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이야기] 그 날, 그 부대에서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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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그럼 갔다올게."
"길은 찾아보고 가는거지?"

가방을 들쳐메고 집을 나서는 내게 엄마는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나도 이제 스물 둘이야 ㅋㅋ 그 정돈 알지."
"알았어. 가서 연락 꼭 하고."

난 엄마와 작별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어깨에는 군복과 세면도구 등등이 들어있는 조금 큰 가방이 있다.
엄마는 내가 누굴 만나러 서울까지 간다고 하니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응. 다음 휴가때 봐."

아침 댓바람부터 나는 열차를 탔고,
얼마 안있어서 나는 대전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가 갈라졌던 대합실에서 나는 쓱 둘러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김보현!!!!"

몇 번이고 보고싶었던 얼굴이, 역 대합실 입구에 있었다.
하얀색 티셔츠에 하늘색 남방을 걸친 정해성 상병님.
검은색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훤칠한 키의 정해성 상병님은 성큼성큼 나한테 걸어오기 시작하셨다.

"짜식…… 멋 좀 냈네?"
"그냥 평상시 외출복입니다 ㅋㅋ"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아침에 몇 번이고 옷을 골라 입어야 했다.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옷 좀 사놓는건데…….
그리고 도대체 정해성 상병님은 사복이 왜이렇게 찰떡같이 어울리는거야.
아까 봤을때 진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귀엽긴 ㅋㅋ"
"아닙니다……. 안 귀엽습니다."
"뭐래 ㅋㅋ 진짜 귀엽거든?"

또 장난스럽게 볼을 잡아당기는 정해성 상병님.
이미 내 볼은 정해성 상병님이 전세를 낸 지 오래였다.

"그리고 음 우리 군복차림도 아니고 하니까,"

정해성 상병님은 나를 슬쩍 보고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말 놓자."
"ㅈ…...진심이십니까?"
"부대 가서 도로 원상복귀하면 되지 뭐."

그런 파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정해성 상병님은 그런 말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 귓볼을 만지고 있었다.
으악 대체 정해성 상병님한테 반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해성이 형 해봐."
"진짜…… 합니까?"
"그럼 가짜로 하냐? 빨리 해 ㅋㅋ"

아직 일병, 그것도 막 일병을 단 개짬이 상병에게 말을 놓는 것은 정말 내 상식선에서는 이해 불가능할 정도였기 때문에도 있었고,
한 번에 말을 놓는다는 것 자체도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서 나는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ㅇ…… 엄청 부담됩니다."
"처음만 어려울 걸?"

그리고 군복도 안입었는데 굳이 군대 말투 써서 티 내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 하고 정해성 상병님은 설명했다.
사실 그것보다도 이 사람은 그냥 형이라는 소릴 듣고 싶은 게 아닐까……?
그치만 왠지 엄청나게 부끄럽다…… 
자꾸 해보라고 돗자리를 깔아주니 더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대답을 강요하는 지긋한 갈색 눈동자에 결국 나는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ㅎ…….해성이 형……."

으악…….
나는 이게 내 입에서 나온 소리인지 실감이 잘 안났다.
진짜 부끄러워서 어디 들어가고 싶어졌어…….

"해성이 형! 이렇게 하면 되지 ㅋㅋㅋ"
"ㅇ…….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말고 알았어. 반말도 해야지."

내가 존댓말을 하자 눈을 가늘게 뜨는 해성이 형.
난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형벌을 받는 것일까……

"ㅇ…… 알았어 형……"

그제서야 만족한 표정을 짓는 해성이 형.
나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저 해성이 형을 따라 승강장으로 따라 갈 뿐이었다.

"그 말투 2일간 유지할 것."
"너…… 너무 하십……"
"어? 또 존댓말 한다?"
"너무해  ㅠㅠㅠ"
"너랑 겨우 두 살 차인데 뭐가 너무해 ㅋㅋ"

투덜거리는 내 옆에서, 뭐가 재밌는지 계속 웃고 있는 해성이 형.
진짜 이러다가 부대 가서도 말 실수하면 선임들한테 진짜 큰일난다고……

"뭐 그땐 내가 커버 치는거고."
"뭐라고 하려고?"
"너랑 장난치다 그랬다 그러지 뭐."
"그건 커버가 아니잖아……."
"어 그런가……? ㅋㅋㅋ 무튼 상관없어. 듣는 내가 상관 없으면 된 거 아냐?"
"그건 그렇긴 한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해성이 형은 무를 생각이 없어 보여서, 
나는 결국 내가 반말을 하는 걸로 타협을 보기로 했다…….
진짜 이 사람 너무 얄밉다.

그러고보니 나는 승차표를 샀던 기억이 없어서,
해성이 형한테 넌지시 표를 샀냐고 물어보았다.

