 그리고 섹스를 무지 좋아하는 섹스광 스타일.

종철의 순수해보이기까지 하는 당당함이 웃기다고 코웃음을 치는 승환. 내가 뭘 요구할지 알고. 승환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조금은 장난스러워진 눈빛으로 말을 잇는다. 장난이나 쳐볼까 싶다.

'백일 날 섹스 안하기 하고 싶어요'

'뭐?'

'섹스 안하는 거 하구 싶다고요. 하루만.'

만날 때마다 섹스를 하는 두 사람. 물론 할 때마다 더 흥분감은 커져가는 기적같은 경험도 하고 있는 승환이다. 종철의 기술은 그야말로 무궁무진 한 것 같다. 이제는 그리 섹스를 즐기지 않았던 승환도 그 순간이 기다려질 정도니까.

그렇게 종철이 가장 당황할 만한 제안을 하며 장난을 치는 승환. 역시나 종철은 당혹감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을 짓고 허둥지둥 대답을 잇는다.

'왜 하필 그 날이냐. 안돼. 그 날은 해야지. 왜 하필이면 백일날 그러자는 거야'

'그냥 평범하게 좋은 데가고 맛잇는 거 먹고 사랑한다 하고 그러고 집에 가요'

'야 그게 뭐냐 재미없게.'

'재미없어요 그게? 언제는 나보고 정하라면서'

'하고 싶은 거 말하랬지. 내가 승환이보고 정하랬냐. 안돼.'

허나 장난은 먼저 시작했는데 말을 이어 갈수록 표정이 굳어버리는 승환. 평범한 데이트는 재미없다고 말하는 종철의 말이 귀에 박혀버린다. 사실 저런 말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연애 초기에 저런 말들로 인한 오해로 다툰 적도 몇번 있으니.

종철은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뿐이란다. 자신은 남자니까 섹스를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고, 남들보다 성욕이 많은 것도 인정한다고 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커플들이 서로에게 꽁냥대며 사랑을 속삭이거나, 오그라드는 표현을 하는 건 몸서리치게 싫어한다는 종철. 대신 귀엽다 이쁘다 착하다 잘생겼다. 그리고 따먹고 싶다. 제 딴에는 특급 칭찬인 날 것 그대로의 말들은 숨기지 않고 쏟아낸다.

남자끼리 연애가 처음인 승환에게는 오히려 그런 종철의 화끈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었다. 겉 보기엔 덩치가 산만한 두 남자끼리 사랑을 속삭여봤자 얼마나 사랑스럽게 잘할까 싶기도 하고, 솔직히 그런 말들은 누군 부드럽다지만 승환에게도 민망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이니까.

'왜. 삐졌냐. 승환이 삐졌냐'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잠시 말을 잇지 않고 시선을 돌리는 승환의 반응에 승환의 팔을 쿡쿡 찌르며 묻는 종철. 말투가 조금은 애교스러워지기도 했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전혀 그렇게 안듣겠지만. 승환은 이제 안다. 저건 굉장히 애교를 부리고 있는 목소리다.

'아니요. 삐지긴요. 그냥 생각하느라고'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또. 와 진짜 생각이 많네 김승환. 이 똑똑이. 똑똑한 내 남친'

종철은 그저 아니라니까 아닌가보다 싶나보다. 승환은 자꾸만 자신이 너무 쪼잔하고 소심한 생각을 하는 건가 생각이 든다. 물론 종철의 당당한 반응들도 그 의식에 큰 영향을 주긴 하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저런 한 마디 한 마디에 의미 부여를 하고 토라지는 모습이 마음에 안든다.

종철은 승환의 볼을 살짝 손가락으로 건드리고는 별 반응이 없자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살짝 표정이 굳는 종철. 그리고 그제서야 종철을 다시 쳐다보며 입을 여는 승환.

'재미없어요 근데? 데이트하는 거'

'데이트하는 거? 재밌어. 승환이는 섹시해서 보고만 있어도 재밌지'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요'

살짝 화를 내는 승환의 목소리. 장난삼아 하루는 섹스를 하지 말아보자 던진건데, 그러면 재미없다고 말했던 종철의 대답이 자꾸만 너무나 심기를 건드린다. 그리고 애써 이 분위기를 모른 척 하고 있었던 것 같은 종철도 표정을 굳히고는 괜히 커피를 깊게 한번 빨아마시고 대답한다.

