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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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2013년 10월 9일이 마지막 일기였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석호는 세상을 떴다. 10월 9일 이후부터의 공백은 석호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페이지 수가 많지 않은 작은 노트 몇 권에 20년이 넘는 석호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내 눈에는 또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미 처음 몇 장의 일기를 읽으면서 석호가 나와 같은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충격과 놀람에 눈물을 한바탕 쏟았으므로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났을 때는 그저 석호가 그리운 마음뿐이었다.


  석호의 일기를 읽는 동안 내 마음은 요동을 쳤다. 상남자 중에 상남자였던 석호가 게이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내가 석호를 보고 첫눈에 반했듯이 석호도 나를 보고 첫눈에 반한 것이 너무 신기하고 고맙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은 게이라는 걸 쉽게 알아냈으면서 내가 게이라는 것은 왜 몰라봤는지 석호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발가벗고 합주를 하면서 내가 그렇게 엉덩이를 흔들어댔는데 그것도 몰랐던 바보....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다던 놈이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보지 못한 멍청이....

  나도 석호와 같은 바보 멍청이였다. 나도 석호를 못 알아봤으니까, 석호에게 게이가 아닌 척 거짓말과 거짓행동만을 하고 살았으니까 나야말로 바보 똥멍청이였다. 하늘나라에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테니, 석호도 내 일기를 보고 나를 욕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처럼 자책하면서, 나처럼 안타까워하면서, 나처럼 후회하면서, 나처럼 미안해하면서, 나처럼 울면서....


  침대에 기대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석호의 일기장을 아무 곳이나 펼쳐 읽었다. 글자 하나하나에서 석호의 감정이 읽혔다. 내 일기장에도 내 감정이 글자 하나하나에 실려 있을 터였다. 석호처럼....

  석호랑 나는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했고, 서로의 표정과 눈빛을 다르게 읽고 해석했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었으니까, 그것은 금단의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래야 했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해야 석호도 나도 서로의 곁에서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석호도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고 알았으니까.... 바보 같이, 멍청이 같이....


  석호의 일기를 통해 내가 석호를 사랑했던 것이 헛되지 않았고, 석호와 함께 했던 모든 날들이 석호의 사랑을 받고 살았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것은 좋은 일이라기보다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다. 너무 억울했다. 석호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냥 나 혼자서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라 해도 모르는 것이 약이 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영오가 원망스러웠다. 나에게 석호의 일기를 주면 내가 읽을 것을 뻔히 알았을 텐데, 아니 읽으라고 준 것일 텐데 왜 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오도 분명히 읽어 봤을 텐데, 자기 아빠의 사생활과 어찌 보면 치부라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담겨 있는 일기를, 아무리 아빠의 친한 친구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남인 나한테 보여준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빠가 게이라는 것에 영오는 그다지 반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공연을 하는 중에 석호를 추억하면서 영오는 찬탄과 존경의 모습을 보였다. 나랑 2년 가까이 사는 동안 어쩌다 석호의 이야기가 나오면 자신이 아빠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고 자랐는지 잘 알고, 자기도 아빠를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표현했었다.


  그런데 그건 영오의 사정이고, 나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내가 게이이고, 석호를 사랑했으니까 망정이지 만약에 내가 일반 남자였다면 석호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일기를 보고 혼란에 빠지거나 석호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 해도 성적 정체성만큼은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이 석호와 나를 엇갈리게 만든 것인데, 영오는 아직 어려서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듯 했다. 어쩌면 내가 석호랑 많이 친한 것을 어릴 적부터 봐왔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기를 2년 가까이 키워줬으니 당연히 석호가 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내가 이해할 것이라 믿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석호의 적나라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일기를 보여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영오가 이제 스무 살이라 아직 현실의 냉혹함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석호처럼 자기의 생각이 다 옳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 믿는 것이 딱 그 아빠의 그 아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오가 이해되지 않고, 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 영오가 원망스러웠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며칠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석호의 일기만 끌어안고 있었다. 가슴이 메어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웃다가 울다가 가슴을 쳤다가 결국 그리움을 안고 잠이 들었다.


  금요일 밤에 영오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에 놀러가도 되냐는 메시지였다.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석호의 일기를 보고 난 이 상황에서 영오를 볼 수가 없었다.

