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서-1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본문
"선배님들은 좋으시겠어요."
현우는 벌개진 얼굴로 손 안의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잘하지도 못하는 소주를 벌써 3병이나 비운 탓인지, 그의 큰 눈은 벌써 반쯤 풀려 있었다.
사회 초년생의 딱지를 뗸지도 몇 달 안된 현우는 아직 얼굴에 풋풋함과 세상모르는 유순함이 가득했다.
오늘도 그의 직장선배인 종혁의 집들이에 와놓고는 뒷정리를 도와준다고 남았다가 지금 이 시각, 새벽 한시의 종이 칠 때까지 종혁과의 억지 술자리에 잡혀있는 중이었다.
"뭐가 좋아보이는데?"
종혁은 싱글거리면서 현우의 말을 받았다.
그는 속마음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붙임성이 좋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현우가 술을 잘 못마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포와 회유를 통해 일부러 이만큼이나 먹여놓은 범인이기도 했다.
"서울은 아니어도... 이렇게 이 시간까지 맘대로 술 먹을 수 있는 집도... 히끅! 있고... 그러면... 휴일에도 갑자기... 회사 안 나와도 되고... 옆방 사람이 방송 뭐보는지도 몰라도...! 되고! 아시잖아요. 회사 기숙사에서는! 딸...!"
까지 말하다가 현우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모를 종혁이 아니다. 종혁은 현우의 빈 잔에 술을 또 채워주며 짖궂게 물었다.
"딸 뭐."
"에이... 왜요! 뭐... 아니에요. 아... 이제 집에... 가야 되는데..."
"그건 마시고 가야지. 그리고 너 지하철타고 오지 않았어? 지금 시간에 지하철 없을텐데."
"택시타고 가면... 되죠... 아... 핸드폰이 어디..."
현우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부들거리며 꺼냈지만, 콜택시 앱의 글자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끊임없이 흔들흔들거리며 커졌다 작아지는 글자들은 현우의 눈만 아프게 할 뿐, 어디를 눌러야 할지도 도통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한참을 똑같은 화면을 들여다보고만 있는 현우를 보며 종혁이 말했다.
"너 그래가지고 어떻게 가려고 그래? 어짜피 내일 쉬는 날인데 자고 가. 내 방에서 이불깔고 같이 자면 되니까."
"에이... 어떻게 그래요... 그건 민폐죠... 그리고..! 과장님도... 있는데..!"
"내가 뭘?"
그때, 부엌 쪽에서 동굴처럼 낮은 목소리와 함께 삼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키가 크고 풍채 좋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지간히 깔끔한 성격인 창진은 오늘 무자비하게 생겨난 쓰레기들을 정리하느라 인상이 매우 험악해져 있었다.
"아! 과장님! 저 이제... 가려구요!"
현우는 그 모습에 깜짝 놀란듯,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갓태어난 망아지처럼 한참 용을 쓰다가는 다시 그대로 엎어져버리는 것이었다.
"어? 어...? 왜 이러지.."
"이자식 완전히 취했네. 야, 박종혁. 너 애한테 술을 얼마나 먹인거야?"
"한 세 병..?"
"세 병? 겨우 그거가지고 이렇게 된다고? 야야, 현우야, 임마, 일어나봐."
창진의 부축으로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한 현우는 반쯤 풀린 눈으로 중심을 잡으려고 했지만,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다시 휘청거렸다.
"이야, 이거 안 되겠네. 이래가지고 집에는 들어갈 수 있나."
"그냥 여기다 재워. 내 방에다 재우면 되지."
"뭐? 너 또...."
순간, 종혁을 바라보는 창진의 눈빛이 심상찮게 변했다.
종혁은 그런 창진을 묘한 미소와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현우는 종혁의 말에 물밖에 나온 생선처럼 팔딱거리며 꼬부라진 혀로 황급히 말했다.
"아니요오! 저 그렇게 안 취했다니까! 요..! 택시타고 가면... 돼!요...!"
여전히 중심을 못잡는 현우의 모습에 쯧,하고 창진은 혀를 한번 찼다.
그리고는 이내 현우를 빙글 돌려서 들쳐 엎더니, 이내 한쪽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자고 가라. 사고라도 나면 어쩌냐."
"아니... 진짜 괜찮은데...."
"마! 자고 가라면 자고 가!"
"네...."
현우는 기어가는듯한 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창진의 인상이 워낙 험악하기도 했지만, 회사에서 늘 이렇게 길들여져버린 탓이었다.
한편, 다 큰 성인을 업었는데도 창진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방문을 열고 침대 위에 현우를 내려놓았다.
"옷 벗어."
"네..?"
"와이셔츠 입고 잘거 아니잖아. 내거... 아니지, 야 종혁아! 니 츄리닝 좀 하나 얘 줘라."
"그래."