"너 오기전에 도착시간 맞춰서 사 놨어."
"내 표까지 형이 산거야?"
"어 ㅋㅋ 빨리 서울 가고싶어서."

나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해성이 형을 쳐다봤다.
아니 서울가는 KTX 표가 3만원이 넘는데 ㅠㅠ

"그거 개 비싸잖아 ㅠㅠ"
"얼마 안하던데? ㅋㅋ"
"형은 너무 과소비가 심한 것 같아."
"야. 다 그 만큼 있으니까 쓰는거야. 걱정하지마."

내가 받는 일병 월급이라고는 겨우 8만원 언저리였다.
그렇다보니 엄마한테서 받았던 용돈 조금이랑 합쳐서 뭐라도 해 주려고 했는데…….

"됐거든요. 그럼 너가 점심밥 사."
"알겠……. 아니, 알았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고 하는 존댓말을 억지로 고치자,
해성이 형은 피식 하고 웃으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열차 온다. 타자."
"ㅇ…...응."

군복이라는 무게마저 없어진 지금의 해성이 형은,
말투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진짜 딱 옆집 형 같았다.
부대 안에서 맨날 호통치고 사람들을 휘어잡는 정해성 상병님이랑은 겉 모습만 같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아마 부대에서 정해성 상병님이 나한테 태도를 조금 풀지 않았더라면 아마 다른사람인가? 하고 착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해성이 형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내가 창가쪽이었다.

"너 또 잠 못잤지."
"아냐 ㅋㅋ 좀 잤어. 형이랑 놀려고."
"근데 왤케 피곤해 해 벌써."
"으으……."

사실 억지로 자려고 하긴 했는데,
정말 설레서 나는 자꾸만 자다 깨다 했었다.
어쩔 수 없잖아. 형이랑 단 둘이서 데이트라니…… 
심지어 요 3일 휴가동안에 자는 시간도 아까워서 서너시간씩밖에 안 잔 것도 좀 컸다.

"으이구……"
"헤헤……"

내가 못 잤다는 설명을 하자, 정해성 상병님이 바보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뭐라 할 말도 없어서 그냥 헤프게 웃었다.

"도착할 때 까지 한 시간 정도 있으니까, 좀 자 둬."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해성이 형 어깨에 기댔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KTX는 서울로 출발했다.
오늘 날씨도 무척이나 좋았다. 비 한 번 올 법도 했지만, 다행히도 휴가동안에는 비 소식이 전혀 없었다.

부대가 아니어서 그런지, 해성이 형은 계속 내 손을 잡은 채로 놓지 않았다.
조금 거칠지만 따뜻한 그 손은 무척 든든했다.
그냥 손을 잡고 있는데도, 이렇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지금 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을 청하기 전에, 슬쩍 해성이 형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형은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고개를 올리는 것을 느꼈는지, 슬쩍 눈을 뜨고 나랑 눈을 마주쳤다.
갈색 눈동자가 깊다.
왠지 저절로 웃음이 나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웃냐."
"좋아서 ㅋㅋ"
"반 말 하더니 대답도 꼬박꼬박 잘 하네. 자주 반말 해야겠어."
"안 돼. 딱 요 이틀만 할거야."
"아쉽네……."

내 단호한 대답에 해성이 형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유는 따로 있긴 했다.
해성이 형이랑 계속 이렇게 말을 놓고 지내면……. 진짜 매일매일이 정신이 안차려질것 같아.

쓰윽 하고 눈을 감았다.
진짜 거짓말처럼 눈을 감았다 뜨니까 KTX는 벌써 서울역에 도착하려고 하고 있었다.

-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마지막 역인 서울역에 도착합니다.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We will soon be arriving……

내가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자,
그걸 지긋이 지켜보는 정해성 상병… 아니 해성이 형.
아니 그걸 또 왜 지켜만 보고 있는거야 이 사람.

"ㅇ……응?"
"일어났냐?"

피식 웃으면서 해성이 형은 나한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맞다…… 나 이 사람이랑 오늘 같이 열차 탔지…….

"서울역이야. 슬슬 내릴 준비하자."
"어…… 응……."

난 멍해진 채로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나한테 빙긋 웃는 해성이 형의 얼굴이 보였다.

"그…… 해성이 형."
"왜?"
"그 표정 좀……."
"야 자꾸 내 표정갖고 뭐라하냐 ㅋㅋ 내 표정이 어때서."
"너무 심장에 안 좋아 ㅋㅋ"
"그러면 그냥 무표정 할까?"
"그거는 좀 싫은데……."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자 해성이 형은 피식 하고 웃더니.

"바보네."

하고 내 머리를 톡 쳤다.
으으 역시 이 사람을 말빨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 한 것 같다.


우리는 4호선 지하철로 갈아타고 명동역에서 내렸다.
부산에도 전철이 다니긴 했지만…… 역시 수도권 전철은 타는 사람 수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가한 평일 낮인데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타서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두 정거장만 가면 되니까 크게 불편함은 없었지만.

