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기차가 없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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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기는 무심히 창밖을 바라봤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기 소유의 승용차 한 대씩은 다 가지고 있는 요즘 기차를 수단으로 한 여행은 정말이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었다. 좁은 땅덩어리에 사방팔방으로 도로가 깔려 있으니 승용차를 이용하면 목적지가 어디든 쉽게 이동할 수가 있는데, 기차는 전혀 그렇지가 못해서 정해져 있는 기차 시간에 여행의 일정을 맞춰야 했으니 시간이 돈인 요즘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교통수단이었다.

  그래도 학기는 2년 전까지 줄곧 기차를 타고 여행을 했다. 앞서 오랜만이라고 했던 것도 사실은 2년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학기에게는 지난 2년의 시간이 20년처럼 느껴졌다. 극심한 삶의 변화 때문이었다. 정말 오랜 시간 내 사람이다 싶었던 애인 용주가 2년 전부터 변해버린 탓이기도 했다. 학기는 용주를 바로 돌려놓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학기가 이번 여행을 계획한 것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학기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주는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학기가 탄 기차는 도심을 벗어나 강을 끼고 달렸다. 대규모 하천 공사 이후 만들어진 자전거 길을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학기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코레일 앱을 실행했다. 최종 목적지에 가기까지 한 번 환승을 해야 했다.

  학기와 용주가 2년 만에 떠난 기차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경북 영주였다. 그곳은 학기와 용주가 처음으로 선택했던 여행지였다. 25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도 않았고, 뚜벅이 신세였던 학기와 용주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지 중의 하나였다. 두 사람 모두 흡연자였기에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기차를 선택했다. 그때는 객차 사이의 공간에서 얼마든지 담배를 피울 수 있었고, 심지어 비둘기호를 타면 객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25년 전 그때, 영주로 가는 기차에 오르는 학기와 용주의 손에 들린 것은 종이로 된 승차권이었다. 지금처럼 환승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영주까지 가는 직통이었다.


  용주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학기는 용주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렸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귀에 꼽고 있던 에어팟에서 이상은이 부른 ‘언젠가는’이 흘러 나왔다. 노래 가사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용주가 좋아하던 노래였다. 학기는 노래를 들으며 입모양으로만 가사를 읊조렸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


  “학기야, 이 가사 너무 좋지 않냐?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한 다발의 추억이 떠내려간다니.... 추상적인 관념이 구체적인 이미지로 확 와 닿잖아. 황동규의 시 중에 ‘조그만 사랑 노래’라는 시가 있는데, 첫 구절이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야. 이 짦은 한 문장에서 정말 많은 게 읽히잖아. 그냥 맨 것도 아니고, 동여맸대. 절대로 풀 수 없도록.... 이별의 편지를 받은 감정을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건지, 정말 시는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게 느껴져. 시간의 강 위에 추억 한 다발이 떠내려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잖아. 사랑이 끝나고 나면 고작 한 다발의 추억으로 남고, 그 추억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어.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형, 또 직업병 나온다.”


  “그런가? 근데 내 말 이해 돼?”


  학기는 용주를 사랑했지만 가끔 장황하게 설명을 하며 가르치는 듯한 화법은 정말 싫었다. 게다가 말을 잘 알아들었는지 다시 꼭 확인을 하는 데에는 학기의 고개가 저절로 저어졌다. 그래도 학기는 용주와의 사랑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다.


  “학기야, 나는 이런 멋진 표현을 절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너한테 이별의 편지를 쓸 일도 전혀 없고, 우리 사랑을 추억 한 다발로 묶어서 강물 위에 던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그걸 어떻게 믿어?”


  “너 공대 나왔으니까 너도 절대로 이런 표현 못하잖아. 이 정도 표현이 아니면 니가 이별 편지를 수백 통을 써도 나 안 받아줄 거야. 너 ‘정석가’ 학교 다닐 때 배워서 알지? 모래 벼랑에 군밤 다섯 되 심고 어쩌고 하는 거.”


  “응. 배운 거 같애.”


  “천 년에 비가 한 방울 내리는 사막에 홍수가 나면 그때 나 너한테 어제를 동여매는 편지를 보낼 거야.”


  “진짜 형 직업병 때문에 내가 질린다 질려. 정말 약도 없어. 누가 형 직업병 고치는 약을 개발하면 그때 그 약을 편지 봉투에 넣어서 이별 편지랑 같이 보내줄게. 토끼 머리에 뿔 날 때까지는 약이 개발되겠지?”


  이렇게 말이 많았던 용주였는데, 이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학기는 다시 용주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등받이를 젖히고 용주처럼 눈을 감았다. 기차가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달리듯이 학기의 머릿속에는 시간이 거꾸로 흘러 어느새 25년 전의 그날에 학기를 데려다 놓았다. 용주를 처음 만났던 그날이었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 글쓴이의 말


  사랑이야기 하나 들고 왔습니다.