  다음날에도 영오에게 메시지가 왔다. 자기가 준 걸 봤냐는 내용이었다. 역시나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마음이 답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리치는 것밖에 없었다. 해질 무렵 대충 씻고 집을 나섰다. 노래방에 가기 위함이었다.


  20년 넘게 같은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인아저씨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다.


  “오늘은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네요. 뭔 일 있어요?”


  “답답한 일이 좀 있네요.... 사장님 감사합니다. 계속 지키고 계셔서....”


  “별말을 다해요. 나도 할 일이 이것밖에 없어서 있는 건데.... 그나저나 주공마트 이사장이 그러던데.... 가수였다면서요? 어쩐지 노래 잘한다 했어.”


  “가수 아니에요.... 그냥 젊을 때 밴드하면서 노래 몇 개 부른 게 다예요. 이제 다 지나간 일이구요.... 노래방에 등록도 안 된 노래에요....”


  “주공 밴드 안 하니까 나도 좀 아쉽네. 늘 혼자 오다가 같이 오니까 좋았는데.... 몇 번 같이 왔던 청년은 누구에요?”


  “친구 아들이요. 그 친구가 밴드 할 때 보컬이었어요. 엄청 노래 잘했는데.... 바보 새끼가 지 몸 상하는지도 모르고 목소리 지키려다가 저 세상 갔어요. 알아주지도 않는데 그게 뭐라고.... 노래방에 등록도 못 시키는 노래를 혼자서만 부르다가 갔어요....”


  “노래방에 없으니까 더 소중하겠네.... 아무도 못 부르고 혼자만 불렀으니까 더 좋은 거지.... 구석방 비었으니까 먼저 가 있어요. 재떨이랑 음료수 갖다 줄 테니....”


  담배를 피워 물고 노래책을 첫 장부터 펼쳤다. 몇 장 넘어가기도 전에 노래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천천히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에서 전주가 흘러나왔다.


https://youtu.be/IEmBoLw9JOA

권인하 – 계절이 음악처럼 흐를 때


  처음 밴드를 하던 무렵 석호의 목소리와 너무 닮아서 즐겨 듣던 노래였다. 지금이야 권인하가 살도 빠지고 나이가 들어서 주름도 많지만 젊었을 적 권인하는 TV 드라마에 나올 정도로 잘생겼었다. 넙데데한 얼굴이 석호와 비슷했다. 석호랑 노래방에 처음 갔을 때 석호가 이 노래를 부르고 나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권인하 보다 더 잘생기고 노래도 더 잘하지?”


  나는 그때 고개를 끄덕였다. 해맑게 웃던 석호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했다. 석호와 나는 정말 계절이 음악처럼 흐르는 동안 늘 노래와 함께 한 셈이었다.

  노래책에서 또 노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https://youtu.be/uUX4RghpbTw

김광석 – 그날들


  석호가 세상을 뜨고 나서 혼자 노래방에 올 때마다 부르던 노래였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석호를 잊어버리고 싶어서 절규하듯 불렀었는데, 석호는 나에게 잊을 수가 없는 존재였기에 더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 연이어서 노래 제목 두 개가 눈에 띄었다.


https://youtu.be/by9PmCXcQV8

조덕배 –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


https://youtu.be/ty0DFs8FaW8

유재하 – 그대 내 품에


  석호가 가끔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부르던 노래였다. 그때는 석호가 마음에 두고 있다던 이름 모를 사람을 위해 연습을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나에게, 내가 들으라고 불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자기 마음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꽃가루가 되어 뛰어서 날아서 나에게 다가와 나를 품에 안고 사랑의 꿈을 나누기를 소망하며 노래를 불렀을 텐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게 나였는지도 모르고 석호의 마음을 애달프게 만드는 년을 부러워했었다.


  ㄱ항목이 지나고 ㄴ항목으로 들어갔을 때도 나에게 의미 있는 노래들이 마구 눈에 들어왔다. 모두 석호가 나에게 불러준 노래들이었다. 개중에는 석호랑 내가 함께 부른 노래도 있었다.


https://youtu.be/Pu4y7ysXeU0

안치환 – 내가 만일


https://youtu.be/5ysdHjaeGGU

자전거 탄 풍경 –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들고 싶다고 한 소절을 부른 다음에는 여지없이 석호가 끼어들어 그 다음 소절을 부르고 후렴 부분에서는 늘 함께 불렀다. 서로가 함께 있어서 늘 기쁨을 느끼고 있었으면서, 서로에게 이런 마음을 아느냐고 묻고 있었으니 석호도 나도 정말 바보 멍청이였다.

