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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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주인 아저씨가 주는 서비스에다 내 돈으로 산 두 개를 합해 총 세 캔의 실론티를 들고 방에 들어갔다. 복도의 맨 끝에 있는 방이었다.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방이라 비어 있을 때면 항상 들어가던 곳이었다. 일요일 늦은 밤이라 손님이 거의 없었다. 두어 개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노래 소리도 얼마 있지 않아 들려오지 않을 것이었다. 반주 기계에 3시간이 찍혔다. 노크 소리와 함께 주인아저씨가 문을 열었다.


  “처음부터 넉넉하게 시간 넣어놨으니까 실컷 부르다가 가쇼. 내가 아무래도 잘 거 같아서....”


  “감사합니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답답한 가슴을 실론티로 달랬다. 한숨만 새어 나왔다. 길고 긴 하루였다. 어둠의 터널 속에 갇혀 있다가 나온 기분이 들었다.

  석호도 여느 남자들과 똑같았으니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내 눈 앞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철우처럼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이라도 하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감정을 숨기고 있어야 했으니 그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철우가 결혼을 할 때처럼 석호도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고 있었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덜 아팠을 것 같기도 했다. 석호의 표정은 철우와는 확연히 달랐다.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석호였으니 얼굴에 책임감과 의무감이 그대로 묻어나서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철우에게는 은정이가 석호를 좋아하니까 잘 살 것이라 말을 했지만 나 역시도 철우가 안고 있는 불안감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내가 은정이에게 느꼈던 것은 도전 의식 같은, 또는 자기가 좋아하니까 상대방도 자기를 좋아하게 만들어야겠다는 맹목적인 집착 같은 것이었지 석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들하고만 살았고, 여학생들이 득시글거리는 학과에서 공부를 했으니까 여자들이 너무나 뻔히 보였다. 우리과 여학생들은 나한테 내숭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은정이도 그것을 알았다. 처음에 팬이랍시고 다가와 석호한테 오빠, 오빠 하면서 애교를 부리고 내숭을 떨다가 어쩌다 나랑 둘만 있을 때 나한테 한 소리를 듣고는 바로 태세 전환을 했다. 나랑 남자 보는 눈이 똑같았으니 더 뻔히 보였다.

  석호 눈에는 안 찼을지 몰라도, 나름 이쁘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 스스로도 좀 이쁘다고 생각하는 은정이는 석호가 쉽게 넘어올 것으로 판단을 했을 것인데 생각 외로 넘어오지 않으니까 자존심이 상하고 오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내가 다른 멤버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석호와 은정이 사이에 서서 은정이가 넘어갈 수 없는 선 역할을 한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없는 몇 달 동안 은정이가 그 선을 넘어간 것이 분명했다. 석호를 지키기 위해 밴드에서 탈퇴한 것이 오히려 석호를 지키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소리를 빽빽 지르면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들어온 노래방에서 나는 그저 멍하니 담배만 피우며 30분을 그냥 흘려보내고 있었다. 사이판을 향해 밤하늘을 날고 있을 석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노래방에 왔으니 노래를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노래책을 펼쳤다. 늘 그랬듯이 아무 데나 펼쳤다. ㅅ항목의 첫 장이었다. 노래 제목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사랑했어요와 사랑했지만이었다. 둘 다 과거 시제의 제목이었다. 내 짝사랑도 과거형이어야했다. 사랑했어요 보다 사랑했지만이 더 땡겼다. 번호를 입력하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https://youtu.be/xhmKg2eFSlw

김광석 – 사랑했지만


  사랑했지만.... 석호를 사랑했지만.... 이제는 가까이서도 볼 수 없고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가 없었다. 내가 남자라서.... 석호의 곁에는 아내가 있고, 석호는 그녀와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켜야 하니까 나는 정말 떠나야했다. 그것이 내가 석호를 내 마음대로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간주가 흐르고 후렴부의 가사가 화면에 떴다.