그리고 지상으로 올라왔을때,
나는 가을공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약간은 쌀쌀하면서도 햇살은 아직 따스한 단풍의 계절.
그 아래를 해성이 형과 함께 걷고 있는 내가 너무 좋았다.

"덥지?"
"딱히 덥지는 않아 ㅋㅋ 형은?"

내 말투는 먼저 머리에서 존댓말로 말을 하고 그걸 입에 낼때 반말로 바꾸는 식이라서,
거의 ~습니다 라는 말 끝만 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그냥 음료수라도 사줄까 해서 ㅋㅋ"
"됐어 ㅋㅋ 내가 커피 살게."
"아 그러고보니 너 나 커피 타준다며. 언제 줄거야?"
"그거야 형이 사무실로 와야 주지…… 안 왔잖아."
"후임이 어? 선임을 모셔갈 생각을 해야지. 너가 시간이 언제 비는지 어떻게 알어."
"나도 몰라 ㅋㅋ 부대에 있으면 늘 바쁘단 말야."
"알았다 ㅋㅋㅋㅋㅋ"
"그니까 이번 커피는 내가 살거야!!"
"알았어 ㅋㅋㅋ 너가 사 ㅋㅋㅋㅋ"

내가 악을 쓰고 커피를 산 다고 으름장을 놓자,
그제서야 본인이 커피를 사려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그럼 보현이가 사주는 커피 맛이나 볼까~"
"내가 사준다고 커피 맛이 달라지거나 하진 않아 형 ㅋㅋ"
"충분히 다를 거 같은데? 가자~"

그렇게 우리는 명동역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딱히 내가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근처에 제일 만만한 카페라고는 스타벅스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잠깐 아르바이트 했었던 곳이기도 하고.
나름 전국 직영점이라는 이 카페는 그냥 어디서든 돈 값 정도는 했다.

"여기서 일했었다고?"
"아니 다른지점 ㅋㅋ"
"그래도 뭐……. 스타벅스 정도면 다 비슷하겠지 ㅋㅋ"

해성이 형은 메뉴판을 한참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늘 먹던 메뉴가 있었기 때문에, 그걸로 하기로 했다.

"형 골랐어?"
"어. 너는?"
"나도 ㅋㅋ 형 뭐마시는데? 내가 대신 주문 해 줄게."
"어…… 그게 나으려나?"

그렇게 해성이 형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아이스 카페라떼. 두유로 해서 시럽 없이."
"으엑."

형이 그런 주문을 하자, 나는 자연스럽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게, 스타벅스에서 쓰는 두유는 전혀 달지 않아서 엄청 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형 여기 두유 겁나 쓴데……"
"알아 ㅋㅋ 근데 그게 맛있어."

해성이 형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한테 물어왔다.

"보현이 너는 뭐 마실건데."
"나…….? 그냥 카라멜 마끼아또 시키려고……."
"그거 겁나 달잖아 ㅋㅋ"
"알아……. 커피는 달아야 맛있다구……."

그렇게 말하고 나는 커피를 주문했다.
자리를 잡은지 얼마 안 돼서 나오는 두 잔의 커피.
내가 쟁반을 들고가자, 저 멀리서 해성이 형이 이쪽을 보고 빙긋 웃고 있었다.
여전히 그가 그렇게 빙긋 웃는 건 적응이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좋다. 나 한테만 저렇게 웃어준다는 것이.

"커피 대령했습니다."
"고마워 ㅋㅋ 잘 마실게."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ㅋㅋㅋㅋㅋㅋ 와 이제 받아칠 줄도 아네. 너 반전있다 ㅋㅋㅋ"

나는 웃으면서 형 옆에서 커피를 섞었다.
카라멜과 우유, 샷이 층으로 되어있는 카라멜 마끼아또가 천천히 얼음과 함께 섞이기 시작했다.
샷이 우유에 결을 그리면서 섞여 들어가는 것이 보기 좋았다.

"내가 반전 있대도 형 만큼은 아닐걸?"
"응? 아 부대 사람들한테?"
"응 ㅋㅋ 아마 부대 사람들한테 형이 그렇게 웃으면 다들 놀랄걸……"
"그래서 내가 이때까지 같이 휴가나간 사람이 없긴 해 ㅋㅋ"

해성이 형은 빨대로 커피를 주욱 빨아들이면서 얘기했다.
아 그래서 휴가를 일부러 같이 안 나간 거구나…….

"아 그래서였어?"
"어. 휴가 동안엔 별로 남 간섭 받기 싫으니까."

헿. 하고 해성이 형은 내 쪽을 쓱 바라봤다.