  석호가 생전에 나랑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가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었다. 영오와 셋이서 간 제주도 여행에서였다. 사이판에 같이 가자고 약속을 한 뒤 영오가 신이 나서 치는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 놓고, 나는 영오가 기타를 곧잘 친다는 것을 까먹고 있던 것이었다. 후렴부에서 석호가 나보다 한 옥타브 위에서 내지르는 고음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박수를 치고 그랬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노래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석호와의 추억이 쌓인 노래 제목이 눈에 띄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밤이 새어도 다 부를 수 없을 것 같아 여러 페이지를 뭉텅 넘겼다. 그 페이지에도 석호를 떠올릴 수 있는 노래가 있었다.


https://youtu.be/VNxUy2ua9AM

부활 – 비밀


  석호의 유작 앨범이 된 3집을 녹음할 때 석호가 나에게 들려준 노래였다. 노래가 끝나고 석호가 이렇게 말했었다.


  “옛날에 박완규가 ‘lonely night’ 부를 때 그냥 나만큼 노래하네 싶었거든. 근데 이 노래 듣고 소름 끼쳤어. 너무 좋아서.... 내가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목소리로 변해서.... 영기야, 너 이 노래 한 번 불러봐.”


  석호가 부르라고 하니까 불렀다.


  “너 목소리 변하니까 정말 잘 어울리네.... 박완규가 어떤 마음으로 이 노래 불렀는지 알 거 같아. 간절함이 느껴져....”


  나는 그때 석호의 마음도 모르고 노래 가사 중에 ‘설레이던 너는 설레이던 너는’ 이 부분을 가지고 씹었더랬다. ‘설레이던’이 아니라 ‘설레던’이 맞다고, 기본형이 설레이다가 아니라 설레다라서 롯데 아이스크림도 ‘설레임’이 아니라 ‘설렘’이 맞다고, 노래방에서 맞춤법 틀린 거 보면 존.나 짜증나서 노래 부르기 싫어진다고 투덜댔었다. 가사를 설레던으로 바꿔 부르면 노래가 이상해지는데, 그깟 맞춤법이 뭐라고 나는 석호의 마음에 상처를 만들었다.

  석호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들은 모두 비밀처럼 계절이 흘러간 것이었는데, 석호는 설레임 아이스크림처럼 나에게 달콤하게 다가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나는 재수 없는 말만 지껄이고 살았던 셈이었다. 너무나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져서 혼자 울면서 이름을 부르다 잠들었으면서, 너무 사랑해서 너무 사랑해서 내 안에 늘 간직하고 살았으면서, 그때는 왜 그랬는지 너무나 후회가 되었다.


  씨.발.... 비밀 밑에 또 노래 제목 하나가 가슴을 찌르듯이 다가왔다.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사연이 깊은 노래였다. 야외무대에서 석호를 처음 본 날 석호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였다.


https://youtu.be/DxyMf2jvLLw

부활 – 비와 당신의 이야기


  석호가 나를 향해 처음으로 외치고, 영오를 통해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노래 가사에 몇 번이나 들어있었기에 나도 석호를 생각하며 노래를 불렀다. 황석호, 너의 처음과 마지막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고, 저 하늘에까지 내 목소리가 닿을 수 있도록 크게 소리쳤다. 석호에게 한 번도 하지 못했던, 할 수가 없었던 그 말을 간절하게, 내 진심을 담아 외쳤다.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울컥하는 마음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주인아저씨가 가져다 준 실론티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타오르는 담배 연기가 석호의 사진 앞에서 타오르던 향 연기 같이 느껴졌다. 서로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는데, 아닌 척 모르는 척 살았던 20여 년의 세월이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담배를 비벼 끄고 또 노래책의 페이지를 잡았다. ㅅ항목을 펼치면 온통 사랑 어쩌구 하는 노래일 것이 뻔해서 많은 페이지를 잡고 한꺼번에 넘겼다. 다행히 ㅅ항목이 지나 ㅇ항목이 시작되는 페이지였다. 한 페이지씩 넘기다가 노래 하나를 발견했다. 가사 한 구절이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번호를 입력하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https://youtu.be/6OXxHVFB_X8

최용준 – 아마도 그건


  석호가 나에게 주었던 그 모든 것이 사랑인 줄을 모르다가 이제야 그 마음을 알아 버렸다. 석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내 눈에 비친 석호의 모습과 같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건 분명히 사랑이었는데,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 너무 아쉽고, 석호의 사랑이 이제는 아픔으로 내게 찾아와 나를 슬프게 했다.