  ♬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


  점수가 나오기 전에 취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바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큰 가방 두 개를 들고 기차에서 내려 역 광장에서 특별시의 하늘을 바라보던 스물한 살의 내가 떠올랐다. 집에서 탈출했다는 기쁨보다 먼저 다가온 것은 의지할 데 하나 없이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막막함이었다. 석호가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떠난 지금 그때의 막막함이 또 나에게 엄습했다. 외로움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자유를 찾아 집을 떠난 것이 오히려 나를 가두는 속박이 된 기분이었다.


  죽지 않을 바에야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기에 이렇게 퍼질러져서 석호만 생각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석호가 결혼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하듯이 나도 그래야했다. 이제 제대로 된 직장도 잡았으니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면서 새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이 나를 위한 길이었다.


  노래는 한 곡만 부르고 노래방을 빠져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뻗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빨래를 돌렸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청소기도 돌렸다. 미뤄 놨던 설거지도 하고, 집 근처 슈퍼에서 삼겹살을 사다가 구워 먹었다. 또 설거지거리가 쌓였지만 맛있고 배부르게 먹었으니 상관없었다.


  발령을 받기 전에 연수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동사무소에 배치되었다. 나의 첫 업무는 인감증명을 발급하는 일이었다. 굳이 시험을 치고 연수까지 받아가면서 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심심하고 무료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면 왼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 버터 두른 프라이팬에 식빵을 구워 우유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점심은 동사무소 근처 밥집에서 달아놓고 밥을 먹고, 저녁에는 집에서 이것저것 만들어 먹었다. 매일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일 같지도 않은 일을 하고, 퇴근을 해서 TV를 보다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수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후는 빨래를 하는 날이고, 세탁기가 돌아갈 때 나는 청소기를 돌리며 집안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베란다에 빨래를 널어놓고 나면 할 일이 없어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2002년 월드컵을 한 달 앞두고 석호가 아들을 낳았다고 철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축하한다고 전해달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월드컵 경기도 나 혼자 내 방에서 봤다. 민구가 다른 밴드 공연도 보고 축구도 같이 보자고 연락이 와도 밀린 업무가 많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라는 표현이 정말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내 일상을 생각해보면 이것만큼 나에게 어울리는 표현이 없었다. 집, 직장, 집, 직장, 집, 직장, 집, 직장, 노래방, 집, 직장, 집, 직장, 집, 직장, 노래방, 집.... 이런 패턴이 무한반복이었다. 그나마 노래방에 가는 것이 나의 소소한 일탈이었다.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라고는 밴드 멤버들밖에 없었으니 경조사 같은 데에 참석할 일도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일부러 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차피 나는 결혼 같은 걸 할 일이 없으니까 그랬다. 내가 지불한 부조금을 회수할 수 없다는 계산적인 생각에서였다.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석호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부러 밴드 연습실에 놀러가지 않았다. 정말 보고 싶어서 일상에서 탈출도 할 겸 애기 낳은 것을 핑계로 한 번 놀러갔다가 더 큰 그리움만 안고 돌아왔기에 안 가고 안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지내는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해가 바뀌었다. 벚꽃이 흐르러지게 폈다가 허망하게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봄비에 모두 휩쓸려가서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였다. 철우에게 연락이 왔다. 석호가 낳은 아이의 돌잔치가 금요일 저녁에 있으니 오랜만에 얼굴 한 번 보자는 내용이었다.

  친구라고는 밴드 멤버들이 전부여서 이들의 경조사에는 항상 참석을 했다. 계산적인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사이였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현금보다 그래도 돌잔치에 어울리는 것은 금반지였으므로 철우의 아이들에게도 그랬듯 석호의 아이를 위해 금반지를 샀다.


  “야, 이영기.... 너 진짜 너무 하는 거 아냐? 이런 때만 얼굴 비치고....”


  철우가 큰아이를 데리고 입구에 서 있다가 나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미안 미안 바빠서....”


  “씨.발, 공무원이 뭐 바빠? 인감증명을 24시간 떼주냐?”


  잔소리가 이어질 것 같아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민구는? 오늘은 공연 못하는 거네?”


  “오늘 같은 날 공연은 무슨..... 민구 안에 있어. 아까부터 와서 먹고 있다고.... 너도 빨리 가서 먹어.”


