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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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집착과 광기 (1)
“오빠, 이제 민재 아저씨 편하게 만나.”
학원 마치고 들어온 지은에게 쥬스를 따라주려던 재은이 들고 있던 컵을 놓칠 뻔했다. 그동안 자신과는 말 한마디 섞으려고 하지 않던 동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오빠, 하고 부르더니 불쑥 민재 형 얘기를 꺼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재은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라앉히며 다시 물었다.
“말 그대로야. 이제 내 눈치 보지 말고, 아니 누구 눈치도 보지 말고 민재 아저씨 편하게 만나라고.”
“아, 아니야. 나 이제 그 사람 안 볼 거야. 내가 그 사람을 뭐하러 봐.”
내가 민재 형을 보면 너랑 아버지가 힘들잖아. 차라리 내가 힘든 게 나아.
그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아휴, 오빠 바보야? 왜 맨날 오빠만 희생하려고 해? 아빠랑 나도 오빠가 행복하길 바라지 불행하길 바라지 않아.”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너 갑자기 왜 그래?”
“난 오빠가 이제 좀 당당해지면 좋겠어. 오빠도 할 만큼 했잖아. 엄마 돌아가시고 아빠 몸 안 좋아지시고 난 이후로 오빠 어깨가 무거웠던 것, 나도 알아. 어린 마음에 오빠가 고생하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겼어.”
“지은아….”
가슴이 뭉클하며 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톡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해, 오빠. 지난번에 내가 철없이 얘기했던 것도. 내가 보기에 민재 아저씨 좋은 사람이야. 오빠를 정말 행복하게 해 줄 사람으로 보여. 그러니 오빠도 우리 눈치 보지 말고 이제 오빠 행복을 찾으라고.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 알콩달콩 살면 그게 바로 아빠와 내가 바라는 거야.”
눈물이 기어이 툭 터졌다.
지난 한 달간 했던 마음고생이 동생의 말 한마디에 다 보상이 되는 것만 같았다.
“우리 지은이, 다 컸네. 이렇게 어른스러운 말도 할 줄 알고.”
재은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몸을 돌렸다. 기쁜데도 자꾸 눈물이 났다.
“미안해, 오빠. 그동안 마음 아프게 해서.”
지은이 재은을 살짝 안아주었다. 지은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묻어 있었다.
재은이 손등으로 얼른 눈물을 닦고 활짝 웃었다.
“고마워, 지은아. 오빠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게.”
“아니야, 오빠가 지금보다 더 이상 어떻게 열심히 살아? 그냥 이제는 조금 느긋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재은이 눈물 맺힌 눈으로 소리 내어 웃더니, 저를 안고 있는 지은의 머리를 헝클었다.
“요즘은 학원에서 수능 안 가르치고 딴 거 가르쳐? 왜 이렇게 애늙은이가 됐어? 징그럽게.”
“흥! 오빠 동생 조숙한 거 다행으로 생각해. 나니까 이렇게 오빠 밀어주는 거야.”
이제야 내 동생 같다. 또랑또랑하고, 말 한마디 안 지는 귀여운 내 동생.
“그래. 네가 내 동생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재은이 지은의 어깨를 토닥이며 웃었다.
“오빠, 연애의 기본은 밀당인 거 알지? 내가 오빠보다 연애 경험이 많으니까 잘 들어 둬. 아무리 상대방이 좋아도 절대로 먼저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돼. 먼저 티를 내는 사람이 지는 거야. 알겠지? 그러면 상대방이 애가 타서 내가 해달라는 것 다 해주게 되어 있어.”
“어이쿠, 이 녀석. 그래서 그동안 성한이가 맨날 네 숙제랑 필기랑 해준 거구나?”
재은이 웃으며 지은의 뺨을 잡아당기자 지은이 아파, 하고 머리를 뺐다.
“참, 요즘 성한이는 안 만나?”
“흥! 남의 뒤나 쫓는 녀석, 뭐가 아쉽다고. 오빠도 걱정하지 마. 지난번에 그일 있고 나서 성한이에게 바로 얘기했어. 그일 혹시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거나 사진 유포하면 바로 절교라고. 그랬더니 얼굴이 노래져서 싹싹 빌더라고.”
“그래?”
