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21) - 은석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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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들어버렸네. 몇 시지.’
눈을 뜬 은석이 손목을 들어 갤X시핏 화면을 켠다. 9시 11분. 와… 거의 두 시간 잤네. 망했다. 오늘 잠은 다 잤네.
‘선배님은 아직 안 오셨네. 오늘은… 보긴 어렵겠구나.’
이 때, 무심코 갤X시핏의 화면을 스와이프하니 보이는 재영의 톡.
*
(재영) ‘은석 씨, 오늘은 좀 늦을 거 같아요. 9시 되면 먼저 들어가요.’
보낸 시간은 7시 21분.
‘엥 뭐야. 나 잠들고 거의 바로 보냈네. 타이밍 보소… 아니 근데 그럼 아직도 안 온 건가?’
은석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띠리릭- 도어락이 열리고, 발간 술톤의 재영이 문 앞에 서 있다.
“아… 선배님 술 드셨어요?”
뭐야 설마 금요일에 회식한 거야? 그런 거면 최악의 회사인데…
“아하하- 경한아-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왔어.”
비틀대다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은석의 품에 폭, 고꾸라지는 재영.
‘… 경한이구나, 그 예전 애인 이름.’
눈치 빠른 은석이 이걸 놓칠 리가 없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그 때… 그렇게 보내면 안 됐는데…”
‘그 사람이랑… 상관 없다더니.’
역시나 거짓말이었군. 그래, 숨기고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더구나 ‘미안하다’면… 뭔지는 몰라도, 혹시 그 경한이란 사람한테 미안한 감정을 풀고자 나한테 잘 해준 거라면.
뭘까, 이 살짝 열 올라오는 감정은.
‘질투…?는 아니다. 애초에 질투할
위치에 있지를 않아.
내가 이 사람 현 애인이라면 질투할 수 있지만, 그런 관계가 아닌 건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그래, 꼭 질투를 논하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나에게 자신의 과거 예인의 모습을 투사하고,
그동안 잘 해 주었던 것이 그 애인에게 못다 한 만큼 ‘갚으려는’ 것이라면, 그건 누구라도 기분 나쁜 게 맞다
나를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대체물’로서 본다면, 그게
별 상관없다면, 그건 배알이 없는 거다.
‘물론… 단순히 이름이 나온 것과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 넘겨짚는 건 위험해.
자세한 건 이 양반 술 깨면 들어보자.’
눈치가 빠른 은석이지만, 당연하게도 가끔 틀린 적도 종종 있었기에 그 위험성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동안 나름 높은 적중률을 보여온 촉을 그저 무시할 이유는 없으니, 일단 보류.
“저기요, 선배님, 일단 들어와서 옷부터 벗으시죠.”
옷에서 술냄새 나요. 내 옷에도 술냄새 옮겠다. 나 집에 어떻게 들어가라고.
‘아까 톡 보낼 때부터 술 마신 거면 아무리 오래 마셨어도 한 시간 반 정도일 텐데 그 사이에 이렇게 취한다고?
퍼 마시길 엄청 퍼 마신 건지, 아니면 술이 엄청 약한 건지.’
어느 쪽이든, 일단 중요한 건 옷 벗기고 대충 씻기고 재우는 것.
“어…? 아, 미안해요, 미안해요 은석 씨. 내가 헷갈렸어요. 얼굴이 워낙 비슷해서.”
얼굴을 은석의 가슴팍에 파묻고 있던 재영이 고개를 들며 말한다.
‘오… 용케 구분할 정신은 있으시네. 아니… 잠깐 뭐야 이 뜨거운 느낌은…’
…하… 도대체 한 두 시간 만에 얼마나 퍼 마시면 이럴 수가 있는 건데. 이 사람 백퍼 알쓰다 알쓰.
후- 하- 몇 초간 심호흡 후, 간신히 분노를 가라앉히고 은석은 재영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은 채
재영을 질질 끌고 가 일단 화장실 앞 문턱에 고개를 젖혀 눕힌다.
그리고 훌렁, 웃옷과 바지를 벗고 화장실에 있는 대야에 던진다. 다행히 팬티까지 침습하진 않았다.