"마셔볼래?"
"형 마시는거?"
"응 ㅋㅋ"

나는 내심 맛이 궁금하기도 했고,
그래서 해성이 형이 건네주는 두유 라떼를 받아들었다.
형이 쓰던 빨대가 입에 닿는 느낌이 되게 묘했다.
그 묘한기분은 액체가 빨려 올라오기까지만 지속됐다.

"으엑"

먹다가 나는 커피를 뱉을 뻔 했다.
쓴 것도 쓴거지만……. 으악 이 콩비린내…….
켁켁 거리고 있으니까 갑자기 해성이 형이 놀라더니 냅킨을 건네줬다.

"괜찮냐? 갑자기 왜 그래?"
"으…… 아냐 아무것도…….ㅠㅠ"
"사래 들렸어?"
"응…… 그렇게 쓴 줄 몰랐어……."

내가 얼버무리자 해성이 형이 갑자기 푸하하 하고 웃기 시작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 애 입맛일 것 같더니 ㅋㅋㅋㅋㅋ"
"스물 둘이면 애 아니거든!!"
"근데 먹는 거 보면 진짜 딱 애 입맛이잖아 ㅋㅋㅋ 하는 것도 그렇고 ㅋㅋㅋ"
"으우…… 못 먹는 건 아냐…… 단지 이 정도로 쓸 줄 몰랐어서 놀란거지……."

해성이 형 한텐 정말 미안하지만……
대체 이 커피는 무슨 맛으로 먹는지 도통 모르겠다.

"ㅋㅋㅋㅋㅋ 아 이 정도일 줄 몰랐어 ㅋㅋㅋ 미안해 ㅋㅋㅋㅋ"
"진짜…… 나빴다……."
"ㅋㅋㅋㅋㅋ 아 진짜 왤케 귀엽냐 진짜."

그 귀엽단 소리 오늘 한 만번째 듣는거같은데…….
귀가 녹아서 없어지게 생겼다구요 ㅠㅠ

그렇게 우리는 한참 카페에서 노닥거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진짜 잠깐 앉아있었는데, 벌써 시간은 오후 세 시였다.

"형 이번 휴가때 뭐했어?"
"나? 별 거 안했어. 그냥 집에 있으면서 겜이나 하고 친구 만나고 그랬지."
"표정이 되게 지루해보이네……."
"말 했었잖아 ㅋㅋ 나 휴가 나와봤자 별로 재미없다고."

오히려 사람 보는 재미는 부대가 좀 더 있어. 하고 해성이 형은 덧붙였다.
부대에서 그렇게 무섭다고 소문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기분이 조금 이상하군……

"부대 사람들이 재밌어?"
"재밌기도 하지만…… 일단은 뭐 배경이 가지각색이니까. 성격들이 천차만별이잖아."

쭈욱,
이젠 거의 얼음 녹은 물인 커피를 해성이 형은 한 모금 들이켰다.

"나는 형이…… 그냥 사람들을 좀 싫어하는 줄 알았어."
"싫어한다기 보다는 그냥 거리를 좀 두는거야. 아버지가 군인이셔서 구설수에 얽히기 싫거든."

해성이 형은 그렇게 나를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 말투에는 조금 슬픔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아 들었어. 형 아버지 장군이라고……."
"인혁이가 말 해 줬지? 맞긴 맞아. 사이는 별로 안 좋지만. 뭐 그래도 그 사람 덕분에 부족한거 없이 키워주셨으니 그건 감사하지 않을 순 없지 ㅋㅋ"

형은 아버지를 그 사람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이미 거기서부터 엄청난 거리감이 느껴졌다.

"별로 사이 안 좋아?"
"뭐 그냥 단순히 집안 문제야. 내가 학군장교 안하겠다고 해서 그러시는 것도 있겠지."

아마 내가 싫다고 안 했으면 지금쯤 나는 다이아 달고 있을걸? 하고 해성이 형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를 했다.
소위로 임관한 해성이 형……. 왠지 성격을 보면 상상이 잘 안 되는 것도 아니다.

"ㅋㅋ 그 이야긴 그만하자. 넌 휴가때 뭐 했어?"
"나도 형이랑 비슷해 ㅋㅋ 그냥 가족들이랑 친구들이랑 밥먹고 얼굴 보고 그랬어."
"친구들도 봤어? 부지런하네 ㅋㅋㅋㅋ"
"응 ㅋㅋ"

그러고보니 어렴풋이 세한이 녀석이 생각이 났지만,
딱히 평소 친구랑 다를 것도 없는 애라서 자세히 얘기는 하지 않았다.

"신병때는 그래도 사람 보는게 제일 재밌긴 하지 ㅋㅋ"
"맞아 맞아 ㅋㅋ 그렇더라구."
"근데 나한테 이렇게 2일이나 쓰고 그래도 괜찮냐?"

해성이 형은 조금 미안하다는 말투로 나한테 물어왔다.
나는 무슨 소리냐고 단번에 말했다.

