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9) - 재영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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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뭐가 좋다고 그렇게 달아올랐던 거야.’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까 어떻게 봐도 경한이였는데. 왜 처음에 봤을 때 인지 못한 거야.
심지어 몇 십 분이나 그런 짓 할 때까지… 바보냐?’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말들로 자책해보는 재영
죄책감과 후회,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가운데 재영은 그저 바닥의 에어컨 리모컨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전원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화풀이할 뿐이었다.
*
그렇게 잠시간 더 멍 때리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어느덧 6시 40여분.
고향집에서 점심밥 먹고 몇 시간 운전을 했던 데다가,
비록 재영은 거의 받기만 했다지만 관계 자체가 은근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어서인지 배에서는 유난히 심한 꼬르륵 소리가.
그렇지만, 머리가 복잡한 탓에 밥 생각은 없다.
뭘 할까 잠시 고민하다 방 한켠의 책상으로 가 노트북을 켜 일 관련된 것들을 이것저것 본다.
이건 재영의 고질적인 버릇이다.
일상의 영역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해결할 수 없고 머리가 복잡할 땐 일거리로 ‘도피’한다.
사실 재영이 6년이나 연애를 하지 않은 것에는 (그리고
회사에서 자타공인 워커홀릭으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이런 일종의 방어기제가 수시로 작동한 탓이기도 하다.
물론 감정의 응어리와 쓸데없는 고뇌에 얽매여서 아무것도 안 하고 허송세월하는 타입보다야 낫다고 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를 유보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별로 좋은 해결책은 아닐지도.
… 지금 이 상황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렇게 얼마간 일에 몰두했을까 (이 황금 같은 토요일에!), 어둑어둑해지고 일거리 하나가 대충 마무리될 때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정도로 꼬르륵 소리와 허기가 느껴진 탓에 대충 방 한 쪽에 있던 시리얼을 말아먹는다.
대충 양치하고 씻고,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든다.
*
다음날 눈을 뜬 재영. 눈을 뜨니 처음 보이는 건 벽에 붙은 에어컨.
웅웅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것이 꼭 재영의 머릿속 같다.
아직… 일요일. 출근하지 않는
날. 어쩌면 출근해서 일에 파묻혀 버리는 게 나을지도, 재영은
생각했다.
사실 재영 자신도 잘 안다. 이게 자신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물론 이런 식으로 도피하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알잖은가, 머리로는 이해해도 감정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게 사람인 것을.
재영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간다.
재영처럼 콧수염을 멋지게 기를 정도의 사람이면 자기 자신을 가꾸는 데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타입은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 매우 엄격하다.
감정적 동요와 복잡한 머릿속에 굴복해서 대충 마무리하는 하루는 어제로 족하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생전 관심도 없던 마사지를 왜 받은 거냐 나…’
그건 그렇다.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번개도
20대 때 멋모를 때 몇 번 해보고 서른 넘어서는 해 본 적도 없는데.
그러니까, 서른 넘어서는 연애도 번개도 제로인 재영은 말 그대로 은둔.
앱이야 깔아는 놨지만 사실상 어디까지나 눈팅용이었던 것이다, 어제까지는.
그냥… 어제 몸이 너무 피곤하다 보니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내 손으로 안 빼고 싶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이상했어. 몇 년간 그런
생각 안 들었는데.’
이럴 땐 사실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사람의 충동이란 게, 한순간에 내가 알던 내가 아니게 하는 법.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랬지?’ 가
되는. 재영도 지금 그 단계인 거다.
애초에 이성적으로 납득되는 이유라는 게 없는데, 억지로 찾으려다 보면 합리화만 될 뿐.
‘… 그 민석이라는 친구한테는 미안하긴 하네. … 아, 됐어, 이제 이 쪽으로는 생각 끝!’
아침이 돼서 다시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생각의 홍수를 억지로 틀어막은 재영.
정성스레 콧수염을 정리하던 재영의 눈에 문득 낯선 무언가가 보인다.
‘이건 뭐지…? 스마트워치인데. 어제 자기 전에 씻을 땐 못 봤는데.’
그건 네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으니까 그랬지, 재영아.
‘무슨 모델이지? 내 건 아닌데.’
대학생 때부터 줄곧 뼛속까지 아X폰 유저인 재영으로서는
애X워치가 아닌 이 낯선 디자인의 스마트워치가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뭐지 이게 왜… 아!’
아. 그 민석이란 애가 놓고 갔구나. 씻으면서
무의식 중에 여기다 풀어놓고…
‘하긴, 어제 내가 그렇게 쫓아내듯(?) 내보내
버렸으니 이걸 떠올릴 겨를도 없었겠지.’
