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아와 나 -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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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문도 모르고 형아를 따라서 서울행 열차를 탔다.
형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을 뿐 계획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형아는 서울역에서부터 내 손을 꼭 잡고 옆에 다가서도록 힘썼다.
종로 5가 전철역에서 나오자 청계천 일대에 상가가 즐비하고, 사람의 왕래가 빈번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형아 뒤를 졸졸 따라가며 생전 처음 보는 상품을 구경하다가 카세트테이프 충전기가 눈에 띄었다.
"형아! 나 저거 사‥‥."
내가 따라간 사람은 형아가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휘 둘러보고 형아가 보이지 않자 겁이 덜컥 났다.
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형아가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형아를 찾아보다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고 그 자리서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형아는 잊어버린 나를 찾으려고 허둥지둥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형아를 보고 매우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어디다 정신이 팔려 날 잊어버려도 몰라요."
"미안, 미안!"
"형아 사과를 받아 주는 대신 저거 하나 사 줘요."
"알았어."
형아와 내가 전자 상가에서 빠져 나가려고 하는데 청년이 우리 가까이 접근했다.
형아는 청년과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더니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게 얼마에요?"
"싸게 드릴게요."
형아는 값을 흥정하더니 청년이 손에 종이 봉투를 하나 들고 왔다.
나는 종이 봉투에 담긴 것이 궁금하여 형에게 물어 보았다.
"그게 뭐에요?"
"응, 이거?"
형아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능글능글 웃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석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가끔 나에게 전화했다.
나는 석이가 방학 중에 한두 번 만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석이는 3학년 중간 고사를 치른 뒤에 여름이 시작되는 6월에 나에게 전화해서 죽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는 석이의 고충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상심한 마음을 달래야 하는데 좋은 방법이 없어서 마음이 답답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토요일 저녁에 석이가 나를 찾아와 내심 무척 기뻤다.
나는 석이를 보자 바람도 쐴 겸 대천 해수욕장을 향하여 떠났다.
나는 천천히 차를 몰면서 석이 얼굴을 한번 보고 이내 눈길을 앞쪽으로 옮겼다.
석이는 차창을 활짝 열고 바깥바람을 쐬더니 우울했던 기분이 풀렸는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나는 카세트에 테이프를 꽂아 음악을 틀어서 분위기를 돋우어 주었다.
나는 차를 주차장에 멈추고 석이와 나란히 해변을 거닐었다.
바다는 달빛을 반짝빤짝 반사해 나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마음이 울적할 때 언제든지 마음 내키면 날 찾아와요. 나는 파도를 보내 당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줄 테니까요."
나는 도시에 나가 고등학교를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한 달에 한번 전체 학생이 귀가하는 날에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학교 가기에 바빴다.
나는 집에 오면 제일 먼저 샤워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 한참 뒤에 나왔다.
어머니는 내가 욕실에 너무 오래 있는 것 같다고 걱정 어린 눈길로 보냈다.
"아들! 뭐하는 데 그리 오래도록 있니?"
나는 대답을 대신에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내가 3학년이 되면서 생활에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닌데 심리적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공부에 회의를 느꼈다.
어느 날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어 내 딱한 처지를 하소연하려고 형아에게 전화했다.
"형아 날 좀 도와 줄 수 있어요?"
"뭔데?"
"나 지금 죽고 싶어요."
형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나는 형아의 마음을 짐작하고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으려고 전체 학생이 귀가하는 날에 형아네 집을 찾아갔다.
형아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나를 반가이 맞이했다.
"어서 와. 참, 밥은 먹었니?"
"예, 저 때문에 신경 쓰였죠?"
"응, 근데 이렇게 만나니까 일순간에 다 사라져 버렸어."
"미안해요."
"그런 소리 마. 자, 우리 드라이브나 가자."
형아는 나를 차에 억지로 태우고 운전대를 잡았다.
차가 인적 없는 도로를 쌩쌩 달리자 형아는 카세트에 테이프를 꽂고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줄곧 한곡만 반복해 흘러나왔다.
"이 노래 제목이 뭐에요?"
"왜, 맘에 드니?"
"예, 드라이브할 때 딱 좋은 거 같아요."
"스콜피온스에 할리데이야."
