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22) - 재영의 시선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경한이에 대한 속마음 중에 어떤 걸 말하고, 또 어떤 것은 말하지 못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분명한 것은, 절대 있는 그대로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 그 말하지 않은 만큼의 미련이 이자 불어나듯 불어난 지금이다.

 

 

*

 

 

‘그 때… 너무 무책임했어. 걔 입장에서는 누가 봐도…
같이 동고동락하다 나 혼자 잘 되니까 팽 하는 것처럼… 느껴졌겠지.
그렇게 보여도 싸. 날 욕해도 돼. 그러고 나서 훌훌 털고 앞으로 나아갔다면…’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러긴 어려웠겠지.

자존감에도 관성이 있어서, 고양되는 흐름을 타면 계속 고양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법.
그 당시 이미 자존감이 많이 낮았던 경한이에게… 내 이별 통보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머리로 뻔히 알면서, .

 

‘다시 그 나이의 경한이를 만난다면… 이번에야말로 힘이 돼 주고 싶어.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도록. 본인이 충분히 빛나는 사람임을 알도록. 그래서… 목표한 바를 이루도록…’

그렇지만, 역시 또 한 가지, 그걸 은석에게 ‘투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도 재영은 안다.

둘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고, 은석이 정말로 내 도움으로 잘 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은석에게 좋은 것이고, 또 내 마음만 편하자고 하는 것이지, 남겨진 경한이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거야.

그러니까… 합리적으로 행동하자면 지금의 반 동거도 그만두는 게 맞아. 그런데 그만두지 못하는 건…?

은석 씨에 대한 내 마음을… 정의하지 못하겠어. 그래서 그래.

그냥 좋은 동생인 건지, 그 몸이 좋은 건지, 너무 오래 혼자여서, 외로워서, 누구든 필요한 것뿐인 건지.

 

그래 이건… 경한이에 대해서도, 은석 씨에 대해서도, 예의가 아니야.

고작 일주일 만에 계약을 파기하기는… 좀 미안하긴 하지만, 은석 씨에게 다 솔직하게 얘기하자.
부지런히 운전해서, 은석 씨한테 가서, 말하자.

마음을 정하고 P에 놓여 있던 기어를 다시 앞으로 미는 재영.

 

‘아니 잠깐… 근데 그러면… 나랑 계약이 끝나면 은석 씨는 다시 마사지 일을 시작하는 건가?

남인데 무슨 상관이야, 라고 하기엔, 정의는 못했지만 은석 씨에게 어떤 형태로든 ‘정’이 든 건 분명한 상황.

은석 씨가 다시 그 일에 손댄다고 하면… 그건 또 엄청 불편하다고.

다시 기어를 P에 맞추는 재영.

 

“하… 씨…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얼마나 고민했을까. 재영은 결국, 아래와 같이 마음 먹는다.
‘… 이런 식이면 날 새겠다. 차라리 저 술집에서 마저 고민해서,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자.
그 자리에서, 경한이에 대한 잘못된 집착도 완전히 털어내.

그리고 은석 씨에게 상처 주지 않으면서 이 관계를 끝내되, 다시 마사지 일에 손대지 않게 할 방법을 찾아보자.
그래서 내일, 그만 하자고 은석 씨한테 얘기하자.

은석에게 톡을 남기는 재영.

(재영) ‘은석 씨, 오늘은 좀 늦을 거 같아요. 9시 되면 먼저 들어가요.

 

 

*

 

 

“네 어디까지 가시나요 손님?

XX OO **하우스요-.

레몬소다만 마신다더니, 잔뜩 취한 재영. 그래도 대리 부를 정신은 있어서, 대리를 불렀다.

 

이쯤 되면 독자들도 진작 느꼈겠지만, 일상적인 부분에서는 자기와의 약속에 철저한 재영도,

남자 문제에 있어서는 그게 유난히 엉망이 되곤 한다. 일종의 아킬레스 건이랄까.

그걸 재영 자신도 은연 중에 알고 있었기에, 경한이랑 헤어질 때 제대로 처리 못한 감정을

무의식 저편에 묻어두고, 그만큼 쫓기듯 일을 열심히 해 온 것일 터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은석을 만나며 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 언젠가는 해결했어야 할 감정이지만.

 

 

*

 

 

창가의 매미 소리에 눈을 뜬 재영. 눈을 찌르는 듯한 햇살.

 

‘뭐지, 몇 시지.