'지금 내가 말한 거에 무슨 문제있나.'

'섹스 안하면 만날 이유도 없는 거처럼 들리잖아요. 그럼 나를 섹스하려고 만나는 건가.'

'왜 다들 내 말을 오해하는 거야'

종철은 결국 인상을 찌푸리고는 혼자 투덜댄다. 이런 상황을 승환이 아닌 다른 사람과도 분명히 겪어봤겠지.

'아니에요?'

'야 승환아. 너 지금 나랑 하루 이틀 만났냐. 왜 갑자기 그러냐'

'아니, 아니냐고요. 누가 들어도 오해할 만한 말인 거 아닌가? 저 째째한 사람 아닌데 듣기가 그렇잖아요'

'내가 표현을 잘 못한다고 했잖냐'

생각보다 종철을 만나보며 느낀 점은 첫인상과는 달리 그리 공격적이거나 화를 잘 내지는 않는다. 이런 날이 선 분위기에서도 은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저 성욕이 매우 강하고 화끈할 뿐. 꽤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르듯 말을 잇는 종철. 허나 그런 종철의 반응이 오히려 더 답답한 승환. 아니면 아니다. 데이트도 즐겁다. 섹스는 너무 하고 싶지만 굳이 섹스가 아니어도 너랑 있는 순간이 좋다. 한 마디 말을 해주면 해결될 문제 아닌가 싶다.

그렇게 서로의 눈을 맞춘 채 정적이 흐르는 두 사람. 종철은 굳게 입을 다문채 두 눈을 살짝 찡그리고 있고, 승환은 그런 종철을 답답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결국 먼저 입을 여는 종철.

'좋아. 승환이 너랑 있으면 호텔 음식을 먹든 싸구려 시장 국밥을 먹든 맛있고, 잠깐 시간내서 놀러다니는 것도. 하염없이 수다떠는 것도 다 좋아. 나는 항상 기분 좋아.'

'그래 그렇게 말을 해야 내가 알아듣죠 근데 내가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섹ㅅ..'

'응. 나는 너무 좋아. 내 남자친구. 승환이.'

드르륵-

그 때, 섹스를 안하는 데이트도 좋냐 물어보려하는 승환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드르륵 일어나는 종철. 담배를 한 대 피고 오려는 듯 담배갑을 든 채로 일어난다. 승환이 말을 하던 중인 걸 몰랐던 게 아니다. 이건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나름의 표시다. 그리고 들려오는 종철의 확고한 목소리.

'근데 섹스는 해야지. 백일이면 더.'

그렇게 두 눈에 힘을 바짝 주고 승환을 바라보는 종철. 승환은 그런 종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찌릿-

분위기가 풀어지려다가, 또 금방 아슬해졌다. 그 후 곧바로 종철은 담배를 피러 저 멀리 걸어가고,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는 승환.

불쾌한 듯 심장이 뛰는데 동시에 이런 걸로 트집 잡는 내 그릇이 이것 밖에 안됐나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리고 자꾸만 이 상황을 합리화하는 승환. 연애가 이렇게 어려웠던가.

그래. 백일이면 더 하고 싶겠지. 안그래도 섹스 없으면 못사는 사람이고. 심지어 둘의 섹스 궁합도 항상 좋으니까.

결국 승환은 인정하겠다는 듯 고개를 홀로 두어번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 속에 찝찝한 감정이 남는지 모르겠다.




















'상황이 재밌네, 재밌어'

남우는 기대 이상의 재미가 느껴지는 승환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는 해맑게 웃으며 말한다. 승환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목이 타서 양주를 꼴깍 꼴깍 마시고 있었다. 순간 잠시 말을 쉬니 찡하며 아파오는 머리. 승환은 숨을 고르고는 대답한다.