‘아 왜 하필 나가려고 옷 다 입은 상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집에 어떻게
가라고.’
샤워기를 들고 대야에 물을 받으면서, 한 손으로는 집에 부지런히 톡을 남긴다.
‘오늘 좀 늦게까지 하다 갈 것 같아요. 먼저 주무세요.’
이 꼬라지 봐서는 아마 내일 아침이나 돼서 들어가겠지만. 밤에 안 들어가면
걱정하시니 일단은.
‘그 다음은 이 아저씨.’
은석은 재영에게 다가가, 대충 입을 씻긴다. 술냄새
나는 입부터 어떻게 좀.
그리고 양복 외투부터 넥타이, 셔츠, 바지를
차례차례 벗겨 방 한쪽에 일단 던져 둔다.
‘확실히 몸에 열이 많은 양반이라… 온몸이 뜨겁고 빨갛다.’
그렇게 재영이 드로즈 팬티만 입은 상태가 되자, ‘공주님 안기’를 시전하여 재영을 침대에 가볍게 던져 둔다.
그리고 다시 화장실에 들어와 아까 대야에 담근 토 묻은 옷가지들을 임시방편으로 밟아 빠는 중.
빨랫비누가 어딨는지 몰라서 일단 바디워시를 대충 뿌렸다.
‘내일 필름 끊겨서 나 몰라라 하는 거 아니겠지. 그러기만 해 봐라.’
지금도 돌아가고 있는 천장의 카메라가 증거자료가 될 테니. 이게 이런 용도가 될 줄은 몰랐지만.
‘아니… 지금까지는 완벽히 일 잘하는 멋진 선배였는데 오늘 완전히 깨네.
이 사람 전 애인 관련된 일만 있으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거 같아 아무래도.’
도대체 둘이 뭔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까지 하는데. 자기 때문에 애인이 죽기라도 했나? … 그렇다면 유감. 그건 인정이지.
‘내일 들어봤는데 별 거 아니기만 해봐라. 아오 확 그냥.’
잘 참고 살았던 성격 나오는 은석. 일단은, 내일 직접 얘기 듣기까진, 캄다운.
땜빵식 빨래를 마치고, 세탁기에 옷가지를 넣어 급한대로 건조를 돌린다.
‘야밤에 층간소음 미안합니다… 어차피… 선배님 옷은 내 것보다 살짝 작아서 입고 집에 가기 그렇고
(게다가 집에서 나설 때랑 완전히 다른 옷을 입고 들어가면… 자칫해서 부모님 눈 마주치면 무슨 소리 듣겠어.)
요 며칠 비가 안 오는 쨍한 날씨였던 건 다행인데 아무리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마르긴 힘들 텐데.’
어쩔 수 없다. 내일 다 안 말랐어도 대충 마른 대로만 입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내 방 들어가서 집에서 입는 옷으로 갈아 입는 수밖에.
‘그래, 꼼짝 없이 오늘은 여기서 자야 하는 거지.’
이제야 한숨 돌리고, 은석은 생각한다.
‘침대가 퀸 사이즈긴 한데.. 내가 체격이 있으니까 둘이 자긴 좁지 않나?
아.. 딱히 여분 침대 시트나 이불이 어딨는지 아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없나…
저 양반 술냄새 나는데, 술냄새 옮긴 싫은데….’
마지못해 꼬물꼬물 재영 옆에 새우잠 자세로 웅크리고 눕는 은석.
‘이따가 빨래 널고 자야 되니까, 아직 자면 안 되지만, 일단 진 빠지니까 좀만 누워있자.’
재영의 쌔액쌔액 숨소리.
‘그새 잠들었나… 대단한 양반이야.’
이 때 갑자기 재영이 눈을 번쩍 든다. 잠든 거 아니었나?
그러더니 재영의 손이 들리더니 은석의 손목을 잡는다.
“은석 씨…. 그 일 하지 마요. 그냥 나랑 같이 있어요.”
