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20) - 은석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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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들어가라고, 영상은 이따 알아서 보고, 오늘 공부한 내용은 내일 함께 물어보겠다는 재영의 말.
‘와… 피곤하실 텐데 영상도 보신다고. 진짜… 안 지 얼마 안 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줄 이유가 없는데. 물론
난 좋지만.
저번에 확인한 것처럼 나를 이뻐 하시긴 하지만 연애감정으로서는 확실히 거리를 두시는데.
선의 자체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다.’
(은석) “헤헤. 네 그럼 염치불구하고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재영) “그래요 조심히 가고 내일 봐요.”*
금요일,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저 이렇게 순탄하고 꽁냥대는 하루가 계속되는 한 주였다.
*
목요일.
아침 일곱 시.
은석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오늘은 어쩐지 조용하다.
‘음…? 선배님 설마 오늘도 운동 가셨나? 아…’
이내 은석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침대에 아직 팬티바람으로 이불을 반만 걸친 채 누워있는 재영.
‘아… 이불을 발로 많이 차시나 보다. 그래서 침대 사이즈도 컸구만.
아 근데… 깨워드려야 하나? 오면 항상 이 시간에 옷 입고 아침 준비하고 계셨으니… 역시… 깨워야겠지?”
‘아? 근데 XX회계법인이면… 차로 가든 대중교통으로 가든 아무리 막혀도 1시간 안쪽일 텐데.
9시까지 출근인데 보통 7시 반 좀 안 돼서 나가시잖아. 일부러 출근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출근하시나?
신입이면 모를까 6년차인데 아직도 매일 그렇게? 꽤나
워커홀릭이신 것 같네…
저번에 주말에 잠깐잠깐 업무 통화하러 나가실 때 들어보니까 제법 인정받는 모양이던데. … 그럼
더더욱 지금 깨워야.’
“선배님, 일어나세요.” 은석은
재영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깨워본다.
“음? 어? 은석 씨 왔어요? 아? 그럼 지금 벌써 7시?” 화들짝 놀라며 시간을 확인하는 재영.
“아… 빨리 준비해야겠네. 아, 미안해요 은석 씨 아침부터 민망하게 팬티바람이나 보이고.”
“아니에요 선배님 ㅎㅎ” 새삼 무슨 말씀이세요.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에.
“그, 씻고 준비하느라 바쁘실 텐데 아침은 제가 차려 볼게요. 뭐 드세요?”
“아… 뭐… 아무거나요.” 화장실로 가면서 대충 대답하는 재영.
‘아… 그러면… 빨리 할 수 있는
걸로… 그리고 며칠 안 보긴 했지만 아침으로 쌀밥은 잘 안 드시는 것 같아.
냉장고에 계란 있으니까. 스크램블 에그에… 햄도
한 장 굽고.
저번에 내가 가져온 토마토 슬라이스된 거 아직 남아 있으니까 그거 살짝 구워서 올려 먹으면 되겠다.’
“와 은석 씨가 한 거예요? 잘 먹을게요.” 씻고 옷도 다 입고 식탁에 앉으며 재영이 말한다.
“네ㅎㅎ 늦었다고 너무 허겁지겁 드시지 마세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먹는 건 잘 먹어야죠.”
“ㅎㅎ 저번에 내가 아침은 꼭 먹으라고 할 때 아빠 같다고 하더니. 이제 본인이 엄마처럼 구네.”
“아니 엄마라뇨. 저도 그냥 아빠 할게요. 이런 근육질 엄마 보셨어요?”
은석의 응수에 피식, 웃는 재영.
‘저 웃음, 자꾸 보니까 정드네.. 너 하는 짓 귀엽다는 듯한.. 나 혼자 설레발치는 건가? 아니었으면.’
이 뒤의 대화는, 재영의 시선에서 본 것과 동일하므로 생략한다.
*
점심 먹고 화장실에서 큰 걸 보는 은석. 다 보고 나서, 물을 내리고 무심결에 패드를 덮는다.
‘응? 이게 뭐지?’
은석의 눈에 들어오는 얇은 드로즈. 이미 몇 번 본 브랜드. 재영이 이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건… 선배님 거 같은데. 아니 이걸 왜 여기다 벗어두셨지.’
별 생각없이 들어본다. 그런데… 앞면 안쪽을 보니, 이 익숙한 자국은… 말라붙은 쿠퍼액.