  “너는?”


  “니가 육아의 고통을 알 리가 없지.... 너 빨리 밥 먹고 우리 애 좀 봐줘....”


  뷔페 안으로 들어서니 민구가 손을 흔들었다. 몇 가지 음식을 챙겨 민구의 맞은편에 앉았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철우의 아내 영지가 작은아이를 안고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서둘러 접시를 비우고, 영지에게서 작은아이를 받아 안았다. 자기 엄마를 닮아 이쁘장하게 생긴 딸아이였다.

  영지가 접시에 음식을 챙겨 테이블에 놓고 바깥에 있던 철우를 데리고 왔다. 큰아이를 옆에 앉혀 놓고 음식을 먹이며 자기도 같이 먹었다. 철우는 재빨리 접시를 비우고, 한 번 더 음식을 날라다가 또 비웠다. 그동안 나는 철우의 딸아이에게 잼잼 도리도리 등을 시키며 놀았다. 철우의 아내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내게 한 마디를 던졌다.


  “영기 오빠도 빨리 결혼해서 애 낳으세요. 그렇게 애를 좋아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애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여러 명이 되는 조카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명절 때나 보는 조카들은 내가 낯설기도 했을 테고, 내가 자기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나에게 오지도 않았다.

  내가 철우의 아이를 안고 있는 건 철우 부부가 식사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차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가 나를 보고 웃는 모습이 너무나 이쁘고 귀여웠다. 내가 딸아이 앞에서 도리도리를 하고 잼잼을 했다.


  “영기야, 하늬 나한테 주고 너 더 먹어.... 하늬야 일루와. 오빠랑 놀자....”


  민구가 철우의 딸 하늬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민구에게 건네주려고 팔을 내미는데,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계속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철우가 민구를 향해 타박을 했다.


  “씨.발, 오빠 같은 소리하고 있네....”


  바로 영지가 앙칼진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오빠~ 내가 애들 앞에서 욕하지 말라 그랬지?”


  “미안 미안.... 진짜 얘들 앞에서는 욕이 저절로 나온다니깐.... 민구 너 한 번만 더 우리 하늬한테 오빠 소리했다가 너 혓바닥 잘라버린다.”


  영지가 또 소리를 질렀다.


  “오빠~~~~”


  “미안 미안.... 그나저나 우리 하늬 벌써부터 이렇게 눈이 높아가지고 어쩌나.... 어린 게 잘생긴 건 알아가지고....”


  “영기 오빠, 소개팅 하실래요? 하늬 돌잔치 때 오빠보고 나한테 계속 소개해 달라는 선생 하나가 있어서.... 오빠도 결혼할 때 됐잖아요.”


  내가 대답을 하기 전에 민구가 끼어들었다.


  “나는?”


  영지가 민구를 째려보며 쏘아 붙였다.


  “오빠는 사귀는 사람 있잖아요. 올해 안에 결혼 생각하는 사람이 무슨 소개팅이에요?”


  민구가 억울한 듯이 영지에게 말했다.


  “얘도 만나는 사람 있을 걸? 인물값 한다고 얼마나 바람둥인데....”


  전혀 사실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민구가 고마웠다. 철우가 결혼을 하고 집들이를 할 때도 영지가 자기 친구들이랑 나를 연결시키려고 귀찮게 했기 때문이었다. 철우는 내가 안고 있던 하늬를 받아가며 민구에 이어 나를 도와줬다.


  “영기 눈 엄청 높아. 웬만큼 안 이쁘면 거들떠도 안 봐.”


  “하여간 남자들이란.... 이쁜 건 한 때야. 솔직히 영기 오빠도 서른 넘어가니까 좀 그렇잖아. 학교 다닐 때 오빠 연습실 가서 영기 오빠 처음 보고 사람이 아닌 거 같았는데, 지금은 딱 봐도 사람이잖아.... 영기 오빠, 진지하게 한 번 만나 봐요. 학교 선생이면 직업도 좋잖아요. 오빠가 공무원이라고 하니까 걔도 좋아하던데....”


