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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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창을 통해, 한 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동네 아이들이 집 앞 놀이터에서 만들어내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어렸을 때에는 덥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 노는 것이 좋았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흘러도, 티셔츠가 젖은 등에 눅눅하게 달라 붙고, 팔뚝은 끈적거려도 그저 새까맣게 탄 얼굴로 아이들과 하루종일 뛰어노는 것이 행복이었다.
그때가 행복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 잠시 그렇게 창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던 승환은 몸을 일으켰다.
컴퓨터 모니터를 에어캡으로 둘둘 말아서 박스에 넣고는 책상 아래의 구석에 놓여있던 프린터를 끌어냈다.
표면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쓰고 마치 버려진 듯 쳐박혀 있던 고장난 낡은 프린터의 윗 표면을 검지 손가락으로 슬며시 한번 문질러 보고는 그는 옆에 놓여있던 물티슈를 집어들었다.
표면에 뭍은 먼지를 문지르면서도 그는 그 프린터를 다시 쓸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고치기에는 새 것을 사는 편이 차라리 더 경제적일 것 같았다. 하지만 마치 로봇처럼 손을 움직여 그렇게 구석구석을 계속해서 닦아냈다.
프린터가 빠져나온 책상 아래의 공간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무엇인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슬며시 등을 굽히고 손을 뻗어 그는 책상 아래의 구석에 떨어져 있던 그것을 집어 들었다.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과 그런 그의 볼에 입술을 대고 있는 우현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의 자신과 우현의 행복해 보이는 표정에 갑자기 뭉클하는 감정으로 가슴이 시려왔다.
예전, 우현과 한창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종로의 한 포장마차에서 알맞게 술이 취해 있던 승환은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셀카를 찍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우현이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승환의 머리를 끌어당겨 그의 볼에 키스했다.
그 둘의 관계를 모르는 일반 사회의 사람들의 눈이 부담스러워 그들은 같이 사진을 찍을 때 항상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포즈를 취했다. 혹시라도 사진속의 ‘그’ 가 누구인가를 일반 사회의 누군가가가 묻는다면 적당한 핑계를 댈 만한 딱 알맞은 거리를 유지했다. 질문자가 누구냐에 따라, 상대방은 학교의 선,후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회사의 동료라거나, 친척 형,동생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그의 볼에 키스를 하는 그 사진이 혹시라도 남에게 보일까봐 부담스러워 승환은 지우려고 했지만, 우현이 그런 그를 말렸다. 지우기 전에 그 사진을 인화해서 방에 걸어 놓고 싶다고 했다.
술에 취해 긴장이 알맞게 풀어진 두 눈과 어둑한 조명, 그리고 자신의 턱을 슬며시 잡고 볼에 키스를 하고 있는 우현의 살짝 눈을 감은 옆 모습이 싫지 않아서 승환은 그러자고 했었다.
책상의 한쪽 위에 그렇게 놓여있던 그 사진은 우현이 사고로 죽은 후에 사라져 버렸다.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어느 사이에 그 어떤 내용물 사이로 끼어 들어간 것으로 승환은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지 1년이 지난 후, 이삿짐을 정리하는 승환의 앞에 그들의 사진이 갑자기 불쑥 나타나 버렸다. 마치 승환에게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우현의 말처럼...
“형! 나는....”
2년 전 겨울, 카페에서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우연히 본 신문기사를 읽고 있던 승환이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먼저 죽으면, 형이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뭐?” 창밖을 바라보던 우현이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승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 여기 연인이 먼저 죽는다면 남은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설문조사가 있길레...”
“하여간 별, 쓸데없는 기사나 쓰고 자빠졌으니 기레기 소리를 듣지!”
“그래도 재미있잖아.” 승환이 씨익 웃었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참 기자하기 쉽다. 공부는 열심히 했을건데. 고작 한다는 일이....” 말을 멈추고 우현이 혀를 찼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쓸데없이....” 그가 자신이 한 말을 다시한번 반복했다.
“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런 우현을 바라보면서 승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그 일 그만두면 안 돼?"
그의 말에 우현이 기사가 떠 있던 화면에서 고개를 돌려 승환을 바라보았다.
"형 일 나갈 때마다 걱정된단 말야.”
그의 말에 우현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당장은... 딴이 할 일이 없으니... 배운것도 없고..” 우현이 커피잔을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보기보다는 위험한 일 아니야. 일하다가 내려다 보면 사람들이 한참 내 발밑에 개미들처럼 기어다니고....” 그가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가끔 그렇게 개미들처럼 줄지어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말야. 참 인간들도 별거 아니란 말이지. 서로 내가 잘났느니 니가 잘났느니 하면서 살아가지만, 다 무의미하고 허무한 거야.”
“난... 싫어.” 잠깐 동안의 침묵 후에 시선은 창밖에 두고서 우현이 입을 열었다.
“뭐가?” 승환이 우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가 말했잖아. 니가 혹시 죽는다면 나 다른 사람만나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우현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승환을 바라보았다.