  석호와 나의 사랑은 가사 그대로 엇갈린 시간들이었다. 스산한 바람처럼 지나쳐 가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랑. 석호의 사랑은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고, 내 사랑은 그리움과 미련으로 변질이 되어 가슴 한 구석에 남아 버렸다.


  간주가 흐르는 동안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숨처럼 연기를 허공에 내뱉고는 손가락 박자에 맞춰 마이크를 들었다.


  ♬ 차가운 내 마음에 남은 너의 뒷모습 열린 문틈으로 너는 내게 다가올 것 같아.... ♬


  노래방 문이 열리고 누가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 영오였다. 영오는 노래를 계속 하라는 듯이 손짓을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 ....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말았네~~ 사랑 그것은 엇갈린 너와 나의 시간들 스산한 바람처럼 지나쳐 갔네~~ 사랑 그것은 알 수 없는 너의 그리움 남아 있는 나의 깊은 미련들 ♬


  점수가 나오기 전에 영오가 리모컨의 취소 버튼을 눌렀다. 작은 방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들고 있던 담배의 재를 떨고 영오를 바라봤다. 영오는 리모컨으로 TV 화면에서 노래를 검색하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화면에 눈을 박고는 입을 열었다.


  “톡해도 답도 없고 그래서 왔어요. 읽씹 당하면 기분 드러운 거 아시잖아요. 주차장에 차는 있는데 집에는 없고, 그럼 여기밖에 없잖아요.... 저 노래할게요.”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였다. 아빠의 비밀이 모두 담겨 있는 일기를 아빠 친구에게 건네주고, 그것을 읽은 사람의 마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메시지를 읽고도 씹었다는 것은 내 마음이 복잡해서 그렇다는 것을 뻔히 알 텐데도 자기 마음대로 들어와서 앉으라는 말도 안 했는데 앉아서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노래를 검색해서 부르고 있는 영오가 이해되지 않았다. 몇 년 간 겨우 가라앉힌 슬픔의 앙금을 마구 휘저어 온몸에 퍼뜨려 놓은 영오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자기 아빠를 닮아 노래 하나는 기똥차게 부르는 영오가 불편했다.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향해 영오가 노래를 부르다 말고 나에게 물었다.


  “어디 가세요?”


  “화장실.”


  볼일을 보는 동안 그냥 나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당장은 불편해서 피한다고 해도 영원히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실론티 하나와 영오가 노래할 때마다 즐겨 마시는 게토레이를 사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전주가 끝나고 새로운 노래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https://youtu.be/VVP0XIh73mk

유리상자 – 사랑해도 될까요


  석호가 민구 결혼식 때 축가로 불렀던 노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연습을 할 때나 결혼식 당일에나 석호가 나를 자꾸 쳐다봤던 것도 축가로 불렀다기보다 나를 위해 부른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도 마음속으로 따라 부르면서 석호에게 사랑해도 될까요 하고 물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석호나 나나 용기가 없어서 직접 물어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석호가 자기 결혼식 때 선곡한 노래들도 모두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석호의 일기에서도 확인했듯이 내가 불렀던 너를 사랑해는 나에게 듣고 싶은 말이었고, 석호가 부른 먼훗날 언젠가는 석호 자신의 소망을 담은 노래였다. 먼훗날 언젠가 내가 자기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곁에 있어줄 수도 있고, 곁에 있고도 싶은데 저 멀리 먼저 떠나간 새끼....


  영오도 석호처럼 정말 닭살스럽게 불렀다. 가사도 그렇고, 원곡 자체가 닭살스러우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지만 밴드 공연을 할 때 롹 사운드에 내지르는 소리와는 너무 달라서 더 닭살스러웠다. 근데 너무 잘 불러서 진짜 사랑을 고백할 때 이 노래를 부르면 웬만한 여자는 다 넘어갈 것 같았다.


  “아저씨, 저 이 노래 잘하죠? 사랑 고백할 때 부르려고 연습했었어요.”


  칭찬을 해줘야 마땅한데, 원망스러운 마음이 속에 있어서 퉁명스럽게 답을 했다.