"형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ㅋㅋ 사실 2일은 너무 짧아."
"나 뭐하러 보고싶어해. 재미없는 놈인데 ㅋㅋㅋㅋ"
"왜 재미없어. 형 진짜 좋아서 매일 보고싶은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 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어딜 봐서 좋냐 ㅋㅋ"
"나만 그런 건 아닐 걸? 아마 부대 사람들 지금 형 보면 똑같이 생각할지도 몰라 ㅋㅋ"

그렇게 말하는 나한테, 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싫어 임마 ㅋㅋ 내 본래성격 보여주는 건 너면 됐어. 다른 사람한텐 싫어."
"ㅋㅋㅋㅋ 도대체 이런 성격을 어떻게 감추고 다니는거야?"
"감춘게 아니라 보여주기 싫었다고 하는거지 이런 건 ㅋㅋㅋ"

나는 그 부분이 좀 더 궁금해져서, 물어보기로 했다.

"근데 왜 하필 나였어?"
"ㅋㅋㅋ 왜, 너면 안되냐?"
"ㅋㅋ 그건 아니지만……."
"ㅋㅋㅋㅋ 사실대로 말하면 너 첫 날에 왔을때부터 이상하게 신경쓰였어."

처음? 처음이라면…….

"어. 너 중대에 새로 신병으로 들어왔을 때."

해성이 형은 빙긋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도 그 상황이 떠오르자, 쑥스러워서 헛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그걸 기억을 다 하고 있네 ㅋㅋ"
"당연하지. 부대에서 누구 챙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챙겨준다고?"
"막 어린애 길 가에 두면 다칠 것 같잖아? 그런 느낌?"
"으……."

그때의 해성이 형은 거의 나한테는 신적인 존재였다.
겉으로 보였던 그의 행동은 그냥 계속 무한히 잔소리만 하는 악마같은 선임이었는데.

"나도 알아. 그때 내가 너한테만 계속 잔소리 한 거."
"뭐야 일부러 그랬어?"
"일부러 그런 것도 있긴 했지. 그때 박병장이랑 너가 붙어있는 게 제일 맘에 안들어서 그랬기도 하고."

해성이 형은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순간 나는 해성이 형이랑 식당에서 단 둘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상욱 병장이랑 심하게 장난치지 말라고. 보기 안 좋으니깐.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조금 이해됐어?"
"와…… 그때부터 그랬구나……."
"뭐 그래도 지금은 다 잘 됐으니까 상관없지 ㅋㅋ"

그렇게 웃으면서, 해성이 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잘 모르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해 지기전에 얼른 가자."
"어디 가는데?"

내 질문에 해성이 형은 씨익 웃으면서 대답했다.

"남산 타워."



- 22.


우리는 남산 타워를 오르기 전에 잠깐 군장점을 들렀다.
사실 군장점이라고 해서 나는 뭔가 군 부대 근처에나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는 그냥 일반 가게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안에 그냥 군용품밖에 없다는 점이 좀 칙칙했지만.

나는 딱히 살 게 없었는데, 해성이 형은 뭔가 살 게 있다고 하고는 계속 사장님이랑 얘기를 했다.
사장님이신 할아버지는 해성이 형이랑 꽤 익숙한지,

"아 전에 부탁한거? 다 됐지 ㅋㅋ"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잃어버리지 말어 ㅋㅋ"

그런 얘기를 하면서 뭔가를 주고 받는 것 같았다.
나는 어둑어둑한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각종 표창장도 있고……. 부대에서 사제라고 하는 대부분의 군용품들이 있었다.

"보현이 너 고무링은 필요없어?"
"아? 아 어……. 있으면 편할 것 같기도 해."
"얼마 안 하니까 그냥 여기서 하나 사가자. PX제는 별로야."

그러면서 사장님 이것도 주세요, 하고 고무링을 가리키는 해성이 형.
내가 한사코 말렸지만 이미 계산을 다 끝낸 뒤였다.

"ㅋㅋㅋ 이번엔 내가 빨랐네."
"아 진짜 형 ㅋㅋ 너무해……"
"됐어 ㅋㅋ"

그러면서 쓱 고무링을 내미는 해성이 형.
나는 쑥스럽게 그걸 받아들었다.
내가 그걸 가방에 집어넣으려고 가방을 내려 놓을 때였을까,
머리에 갑자기 뭔가가 푹 씌워졌다.

"어?"

전투모였다.
일병 오바로크가 된 전투모.
심지어 사이즈도 딱 맞았다.

"헐……. 형 이것도 산거야?"
"ㅋㅋㅋ 얼마 안해. 너 이번에 진급했잖아. 선물이야."

너무 고마운 기분에 갑자기 마음이 너무 당황스러워졌다.
그걸 뒤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는 사장님이 한 마디 거들었다.

