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아파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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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전화에 대고, 한번 갈까? 하는 것은 내가 보고 싶다는 말이다. 살다가...그의 마음이 어느 순간에 과거의 나에게로 돌아서는 일이 있을까...
하지만...내가 보낸 사람...내가 나의 발을 움직여 떠나온 사람...그 누구도 우리들 사이의 불꽃을 몰라, 그의 옆에 있지 말라고 한 사람이 없지만...나...세상이 두려워...세상의 법칙대로 그를 떠나보냈기에...한번 갈까, 하는 그의 말이 내가 보고 싶다는 말인 것을 잘 알지만 선뜻 대답할 수 없다.
혹...나중이라도 그의 한번 갈까? 하는 말이 이곳은 힘들고 외로운 곳이라는 말만 같이 들리지 않기를...그래서 그의 결혼이 쓰라린 상처처럼 생각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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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아파트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탄다. 예정대로라면...내일 그가 나의 자취방으로 오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의 전화를 받고 내가 아파트로 내려간다.
"진호야, 이번 주는 니가 와야 겠는데...선생님이 이번 주는 바빠서..."
'무슨 일이 있나...'
나...오후 8시가 되어서야 아파트에 도착한다. 현관문 손잡이가 열려 있다. 그를 부르며 현관을 들어서니 그가 식탁에 앉은 채 나를 맞는다. 나...그에게로 다가간다. 그는 말없이 나에게 식탁위로 눈치를 준다. 식탁 위에 놓인 것을 보라고...
나, 식탁 위에 놓인 편지 봉투를 본다. 그는 나의 눈치를 살피고...나, 그 편지 봉투를 집어 든다. 입영 통지서...
"언제야?"
"곧 인데요? 생각보다 촉박하게 나왔네..."
"어떻게 할거야?"
"......"
나, 그의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 없다. 그가 나의 손을 잡아끌며...식탁에 앉아 보라고 한다.
"갈 거지? 진호야...어? 그러니까...선생님도 군대문젠 조심스러운데...갖다 오자, 우리."
"우리요?"
"아니...내 말은 그러니까...니가 군대를 갔다 왔으면 한다는... 넌...성격도 강하고 몸도 튼튼하지까...뭐 마지막 결정은 니가 하는 거지만..."
"예...저도 군대는 갔다 오려고 했어요...한번도 가지 않겠단 생각 해본 적 없구요. 그런데 3학년 마치고 가고 싶어요. 아님 졸업부터 하든가..."
"그래...선생님은 진호 결정 믿어."
그의 손이 나의 어깨로 와 토닥이며, 그가 보낸 미소를 올려놓는다.
"우리...내일은 외식이나 할까?"
"예...좋아요."
나...군대 가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정말 그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그와 헤어져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다음 날 날씨는 조금 더운 듯 하다. 그와 나...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아파트를 나선다. 아파트 상가를 가로지르며 걷던 우리 두 사람 앞으로 하얀 블라우스가 슥, 지나간다.
"저...기. 안녕하세요."
그와 나...뒤돌아본다. 색종이와 도화지 뭉치들을 말아 쥐고 선 여자가 우리를 보고 인사를 한다. 나...그 여자가 낯설어...그를 본다. 내가 그를 보았을 땐, 이미 그의 얼굴에 반가움의 기색이 역력히 피어난 후였다.
"아! 안녕하세요. 교재 준비하시나 봐요?"
"예...어디 가세요?"
나...나를 비켜 세운 채 이야기를 하는 그와 여자를 본다. 나...잠시 무안한 기분이 들어...발 끝에 걸리는 돌 하나를 가볍게 툭, 차 본다. 그와 여자 다시 인사를 하고...뒤돌아 선다.
"누구예요?"
"몰라? 그 여자야. 요 앞 유치원 선생님...왜 비오는 날..."
"...아!"
"...좋은 여자야..."
나...그의 얼굴에 번지는 흐뭇함을 놓치지 않는다. 그의 팔이 장난스레 나의 어깨를 감싼다. 마냥 즐거운 그의 얼굴...앞을 보고 걷는 그의 옆모습을 나...한참을 쓸쓸하게 바라본다. 나...그녀가 '그냥 좋은 여자' 이기를 바란다.