“그럼! 걔가 그 얼굴로 어디 가서 나같이 예쁜 애 만나겠어. 당연히 싹싹 빌어야지. 그리고 오빠 뒷조사한 거 내가 따끔하게 뭐라고 했어. 그래서 걔, 요즘 자숙 중이야. 호호호.”
“너 정말 무섭구나? 성한이한테는 그래놓고 나한테는 그동안 그렇게 인상 쓰고 있었단 말이야?”
재은이 억울하다는 투로 지은에게 눈을 흘겼다.
“나도 기분이 좀 그랬단 말이야. 세상 남자가 모두 게이라도 상관없지만 오빠가 그럴 줄은 몰랐으니까.”
‘게이’라는 단어에 재은이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오빠, 사거리 앞 ***커피숍에 빨리 가봐.”
“거긴 왜?”
“가보면 알아. 그리고 오늘 밤은 집에 올 생각 하지 마.”
지은이 빨리 가보라며 재은을 현관 문밖으로 밀어냈다.
“알았어. 갈게. 가볼 테니 밀지 마.”
답을 하면서도 재은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왠지 누가 있을지 알 것만 같다.
“아 참, 오빠.”
“응?”
지은이가 갑자기 두 손을 입가에 모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그거 할 때 콘돔은 꼭 끼고 해야 한다? 알지?”
그러더니 주먹을 꽉 쥐며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원, 녀석. 못하는 소리가 없다.
재은이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바람으로 식히며 걸음을 재촉했다.
****
민아는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동안 고은수 눈에 띄려고 엄청 노력했었다. 지금은 아무리 노력해도 3초짜리 단역 출연이 고작이다. 그것도 자주 없다.
하지만 인기스타 고은수가 피디에게 넌지시 말이라도 해주면 자신에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가 다가올 줄도 모른다. 다행히 고은수가 게이라서 개인적으로 알게 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뜻밖에 고은수가 먼저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거기까지는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계속 찜찜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재은이를 만나보고 싶다고 한 말 때문이었다.
고은수가 재은이를 만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민재의 여자친구가 은수의 누나였으니 좋은 이유로 만날 일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은수는 그런 민아의 걱정을 읽기라도 한 듯이 묻지도 않았는데 말해주었다.
“나는 우리 누나 연애사에는 상관없어. 그냥 지난번에 얼핏 봤는데 재은이라는 그 친구, 외모가 괜찮더라고. 마침 적당한 배역이 있어서 아는 피디에게 추천하려고 그래. 그때 너도 같이 해줄 게. 어때?”
귀가 솔깃해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리고 재은이 외모야 민아 자신도 늘 부러워했으니 고은수 말이 일견 납득가기도 했다.
그 녀석은 진작에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되었어야 할 얼굴이니까.
“이번 주 목요일 오후 세 시쯤 보는 게 어떨까? 내가 그때만 스케줄이 비네. 너네들 일정도 있을 텐데 일방적으로 정해서 미안해.”
“아니야, 당연히 우리가 맞춰야지.”
톱스타가 자신들을 만나준다는데, 그것도 피디에게 소개해 준다는데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시간을 내야지.
“그래. 그리고 재은이에게는 나랑 같이 본다는 얘기는 미리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서프라이즈면 더 좋잖아?”
민아는 은수의 말에 설득되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재은과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재은은 민아를 만나려고 일부러 목요일에 휴가를 내기로 했다. 민재와 다시 만나게 된 재은은 목소리가 밝았다. 민재에게 조언을 해 준 사람이 민아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그 짠돌이 녀석이 만나면 밥을 사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지금까지는 별문제 없다. 두 사람이 다시 보게 된 것은 정말 축하할 일이고, 재은이가 다시 활력을 되찾은 것도 기쁜 일이다.
그리고 이번 일이 잘되어 재은이와 자신이 연예계에 데뷔할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뭐가 있을까.
하지만 왠지 자꾸만 불길한 느낌이 든다.
“후-”
민아가 재은을 기다리며 심호흡을 내쉬었다.
“고은수에 대한 소문이 안 좋아서 그런가? 직접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민아는 인터넷에 떠돌던 고은수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마약에 손대고 그룹 섹스를 즐기는 데다 싸가지 없기로 유명한 연예인.
자신이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매니저 무릎을 꿇리고, 선후배들 무시하고, 팬레터는 읽지도 않고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 자기 같으면 인기를 얻을수록 더 조심할 것 같은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소문이란 어차피 돌면 돌수록 부풀리게 되니까.