'내가 찌질했던 거죠 이거'

'니 등치값 못하는 거긴 한데. 바텀년들이 다 그렇지 뭐. 나도 뒷구멍 쓰는 사람이라 그런가 니 마음 뭔지 알어'

'그거랑 성향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저 바텀 아니에요'

'그런 말하는 년들이 아주 씹바텀인거야. 낄낄'

남우는 승환을 골리는 재미가 있나보다. 겉보기엔 전혀 게이스럽지도 않고 덩치도 커서 9살은 더 어린 승환은 이렇게 놀려대는 데도 화도 잘 안내고 혼자 궁시렁대기만 하니. 안 귀여울 수가 없긴 하겠다.

'...후.'

'아직 못잊었냐? 어라.'

그 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승환을 보고 의아해하며 묻는 남우. 술을 많이 먹어 더욱 다 지난 감정이 다시 올라오나 보다. 그렇게 시작되는 진솔한 대화.

'잊는 게 어딨어요. 그래도 좋아했던 사이인데.'

'이제 싫다고~ 싫다고 노래를 부르던 녀석이'

'싫어요. 싫긴 한데. 잊었냐며요. 잊었으면 싫은 감정이나 들겠어요? 애초에 사람이 사람을 잊는 게 말이 안되죠. 그냥 다른 거 하기도 인생이 바쁘고 어쩌다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그렇게 점점 생각 안 하게 되는 거지.'

'그게 잊는 거 아니냐?'

'치매 걸렸어요? 잊긴 뭘 잊어요'

'아오 왜 배종철이 너를 똑똑하다 그렇게 자랑하고 다녔는지 알겠다. 아주 생각하는게 심오하시구만'

'형이 자랑하고 다녔어요?'

힐끔-

그 때, 지난 날 종철이 승환의 자랑을 했다고 말을 하는 남우의 말에 꽂힌 듯 힐끔 남우를 바라보는 승환. 친구끼리만 아는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저 눈빛의 의미는 대체 뭔지. 이미 진작 끝난 사이면서. 남우는 그저 자꾸만 승환이 웃기단다.

'푸핫. 자랑. 흐훕. 자랑 했겠지 연하 남자친군데'

'그런 것도 할 줄 아는 사람인가'

'니는 지금, 기억 속에서 종철이를 너무 못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거야.'

남우는 실실대며 승환을 놀리듯 말하고, 그런 남우에게 반박은 못하고 그저 심통이 난 눈빛을 보내는 승환. 그렇게 말을 잇는 승환과 단호한 남우의 대답.

'이야기 그만 듣고 싶어요?'

'아니. 배종철 쓰레기지.'
































'어어. 승환이. 잠깐.'

예상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백일을 보냈다. 승환이 가장 좋아하는 소고기도 썰고. 경치 좋은 곳에 올라가서 둘이 사진도 한 방 남기고. 역시나 모텔도 들러 온 몸이 땀에 홀딱 젖을 정도로 섹.스도 한 두 사람. 이 나이에 백일을 특별한 날이라 기념하는 것이 민망하지 않을 정도의 딱 보람찬 하루를 보낸 두 사람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하지만 승환은 요즘 권태기인가보다. 혼자만의 권태기. 지난 번 카페에서부터 그 감정이 이어지고 있다. 섹스가 없는 데이트는 싫다는 듯한 종철의 말. 그 이후로 종철의 모든 말과 행동이 마냥 좋았던 연애 초반과는 다르게 들리고, 보인다.

오늘도 백일인데, 종철은 승환에게 언제나와 같은 말들만 전했다. 잘생겼다. 똑똑하다. 그리고 그놈의 따.먹고 싶다. 아까 승환이 숨이 멎을 듯이 격렬하게 박.히고 나서 아직 남아있는 미세한 몸의 흥분감에 호흡을 바르르 떨며 종철의 품에 안겨 있던 그 때. 그 분위기과 몸의 기운이 주는 감정이 차올라서 종철에게 고맙다고 말을 했던 바로 그 때, 대답으로 '나도' 라고 말한 게 종철의 백일을 맞이한 진솔한 표현의 전부였다.



'어디 있지. 여기 놨는데.. 으음. 여깄다. 까먹을 뻔 했다.'