식당에서 나는 그녀에 대해 묻는다. 어떻게 친해지게 됐어요? 그날 이후 만나셨어요? 어떻게 좋은 여자예요?.....나의 질문에 그는 처음에 순순히 대답을 한다. 아파트 앞에서 퇴근길에...지나치다...몇 번 마주쳤었노라고...그녀가 고맙다며 차 한잔을 사 줘...같이 마셨었다고...하지만 그는 집요해지는 나의 질문에 끝끝내는 퉁명스럽게 왜? 한다. 순간 나는 그가 내 마음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알고 나서부터 그는 갑자기 무언가가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 즈음 나는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이말 저말을 섞어 하는 그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나...그가 안쓰러웠다. 나는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차마...상대방에게 비수를 꽂을 수 없는 그...그렇게 세상에 태어나 삼십 년을 넘게 그렇게 살아온 사람. 언제부턴가...나...먼저 그에게 비수를 꽂으리라 다짐했다.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33-
2학년이 된 나...그녀가 일한다는 유치원에 간다. 그날 내가 그곳에 왜 갔었는지는 나도 그때의 내 심정을 잘 말할 수 없다. 하지만...나...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내내 궁금했다.
상가 옆에 자리한 유치원은 꽤 큰 규모다. 처음부터 아파트 단지 내 아이들을 모두 수용할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은 한눈에 봐도 유치원처럼 아기자기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나, 안으로 통하는...꼬마아이들의 높이게 맞춰진... 짧고 낮은 계단을 한 칸씩 밟아 오른다. 깨끗한 통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교실 여기저기에서 짹짹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노래 소리가 복도까지 새어 나온다.
"어떻게 오셨어요?"
단발머리를 한 작은 체구의 여자가 내 앞을 지나치다 묻는다.
"여기...저...사람을 좀 찾아 왔는데요. 이름은 모르겠고...아!...머리가 길고...키가 작진 않은데, 어깨가 좁아서 좀 말라 보이는 여자 분인데...목도 긴..."
"아! 김선생님 찾아 왔나 보다아...저기 복도 끝 교실에 있는데...불러 드릴까요? 지금 그 반 놀이 중인데..."
"아니에요...저...그냥 한번 밖에서 봐도 됩니까?"
"그럼요...어머니들 그렇게들 보고 가곤 해요."
나...그녀가 있는 교실 안을 들여다본다. 그녀는 샛노란 면 티에,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펄럭이는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있다. 나...교실 반대편으로 밝게 들어오는 봄 햇살을 가르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 그녀의 뒤를 따라 병아리처럼 뛰어 다니는 아이들...나....봄 햇살을 이겨내는 그녀의 웃음을,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여 본다. 나, 순간 그녀의 무엇을 보았을까...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좋은 여자야...좋은 여자야...그리고 가끔가다 그녀의 이야기를 하던 순간의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그 건물을 빠져 나온다.
나의 머릿속에는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않으면...아이들 앞에서 그런 웃음을 지을 수 없는 그녀의 웃음이 지워지지 않는다. 나...어깨에 멘 가방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나는 그때 알 게 된다.
그가...그녀의...저런 모습을 좋아하는 구나.
그해 봄...그의 아버지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세상을 떠난다. 오랜 병을 앓던 그의 아버지...또 한번의 추운 겨울을 잘 버티어 냈지만...잔인하게 풀어지는 봄 햇살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그와 그의 가족에게서 떠나버린다. 나...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무너지는 그를 본다. 나는 무너진 그의 등뒤에서 아버지의 죽음보다 슬픈 그의 흐느낌을 이겨내려 애쓴다. 나...서른이 훌쩍 넘은 남자가 바닥에 몸을 구기고 우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의 슬픔이 내 가슴으로 물결치듯 밀려든다.
그...아버지를 산에 묻고 내려오면서 눈가가 다시 젖는다. 나를 보던 그의 입술이 순간 실룩거린다. 내 앞에서 울음을 이겨내려 애를 쓰는 그의 손이 다가와 내 손을 잡을 때...나, 그의 손이 차가워 마음이 아프다.
나는 산을 내려오면서...하관을 지켜보던 그의 어머니...머리가 하얀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떠올라 가슴 어딘가를 둔중한 무엇으로 강타당한 심정이 된다. 그 머리가 하얀 미망인의 울음...통곡 소리...아들 장가드는 것도 못 보고...며느리 밥도 못 먹어 보고...하던 그 소리...