이어, 방 안으로 들어온 종혁이 현우의 옷을 갈아입히는 동안, 창진은 요와 이불을 가져와 침대 옆에다 펴 놓았다.
현우는 어린애처럼 두 사람이 하자는대로 얌전히 따를 뿐이었다.
현우를 침대에 얌전히 눕혀놓고 나서 종혁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는데, 문득 창진이 그의 손목을 훽 잡아 끌고 문 밖으로 같이 나갔다.
현우는 몽롱한 와중에 문 틈 사이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려고 노력했지만, 목소리가 크고 낮은 창진의 말만 조금씩 들릴뿐, 나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 예전... 기억........ 일반........ 칼침..."
'뭐라는거야..'
현우는 종혁이 곱게 덮어준 이불을 이내 걷어버렸다.
가슴 속에서 꺼지지 않는 연탄불이 타는 느낌이었다.
온몸이 덥고 슬슬 땀이 차올라서, 가벼운 츄리닝도 한겨울 오리털 담요처럼 점차 참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결국, 종혁이 다시 방 안에 들어왔을 때는, 현우는 팬티 한장말고는 아무것도 입은게 없었다.
헛!하고 순간 종혁이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우가 몽롱한 눈빛으로 종혁을 올려다보자, 종혁은 황급히 방의 불을 끄고 다가와 현우의 알몸 위에 이불을 끌어올려 덮었다.
"선배... 더워요..."
"감기 걸려! 많이 취했냐? 물 가져다 줄까?"
"아니요.. 괜찮다니까!요.. 죄송해요. 일찍 갔어야... 됐는데.."
"아니야, 됐어. 괜찮으니까..."
"선배..."
현우는 손을 뻗어 종혁의 까슬까슬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잘생긴 선배, 친절한 선배, 좋은 선배, 따뜻한 선배... 자신을 보면 늘 갈구고 화만 내는 창진과는 다르게, 종혁을 보면 현우는 늘 좋은 기억만 있었다.
종혁은 순간 놀란듯했지만, 딱히 현우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현우의 손가락은 술김에 더욱 용기를 내어 부드러운 종혁의 머리칼 속을 이리저리 탐험해 나갔다.
"선배.."
"왜?"
"늘 고마워요."
"뭐가?"
"잘 가르쳐주시고, 잘 도와주시고... 학교 때도 그렇고 지금도요..."
"귀여... 아니, 동창 후배니까 그렇지."
"나도 선배처럼 일 잘하면... 과장님한테 안 혼날텐데.."
"그 자식은 잘해도 혼내. 비비꼬인 놈이라."
하하, 하고 현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창진은 그 짙은 눈썹만큼이나 인상도 강하고 똑부러지는 성격이라 그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
게다가 헬스 매니아인지 풍채도 크고 튼튼해서, 그를 허투루보고 농담을 거는 사람은 사장님급이 아니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친구랑 같이 사는 사람은... 선배면서..."
"친구같은 소리."
"그런데 선배는 왜... 왜... 이 회사로 왔어요? 전에는 A회사 다녔었잖... 아요?"
A회사는 외국계 회사로, 현우와 종혁이 다니던 학과를 졸업했을 때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장이었다.
일찌감치 그의 취업이 확정되었을 때, 종혁이 현우를 비롯한 학교 선후배들에게 한턱 냈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글쎄..."
종혁의 얼굴은 캄캄해서 보이지 않았지만, 현우는 그의 목소리에서 깊은 회한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대답이 없는 종혁의 뒷모습을 보던 현우는 아차, 싶은 마음에 그의 손가락을 종혁의 겨드랑이로 향했다.
"캬캬캭. 하지마, 임마! 이 자식이! 하지말라니까!"
"간지러워요?"
"하지 말라니까! 키키킥, 아오, 이 자식이!"
종혁은 현우의 손을 깍지를 껴 붙잡으며 침대 위로 뛰쳐 올라왔다.
현우의 양 손을 각각 찍어 누르며 그의 배 위에 올라타버린 종혁은 현우에게 미소가 가득한 얼굴을 들이대며 끈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오, 진짜 먹어버릴까보다."
땀에 젖은 수컷의 짙은 냄새가 얇은 옷 아래로 드러난 그의 튼튼한 가슴팍에서부터 훅 풍겨왔다.
텁텁하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그 체취가 현우의 코를 아찔하게 간질였다.
그와의 몸이 닿는 모든 부분이 한순간에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지만, 현우는 짐짓 모르는체 찡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거워요... 선배."
"어? 아... 그래..."
"저 이런 장난은 별로 안 좋아해요..."
"아, 그랬었지. 미안하다.."
종혁이 뜨끔한 표정으로 이내 침대 밑으로 내려가자, 현우는 재빨리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신이 민망한 상태에 있는 모습을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 잘게요..."
"그래..."
종혁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현우는 가슴이 용광로처럼 뛰어서 한참을 잠에 들 수 없었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