시계를 보니, 아홉 시. 하… 주말에 이 시간에 일어난 적이 손에 꼽는데. 운동을 이따 저녁에 가야 하나…

어쩌다 이렇게 됐지. 아… 어제… 마셨지.

아 잠깐. 아홉 시? 은석 씨 왔나 그럼?

 

벌떡 몸을 일으키는 재영. 드로즈 한 장만 걸친 채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은석.

 

“아… 은석 씨 왔어요? 근데 왜 팬티만 입고 있어요.

대답 없이 고갯짓으로 방 한 쪽을 가리키는 은석.
따라가 보니 빨래 건조대에 걸린 티셔츠와 반바지. 아마도 은석의 것.

 

아 망할. 다 기억났다. 나 어제 은석 씨 옷에 토했지.

이것만 기억나면 차라리 다행(?)인데… 다 기억난다. 어제 은석 씨한테 취중에 한 말들.

 

‘와 최악… 선배로서 최악의 모습이다 진짜.

…이 와중에 이미지 걱정하는 거?
‘아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저희, 할 얘기 있죠 선배님. 얘기 오래 해야 할 거 같은데, 아침 입 냄새 안 나게

대충 빨리 양치질하고 여기 앉아 보시죠. 어제는 급한 대로 가글만 시키고 눕혀드린 거라.

아… 그 동굴 보이스가 이럴 때는 또 무섭게 들리네.

원래대로라면 전혀 ‘쫄’ 이유가 없지만, 어제 한 짓이 있으니 쫄리는 재영.

 

‘하…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재영은 말없이 시키는 대로 화장실로 가 빠르게 양치질을 하고는, 돌아와 은석 앞에 마주 앉는다.

재영도 팬티바람이지만, 원래대로라면 ‘잠깐만요 은석 씨, 반바지라도 입고요’ 했겠지만,

그냥… 그럴 분위기가 아니야. 지은 죄도 있고.

 

그렇게 팬티 한 장만 걸친 두 남자는, 이 애매한 동거의 담판을 짓기 위해 테이블에 앉는다.

 

 

*

 

 

이전 화 ‘은석의 시선’에서 이어지는 둘의 대화.

 

“그래요, 말 나온 김에, 어제 그 말은 무슨 뜻이었어요? 그 일 하지 말고, 내 곁에 있으라는 건?

“… 일단, 다른 거 다 떠나서, 전에도 말했듯이 아직 젊고 앞길 창창한 청년이 그런 일을 하는데
어떤 계기로든 ‘인연’이 생긴 사람이 그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요. 완전 남이었을 때라면 모를까.
어설프게 동정하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하게 된 데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건 알겠으니까요.

 

‘원래라면… 가난하고 생각 없는 애들이 쉽게 몸 파는 거다… 라고 쉽게 생각했지만…

은석 씨를 보면 그게 아닌 건 알겠어. 아직 시작하게 된 자세한 사정을 들은 건 아니지만,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나, 마사지할 당시에도 그걸 허투루 하지 않았던 모습을 보면,
쉽게 일반화할 문제는 아니야. 내가 편협했던 건 인정.

 

“…….

“그리고, 내 곁에 있으라는 건, 이 분위기에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진심이었어요.

은석 씨에 대한 감정… 뭔지 정확히는 아직도 정의 못하겠어요.

단순히 동생으로서 좋은 건지, 정말 연애감정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사람이 고팠던 건지.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확실한 건, “은석 씨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건 분명해요.

경한 씨의 대체재로서가 아니라, 은석 씨 자체로서.

“그 말을 어떻게 믿나요, 그동안 저에게 경한 씨를 투영하고 계셨던 건 방금 스스로도 인정하신 사실인데.

 

… 첫 시작이 잘못 꿰어진 관계는 역시 파국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는 걸까.

‘나중에 말한다’는 게, 결국 타이밍을 놓쳐, 거짓말을 한 것이 되고,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믿지 못하겠다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내 잘못이죠. 미안해요.
정 그러면, 일주일만 더 기회를 줘요. 내가 내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리고 은석 씨에게 증명할 수 있는.

“…….

잠시 생각에 잠겼는지 은석은 말이 없다.

재영은 그저 초조하게 마음 졸이며, 은석의 대답은 기다릴 뿐이다.

 

“…일단, 이거 하나는 얘기해주고 싶은데요.

?