나, 그의 손을 한번 꼭 잡아 본다. 그리고 내가 먼저 그의 손을 놓는다. 점점 더 앞서 걷게 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 흐르는 눈물 때문에 어른거리던 그의 까만 양복자락을 찾을 수 없다. 그 순간 나는 다짐한다.
상을 치르는 3일 내내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던 저 남자...아버지의 영정을 끌어 앉고 아이처럼 울던 저 남자...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저 남자인 것이 다행이라고...저이가 내 선생님인 것이 다행이라고...하지만... 나...이제...그를 놓아주리라...고.
..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며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 김소월, <먼 후일>-
-34-
나, 그와 그녀...이렇게 셋이서 저녁식사를 하게 된다. 일주일에 한번 그의 아파트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게 된 후에 자주 갖게 되던 외식자리에 나...그녀를 부르자고 제안한다.
"그분도 불러요. 우리."
"누구?"
"유치원...그 분."
"...싫다..."
"왜요. 전 좋은데...선생님도 좋잖아요."
나는 식사 내내 얼굴이 굳어버린 그의 눈치를 살핀다. 말없이 고기만 썰어대는 그의 행동에 그녀가 조금 무안해졌는지...
"죄송해요. 제가 눈치도 없이..."
"아니에요. 선생님이 먼저 부르자고 했는걸요. 선생님...돈까스 맛있죠? 저희 선생님은 돈까스 말고 다른 건 몰라요. 하하..."
그가 나를 째려본다. 하지만...나 그의 얼굴에서 전혀 싫지 않은...나를 째려보는 그 표정 옆으로 숨어있는 붉은 홍조를 본다. 숨어있는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는 그.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나...웃고 있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자꾸만 아려 왔다.
"선생님...저 먼저 아파트에 들어갑니다."
"왜...같이 가."
"선생님은 숙녀 분 가시는 것까지 보고 오세요."
나에게 등을 떠밀린 그와 그녀가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나를 등지고 걸어간다. 그녀가 한번 나를 뒤돌아보더니 꾸벅 인사를 한다. 나는 엉겁결에 손을 든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내리지 못하고 그만 버스정류장 앞에서 굳어버린다. 나...잘 하고 있는 거라고...그래...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생각한다.
나란히 걷는 그와 그녀...어느 새 밤이 깊어...사람들은 긴장이 풀린 모습들로 거리를 다닌다. 그 사람들 속에서 나는 그와 그녀의 모습에 눈을 쉽사리 떼지 못한다. 왠지...눈물이 날 것만 같아...손가락으로 코끝을 비벼본다.
나...다행이라고...그녀가...저 여자가 선생님과 잘 어울려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서...정말...정말...다행. 이. 라. 고...
그 여자...Y. J와는 다른 여자. 착한 여자. 어찌 보면 J보다 조금도 잘 난 것이 없어 보이는 그런 여자. 하지만 나...그녀에게서 그의 모습을 발견한다. 배려...섬세함... 그 여자 Y...목덜미와 어깨가 차분해서 금방이라도 공중으로 날아오를 것 같은 하얀 여자. 언젠가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내가 선생님 동생인 줄만 알았다고...닮아서 한 눈에 그렇게 생각했었다고...나...그녀에게서 그와 내가 닮았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녀...그렇게 말했다...왠지 두 분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닮았다고...그래서 보기 좋다고... 그녀 때문에 나...거울을 보면서 그의 모습을 찾아보는 버릇이 생긴다...
나...아파트로 돌아오는 길...5층을 오르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계단을 택한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언젠가 이렇게 계단을 걸어 그의 아파트로 가보겠노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늘이 되는구나...한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데...왜 이제껏 한번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나...이제 나의 자리가 되어버린 4층과 5층 사이의 그 계단을 밟고 선다. 갑자기 눈물이 나와...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나...이 자리에서 그를 기다리고...별을 보았지...그의 비밀한 모습도...나, 이 자리에서 이해하고...그를 닮은 배려의 마음을 키웠지...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며...하늘 위로 그리운 별 하나를 띄웠지...나...이 자리에서...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정호승, <수선화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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