그걸 보니 갑자기 야릇한 기분이 전류처럼 은석의 몸을 타고 올라온다.
‘혹시… 어제 내 영상 보면서? 에이 아니겠지. 거기 어디 야한 포인트가 있어.
… 설마 한 30분 팬티바람으로 있던 거? 에이.’
이건 꼭 재영이 어제 ㄸ쳤다는 증거는 못 된다. 뭐 근무하면서 조금씩 흘러나왔을 수도 있고
(… 그게 더 야한데? 이 상상에 더 바짝 서는 은석의 물건.)
며칠 전에 벗어 둔 것일수도… 라고 하기엔 그렇게 며칠씩 깜빡하실 타입은 아니야.
뭐에 홀렸는지, 은석은 팬티 안쪽 쿠퍼액 자국에 코를 갖다댄다.
당연히 거의 날아갔지만 아주 희미하게 느껴지는 재영의 체취.
헬스장 탈의실에서 봤던, 그리고 소설에선 생략됐지만 주중에 빨래 건조대에 널려 있던 그 팬티들과 같은 브랜드…
은석에게 딱히 팬티 페티쉬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앞선 상상들을 하면서 체취를 맡자니,
그리고 이걸 ‘몰래’ 하고 있자니 좀… 아, 나한테 이런 취향도 있었나.
모세혈관에 피가 쏠리면서, 기둥이 자꾸 꿈틀대며 고개를 쳐든다.
종지부를 찍는 상상은, 어제 내 팬티차림을 보고 화장실로 뛰어들어와 급하게 팬티를 벗어놓고,
이 변기 앞에서 싸고, 그러고 나서 팬티는 깜빡 잊고 두고 나가는 재영의 모습.
물론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고 딱히 중요한 사실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신기라도 있는지 맞췄지만) 충분히 야한 상상이다.
어젯밤 재영이 그랬던 것처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몸을 낮춰 변기구멍에 정조준한 채로 물건을 만진다.
재영과 달리 은석의 경우엔, 마침 헬스장 화장실에서 비슷하게 재영을 생각하며 변기에 쌌던 경험이 있는지라,
그 날의 상상이 흥분감을 더한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흰 물감을 물에 풀듯이, 흘러나오는 하얀 액체…
액체를 토하고도 바르르 떠는 제 물건과, 흰 물감이 풀린 변기물을 내려다보다, 이내 뒷처리를 한다.
*
저녁 여섯 시 10분.
재영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재영) “은석 씨,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은석) “어? 선배님 오늘은 일찍 퇴근하십니까?”
(재영) “네 그렇게 됐네요. 뭐, 치킨 좋아해요? 들어가는 길에 사갈까 하는데.”
와, 치킨… 먹은 지 오래 돼서
그런지 먹고 싶네. 아 그런데…
이미 3일 연속 운동해서 내일은 쉬려고 했는데, 오늘
저녁으로 치킨을 먹으면 내일도 해야 하나.
아니, 살 안 찌려면 오늘 자기 전에 운동해야지. 하… 일단 감사히 먹고 이따 집 가는 길에 뛰고 들어가야겠다.
일단 한 번은 예의상 거절.
(은석) “네? 아… 이미 너무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셔서… 너무 죄송한데요 ㅠㅜ 집밥으로도 충분히.”
(재영) “아니에요. 혼자 사니까 치킨 한 마리 혼자 먹기 버거워서 안 먹게 되더라고.
먹고는 싶은데 먹은 지 좀 됐어. 내가 먹고 싶어서 사가는 거니까 부담갖지 말아요.”
여차저차 하여 재영이 치킨을 사 오고,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맛나게 치킨을 먹는 두 사람.
“ㅎㅎ 아 어젠 보니까 오후에 한 3, 40분 나간 거 같은데 어디 산책 나간 거예요?”
“아 영상 보셨습니까? 네, 접때 보니까 요 근처에 조그만 공원 있는 것 같아서요.”
“아, 모르면 오늘 말해줄까 했는데 알아서 잘 찾아갔네요. 역시 똘똘. 굿굿.”
이 말에 갑자기 은석이 본인의 (양념 안 묻은) 오른손으로 재영의 (양념 안 묻은)
왼손을 집어
제 머리에 얹으며 쓰다듬는, 부비는 시늉을 한다.
‘아, 나도 모르게 그만.’
똘똘하면 이렇게, 칭찬해 주셔야죠, 라는
듯, 전 애인들한테 하던 버릇이 나와 버린 것.