하… 이건 또 뭐야. 잠꼬대 왜 이래. 저번에 이불 반쯤 차고 잘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그리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 일 하지 말고 같이 있자니.
… 딱 대. 내일 봅시다, 아저씨.
*
일곱 시쯤 눈이 떠진 은석은, 곤히 자는 재영을 두고 조심스럽게 일어난다
어제 건조기 돌리고 빨래 건조대에 널어놓은 옷가지는… 그래, 하룻밤 사이에 다 마를 수가 없지.
그래도 이 정도는 걸치고 나갈 정도는 된다. 여름밤 더운 게 의외의 도움이.
어차피 재영이 일어날 때까지 특별히 할 일도 없겠다, 대충 시리얼을 먹고,
(팬티 바람으로) 책을 펴 어제 하던 공부를 이어 나간다.
얼마쯤 지났을까, 침대 쪽에서 나는 부스럭 소리에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드니, 마주치는 재영의 눈.
“아… 은석 씨 왔어요? 근데 왜 팬티만 입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더니 자기도 아차, 싶었는지, 표정이 금세 변하는 재영.
‘다행히 필름이 끊긴 건 아닌가 보네. 표정 변하는 거 보니.’
“저희, 할 얘기 있죠 선배님. 얘기 오래 해야 할 거 같은데, 아침 입 냄새 안 나게
대충 빨리 양치질하고 여기 앉아 보시죠. 어제는 급한 대로 가글만 시키고 눕혀드린 거라.”
지은 죄를 안다는 듯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말없이 화장실로 가 양치질을 후딱 마치고
그 팬티 바람 그대로 와 은석의 앞에 마주앉는 재영.
그렇게 팬티 한 장만 걸친 두 남자는, 이 애매한 동거의 담판을 짓기 위해 테이블에 앉는다.
*
“… 어디까지 기억하세요. 전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재영.
“그럼 긴 말 안 해도 되겠네요. 전 애인 이름이 경한?”
역시 재영의 끄덕.
“그 사람한테 미안한 게 있고, 나한테 잘해 주면서 그 부채감을 씻으려 했다, O, X?”
확실히, 돌려 말하는 것 없이 의표를 찌른다. 역시 끄덕.
“그러-면, 저한테 들어오라는 제안을 했을 때 그 사람이랑 관련 없다는 말도 거짓말인 거죠?”
약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은 데다가,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일 테니, 끄덕이는 재영.
.
“… 미안해요, 은석 씨.”
“… 하… 그 동안 잘 해주신 게 고맙긴 한데, 제가 좀 화나도 되는 상황인 건 이해하시죠?”
누가 나를 보면서 다른 사람 생각나서 잘 해줬고, 심지어 전 애인 생각에 그러는 거 아니냐고 되묻기까지 했는데
아니라고 했다가 지금 이렇게 들켰으면… 그치, 할 말 없어야 맞지. 제 잘못을 안다는 듯, 재영의 끄덕.
“아니, 도대체 그 경한 씨라는 분한테 어떤 게 미안한 건데요? 들어나 봅시다.”
….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재영의 사연을 듣는 은석.
듣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을 연다.
“… 무슨 마음인진 이해했어요, 이해했는데, 그 해소 방법이라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아시죠?”
“… 네 맞아요. 은석 씨한테 잘해주는 건…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일 뿐이고,
지금은 연락 안 되지만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경한 씨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일이죠. 알아요.”
“… 그거라도 아시니 다행이네요.”
“… 그래서! 그래서, 어제 다
말하려고 했어요. 은석 씨한테.
다만… 어떻게 말하면 은석 씨 마음이 다치지 않을지, 고민하면서 마시다가, 마신다는 게…”
사과든 뭐든, 모든 말에는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 이미 저질러지고 나서 이런 말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
주석이 달린 사과는 진짜 사과가 아닌 법. 재영도 역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남자 문제 앞에서는 영 고장나 버리는 재영인 것을 어쩌겠나.
“… 됐습니다. 변명은 듣고 싶지 않구요. 나가겠습니다.”
“아, 그러지 말아요.”
“왜요? 왜 안 되죠? 나가면 다시 그 일 할까 봐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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