그렇게 겉보기엔 무사히 백일 데이트를 마치고 승환을 집 앞까지 차로 데려다 준 종철. 종철은 차에서 내리려하는 승환을 급히 부르더니 뒷 좌석으로 손을 넘긴다.

그리고 뒷 좌석을 휘젓다가 손으로 집어 가져오는 작은 종이 박스 하나. 승환은 하루 종일 마음이 싱숭생숭 하다가는 놀란 눈을 뜨고 종철을 바라본다.

'승환이 나 때문에 이쁜 반지 잃어버렸잖냐. 내가 반지 보는 눈은 없고. 아는 친구가 금을 좀 봐가지고 목걸이 하나 싸게 샀지.'

종철은 웬일인지 조금은 수줍어하는 듯한 표정으로 종이 박스를 열어 금 목걸이를 꺼낸다. 종철답지 않게 꼼꼼하게 포장되어 있는 목걸이. 승환은 그런 종철의 의외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혼자만의 꿍한 감정 때문에 마냥 크게 웃지는 못한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을 잇는 승환.

'오.. 이런 걸 언제 준비하셨대요. 대단한데.'

'이게 뭐라고. 여기 내꺼도 있다. 보통 이런 거 하지 않냐. 커플끼리. 아닌가? 흐흐'

여태 본 종철의 모습 중에 가장 신이 나고 수줍어 보이는 모습. 종철은 박스 안에 포장 없이 막 넣어져 있던 자신의 목걸이도 꺼내 커플 목걸이라고 보여준다.

연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 종철인데. 선물을 주며 뭐 이리 수줍어 하는 걸까. 그리고 승환은 왜 이렇게 지금 목걸이를 들고선 이리저리 살펴보는 종철의 행동 하나하나에 순수함이 느껴지는 건지. 그 모습에 요 몇일 간 들었던 종철에 대한 요동치는 복잡한 생각이 눈 녹듯 사라져버린다.

'해봐. 어때. 이뿌지 않냐'

평소 낮게 울리던 종철의 목소리가 신이 나니 꽤나 익살스러워진다. 얼른 차보라고 목걸이 고리를 굵직한 손가락으로 풀어내려 애쓰는 종철. 그런 종철의 모습이 다시 예전처럼 사랑스러워만 보이는 승환은 기분이 완전히 풀려서는 종철의 손에서 목걸이를 빼앗듯 가져간다.

승환의 마음은 선물과 보석에 다시 넘어간 게 아니다. 뭐랄까.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종철의 깊은 감정을 함축한 듯한 선물과, 선물을 주며 수줍어 하는 이 모습으로 전달받은 듯한 느낌이랄까. 그렇게 승환은 목걸이가 마음에 든다고 금방 목에 둘러보며 대답한다.

'완전 마음에 드네요. 아 이러면 내가 준비한 게 없어서 미안한데..'

자신이 선물한 목걸이를 찬 승환을 바라보는 종철. 승환은 그간 종철 몰래 혼자만 하고 있던 생각들이며, 선물 하나 준비할 정신도 없이 꿍해있었던 지난 시간들이 괜히 민망해져오는 기분이 들어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허나 단순한 종철은 아무것도 모르겠지. 자신이 준 선물에 그저 수줍어 하는 줄 알고는 승환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종철. 차량 내부의 라이트에 종철의 눈빛이 빤짝이고, 뜨거운 숨을 내쉬는 종철의 콧구멍이 또 다시 벌렁인다.

꽈아악-

그리고는 두 팔을 벌려 승환을 곧바로 품에 가득 껴안는 종철. 얼굴에는 한없이 행복한 눈웃음을 짓고는 승환을 자신의 두툼한 품 안에 찌부시키듯 가득 껴안아 힘을 준다. 맨 가슴을 승환의 몸에 문질러댄다 느껴질 정도로 몸을 꼼지락대기도 하는 종철. 이 움직임을 보아하니 그렇게 섹.스를 하고도 또 성욕이 올라오는 듯 하다.


'으아아..'

'너는 아무것도 안해도 돼 임마..'