은석은 전 애인들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전 애인들은 그런 은석을 귀여워하고,
다시 그 마음을 숨기려는 전 애인들을 은석이 귀여워하고.
물론… 마냥 버릇만인 건 아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재영을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 자상함을, 동안 얼굴에 반전 매력 같은 콧수염을, 숨기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을 티나게 하는 흰 피부 위 홍조를,
뒤에서 안으면 쏙 들어올 것 같은 적당한 키를, 성실하고 자기와의 약속에 철저한 ‘멋진 남자’로서의 모습을.
“흠, 그… 어제랑 오늘 뭐 공부했는지나 들어볼까요?”
봐봐. 지금 이 티 나게 부끄러워 하는 모습. 안 귀여워할 수가 없다.
“네? 아 선배님~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데. 그런 말씀은 다 먹고 치우고 하십시오. ㅋㅋ”
그리고 다음 날, 금요일. 결국 그 일이 일어났다.
*
앞선 나날들과 비슷하게, 은석은 재영과 함께 아침을 먹고, 출근하는 재영을 배웅하고 책을 편다.
오늘도 언제든 재영이 보고 있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스스로에게 약속한 진도를 빼는 중.
‘선배님… 오늘은 빨리 퇴근하시면 좋겠다. 더 얘기 많이 나누고 싶어.’
떳떳하게 보려면, 더 즐겁게 얘기하려면, 공부 시간을 충실히 보내야지. 확실한 동기부여.
수험생활할 때 일반적으로는,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미 연인이 있는 상태에서 수험생활을 시작한다면, 억지로 헤어지는 것은 좋지 않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경향성’이고, 사람마다 상황은 다르다.
지금 은석의 경우는, 재영과 연애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와중에 자꾸 생각이 나서 맥을 끊을 수 있다는 점은 수험생활 중 연인의 해악을 공유한다.
하지만 은석처럼, 그 누군가의 존재를 분명히 동기부여의 원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고,
그것이 상대방을 떠올려서 공부의 맥이 끊기는 해악을 압도한다면, 당연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렇게 공부에 한참 공부에 매진하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7시 13분.
‘슬슬 오시려나. 일찍 퇴근하셨으면 한 40분? 쯤 오시겠지.’
뭐야, 이렇게 콩닥거리며 기다릴 일인가? 언제부터?
네가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설렐 거야 뭐
그런 거냐. 표은석, 이런 금사빠 아니잖아 너.
‘…? 아닌데. 어릴 땐 나 엄청 금사빠였는데.
‘언제부터지, 금사빠 아니게 된 게. … 아, 아무래도 역시, 만나본 이쪽 사람들 중에 마사지 일로 만난 비율이
더 많아서인 것 같다. 그냥 그것만으로도 지쳐서 연애도 안 하게 됐고.’
손님을 열 명도 채 받지 않았다며? 독자들은 의아하겠지만, 그건 은석이 ‘개인 마사지’를
걸고 활동한 최근의 얘기다.
그 ‘기술’들이 생이지지(生而知之)일 리가 없다. 자세한
건 곧 알게 될 테지만.
생각하는데, 저도 모르게 잠이 밀려오는 은석.
아무리 10-11시 사이에 일찍 잤다지만, 화수목 3일을 연달아 새벽 다섯 시에 나와 운동하고,
어제는 저녁으로 치킨 먹었다고 달리기까지 하고 들어갔으니, 한 주 동안 축적된 피로가 밀려오는 게 당연하다.
‘아… 어제 잠이 곤히 잘 오길래 충분히 잔 줄 알았는데 졸리네…
지금 잠들면 안 되는데… 이따 밤에 잠 더 안 올 텐데… 그렇다고 커피를 마시는 건 더 안 되고…
아… 선배님은 언제쯤 오시는 거야… 톡 좀 주시지.’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존 것도 몇 분일까,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팔을 앞으로 하고 식탁에 엎드려 잠을 청하는 은석이었다.
*
‘아… 잠들어버렸네. 몇 시지.’
눈을 뜬 은석이 손목을 들어 갤X시핏 화면을 켠다. 9시 11분. 와… 거의 두 시간 잤네. 망했다. 오늘 잠은 다 잤네.
‘선배님은 아직 안 오셨네. 오늘은… 보긴 어렵겠구나.’
이 때, 무심코 갤X시핏의 화면을
스와이프하니 보이는 재영의 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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