"맞선임이여?"
"아 맞선임은 아니고 분대장입니다 ㅋㅋ"
"아 그려? 보기 좋쿠먼 후임도 잘 챙겨주고."
"아닙니다 ㅋㅋ 전투모 없어가지고 이병모 쓰고다니는거 좀 그래가지고 이번에 나와서 사줄려고 했습니다."
"그려그려. 크으 옛날 군대때 생각나는구먼."

사장님은 그렇게 내가 가방에 전투모랑 고무링을 집어넣는 걸 보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잔뜩 쑥스러운 기분이 되어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또 필요한 거 있으면 와."
"알겠습니다 ㅎㅎ 수고하세요 사장님."
"오야~"

쑥스러워 하는 나 대신, 해성이 형은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군장점을 나섰다.
딸랑- 하는 소리가 문에서 났고, 가볍게 닫혔다.

"도대체 내 머리 사이즈는 어떻게 안거야."
"ㅋㅋㅋㅋ 생활관에 있을때 잠깐 확인했지롱."
"와 진짜 미쳤어 ㅋㅋㅋ 언제봤어"
"나오기 하루 이틀전인가? 얼마 안됐어."
"그냥 물어봐도 됐을텐데."
"그럼 너가 눈치채잖아."
"으으……."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고마워 형."
"아냐. 평소에 내가 분대장으로 해준 게 없는 거 같아서. 이젠 좀 마음이 놓이네."
"아냐 그냥 내가 샀어도 됐는데……"

실제로 나는 그냥 복귀하기 전에 일병모를 하나 사려고 했었다.
원래 우리 중대에서는 맞선임이 후임 전투모를 사주는 것이 약간 관례화 되어 있었는데,
한인혁 일병님이 출타할 일이 거의 없어서 나는 그냥 내가 내 전투모 사는게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도대체 해성이 형은 어떻게 캐치한거지……


남산 타워로 가는 길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남산 타워가 뭔지도 잘 몰랐지만, 서울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유명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하는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올랐다고 헥헥대는 나를 짠한 표정으로 보는 해성이 형.

"내가 책임지고 운동 시켜야겠다 너."
"으으……."
"부대 가면 나랑 운동하자."
"알았어……."

사실 원래 사회에 있을때도 나는 운동이 정말정말 싫었다.
그래서 그냥 차라리 덜 먹는걸로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형은 그게 싫은가보다…….
나는 해성이 형이 신경써주는 걸 차마 싫다고도 못하고 속으로 울면서 Yes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사람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없네."
"원래 사람 많아?"
"주말이라 그랬나봐. 원래 케이블 카 타러 많이들 오는데."

언덕을 조금 오르자, 산 정상즈음에 있는 탑까지 연결된 케이블 카 탑승 플랫폼이 보였다.
케이블 카 탑승권은 조금 비싸긴 했지만, 그래도 해성이 형이 해준 걸 생각하면 새발의 피여서 나는 내가 억지로 계산했다.

"으이구 그렇게까지 안해도 된다니깐."
"알았어 이거만 사게해줘."
"그래 그럼 ㅋㅋ 무리는 하지마."

네모난 케이블 카가 와이어를 타고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차한 케이블 카에 올랐다.
느지막한 오후 5시, 케이블 카에 탑승하는 인원은 우리 둘 뿐이었다.

덜컹하고 케이블 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해성이 형은 나한테 넌지시 그렇게 말했다.

"사실 근데 남산타워까지 가는 버스가 있긴 해."
"뭐야 그럼 그거 타도 됐겠네."

훨씬 싸잖아 ㅋㅋ 하고 말하는 나한테,
해성이 형은 말 없이 손가락으로 케이블 카 창문을 가리켰다.
막 출발점을 벗어난 케이블 카 옆으로,
멋들어진 석양이 단풍잎을 밝게 비추는 풍경이 흘러갔다.

"와……."
"돈 낼 만 하지?"
"응……."

정말로 절경이었다.
높은 빌딩들이 석양 빛을 받아서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리는 풍경,
그 가운데에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을 듯 묘한 붉은색 산길이 케이블 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조금 늦게 오니까 차라리 더 낫긴 하다."
"그러게…… 이쁘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흘러가는 풍경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나를,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해성이 형.
형은 쓰윽 다가와서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조금은 바깥에서 차가워 진 손에, 해성이 형의 손이 온기를 더했다.

"형은 진짜……"
"왜 ㅋㅋ"
"아냐 ㅋㅋ"

이런 것 까지 계산을 한 건 아니겠지만,
아무튼 이런 자리를 만든 해성이 형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난 할려고 해도 이렇게는 못 할 것 같은데…….

"그냥…… 나도 이런거 해주고 싶은데 엄두가 안나서……"
"꼭 안해도 돼.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아."