  “진짜 닭살스러워. 여자들이 딱 싫어하는 스타일인 거 몰라? 고해, 취중진담 이런 노래는 절대 부르면 안 돼. 여자들이 얼마나 싫어하는데....”


  “못 부르는 사람이 부르니까 그런 거죠. 진심을 담아서 잘 부르면 다 넘어와요. 고해 불러볼까.... 아저씨, 저랑 고해 같이 부를래요?”


  “아니. 임재범 노래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냐.... 배고프다. 너 저녁 먹었어?”


  “아뇨. 아저씨, 우리 돼지갈비 먹으러 가요. 제가 쏠게요.”


  밥을 먹는 동안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나을 것 같았다. 그냥 밥을 먹고 영오를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석호에 대한 얘기는 하기가 싫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영오가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를 꺼냈다.


  “아저씨, 많이 드세요. 처음으로 제가 쏘는 거니까.... 아빠가 쏘는 걸 수도 있겠네요. 아빠가 남겨 놓은 걸로 제가 쏘는 거니까.... 저 어릴 때도 아빠랑 아저씨한테 오면 돼지갈비 많이 먹으러 왔잖아요....”


  석호가 고기를 구워 영오의 앞접시에 놓아주던 것이 떠올랐다. 이제는 영오가 집게를 들고 고기를 구우며 잘 익은 것을 내 앞접시에 놓아주고 있었다. 돼지갈비의 달달한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꾸만 목에 걸렸다.


  “아저씨, 보셨죠?”


  목적어가 생략된 질문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뻔했으므로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아저씨한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저씨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엄청 복잡할 거는 같아요.... 그래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빠 마음을 아저씨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불판에 시선을 두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영오를 바라봤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내가 뭔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떼기 전에 영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빠가 게이인 게 어때서요? 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것도 아무렇지 않아요. 아빠가 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전 잘 아니까요. 그리고 반평생을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았던 아빠가 못했던 거 해주고 싶었어요. 전 아빠 아들이니까. 아저씨도 보셔서 알겠지만 아빠가 살아있었으면 아빠 입으로 직접 들었을 거잖아요....”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불판의 고기를 뒤적였다. 영오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계산을 하겠다는 걸 영오가 힘으로 나를 밀치고 계산을 했다. 바깥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무는데, 영오가 내 옆에 서서 한 마디를 던졌다.


  “아저씨, 2차로 술 한 잔 해요. 그건 아저씨가 쏘시구요.”


  구석자리에 앉아 안주가 나오고 술이 한 잔씩 들어갔을 때 영오가 석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일기에는 없던 10월 9일 이후의 일이었다.


  “학교 갔다 와서 아빠랑 같이 앨범 작업 하고 있었는데 아빠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말도 잘 안 나오는지 119 오는 동안 아빠가 종이에다 몇 글자를 썼어요. 그리고 똑같은 내용으로 하나 더 썼어요. 아빠 입모양이 영기 영기 하는 것 같았어요. 아빠 장례식 때 제가 아저씨한테 드린 게 그거예요.”


  가슴이 메어와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식도를 타고 씁쓸한 액체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고모집에 들어가면서 아빠 물건은 하나도 안 버리고 다 갖고 들어갔거든요. 그래봐야 기타랑 해서 몇 개 되지도 않는 거였지만.... 그냥 눈치 보면서 살았어요. 아빠가 없으니까.... 내맘대로 못하고 그냥 살았어요. 아빠랑 같은 고등학교 들어가서 밴드부 가입했을 때 아빠 노래 악보 찾으려고 뒤적이다가 일기를 발견한 거죠....”