  평소 내 성격 같으면 딱 잘라서 거절을 하면 되는데, 철우의 아내라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슬며시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나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나 챙겨주는 사람은 영지 너밖에 없네. 고마워....”


  석호가 아이를 안고 은정이와 함께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영기 너 온 거 아까 봤는데, 인사하느라고 아는 척을 못했어....”


  석호가 안고 있는 아이는 통통한 몸집에 얼굴이 똘망똘망했다.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아는 듯이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나는 주머니에서 금반지를 꺼냈다.


  “애 이름이 영오?”


  “응. 나 많이 닮았지?”


  “응.... 영오야~ 아저씨가 너 선물 사왔어. 생일 축하해~~~”


  나는 이미 손가락에 금반지를 몇 개 끼우고 있는 영오의 손에 작은 상자를 쥐어줬다.


  “한 번 안아 볼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박수를 두 번 치고 팔을 벌렸다. 영오가 손을 뻗으며 나에게 안겼다. 정말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하늬보다 더 무거웠다. 은정이가 밝은 얼굴로 석호에게 말했다.


  “신기하네....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가려고 하더니 영기 오빠한테는 낯을 안 가려....”


  “그러네.... 잘됐다. 우리 빨리 밥 먹자.”


  석호와 은정이가 우리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계속 영오를 안고 있었다. 민구와 철우가 손을 뻗어도 영오는 가지 않았다. 영오는 영지마저도 거부를 했다. 한 번은 민구가 억지로 안아보려다가 크게 우는 바람에 나는 영오를 안고 등을 토닥이며 다독여야 했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까칠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막 떼쓰고 운다니깐....”


  철우가 깔깔 웃으며 석호를 놀리듯 말했다.


  “유전자의 힘이네. 천하의 황석호 아들인데 당연히 자기 맘대로 해야지. 석호 너도 이제 니 맘대로 못하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철우의 말을 은정이가 냉소적으로 받았다.


  “글쎄.... 죽을 때까지 알면 다행이고....”


  “야~”


  석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영지가 화제를 돌리며 막았다.


  “영기 오빠 정말 애 잘 보네.... 영기 오빠 데려가는 여자는 정말 복 받은 여자야. 잘생겼지, 착하지, 애도 잘 보는데.... 영기 오빠, 요즘 혼자 밥도 해먹고 살죠?”


  “응.”


  “오빠는 요리도 잘할 거 같아요.”


  “아냐, 그냥 나 혼자 먹을 만할 정도?”


  “안정적인 직장에 집도 있으니까 결혼만 하면 되네요. 빨리 지금 만나는 여자랑 결혼해요. 미루면 미룰수록 여자만 힘들어져요. 민구 오빠 결혼하기 전에 영기 오빠가 먼저 하세요. 호호호호....”


  민구가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영지는 영기만 챙기고, 나는 안중에도 없어.”


  철우가 웃으며 민구를 놀렸다.


  “당연하지. 니가 여자래도 너보다 영기를 챙길 거 아냐.”


  은정이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민구를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민구 오빠, 난 아냐. 난 민구 오빠가 훨씬 좋아. 얼굴 뜯어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남자가 힘이 좋아야지.”


  은정이의 말을 철우가 받았다. 아내인 영지 편을 들어주려는 의도와 평소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농담처럼 가볍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 속에 뼈가 있었다.


  “아이구야, 힘이 좀만 더 좋았으면 누군 쌍둥이 낳았겠네.”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아 나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근데 아직 베이스 없어?”


  내 질문에 민구는 헛기침을 하고, 석호는 잠자코 먹기만 하고, 철우가 답을 했다.


  “영기 너 덕분에 내가 소원성취를 했잖아. 요즘 내가 기타 쳐.”


  “베이스는?”


  “석호가.... 진짜 기타 치니까 밴드 할 맛이 더 나는 거 같아. 역시 밴드는 기타야....”


  기타, 드럼, 베이스.... 가장 단촐한 밴드 구성이었다. 철우의 건반 실력이 남달라 잘 받쳐주니까 석호는 마음 편하게 편곡을 할 때 키보드 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요소요소에 배치를 했었는데, 키보드가 빠진 사운드는 좀 밋밋할 것 같았다. 나는 석호 편을 들어주기 위해 철우를 타박했다.