아니, 그거랑 상관없이 마사지가 원래 코스대로 종료됐어도 화장살에 둔 걸 기억하긴 힘들
거 같은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걸 내가 낼름할 수는 없고 당연히 (애초에 난 애X워치 잘 쓰고 있고).
결국… 그 말은 이 민석이란 친구를 다시 봐야 한다는 얘기인데.’
아… 껄끄러워서 어떻게 봐. 물론 이거 건네주는
잠깐이면 되긴 하지만 그 전까지 어색하게 톡 오갈 거 생각하면…
일단 하던 그루밍을 마무리하고 화장실에서 나온 재영은 어제 민석과의 톡방을 열어본다.
‘아… 본인도 근데 자기가 여기다 이거 두고 간 거 지금쯤 인지는 했겠지? 그럼… 먼저 톡이 오지 않을까?’
그 와중에 먼저 연락하긴 민망한 걸까? 이것도 자존심을 세우는 것으로 봐야 할까?
‘지금… 여덟 시니까, 주말이니까
늦게 일어날 수도. 일단 좀만 기다려 보자.’
기다리면서 재영은 주섬주섬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헬스장에 갈 채비를 한다.
*
어느덧 오늘분의 운동을 마치고, 헬스장 샤워실에서 샤워까지 한 재영.
지금 시간은 9시 40분. 지금도 일요일 아침으로서는(?) 이른 시간이긴 한데, 민석으로부터 톡이 와 있다.
(민석) ‘고객님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만 혹시
화장실에 스마트워치가 없었는지요?’
단도직입적으로 필요한 내용만 담은 톡. 하긴, 그
쪽도 껄끄럽겠지, 그치만 그건 그거고 물건은 챙겨가야 하니까…
결국 아쉬운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아 근데… 여기로 다시 오라고 하면 되는 게 맞나…?’
내가 이 사람 쪽으로 가는 것도 웃기고, (마사지사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걸 용납할
리가 없다)
굳이 중간지점 정해서 만나는 것도 웃기긴 한데… 그렇다고 이 집 다시 오는 건 제일 껄끄러울
거 같은데?
아닌가, 잠깐 이것만 받아가면 되는 거긴 하니까 상관 없으려나.
차라리 일 관련된 거면 결정을 쉽게 하겠는데. (옛 애인 닮은) 마사지사랑 코스를 애매하게 끝내고 다시 톡한다…
이건 일 잘하는 재영이라도 문제은행(?)에 없는 문제인데.
(재영) ‘네 있어요. 여기 다시
올래요?’
잠깐 고민하다, 공을 민석에게 던지는 것으로 한다. 본인이
이게 불편하면 어떤 식으로든 편한 쪽을 제안하겠지.
난 솔직히 어디서 보든 똑같은 수준으로 껄끄럽겠지만 장소에 따라 불편함의 수준이 다를 수 있는 건 이 사람이니까.
민석이 톡을 보낸 시간이 9시 정도인 걸 보면, 답장이 오려면 좀 걸리겠다.
생각과 달리, 헬스장 문을 나서자 이내 들리는 톡 알림.
(민석) ‘네 알겠습니다. 10시
20분쯤 도착할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어제 우리 집까지 오는데 30분 정도 걸린댔지. 시간을
보건대… 바로 출발하겠다는 뜻인 거 같고.
본인도 그냥 빨리 받을 거 받고 이 불편함을 해소하고 싶다는 거겠지.
(재영) ‘네 알겠습니다 근처 와서 톡 주세요.’
민석의 어조에 맞춰 재영도 건조하게, 필요한 내용만 담아 답장한다.
*
책상에 앉아 직무관련 공부를 하는 재영. 정적을 깨고 울리는 톡 알림.
(민석) ‘근처 다 왔습니다. 건널목만 건너면
됩니다.’
톡을 확인한 재영은 겉옷을 걸쳐입고 민석의 스마트워치를 챙겨서 내려간다.
집 앞에서 큰길로 조금 나가 보니, 횡단보도 맞은편에 민석이 보인다.
눈이 마주친다. 그 귀여운 갈색 눈. 잠깐 (억지로) 잊었던 어제 무드등에 비친 그 눈이 생각났지만, 다시 꾹꾹 눌러담는다.
눈이 마주친 민석은 꾸벅, 목례하듯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재영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뀐다. 민석이 횡단보도를 종종걸음으로, 살짝 뛰듯이 걸어온다. 시선은 재영에게로 고정. 그 때…
“끼이익-!”
갑자기 골목에서 좌회전하며 차 한 대가 튀어나오더니 민석 바로 옆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춘다.