꾸우우우욱-

'아아. 너무 세게 안지마요..'

'나는 그냥..'


종철의 감정이 처음으로 격해진 걸까. 살짝은 잠긴 목소리로 승환의 몸을 부술듯 강하게 껴안고 있는 종철. 승환은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종철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심장이 뛰어오기 시작한다.

드디어 종철의 진심을 들을 수 있는 걸까. 나를 이리도 불안하고 찌질하게 만드는 종철이 내가 듣고 싶어하는, 아니 들어야만 할 것 같은 그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렇게 고요한 공기 속에서 이어지는 종철의 목소리.
















'평생 너만 따.먹고싶다'










'푸후우우우웁!!!!'

'으으'

남우가 물을 마시다가 그대로 물을 뿜어버렸다. 남우는 숨이 넘어가게 웃기다고 의자에서 까지 일어나서 테이블을 받쳐 겨우 물을 쓰레기통에 뱉고선 가라오케가 떠나갈 듯 웃기 시작한다.

'푸핳하하핫'

'웃겨요? ㅎ웃기냐고'

'야...이씨 ㅋㅋㅋㅋㅋ웃기지 그럼. 배종철 진짜 쓰레기다.'

'내가 왜 싫어하는데요'

'너 그래서 그 말 듣고 좋았냐?'

'미.쳤어요? 애인한테 그런 말 들으면 누가 좋아해요. 왜 자꾸 따.먹고 싶대. 심지어 그런 말을 할 타이밍도 아니잖아요. 아오 존심 상하고 짜증나요. 아 진짜로 너무 빡도네. 다시 생각하니까.'

'푸하핫..'

남우는 입가에 묻은 물을 닦아내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잠시 빵 터졌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을 하는 남우. 이런 행동 마저도 형님이 깐족대는 것 같아 승환은 괜히 인상을 쓰고 있다.

'형님이 생각해도 이제 왜 제가 그런 감정 느꼈는지 알겠죠?'

'알겠어. 응. 알어. 근데 있잖냐. 흐흐 아이씨.... 빵 터졌네 ㅎ ㅎ..'

이해가 간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남우. 헌데 겨우겨우 진정을 하는 남우의 반응이 어딘가 예사롭지 않다. 괜히 주변에 튄 물자국을 휴지로 닦아내며 말을 늘이는 남우. 승환은 그런 남우의 손의 움직임을 따라 그저 무심한 듯 시선을 옮긴다. 이어지는 남우의 목소리.

'종철이가 목걸이를 줬다고.'

'네. 이상한 싸구려 금 목걸이'

'종철이가 너 진짜 많이 좋아했나보다. 아니 사랑했나 보다.'

남우의 한마디에 이어지는 순간의 정적.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르는 다른 게이 남정네들의 노랫소리조차 귀에서 웅웅거리듯 먹먹하게 들리는 것 같다.

갑자기 반전된 분위기와 꽤나 또렷한 눈빛으로 승환과 눈을 맞추는 남우. 그런 남우의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갑자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몰려오는 승환.

'뭐가요? 어느 부분에서요? 목걸이 사줘서요?'

우우웅-

'어 잠깐 전화.'

하필이면 그 때, 울리는 남우의 휴대폰 진동. 남우는 휴대폰을 들어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실례한다고 살짝 손을 들어올리며 가라오케를 나가는 남우. 이렇게 궁금증만 유발하고 전화를 받으러 가버리면 어떡하나.

종철이 나를 진심으로 많이 좋아했다고? 아니, 사랑했다고? 그런 사람이 그래? 승환은 남우의 마지막 한 마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승환은 다시금 머릿 속을 지배하는 종철의 생각에 고개를 살짝 숙인다.

그렇게 남우는 꽤나 오랜 시간 전화를 받는지 나타나질 않고, 홀로 생각에 잠긴 승환은 점점 술이 올라온다. 그렇게 밤이 깊어진다. 자꾸만 그 사람이 떠오른다. 그게 어떤 의미가 됐든 간에. 사람이, 그리고 사랑이 남기는 기억이라는 것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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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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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다리고 있어요! 건필하세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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