형아는 대천 해수욕장 가는 길에 칠갑산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나는 형아와 함께 간식을 먹는 동안에 칠갑산 노래를 반복해 듣고 있자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나는 형아와 같이 해변에서 거닐며 자기 의견을 말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형아는 걸음을 멈추고 긴 의자에 앉으며 나의 의향을 물어 보았다.
"우리 한 시간만 자유롭게 지내볼까?"
"예, 좋아요."
나는 형아가 긴 의자에서 혼자 있도록 내버려두고 전자오락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시간을 한참이나 넘기고서야 형아에게로 다가갔다.
형아는 긴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다가 내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입을 열었다.
"나 혼자 이렇게 앉아 있으면 누구라도 말을 걸 줄 알았는데 정작 석이 밖에 없구나."
형아는 긴 의자에서 일어나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아 참, 바다가 석이에게 전할 말이 있데."
"그게 뭔데요?"
"언제든 놀러 오면 반갑게 맞이해 주겠데."
나는 소리없이 빙그레 미소지으며 형아의 허리를 힘껏 껴안았다.
올 겨울은 대체로 포근하다가 수능 시험을 보는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추워졌다.
나는 석이가 수능 시험을 보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승용차를 몰고 학교를 향하여 떠났다.
나는 학교 정문 앞에서 교복을 입고 나오는 학생들 중에 석이를 찾으려고 휘둘러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석이가 어디에 있든지 멀리서도 찾을 수 있었는데 똑같이 교복을 입고 있으니 석이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석이는 양손으로 내 눈을 가리고 목소리를 바꾸어 말했다.
나는 석이가 눈을 가린 것을 금세 알아채고 손을 꼭 잡았다.
석이는 모교에서 오백여 미터 떨어져 있는 학교에서 수능 시험을 본다고 등교를 서둘렀다.
나는 교문 밖에서 손을 흔들며 분투노력하도록 석이를 격려했다. 그리고 석이의 모습이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회사에 출근했다.
나는 담임 선생님의 주의 사항을 귀담아듣고 수능 시험 보는 장소로 이동하는데 형아는 교문에서 나를 찾는 듯 두리번두리번하고 있었다.
나는 급우 뒤에 숨어 형아에게 몰래 접근한 뒤에 두 손으로 형아의 눈을 가렸다. 형아는 청청한 음성으로 나에게 건강 상태를 먼저 물어 보았다.
"몸은 괜찮니?"
"예, 좀 긴장해서 그렇지 아무 이상 없어요."
"다행이네. 오늘 시험 끝나면 맛있는 거 먹자."
"정말요? 그거 참 좋죠."
나는 형과 함께 수능 시험을 보는 학교까지 천천히 걸었다.
형아와 같이 보도(步道)를 걸으니까 긴장감이 한순간에 녹아 버렸다.
"석이야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에 응해라."
"예, 고마워요."
내가 가다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자 형아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나는 교실로 들어서 의자에 앉아 시험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깊은 상념에 잠겼다.
12년의 교육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적을 나타내는 숫자에 나의 앞날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니 삶에 대한 허무를 느꼈다.
수능 시험을 보는 내내 자신이 있는 과목은 진도가 빠르고 못하는 과목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수능 시험을 치르고 난 뒤에 생기는 부작용은 내가 마음먹은 대학교에서 점점 멀어졌다.
나는 석이가 대학생이 되기만을 기다렸는데 막상 대학교에 들어가고 보니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보다 더 만나기가 어려웠다.
석이는 지방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서 집에 오는 일이 만만치 않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꼬박꼬박 나에게 전화해서 일상적인 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어느 날 석이는 자기가 보고 느낀 여자를 서슴없이 말할 때 예전처럼 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토요일 저녁에 나는 석이로부터 뜻하지 않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약속 장소에 단숨에 달려갔는데 석이는 다정한 연인처럼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여자와 인사를 나누고 맥주와 음식을 주문했다.
나와 석이는 오래간만에 만나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여자가 석이를 보고 나와 사귀고 있느냐고 엉뚱한 말을 불쑥 내던지는 바람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는 모두 술집에서 나와 노래방으로 향하는 길에 여자가 돌연히 택시를 잡아타고 가 버렸다.