민아는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나온 민아가 재은을 기다리고 있는데 은수에게서 문자가 왔다.
- 내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다음에 봐야 할 것 같아. 미안. 재은에게는 내가 연락했으니 따로 할 필요 없어.
어쩐지 너무 술술 일이 풀린다고 했다. 뭐, 인기스타를 만나는 일인데 약속 시간 한번 변경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자신보다 재은에게 먼저 연락한 게 좀 의외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재은이에게 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은 벌써 눈치챘다. 그래도 고은수와 이렇게 말까지 놓으며 문자를 주고받는 게 어딘가.
- 괜찮아. 다음에 시간 될 때 봐.
고은수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민아가 몇 번을 고치며 신중하게 문자를 보냈다.
****
재은은 간만에 민아를 만날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수다스럽기는 하지만 속이 따뜻한 민아가 아니었다면 민재와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만나면 정말 맛있는 걸 사줘야겠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장소가 좀 의외다. 시내에서 보자고 한 게 아니라 인적이 드문 **동 인근 공원에서 보기로 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 근처에 고급 레스토랑이 좀 있는 것도 같다.
밥 산다고 했더니 이 녀석이 일부러 그런 데를 골랐나,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비싼 것도 흔쾌히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 간만에 이 형님이 칼질 좀 하게 해주마.
민아와 보기로 한 카페는 공원 뒤쪽 한적한 숲길을 좀 걸어야 나오는 곳이었다. 간만에 조용한 숲길을 걸으니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여름이 성큼 다가와서인지 나무마다 초록이 무성했다.
좁은 숲길에 차가 한 대 나타나더니 길 한복판에 멈췄다. 그때까지도 재은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인적이 드문 길이기는 하지만 차도였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설재은씨?”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지? 의아한 생각이 든 재은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머리 뒤를 내리쳤다.
불에 덴 듯 화끈한 통증을 느낀 재은이 순간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재은을 잽싸게 차에 실었다.
****
머리가 깨지는 듯이 아팠다. 간신이 들어 올린 눈꺼풀이 무거웠다. 사물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고 두 겹, 세 겹으로 겹쳐 보였다.
“정신이 들어?”
누군가 앞에 앉아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는 유리잔을 든 채.
시야가 점점 뚜렷해졌다. 눈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뜻밖에 인기스타 고은수였다.
“읍!”
재은이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두 손은 등 뒤로 묶여 있었다.
갑자기 오싹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두 팔은 왜 묶였는지, 그리고 고은수가 왜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지.
일인용 안락의자에 앉은 고은수가 입가에 조소를 떠올리며 발을 까닥거렸다.
“생긴 게 좀 봐줄 만하긴 한데…. 그래도 너무 촌티 나잖아?”
고은수가 재은 앞으로 다가오더니 재은의 턱을 들어 올렸다.
턱이 들린 재은은 꼼짝도 못 하고 은수와 눈을 마주쳤다. 두려움에 질린 재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본 은수가 기분 나쁘게 웃었다.
“피부 하나는 야들야들한 게 끝내주네. 뭐, 내 취향은 아니지만 울면서 질질 싸는 모습은 좀 볼만하겠네.”
그리고는 옆을 보며 말했다.
“어때? 좀 땡겨?”
그때까지 옆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재은이 은수의 시선을 따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는 키 185가 넘는 건장한 남자 세 명이 속옷만 입고 선글라스를 쓴 채 재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차에서 내렸던 남자들 같았다. 세 명 모두 한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문지르고 있었다.
“크크크, 맡겨만 줘. 최상의 쇼를 보여줄 테니까.”
“너도 준비됐어?”
고은수가 재은의 뒤쪽을 보며 말했다.
“그럼. 준비 완료됐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재은이 두려움에 질린 채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안녕, 예쁜이?”
누군가 비디오카메라를 들이댔다. 재은이 놀라서 벌떡 일어서려고 하자 선글라스 남자들이 재은의 어깨를 눌렀다. 힘이 무지막지했다.
재은이 비명을 질렀다.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농아들이 내는 것과 같은 불분명한 소리만 터져 나왔다.
고은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시작해볼까? 재은이 너 방송에 데뷔시켜 주려는 거야.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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