  또 술잔을 기울여 입에 털었다. 술 한 잔 놓고 제사 지낸다고 핀잔을 듣던 내가 아니었다. 그냥 술이 막 들어갔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버티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안 읽었어요. 그러다가 고1 겨울방학 때 할아버지한테 밴드 하는 거 들켜서 엄청 혼나고 아빠 생각나서 읽은 거에요. 일기 읽고 나서 아빠가 너무 바보 같더라구요. 아저씨 생각도 나고.... 다시는 아저씨 못 볼 줄 알았거든요. 아빠가 없으니까.... 설날에 할아버지랑 또 싸웠어요. 밴드 그만 두라고 그랬는데 제가 말을 안 들었거든요. 할아버지가 저 보는 앞에서 아빠 기타 때려 부쉈어요.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아저씨 베이스랑 똑같은 그 빨간 기타.... 아빠가 없어도 꾸역꾸역 잘 살았는데.... 기타가 부서지니까 이 세상에 저 혼자 남은 거 같았어요. 아저씨 생각밖에 안 났어요. 이 세상에 저 이해해 줄 사람은 아저씨밖에 없을 거 같아서.... 아저씨랑 같이 살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아저씨가 다시 밴드 하는 거 보면서 아빠 말이 맞구나 싶기도 했고.... 혹시나 싶어서 제가 밴드 하는 거는 아저씨한테 일부러 말 안 했어요. 집에 늦게 온 것도 연습하다가 그런 거구요. 아저씨 덕분에 성적도 올라서 다행히 아빠 학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아빠가 저 고등학교 가면 아저씨한테 보내서 공부시킬 거라고 그랬는데 제 발로 찾아간 게 됐네요....”


  영오의 말을 들으면서 계속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석호처럼 게이이고, 석호가 나를 사랑한 만큼 나도 석호를 사랑했노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터져 나오려는 말을 계속 술로 막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에요. 진짜 제 마음대로 살 거에요. 제 앞가림 잘 하면서.... 아빠처럼 바보 같이 살지 않을 거에요....”


  영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복잡했던 머리가 이제는 어질어질했다. 고개가 자꾸만 앞으로 쏠렸다. 그렇게 그대로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석호가 내 앞에 있었다. 꿈이었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었는데, 내가 일기를 읽으며 항상 석호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찾아왔지 싶었다. 나는 이제 석호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었으니 두 팔을 벌려 석호를 맞이했다. 석호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천천히 옷을 벗고 나에게 안겼다.


  키스를 했다. 기나긴 키스였다. 석호가 내 티셔츠를 들어 올려 젖꼭지를 빨았다. 나는 석호가 좀 더 편하게 애무를 할 수 있도록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석호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 내 바지와 팬티를 벗겼다. 나는 벗기기 쉽도록 살짝 엉덩이를 들었다. 석호는 내 자지를 잡고 흔들어 세우더니 단숨에 입에 넣었다. 크지 않은 내 자지가 석호의 입속을 마구 돌아다녔다. 너무 짜릿했다. 나는 석호를 끌어올려 입을 맞추고 더 위로 끌어올렸다. 석호의 커다란 자지가 누워 있는 내 얼굴 앞에서 끄덕였다. 혀를 내밀어 요도 끝에 맺혀 있던 프리컴을 핥고는 바로 입에 넣었다. 자두알 같은 귀두를 혀로 핥았다. 나는 다급했다. 꿈에서 깨기 전에 모든 것을 다 하고 싶었다. 석호를 끌어내려 팔과 다리로 감싸 안고는 석호의 귀에 속삭였다.


  “넣어줘.”


  석호가 내 귀에 속삭였다.


  “콘돔....”


  웃음이 나왔다. 꿈에서 무슨 콘돔을 찾는 것인지 기가 찼다.


  “괜찮아. 빨리 해.”


  아래쪽에서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다. 너무나 생생해서 꿈에서 깰 것만 같았다. 나는 어서 빨리 깊게 들어올 수 있도록 다리를 들어 올렸다. 찌릿한 통증과 함께 가득 차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엄습하는 통증은 그동안 석호를 바라보며 마음이 아팠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석호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아래쪽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내 자지가 석호의 배에 깔려 마찰이 되고 있었다. 금세 사정감이 올라왔다. 참지 않았다. 꿈에서 깨기 전에 분출을 해야만 했다. 자지 끝에서 폭발을 한 감각이 온몸에 퍼졌다. 저절로 아래쪽에도 힘이 들어갔다.


  “어~ 어~ 씨.발.... 으~~~~”


  석호가 커다란 덩치로 나를 짓누르며 입을 맞췄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무게감이었다. 꿈에서도 꿈이 깨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 마지막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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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bbs/profile.php?mb_id=kjs66611" data-toggle="dropdown" title="훈훈하고싶다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 훈훈하고싶다</a> <ul class="sv dropdown-menu" role="menu"> <li><a 님의 댓글

  • <spa…
  • 작성일
영오구나.. 영오가 석호한테 했던 말 진짜였군요. 영기 사랑한다구. 석호가 못준 사랑 영오가 영기한테 주는구낭. 슬프지만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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