빙긋 웃으면서, 해성이 형은 그렇게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의 시선은 저 너머 슬금슬금 넘어가려는 석양과 그 아래 깔린 단풍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정말 미친듯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나 흐르지 않던 군 생활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해성이 형과 만나고 나서는 빛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케이블 카가 정상에 도착하고,
우리는 입장권을 사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로 올라갔다.
물론 해성이 형은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은 채였다.

"왜 남산타워 오자고 한지 알아?"
"응?"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우리는 그런 잡담을 했다.

"사람이 높은 데 있으면 마음이 불안해져서 연애 감정에 취약해진대."
"ㅋㅋㅋㅋ 뭐야 그게."
"진짜야. 나 책에서 봤다니깐."
"그거 막 고소공포증 있고 그런 사람들 한정 아냐?"
"글쎄……. 고소공포증 없어도 높은데서 밑 쳐다보면 조금 무섭긴 하잖아?"
"그렇긴 해도 ㅋㅋㅋㅋ"

복도를 조금 지나자, 확 트인 공간의 전망대가 나타났다.
통유리가 사방을 감싸고 있는 이 곳은, 서울의 전경을 여과없이 비추고 있었다.
석양이 저물고 땅거미가 내린 서울 시내는 건물들이 조명을 하나씩 켜고 있었다.
한강을 따라 반딧불처럼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고층 빌딩과 아파트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빛들.

"우리 사진찍자 ㅋㅋ"
"응 ㅋㅋㅋ"

전망대에서 우리는 배경이 잘 보이게 스마트폰 사진을 찍었다.
막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한 때였지만, 나도 해성이 형도 둘 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 신기하다."
"뭐가?"

내가 신기하다고 하자, 해성이 형은 뭐가 신기하냐고 물어왔다.

"그냥. 빌딩 불 켜진데 보면 다 하나하나 사람이 있잖아."
"그렇지."
"그런 사람들은 다 뭘 하고 살까 그런 생각도 들고……"
"그러네……."

내가 풍경에 젖어 이상한 소리를 해도, 해성이 형은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럴 정도로 도시 풍경은 너무 간만이었고, 그만큼 절경이었다.

"보현아."

갑자기 해성이 형이 나를 불렀다.
나는 형을 돌아보았다.
옆에서 형은, 나랑 비슷한 자세로 전망대 밖을 바라보면서 얘기를 했다.
빛나는 도시의 빛들이, 어슴푸레하게 형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응."
"이런 말 하면 좀 멍청이 같기는 한데……"

그리고는 형은 지긋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우리 형이 멍청이 같을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만류했다.

"괜찮아 형 ㅋㅋㅋ 멍청이같은 말이 어딨어."
"음…….."

형은 조금 고심하다가, 나한테 넌지시 물어왔다.

"나 너 좋아해도……. 상관 없는 거지?"
"응? 당연하지!"

무슨 고민인가 했는데 정말 바보같은 말이긴 했다.
나는 그래서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ㅋㅋㅋ 방금 너가 대답해줘서 힘이 났다."
"왜 그래 ㅋㅋ"
"그냥 좀 무서웠거든."
"뭐가?"
"음…… 그냥 남자끼리 연애해 보는 건 처음이라서."

살짝 떨리는 해성이 형의 목소리는 조금 낮게 깔려있었다.
나는 간과하고 있던 이 형의 심리가 그대로 이해가 되고 말았다.
형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처음이다.
그런데도 깊은 고민끝에 날 받아들여주고, 심지어는 이런 이벤트까지 해서 나를 기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그냥 형이 하는대로 따라줄 뿐, 내가 어떻게 하자고 리드한 것이 없었다.

"고맙다."
"나도 형 좋아해도 돼?"
"당연하지 ㅋㅋ"

해성이 형은 그제서야 빙긋 웃어주었다.
진짜 너무 멋있다.
이런 사람이랑은, 내 평생을 같이 해도 좋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슬슬 나가자."
"어디로?"
"그냥 나와봐."


해성이 형은 내 손을 꼭 잡고, 밖으로 날 데려갔다.
전망대 측면으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안전 철망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곳에는 정말 수도없는 자물쇠들이 엄청 걸려있었다.

"자물쇠?"
"ㅋㅋ 이것도 처음 봐?"
"응…… 뭐야 이게?"
"드라마 같은데서 많이 나와서 알 줄 알았는데."

해성이 형은 그렇게 말하더니,
주머니에서 열쇠가 달린 하늘색 자물쇠를 하나 꺼내들었다.
다른 손에는 네임펜이 하나.

해성이 형은 신기하게 그걸 쳐다보는 내 앞에서, 본인의 이름을 썼다.
'해성'.
그리고는 펜과 자물쇠를 나한테 건넸다.