“?! 민석 씨 괜찮아요?”
깜짝 놀라며 넘어지는 민석, 그걸 맞은편에서 보던 재영은 놀라 뛰어온다. 운전자도 놀란 눈으로 운전석에서 나온다.
“민석 씨, 민석 씨 괜찮아요?”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려고, 재영은 쪼그려 앉아 팔로 민석의 어깨를 감싸며 묻는다. 힘을 주어 일으키려고 하는데…
“아아! 으… 아… 지금 일어나면 안 될 것 같아요.”
뭐지, 근육이 놀랐나? 쥐라도 났나? 아니면 뼈에 금갔나? 하긴 부딪히기 일보 직전에 저런 식으로 털썩
넘어졌으니…
“어떡해 미안해요 괜찮아요 학생?”
발을 동동 구르며 연신 미안하다고 하는 아주머니 운전자.
“민석 씨 움직이지 마요. 구급차 부를게요 잠시만요.”
오늘 일요일인데 괜찮나. 그래도 당직자도 있고 응급실도 운영하긴 하겠지.
운전자는… 자기도 당황해서 제대로 수습을 못 하는 거 같고. 사실 직접 친 게 아니어서 크게 다친 건 아닐 것 같긴 한데,
(그러길 바라야지) 어쨌든 뼈라도 금간 거면 지금 당장은 비전문가가 함부로 들었다가 더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
보험사는 일단 나중이고 구급차를 부르긴 해야겠다. 잠시 119에
통화하는 재영. 다행히 금방 온단다. 그리고 곧바로,
“그… 아주머니, 일단 명함… 아니 연락처 남겨주세요. 지금은 병원에 가보는 게 먼저일 것 같네요.”
재영은 오히려 자기가 더 놀란 운전자를 어르며 상황을 수습해 본다.
“… 구급차도 불려 주시고 고맙습니다. 그… 갤X시핏은…?”
겨우 진정된 듯한 민석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는 걸 들은 재영은 황당했다.
“아니 이 상황에 지금 그게 중요해요?”
“… 당연히 병원부터 가야죠. 보험사도 부르고.
맞는데, 수습해주신 것도 감사한데, 이젠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제 ‘고객’에게 말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딱딱한
말투.
‘아… 분명 아직 아프고 놀란 마음도 간신히 추스렸을 텐데 그것보다도 확실히 선 긋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지?’
나랑 엮일 연결고리는 이제 이 스마트워치 뿐이니까, 이걸로 서로 불편한 건 끝.
그래, 그 마음 당연히 이해는 하는데.
“아니… 그… 눈 앞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네 그래요!’ 하고 시계만 던져주고 가면 그게
사람입니까?”
그렇지 이건 맞지. 이건 어제 그 껄끄러운 상황 이전에 그냥… 그렇잖아.
… 더군다나, 그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
“…그 마음 너무 감사하고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 전 괜찮으니까, 그냥 가주세요.”
차분하게, 의식적으로 톤 다운된 목소리. 이
사람도 감정을 절제하고 있다.
그래 그 마음 뭔지 알겠다고.
“아니 그래도… 그래도 그렇지…”
“아 됐으니까 그냥 가시라구요!”
결국 민석이 폭발한다. 한층 더 불편해지는 공기. 기온이
높고 끕끕해서 유독 더 그런 것 같기도.
이 때 이제야 좀 진정이 된 듯한 운전자가 입을 열려는데, 들리는 사이렌 소리.
‘뭐야 벌써 온다고? 아니 지금 통화한 지 몇 분이나 됐다고… 근무 인원도 지금 다 없을 텐데…
와 대단하다 우리나라. 일요일 아침이라 동네에 차가 별로 없어서 더 빨리 왔나.’
“… 감사합니다. 구급차도 왔으니 이제 제발 가 주세요.”
다시 차분해진 민석의 목소리.
“… 알겠어요. 지금 저기 오는 구급차에 타는 것까지만 보고 갈게요.”
…그래, 거절도 삼세 번이면 입 아프다. 이
정도 거절했으면 말 듣자. 그게 이 사람을 존중하는 거지.
재영은 안쓰러운 눈으로 주저앉아 있는 민석을 내려다 보며, 갤X시핏을 건네준다.
구급차가 도착하고, 민석은 들것에 실려 들어간다. 일부러
재영의 눈을 안 보려는 듯, 눈을 감고 있다.
구급차가 떠나고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재영은, 이내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
주말을 기하여 진도 부지런히 빼 봅니다 ㅎㅎ
더군다나 씬을 기다리실 테니 스토리 파트는 빨리빨리 써서 푸는 걸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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