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의 그림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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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새라도 흰 눈이 내릴 것 같은 잿빛 하늘을 가르고 서너가닥의 전깃줄이 늘어져 있고, 그 전깃줄을 따라가다가 보면 자동차 앞 유리의 모서리 지점에서 헐벗은채 서 있는 나무의 앙상한 가지와 맞닿아 있다.
방금 그 가지의 끝 부분에 힘겹게 매달려 있던 이파리 두개 중에서 하나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와 바람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흔해빠진 그 수많은 토요일들중에서 한 오후였다.
공단 안에 있는 그의 회사근처의 골목길 입구에 차를 세우고 그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를 피지 않는 그의 눈치때문에 아직도 입 속에 남아있는 텁텁함을 없애기 위해서 혹시라도 사탕이나 검하나가 어느 구석에 남아있지나 않을 까 하는 생각에 자동차안에 있는 보관함을 뒤져보고 있을 때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
"미안, 오래기다렸지?"
"아냐, 뭐 겨우 한시간 반 기다린건데, 괜찮아." 더 미안한 척 하라는 심술을 잔뜩 넣은, 짐짓 다정한 척 말한 나의 말의 반응 대신에 그는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너 담배폈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너 싫어하는거 뻔히 아는데. 내가 피겠냐?" 몸을 그에게서 뒤로 슬쩍 빼면서 태연한 척 시치미를 떼었다.
나를 향해서 코를 킁킁 거리면서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오른쪽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밀어내면서 왼손으로는 슬쩍 입술끝을 긁는 척하는 행동을 취하며 입을 가리면서 둘러댔다.
"뽀뽀하고 싶으면 그냥 그렇다고 말로하지, 담배냄새 난다면서 핑계대기는..."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퇴근할 때, 회사직원 두 명이 내 차 얻어탔는데 그때 걔네들이 핀 담배냄새가 배어있었던걸꺼야."
"어제 핀 담배냄새가 아직도 난다고?" 그가 피식 웃으면서 기막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담배 냄새 원래 오래가잖아. 몰라서 그래? 아 넌 모르겠구나 담배를 피운적이 없으니!" 끝까지 나는 버텼다.
'그래 피었다' 이 말 한마디가 불러올 결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식한 인간들, 비매너, 범죄자' 그는 흡연자들을 그렇게 불렀다.
창문을 빼끔히 열었다. 좁은 틈으로 쏜살같이 밀려들어오는 찬바람을 이마에 느끼면서 요철을 지나고 낡은 트럭도 지나쳤다. 어깨를 늘어뜨린 회색양복을 입은 남자도 지나고, 추운 날씨에도 짧은 스커트로 한껏 멋을 부리고 퇴근하고 있는 한 무리의 젊은 여성들도 지나쳤다. 그렇게 공단을 벗어나서 번화가 안으로 진입하는 다리 위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커밍아웃한 아들녀석이 남자를 집에 데려 왔으니........"
그는 말끝을 흐렸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의 곤혹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지나가는 말처럼, 그냥 그러더라. 외박하고 일욜아침에 들어오니 엄마가 그러더라 라고 아무런 표정 짓지 않고 별 신경 쓰지 않는듯이 그에게 말을 했건만, 며칠이 지났어도 끝끝내 그 말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서 불편했었던 듯 했다. 공연히 그 말을 꺼냈다고 후회도 되긴 했지만, 그런 엄마와의 사이에서 휘청거리는 내 모습을 그가 조금은 알아주길 바랬었다는것이 더 옳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뭘... 나 버린자식인지 오래됐어."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한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내가 커밍아웃하고, 그렇게 눈앞에 놓고 보고싶지 않은데도 내쫓아 놓고 수소문까지 해서 친구자취방에 있던 나를 왜 엄마가 다시 집으로 끌고 들어가신 줄 알아?"
".................."
"내가 다른 사내놈하고 살맞대고 있을것이라는 상상이 싫으셨을거야. 구역질 나셨겠지. 게이 아들놈, 눈밖에만 나면 어딘가에서 어떤 놈 끌어안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런거나 상상하셨을거야. 그래서 집안에 붙잡아 놓고 감시하시기로 하신거 내가 벌써부터 뻔이 알고있다."
"설마 그럴라구. 너가 걱정되셨겠지....." 그가 고개를 돌려서 나의 시선을 피해서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이미!" 그의 뒷통수를 한번 바라보고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져버렸다.
"예전에 그런식으로 말씀하셨어. 우리 한집에 산다. 싫어도 같이 밥먹고, 매일 집안에서 부딪혀, 이런저런 말... 하기 싫어도 하게되고, 듣기 싫어도 듣게 돼."
"................."