나는 말없이 석이와 보조를 맞추며 한길을 걷다가 길목에서 헤어지는 인사하고 집에 돌아왔다.
나는 동기생과 함께 선배와 어울려 다니느라고 주말에 집으로 가지 않았다. 어쩌면 억압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몸이 되자 집에 가는 것을 소홀히 생각했다.
나 혼자서 자취하며 대학교에 다니는데 여자 동기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 나는 내심으로는 좋아했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자."
"응, 그래."
여자 동기의 색정적인 대담한 자태가 나를 호리는 순간 황홀한 전율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자 동기의 능숙한 성행위는 나를 매료했고 하룻밤을 꼬박 샜다.
나는 세상 모르고 자고 일어나 보니 벌써 저녁때가 되었다. 나와 여자 동기는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버스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무작정 형아를 만나러 갔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데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응, 너 어디니?"
"여기 비어홀인데 나올 수 있나요?"
"정말? 바로 나갈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예."
형아는 여자 동기를 보고 인사를 나누더니 임의로이 맥주와 음식을 주문했다. 나와 형아는 오래간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여자 동기는 자기가 보고 느낀 바를 서슴없이 말했다.
"둘이 사귀나 봐요?"
"저를 얼마큼 좋아해요?"
나는 여자 동기의 말을 듣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형아의 속을 떠보았다.
형아는 뜻밖의 상황에 마주쳐 놀라 맥주를 마시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우리 노래방이나 가자."
"좋아요!"
우리는 비어홀에서 나와 가까운 노래방으로 이동하는데 여자 동기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나는 형아와 함께 한길을 나란히 걸으며 형아의 의중을 떠보았다.
"형아네 집에 가서 자도 되나요?"
"잘 가라."
형아는 대답 대신에 씩 웃어 보이더니 나와 헤어지는 인사말했다.
그 뒤에 나와 여자 동기 사이가 서먹서먹해지면서 자연 멀어지게 되었다.
나는 캠퍼스 생활에 회의를 느낄 때 시간의 여유를 두고 휴학원을 제출했다. 그리고 군대에 들어가기 위하여 자원 입대를 신청했다.
나는 석이를 사단에 데리고 가면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마음이 착잡했다.
이제는 석이를 마음대로 만날 수가 없다는 생각하니까 심사가 편치 않았다.
사단 입구에는 입대 장병과 동행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입대 장병들은 머리가 짧고 잔뜩 긴장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 나는 말없이 석이 얼굴을 바라보았다.
석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와 눈길이 마주쳤다.
동행하는 사람들은 사단 정문에서부터 연병장까지 자유로이 걸어가고, 입대 장병들은 열을 지어 사단 안으로 들어갔다.
연병장에는 푯말을 박아 입대 장병들을 유도했는데 내가 걱정하는 마음과는 달리 석이는 알아서 푯말 뒤에 서 있었다.
나는 석이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도저히 석이를 끝까지 지켜볼 수가 없어 슬그머니 연병장에서 빠져 나왔다.
나 혼자 차를 몰고 집에 오면서 소중한 친구를 연병장에 떼어놓고 오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울적했다.
나는 이 곳을 뜨기만을 기다렸는데 막상 군대에 들어가려고 하니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형아를 만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밝은 표정을 지었다.
형아는 대화를 나누는 중간에 나의 심적 고통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아 밝은 표정을 짓기가 힘들었다.
형아와 내가 겉으로 표현은 않지만 심리적으로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내 옆에 붙어 있던 형아는 사단 정문에서부터는 어쩔 수가 없이 나와 떨어졌다.
입대 장병들은 조교의 지시 사항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동행하는 사람들은 입대 장병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형아는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손을 높이 치켜들어 흔들더니 표정이 없는 얼굴로 등을 돌려 가 버렸다.
그 모습이‥‥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인데 자꾸만 형아는 터무니없는 거짓말하고 있었다. 나의 속을 떠볼 심산으로 형아가 흉계를 꾸민 거라고, 지금쯤 몰래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형아가 나타나야 되는데. 나는 형아와 연병장에서 헤어진 모습을 오늘의 모습으로 이어 붙여야 하는데 왜 정지된 모습으로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도대체 형아는 어디에 있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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