  글을 올릴 때 어느 정도는 써놓고 올리는데, 이번에는 거의 실시간으로 올릴 것 같습니다. 그만큼 연재 간격이 길거라는 말이 되는 셈이지요. 연말이 되면 바빠질 것 같아서 구상을 해 놓은 것을 좀 일찍 풀어보려고 합니다.

  날아라 황석호가 노래 이야기였다면 이번 이야기는 여행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캐릭터의 직업이 비슷비슷해서 좀 식상한 면이 있기도 하겠지만 제 한계가 그 정도니까 양해 부탁드립니다.


  몇 개의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 ‘나는 꼰대다’입니다. 댓글 확인을 위해서 제가 올린 글을 클릭하면 모바일 환경이든 모니터 환경이든 화면을 가득 채우는 문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걸 보게 됩니다. 읽기도 전에 갑갑함이 확 다가오는 거지요. 줄간격을 넓히고 문장들을 중간 중간에 잘라서 배치를 하면 가독성이 훨씬 높아질 텐데, 그게 인터넷 상황에 맞는 것일 수도 있는데, 처음 글을 올릴 때부터 지금까지 화면을 문장들로 가득 채우고 있으니 속이 꽉 막힌 꼰대가 확실히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또 문장을 길게 쓰는 편이라 그 갑갑함이 더욱 가중될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가장 친한 후배한테 ‘기억을 걷는 시간’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후배는 일반이지만 제가 게이라는 것을 아는 녀석이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격이 까칠하고 지적질을 잘하는 녀석이라서 평가를 받기 위함이었죠. 제가 후배에게 던진 평가의 기준은 돈이 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후배에게서 ‘돈이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나왔습니다. 일단 ‘퀴어’라는 소재가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이고, 요즘 트렌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바로 제가 만든 문장이었습니다. 요즘 트렌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 문장 때문입니다. 짧게 짧게 단문으로 훅훅 넘어가야 되는데, 저는 그렇지가 않다구요. 한 마디로 갑갑하다는 말이죠. 문장이 길다보면 비문이 나올 수밖에 없기에, 그런 문장들이 눈에 거슬렸다고 하더군요. 인정했습니다. 저도 아는 것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기도 했구요.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약간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 항변을 좀 하고 싶어서 댓글이 어마어마하게 달리고 읽으면서 눈물 흘린 사람들도 꽤 된다고 과장을 좀 섞어서 말을 했더니 자기들 얘기니까 그렇겠지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을 하더군요. 제가 싸움을 좀 잘하면 때릴 뻔 했습니다. ^^


  얼마 전에는 또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선배한테 놀러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이 선배도 제가 게이라는 것을 알고 독서광인지라 책 얘기가 많이 나왔죠. 선배 사무실에 있는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퀴어로맨스 단편집입니다. 벌써 한 달이나 되었는데, 몇 장 읽다가 더 읽지를 못했습니다. 제 머릿속에 이런 게 요즘 트렌드구나 싶더군요.


  제가 썼던 것 중에 ‘기억을 걷는 시간’을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욕심이 좀 생겼었거든요. 중심 줄거리와 구성은 놔두고, 인물들이 성적 정체성을 깨닫고 고민하는 과정을 추가해서 개작을 한 다음 여기저기 응모를 해볼까 싶었어요. 그런데 마음을 접었습니다. 후배의 말대로 돈이 될 것 같지도 않고, 트렌드에 맞지 않아서요. 제가 꼰대라서 트렌드에 맞출 수가 없을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갑갑함을 참고 견디며 다 읽어 주시고, 공감도 해 주시는 독자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의미로 꼰대 같은 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랑 비슷한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이 제가 쓰는 글을 읽고 많이들 공감해 주시니 저에게 꼰대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기분 안 나쁘시죠?

  꼬장꼬장한 문장들로 이뤄진 국어 교과서로 공부를 하고, 다른 사람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란 마음과 엄청난 고민을 안고 세상의 편견을 꿋꿋이 버티며 여태까지 살아온 분들이니까 꼰대 맞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제가 쓰는 글도 이런 꼰대분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더군요. ‘날아라 황석호’는 처음부터 꼰대분들을 독자층으로 삼고 썼습니다. 좋아하는데 말도 못하고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영기와 석호가 바로 꼰대 당신들이니까요. 저도 마찬가지구요.


  공감해 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려고 했는데, 제가 꼰대라서 또 길어졌네요. 아무튼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몸 건강히 잘 지내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가 차려드리는 밥상에서 따뜻한 밥 한 술 떠 드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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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믿고 보는 글!

미리 감사드립니다. 잘보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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