“남의 지나간 연애사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원래는 좀 그렇지만,
먼저 그 지나간 연애사를 가지고 제 인생에 끼어 드셨으니 저도 오지랖 좀 부려 보겠습니다.

자존감은 어차피 자기 내면에서부터 쌓아 올리는 거예요. 괜히 단어가 ‘자’존감이겠어요.

본인이 ‘아, 오늘도 잘 살았다’ 하는 하루하루가 쌓일 때 그게 자존감의 자양분이 된다고요.

“…….

“… 물론, 노력한 하루들이 쌓였더라도 생각만큼 잘 안 될 때 자존감이 무너지는 거, 얼마든지 있어요.
그렇지만 그 때 회복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 할 일입니다.
외부에서 타인이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그건 한계가 명확한 거라고요.
선배님은 그래도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존중을 하시는 분이니,
비록 본인은 자책하시지만, 헤어지기 전 그 일정 기간 동안 분명 하실 만큼 하셨을 거예요.

그걸 얼마나 받아들이고 스스로 살아갈 힘을 얻었는가는 그 사람의 문제죠. 자책할 일이 아닙니다.

 

“…….”

 

“그치만 솔직히… 이걸 모르실 분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아무래도 애인의 일이다 보니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서 이러시는 것 같은데.

이럴 땐 제3자가 옆에서 팩트를 다시금 짚어 줘야죠. 그래서 오지랖 한 번 부려 봤습니다. 자책 그만하세요.

“… 고마워요 은석 씨. 참 그릇도 넓고, 맘이 따뜻하네요. 화만 내고 나가 버려도 될 입장인데, 이렇게까지.

 

“… 그건 그렇고, 선배님 마음을 고백하셨으니, 저도 허심탄회하게 말할게요.

“……?

“저도, 선배님에 대해 딱 이거다, 말하기는 힘든 호감을 갖고 있어요.
그 배려심과 자상한 성격 때문인지, 외모가 맘에 들어서인지,

제가 좀 능글맞게 굴거나 어쩌면 주제넘게 한 마디 해도 그걸 수용하시는 그 태도 때문인지.

그리고… 짜증나지만, 그 경한 씨에 대한 순정 때문인지.
“……?”

 

“아, 그러니까, 저한테 그 사람을 투영한 건 물론 짜증나고 화나는데요.
일단 좋아했던 사람에 대해서는 그 감정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해서.

“아… 그건 과대평가예요. 지난 몇 년간은… 이 감정을 제대로 매듭지으려 하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걸로 그걸 잊으려고 했어요. 그렇게 평가할 일 아니에요.

“네, 그런 성격이실 것 같긴 했어요. 그것까지 포함해서 순정이라 한 겁니다.
어쨌거나, 제가 트리거가 되어서 그 묻어 두었던 감정을 다시 마주했을 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도피하려고 하지 않으셨잖아요.
두 번 세 번 마주해도 그걸 해결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걸요.
… 칭찬이니 좋아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봐주는 건 고맙긴 한데… 영 과분한데.

“그리고… 어제든 오늘이든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다는 말… 믿을게요.

“……!

“굳이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시잖아요, 저 눈치 빠른 거.
앞으로 지켜봐서 또 경한 씨를 생각하며 제게 잘해주려 한다고 생각되면, 그 때 나갈게요.

그 때 헬스장 샤워장에서 그러셨죠. 선 넘는 거 삼진 아웃이고, 한 번 스트라이크라고.

아…. 갑분싸 될까 봐 그냥 했던 말인데 그걸 이렇게 회수하네…

“선배님도 한 번 스트라이크로 치죠. 그 때 병원에서 제가 애인 때문이냐고 물어봤을 때 아니라고 하신 거.

그러니까 서로 한 번씩 스트라이크, 쌤쌤으로 치고, 다시 잘 지내 보자구요.

“……! 고마워요 은석 씨, 이제 내가 진짜 잘 할게요.

 

“선배님은 그런데… 안 궁금하세요?
? 뭐가요?
“그 때… 헬스장 샤워장에서 제가 왜 노골적으로 그랬는지.

 

관련자료

댓글 1

<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bbs/profile.php?mb_id=samauinim" data-toggle="dropdown" title="samauinim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 samauinim</a> <ul class="sv dropdown-menu" role="menu"> 님의 댓글

  • <spa…
  • 작성일
이제 한발짝 나아갔네요 조금씩 더 나아갔으면합니다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