"너 이름도 옆에 써. 중간에 하트 쓰고 ㅋㅋ"

와…….
진짜 준비성이 철저한 형이었다.
나는 쭈뼛거리면서 그 옆에 하트랑 내 이름을 썼다.
'보현'

그리고는 나는 다시 그걸 형에게 돌려주었다.
해성이 형은 오늘 날짜를 적었다.
2011. 10. 17.
그리고는 철망에 자물쇠를 걸고, 잠궜다.
찰칵 하는 기분좋은 무게감 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이거는 필요 없겠지? ㅋㅋㅋ"

그리고 형은 한 쪽 손에 들고 있던 자물쇠의 열쇠를 저 멀리 철망 밖으로 던져버렸다.
형은 정말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와 이걸 언제 사 온거야."
"ㅋㅋㅋ 몰라.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어."

벙찐 나한테, 형은 또 하나의 자물쇠를 건넸다.
이번에도 똑같은 하늘색 자물쇠였다.
다만 자물쇠의 걸쇠 부분이 좀 가늘었다.

"저거는 정기적으로 철거한다는 것 같더라구. 그래서 하나 더 만들려고 ㅋㅋ"

그리고는 형은 주머니에서 뭔가 짤랑이는 걸 꺼냈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내가 잘 못 보고 있는게 아니라면, 저건 군번줄인데……?

"보급 받은거는 원칙적으로 쓰면 안돼서. 아까 그 군장점에서 새로 하나씩 팠어 ㅋㅋ"
"아까 사장님이랑 말하던게……"
"응. 어제 잠깐 거기 들러서 파 달라고 했지. 하루면 충분하다 그랬는데 진짜 잘 해주시더라."

확실히 해성이 형이 나 몰래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는데,
그게 인식표를 새로 파는 걸 줄이야.
어쩐지 사장님이 다시 잃어버리지 말라고 해서 뭔가 했는데…….

"형 내 혈액형은 어떻게 알았어 ㅋㅋ"
"분대장 수첩에 있잖아 ㅋㅋ"
"아 그것도 그렇네……."

나는 쑥스러워 하면서 내 군번줄을 살펴보았다.
정말이지 뭣 하나 틀리지 않고 내 이름, 군번, 혈액형이 전부 표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인식표에는 해성이 형의 이름과 군번, 혈액형이 적혀있었다.
형은 AB형이었구나…….

"자물쇠에 뭐라고 쓰면 누가 봤을때 너무 티 날거 같아서 ㅋㅋ"

해성이 형은 내가 갖고 있는 인식표를, 형 것과 같이 겹쳐서 자물쇠에 끼웠다.
조금 특이하게 얇았던 자물쇠 고리에는 인식표의 구멍이 딱 알맞게 끼워졌다.

"너가 잠글래?"

그리고는 쓱 나한테 자물쇠를 내밀었다.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자물쇠를 받아들고 잠궜다.
찰칵.
손으로 전해지는 소리는 묵직하고 단단했다.

"됐다……. 헤헤."

해성이 형은 기분이 좋은 듯 바보같이 웃었다.
나는 뭔가 얼굴에 시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이 사람…… 진짜 끝까지…….

"울지마 ㅋㅋㅋ"
"몰라……."

이상하게 내 마음대로 조절이 잘 되지 않는다.
이 사람 앞에서 나는 몇 번이나 울어야 할까?
그치만…… 그치만…….

"우리 1년 될 때마다 한 번씩 자물쇠 바꿔달자. 인식표는 그대로 두고.
 너가 자물쇠 갖고 있고, 내가 열쇠 갖고 있을게."

가슴이 너무 아플정도로 감동이 벅차올랐다.
나는 애써 울지 않으려고 팔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런 나한테, 형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보현아."
"응…….?"
"여기 우리 둘 밖에 없는 거다."
"갑자기 그게 무슨소리……."

그리고는 정말 믿기 힘들게도,
해성이 형은 그대로 살짝 위에서 나한테 입을 맞춰왔다.
시간이 멈춰버릴 것 같은 키스가, 달콤한 가을 바람을 타고 다가왔다.

시원한 가을 바람이 볼을 스쳐 지나갔다.
형의 입술은 너무 부드럽고 달콤했다.
주변 풍경이 발치부터 지우개로 지우는 것 처럼 사라져간다.
따스한 주황색 가로등 불빛만이, 우리 위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이 마치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막지 못할 것 같았다.
형이 나를 생각해주던 진심, 내가 이 형을 좋아하는 진심.
그런 감각이 온데 뭉쳐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이 순간에 입술을 통해서 전해졌다.
불안했던 나도, 불안했던 해성이 형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아무런 경계없이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저 계속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이제 이 형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서울의 야경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도 짧은 영원의 키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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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 행복하네요 ㅠㅠ 흑흑 너네 잘먹고 잘살아라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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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 작성일
와  군대스토리..나 군복무때도 저런선임 만났으면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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