  “너는 피아니스트 해도 될 정도면서 어떻게 키보드를 버리고 기타를 치냐? 사운드 많이 비겠네....”


  한동안 말이 없던 석호가 갑자기 화를 내는 것처럼 나한테 쏘아붙였다. 석호 편을 들어준다는 것이 오히려 석호를 건드린 셈이었다.


  “씨.발, 그게 걱정되면 니가 와서 베이스 치든지....”


  석호의 씨.발 소리에 영지가 바로 타박을 했다.


  “오빠, 애들 있는 앞에서는 제발 욕 좀....”


  “에이 씨....”


  석호가 들고 있던 젓가랏을 테이블에 탁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민구가 나에게 찡그린 표정을 한 번 짓고는 석호를 따라갔다. 철우가 한숨을 쉬고 나에게 말했다.


  “야~ 그런 말은 왜 해? 석호 성격 몰라? 니가 진짜 밴드 나가더니 감 떨어졌네.... 말이 그렇지 내가 기타 치고 싶어서 치냐? 어쩔 수 없이 치는 거지.... 너 나가고 나서 베이스 세 명 들어왔다가 적응 못하고 다 나갔어....”


  사운드가 비는 원인이 바로 나였는데, 사운드에 집착하는 석호 앞에서 내가 사운드가 빈다는 소리를 했으니 석호가 화낼 만 했다. 너무 미안했다. 나는 밴드를 나가서도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석호를 힘들게 하는 존재였다.


  이벤트 직원이 은정이에게 다가와 행사 시간이 되었다고 말을 전했다. 은정이는 내게서 영오를 받아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우~ 내가 저 인간 성질머리 때문에 못 살아....”


  철우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은정이에게 감정이 담뿍 담긴 말을 던졌다.


  “애 엄마가 애 안고 그런 말하면 안 되지.... 석호는 내가 찾아올게.”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철우를 따라갔다. 석호는 민구와 담배를 피우고 있을 터였다. 나도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흡연 장소로 가는 동안 철우에게 한 마디를 했다.


  “은정이한테 왜 그래....”


  “씨.발년이 말하는 게 밉상이잖아. 좋다고 따라다녀 놓고 지금에 와서는.... 석호가 엄청 스트레스 받아. 집에도 잘 안 들어가는 것 같더라. 연습실 가면 소파에서 자고 있을 때가 많아.”


  “옛날에도 자주 그랬잖아. 내 방에 와서 많이 자고 갔으니까....”


  “니가 결혼을 안 했으니 유부남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야, 황석호~~ 너 찾더라. 이제 시작할 거래.”


  석호는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우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민구도 나에게 타박을 했다.


  “영기 너는 석호 성격 제일 잘 알면서 그런 말을 해. 안 그래도 요즘 석호 스트레스 존.나 받는데.... 소문났는지 이제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어. 석호 저 새끼도 웃겨. 영기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연습시키면서 잘도 기다려주더니....”


  철우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그때랑 지금이 같냐? 그때는 재롱잔치였으니까 그런 거고 지금 그랬다가는 이 바닥에서 쫓겨나야지.... 영기는 우리한테 맞추려고 엄청 열심히 연습한 거 민구 너도 알잖아. 저번에 들어왔던 애는 나도 좀 그렇더라. 민구 너도 재수 없다고 그랬잖아.”


  “그치? 석호보다 더 잘난 척하는 사람 처음 봤어. 석호는 진짜 잘하니까 그런가보다 하지만 영기 반도 못 따라가는 게 존.나 깝쳐서 재수 없더라고. 나도 그런데 석호는 오죽 했겠어. 안 그래도 지 맘대로 못하면 꼭지 도는 놈인데....”


  “영기야....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너 다시 들어와라.”


  “그래 영기야 너만한 사람이 없어. 다른 밴드 뗌방해 주러 갔을 때도 너만큼 안 맞더라.”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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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진짜 잘 쓰신다..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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