“난. 혹시 내가 죽는다고 해도, 너 도저히 다른 놈에게 못 보낸다.” 그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 아까워서 딴 놈한테 못 줘. 너, 나 죽으면 따라 죽던가, 아니면 평생 나만 그리워하면서 사는거야. 알았지?” 말을 끝내고 우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승환을 보고 입꼬리를 올리고 씨익 웃어보였다.
그렇게 이삿짐이 널려있는 방 한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아 과거의 기억속에 떠돌고 있는 그의 옆에 놓여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뭐하고 있어?”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종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이삿짐 챙기고 있지. 형은 뭐하는데?” 헛기침을 하면서 승환이 잠긴 목소리를 다듬고는 물었다.
“너 생각 하고 있었지. 날씨도 더운데, 혼자 이삿짐 꾸릴거 생각하니 일도 손에 안잡히고....” 그가 말을 멈추고 크게 웃었다.
“천천히 해. 이사는 주말이잖아. 주말에 내가 가서 도와줄게.”
“그냥 대충 큰 것만 정리해 놓는거야. 그리고 당장 내일이 토요일 이거든?”
그런 승환의 말에 종석이 크게 한번 웃었다.
“그래. 내일 일찍 가서 형이 도와줄게. 힘든 건 하나도 하지마.” 여전히 종석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알았어.”
“사랑해.” 전화를 끊기 전 항상 그렇듯이 종석이 휴대폰에 바싹 입을 대고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귀에서 종석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승환의 시야에 그의 볼에 키스를 하고 있는 우현의 얼굴이 들어왔다.
슬며시 우현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일년 전 세상을 떠난, 전 애인의 사진을 손에 들고 지금의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이런 터무니 없는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지난 해, 바로 이렇게 더위가 찾아 올 무렵에 승환은 우현의 사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후덥지근 했다.
며칠동안 기승을 부리던 장마가 잠시동안 소강상태였다.
습도는 높았고, 샤워를 하고 밖에 나와 몸을 놀릴라 치면 벌써 팔이 끈적거리기 시작했다.
전날 밤 통화에서 우현은 당분간 장마가 지날 때까지 일을 쉴 것이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조금 쪼들리겠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안하다고, 주말에 경기도 양평으로 놀러가자고 했다.
집안에서는 더웠지만, 집을 나서면서 강풍이 불어와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그는 시원함을 느끼고 있었다.
평상시보다 십여분정도 일찍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날따라 그가 탈 버스가 여간해서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여유로웠던 그의 얼굴표정이 변하고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탈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가 들려왔다.
하필, 그 때에 그 작은 동네의 좁은 버스 정류장으로 동시에 세대의 버스가 한꺼번에 들이 닥쳤다.
그가 타려고 하는 버스는 그 중에서 맨 뒤로 따라오고 있었다.
버스쪽으로 뛰어 갈 것인지, 정류장 앞으로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때 그런 그의 시야에 버스의 문이 열리고 하차를 대기중이던 아주머니 한분이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버스를 향해서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님을 내린 후, 손을 흔드는 그를 보지 못한 듯, 버스는 그냥 그를 지나쳐 출발해 버렸다.
“아! 씨*발. 진짜 존나 어이없네.”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가다가 사고나 확 나버려라.”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악담을 했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기에는 이제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 다급한 마음에 그는 손을 흔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택시에 올라타고는 여전히 밀려오는 짜증을 참으면서 그 버스가 그날의 그의 악운을 모두 싣고 간 것이라고 이제 그에겐 즐거운 날이 될 것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몸보신 한다고 점심으로 오리고기를 먹으러 간다는 사무실 직원들을 따라가지 않고 그는 거래처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그의 동기인 관리과 직원과 같이 짜장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리고 같이 점심 먹어준 답례라면서 그가 뽑아온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마시고 있을 때, 승환의 휴대폰이 울렸다.
예전 부터 알고 지내던 우현의 친한 친구인 종석이였다.
“어. 형! 오랜만이예요.” 승환이 반갑게 휴대폰에 대고 인사를 했다.
“승환아. 너. 지금 중앙병원에 와야겠다.” 종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형 무슨일로......”
“우현이가 사고가 났어. 작업하다가 떨어졌다.”
“네? ” 그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승환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래서 형은 지금 어때요?” 눈 앞이 하얘져 버렸다. 한순간 그의 머릿속에 고층빌딩의 한참 위에 매달려 있는 우현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미안하다.....” 한마디를 간신히 말하고는, 종석이는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뭐가 미안한건데. 도대체 뭐가 미안한건데.' 입에서 맴도는 말을 얼얼해진 혀가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했다.
잠시동안의 침묵 후에 수화기 너머로부터 종석이의 낮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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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간부분에 내용자체를 교정해야할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글을 올리기 시작했네요.
오타정도의 교정이 아니고 내용상의 문제로 수정이 불가피한데, 그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 쉬고 있습니다.
나중에 시간되면 다시 올리도록 하고, 그 사이에 6화까지 가는 십여년 전에 써 놓은 간단한 글 하나 대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