"사실, 엄마가 한 그 얘기 듣고 소름도 끼치고 기가막혔다. 그러실 분이라는거 모른거 아냐.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래도.... 설마...' 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너를 회사동료라고 하고 집에 가끔 부른거야. 그래, 엄마가 눈치채실수도 있어. 그런데, 그렇다고 그 한밤중에 맨 끝에 있는 아들방앞 까지 오셔서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나, 무슨짓 하고 있나 하고 방문에 귀대고 계셨다는게.... 말이나 되고 이해가 돼?"
목이 꽉 막히고 기침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말을 멈췄다.
그가 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소리가 너무 컸나?" 고개를 돌리고 장난스런 웃음을 짓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커밍아웃전에는..." 말을 시작하려고 입을 떼기가 무섭게 옆차선에 있던 빨간색 승용차가 깜빡이도 넣지 않은 채 갑자기 내 앞으로 밀고 들어왔다.
"저. 개 새끼가!!!" 순간적으로 욕을 내뱉었다가 문득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이녀석은 욕하는 사람도 싫어한다. 아니 경멸한다. 까다로운 놈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새끼는 아닌것 같은데...."
"다 익었네. 먹어." 그가 먹음직 스런 닭고기 한덩어리를 내 앞의 빈 그릇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내 젓가락은 이미 한쪽 귀퉁이에서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작은 고구마조각을 집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뜬금없이 물었다.
"뭐가 그래서야?" 고구마를 입에 넣고 달착지근한 맛을 음미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너 차에서 '커밍아웃하기 전에는.....' 이라면서 뭐라고 말하려고 했던거 아냐?"
"아, 뭐 별거 아냐. 그 전에는 외박을 해도 생전 내가 여자랑 어디서 그짓거리 할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으시더니, 나 게이예요 하니까 그 순간부터 내가 무슨 하루 이십사시간 눈만뜨면 남자들 살 냄새 찾아다니는 놈인것처럼 생각하니까..."
"너, 사실 눈만 뜨면 내 생각만 하잖아."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실실 웃었다.
"농담 아니야. 집에 있다가 동네 슈퍼만 갈때에도 그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는거 느낀다."
"힘들겠네. 그럼 오늘은 어떻게 하냐? 너 밤 늦게라도 들어갈거야? 아침까지 같이 있고 싶은데..."
'핸드폰 꺼놓고 그냥 내일 아침에 들어갈꺼야."
"누가 이기나 해보는거야?"
"아버지 퇴직하신다음에 고향쪽으로 내려가셔서 지내시려고 여름부터 마땅한 자리 알아보고계셔. 아마 내년 봄 즈음에서 내려가실거야. 그때까지 버텨봐야지."
"너를 여기 혼자 그냥 놔두고?"
"아버지는 모르시니까. 엄마는 내가 아버지한테도 커밍아웃할까봐 신경 쓰신다. 나 혼자 두면 옷 홀딱 벗은 사내넘들 사이에 있는 내 생각에 열불나실테고, 그렇다고 고향가신다는 아버지 붙잡고 같이 살다가 아버지가 알게되는 날엔 집안이 완전히 초토화될테니 너랑나랑만 알고있자 하고 쉬쉬하시다가 가시는거지. 모르는게 약이라고."
밤이 되니 바람이 더 거세어졌다.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자신들의 갈길을 재촉했고, 그와 나는 나란히 그렇게 서로의 어깨를 부딪치면서 걸었다. 그가 내손을 잡아서 자신의 잠바 주머니에 넣고 꼭 쥐었다.
그의 손가락에 끼어있는 반지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아직도 반지 끼고있네?" 내가 빙긋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가 화났다는 듯 표정을 지으면서 다른 손으로 나의 어깨를 툭 쳤다.
"결혼반지 끼기전까진 끼고 다닐거야. 설마 너 내가 준 건 잃어버린건 아니지?"
"잃어버리긴.... 회사 책상속에 넣어 놓고 매일 한번씩 본다. 이 놈이 나 없을때 혹시 딴짓하는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그가 발을 들어 내 엉덩이를 한번 툭 걷어찼다.
"말이 되는 소릴해라."
"어허. 이 놈이. 감히 형님한테 발길질해?" 내가 짐짓 험악한 인상을 지으면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픽 하고 웃음을 지으면서 그는 주머니의 손을 빼서 나의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라 주위를 한번 돌아본 다음에 나는 그의 팔을 골목안으로 끌어당겼다. 우리가 지나온 거리 위로 찬바람이 한바퀴 돌아서 길 건너편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아주머니의 목도리를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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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꾸미지 않는
그저 일상의 일기같은
그래서 한 호흡으로 부담없이 읽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